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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24) 12:7-17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렸다가 다시 구하는 하나님의 심정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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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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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렸다.

[렘 12:7] 나는 내 집을 버렸다. 내 소유로 택한 내 백성을 포기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백성을 바로 그들의 원수에게 넘겨 주었다.

- 버리고, 포기하고, 원수에게 넘겨 주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방 통치자에 의해 황무지가 된다.

[렘 12:10~11] 이방 통치자들이 내 포도원을 망쳐 놓았고, 내 농장을 짓밟아 버렸다. 그들은 내가 아끼는 밭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렸다. (11) 그들이 내 땅을 황무지로 바꾸어 놓았다. 황무지가 된 이 땅이 나를 보고 통곡한다. 온 땅이 이렇게 황무지가 되었는데도, 걱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 포도원이 망가지고, 농장도 짓밟히고, 밭도 사막이 된다.

- 황무지가 된 땅이 통곡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지만,

- 그 땅을 걱정할 사람조차 없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이 사태의 근원적 주체는 누구냐?

- 하나님이시다.

[렘 12:12] 강도 떼가 사막의 모든 언덕을 넘어서 몰려왔다. 내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칼로 휩쓸어, 어느 누구도 평온하게 살 수 없게 하였다.

- 이스라엘을 황무지로 만든 실질 주체는 이방인이지만,

- 이방인을 통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칼로 휩쓸어' 황무지로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심판의 결과는 무엇인가?

- 모든 노력의 '헛수고' 전락이다.

[렘 12:13] 사람들이 밀을 심어도 가시만을 거두었고, 그들이 수고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들은 나의 맹렬한 분노 때문에, 아무런 소출도 없이 수치만 당하였다.

- 땅의 황폐화는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에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 땅이 없어도 농업이 아닌 상업으로 소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헛수고 심판'은 소득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 즉, 가능성의 완전한 박탈이다.

- 이것이 심판의 핵심이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맹렬한 분노'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하나님은 완전히 멸망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고하신다.

[렘 12:14] 나 주가 말한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침범한, 모든 악한 이웃 백성을 두고 말한다. 내가 그 악한 백성들을 그들의 고향 땅에서 쫓아내고, 유다 백성을 그들 가운데서 구하여 내겠다.

-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이방인 가운데서 구해내겠다고 말씀하신다.

게다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에 대한 구원까지 예고하신다.

- 이방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데 일조했다.

[렘 12:16] 비록 그들이 내 백성에게,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맹세하도록 가르쳤지만, ・・・・

- 그리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실질 주체였다.

-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조차 하나님을 믿으면 회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까지가 본문 전체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실까?

왜 이랬다저랬다 하실까?

- 왜 이스라엘을 멸망하셨다가 구원하실까?

- 애초부터 구원하실 것이라면, 심판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 구원하실 것이라면, 도대체 왜 심판하실까?

- 심판하신 후에 분노가 가라앉고 마음이 바뀌어서 결정을 번복하신 것일까?

- 아니면 애초부터 심판은 시늉만 한 것이고, 구원만이 진정한 목적이었던 것일까?

 

이것에 대해 많이 하는 오해가 있다.

- 이렇게 심판 후 구원 예고가 있을 때, 앞의 심판을 과소평가한다.

- 심판 이후 구원이 예정되어 있기에, 앞의 심판은 통과의례처럼 형식적이라는 것이다.

- 따끔하게 혼을 내어 정신 차리라는 정도의 의미이지, 

- 진정한 심판, 완전한 멸망, 모든 가능성 박탈은 아니라고 한다.

- 진정한 심판은 종말 이후에나 오는 것이지, 

- 회복이 예정된 심판은 부모가 자녀 훈육하는 정도의 가벼운 수준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 예수님은 죽음 이전부터 자신이 죽고 부활할 것을 제자들에게 수차례 예고하셨다.

- 예수님은 죽으시면서도 곧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아셨다.

-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사람의 죽음보다 가볍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기에,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이 작거나 없었다는 것이다.

-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예수님은 죽음은 실제 죽음이 아니라 일종의 '신적인 연기'라고까지 말한다.

- 여기까지 나가면, 예수님의 죽음 사건 자체가 부정되기 일보 직전이다.

따라서 구원 예고가 있다고 해서 심판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마저 부정할 정도로 위험한 생각이다.

 

예수님은 정말 죽으셨다.

- 목숨이 완전히 끊어졌다.

- 여기에 더해 예수님이 가진 모든 가능성을 잃었다.

특히 예수님의 본질인 하나님의 아들 지위를 잃었다.

- 이론적으로 예수님은 종말에 사람이 심판받아 영원한 죽음에 이를 때 겪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경험을 모두 하셨다.

- 말 그대로, 예수님은 지옥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온전한 심판을 모두 겪으셨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은 구원이 예정돼있다고 해서 가볍지 않다.

- 이스라엘은 멸망할 뻔한 것도 아니고, 멸망에 가까운 큰 고난을 당한 것도 아니며, 멸망할 것이라는 협박에 그친 것도 아니다.

- 말 그대로, 멸망했다.

- 모든 가능성을 잃었다.

- 그 상태로 70년을 지낸다.

그렇게 멸망 상태가 지속되어, 멸망의 고통조차 잊혀지고,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며, 새로운 민족 속에 피지배 민족으로 사는 것이 적응되었을 때까지 회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 이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심판의 참 의미이다.

- 회복이 예정된 심판이라고 해서 절대 가볍게 지나가지 않는다.

- 완전한 죽음, 모든 가능성 박탈을 전인격적으로 경험한다.

 

사람의 인생도 똑같다.

-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실 때도, 심판의 과정을 거치신다.

-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고 부른다.

- 죄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고, 죄로 인한 고통과 모든 가능성 박탈을 고스란히 경험한다는 점에서 심판과 회개는 같다.

- 이런 회개를 거친 후에야 구원에 이른다.

- 따라서 회개는 심판 중에서 구원이 예정된 심판을 따로 떼어 부르는 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회개의 경험은 가볍지 않다.

- 단지 회개는 그동안 내가 잘못 살았구나. 앞으로 잘 살아야지. 정도의 결심이 아니다.

- 말 그대로, 심판 경험이다.

- 그래서 자신의 죄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회복 가능성이 완전히 박탈당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 인생 전체와 생명 그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 그래서 죄 때문에 인생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구약에서는 모세가 했고, 신약에서는 바울이 했다.

-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말을 잊어버릴 정도로 자신이 부정당했다.

-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눈이 멀어 제 몸 하나 간수할 수 없을 정도로 전락했다.

 

심판은 왜 이렇게 가혹해야 하냐?

- 구원이 예정된 자에게까지 굳이 이렇게 가혹한 심판이 필요할까?

그래야만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새로운 소망이 참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 그래야 자신 욕망과 하나님의 소망이 버무려져서 잡탕밥 인생이 되지 않고,

-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 인생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욕망을 실현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김없이 빼앗는 것이다.

 

이런 가혹함이 하나님께만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 육아에서도 일상적이다.

- 자녀에게 백이면 백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특별한 규칙이 있다.

- 예를 들면,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야 하는 것, 차에서는 카시트에 앉아야 하는 것 등이다.

- 물론 자녀는 규칙을 거부할 것이다.

- 그러나 이런 것에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만약 자녀의 요청이 간절하다고 해서, 예외 상황이 생기고 부모가 협상의 여지를 허용하면,

- 물론 그 시작이 자녀를 사랑하여 자녀의 마음을 헤아려주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 결과적으로 자녀와 부모와의 신뢰는 깨진다.

왜냐하면 예외가 허용되면, 자녀는 정해진 시간이 되어도 자지 않고 놀고 싶은 욕망이 커지고,

- 결국 부모가 감당할 수 없는 시간까지 놀게 되며,

- 그러면 부모는 불쾌한 감정을 자녀에게 표현하고,

- 자녀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감정으로 하루를 마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하루 이틀로 끝나면 좋은데,

- 늦은 수면 패턴이 반복되면, 몸이 적응되고 굳어져서, 늦게까지 졸리지 않게 되고,

- 놀겠다는 자녀와 재우겠다는 부모의 갈등은 점점 더 심화하여,

- 다투다가 잠드는 패턴이 매일 밤 반복된다는 점이다.

사실상 늦게 자는 것 자체도 큰 문제는 아니다.

- 진짜 문제는 잠 문제로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 그 갈등이 매일 밤 반복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 큰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가지 특별한 규칙에서 부모의 '가혹함'이 필요하다.

- 여기서 가혹함은 다른 말로 엄격함이다.

- 가급적이면 예외 없이, 협상의 여지 없이 지켜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자녀가 정해진 시간 이후에도 놀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김없이 빼앗는 것이다.

- 기대와 소망을 없애는 것이다.

- 자녀에게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놀 수 없다는 철저한 절망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 절망감 속에서만 자녀는 매일 밤을 아무런 불만 없이 기분 좋게 충만함 속에서 잠들 수 있다.

- 다툼과 갈등이 아니라, 안정감과 사랑받는 느낌으로 잠들 수 있다.

- 그럴 때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신뢰하게 된다.

- 가혹함과 그로 인한 절망감이 오히려 신뢰 관계를 만든다.

 

그래서 하나님도 가혹하게 심판하시는 것이다.

- 우리 안에 불필요한 욕망의 실현 가능성을 빼앗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야 불필요한 욕망이 사라지고, 

- 매일을 불만 없이 기분 좋게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혹하게 심판받는 모습을 보며 섬뜩함을 먼저 느낀다.

-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보다는 이스라엘에게 감정 이입이 된다.

- 이스라엘을 매몰차게 내치시는 하나님께 불만을 갖는다.

- 그러면서 내 인생에는 저런 심판이 없기를 바라며,

- 심판하시는 하나님 자체를 부정하던가,

- 아니면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고 왜곡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가혹함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중요한 규칙을 내재화시키시려는 목적이다.

- 그래서 우리가 규칙을 지키는 것에 아무런 불편함을 갖지 않도록 하시려는 사랑이다.

- 수면 교육이 자녀가 매일 해야 할 수면 행위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부모의 사랑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면 교육에서 협상과 타협은 자녀를 위한 배려가 아니다.

- 오히려 무책임, 무성의, 무관심이다.

- 왜냐하면 타협으로 인해 매일 수면 행위를 해야 할 자녀에게 불만을 가증시키기 때문이다. 

- 자기를 거부하고 놀고 싶은 욕망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어떤 면에서 비타협적이고 무자비하게 대하시는 것이다.

- 불필요한 욕망을 억제하여, 우리에게 불만과 스트레스를 낮추고, 삶의 만족과 기쁨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가혹한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만, 그 이후에 있을 구원이 제 역할을 한다.

- 불필요한 욕구가 억제되어야, 그 이후 구원받아 회복되어 자유를 얻었을 때,

- 또 다시 자유를 불필요한 욕구 성취에 소진해버리지 않을 수 있다.

- 그래야 자유롭게, 마음껏, 원하는 만큼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 그 사랑을 통해 진정한 충만함, 진정한 만족, 진정한 생명, 진정한 나다움, 말 그대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참된 구원이다.

- 여기까지가 심판하신 후 다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심정이다.

구원이 예정된 이스라엘을 가혹하게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 심판은 이스라엘에게 괴로움 그 자체였다.

- 그런데 여기서 생각이 멈추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대상조차 괴롭게 만드는 폭군으로 전락한다.

- 그래서 우리도 구약에서 가혹한 심판 메시지를 읽을 때 폭군 하나님을 떠올리지 않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정말 어떤 분이신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는데 나에게 가장 와닿는 예는 자녀에게 수면 교육을 했던 첫 일주일이다.

- 자녀를 침대에 누이고, 허둥지둥 수면 의식을 한 후, 도망치듯 나와서, 문 앞에서 입술을 깨물며 벌서듯 서 있었던 시간 말이다.

- 자녀는 자지러지듯 울며 부모를 찾았고, 울다가 토하고, 울다가 똥 싸고, 그러고도 기절할 듯 울었다.

- 그러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하고 발만 동동거리며 애간장이 썩어 문드러지는 심정으로 문 앞을 서성거렸다.

- 그 짓을 매일 밤 했다.

- 그래서 밤이 두렵기까지 했다.

- 물론 우리 부부는 수면 교육을 실패했다. 사랑이 부족해서 말이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두 가지이다.

- 고집을 꺾지 않으려는 자녀에 대한 분노와,

- 고집이 꺾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자녀에 대한 슬픔이다.

- 수면 교육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를 찾는 자녀의 울음에 견딜 수 없이 슬펐고,

-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도 모르고 계속 울어 재끼는 자녀에게 짜증이 났다.

 

게다가 나를 더 괴롭게 했던 것은, 분노와 슬픔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 만약 아무리 자녀가 울어도, 귀를 막아 울음을 외면하고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 그냥 시간만 지나면 해결될 일이라면, 넋 놓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 슬픔과 분노를 주는 자녀의 울음소리를 반드시 세심하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울음소리를 듣고, 가만히 기다려야 할지, 말로만 대답해야 할지,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지, 들어가서 안아줘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판단해야 한다.

- 그래야만 효과적이고 바른 수면 교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고 무관심하게 놔두는 것은 학대이기 때문이다.

즉, 자녀로 인한 마음의 분노와 슬픔을 외면하거나 해소하면 좋을 텐데,

- 그러지 않고 분노와 슬픔을 계속해서 마음에 쌓아둬야 한다는 것이 나를 가장 괴롭게 했다.

- 마치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는데,

- 가시를 빼도 안되고, 약을 발라도 안되고, 아픔을 잊으려고 다른 일에 집중해도 안 되고,

- 가시가 손톱 밑에서 피를 내고, 부어서, 곪아가는 과정을 계속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사람을 정말 힘들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정이 바로 이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꼭 필요하고, 그래야 이후에 예정된 구원이 참된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셨다.

- 심판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는 것을 아셨다.

- 그래서 반드시 심판하셔야 했다.

- 심판의 정당성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스라엘을 정확하게 주시하셔야 했다.

- 이스라엘이 하는 짓을 낱낱히 바라보아야 했다.

- 그러면서 하나님은 분노와 슬픔을 지독하게 느끼셨다.

- 헛된 욕망에 매여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때문에 분노를 마주해야 했고,

- 헛된 욕망에 이끌려 스스로를 파괴하는 이스라엘 때문에 슬픔을 마주해야 했다.

- 그리고 심판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이스라엘 때문에 슬픔에 잠기셨고,

- 심판받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거부하며 자기 혼자 살겠다는 이스라엘 때문에 분노를 참기 힘드셨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님도 분노와 슬픔을 외면하거나 해소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 이스라엘로부터 완전히 눈을 돌려버리시거나, 

- 혹은 이스라엘에 분노를 쏟아내어 파괴하실 수도 있고, 

- 이스라엘의 욕망을 충족시켜서 슬픔을 해소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노와 슬픔을 마음에 삼키고 인내하셨다.

- 이스라엘이 죄를 깨닫고, 헛된 욕망에서 벗어날 때까지 말이다.

-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 분노와 슬픔을 직면하셨다.

- 더 길게는 출애굽부터 약 1000년 동안 기다리셨다.

- 이스라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말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 하나님은 황무지가 된 이스라엘 땅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신다.

[렘 12:11] 그들이 내 땅을 황무지로 바꾸어 놓았다. 황무지가 된 이 땅이 나를 보고 통곡한다. ・・・・

- 여기서 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확증해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 그런 점에서 땅은 하나님과 동일시된다.

- 따라서 땅의 통곡은 사실상 하나님의 통곡이다.

-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서 선물한 이스라엘 땅이 이스라엘과 함께 황폐해지는 모습을 보시며 누구보다도 더 깊이 통곡하셨다.

동시에 땅이 황무지가 되는데도 슬퍼하는 이는 땅과 하나님 말고는 없다.

[렘 12:11] ・・・・ 온 땅이 이렇게 황무지가 되었는데도, 걱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 그만큼 땅과 땅을 선물하신 하나님께 관심을 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 그 사실에 하나님은 분노하셨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가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회복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 만약 슬픔이 없었다면, 분노로 이스라엘이 심판받은 이후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고,

- 만약 분노가 없었다면, 심판 없는 회복으로 인해 회복된 후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죄악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 슬픔과 분노가 함께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심판으로 정화되고 구원으로 자유롭게 된다.

게다가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는 이스라엘에서 멈추지 않는다.

- 이스라엘의 이웃 백성에게까지 확대된다.

[렘 12:16] 비록 그들이 내 백성에게,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맹세하도록 가르쳤지만,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확실하게 배우고, 내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면, 그들도 내 백성 가운데 들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웃 백성에게 분노를 가지셨지만,

- 동시에 그들에게도 긍휼함, 즉 슬픔을 느끼셨다.

[렘 12:15] 그러나 내가 그들을 쫓아낸 다음에는, 다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제 땅, 제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겠다.

그러니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가지신 하나님이 이웃 백성에게 하실 일이 무엇이겠는가?

- 당연히 심판 후 회복이다.

- 결국 온 인류는 회복되어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대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것이 온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이다.

- 그리고 그 계획을 이끌어가는 힘은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이다.

 

결론 - 구원뿐만 아니라 구원 전 심판도 피할 수 없다.

심판은 통과의례가 아니다.

- 필수 과정이다.

- 심판을 지난 구원이라야 참된 회복을 가져온다.

심판의 역할은 명확하다.

- 우리에게 헛된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다.

- 밤에도 놀고 싶은 자녀의 욕망이 자녀를 해치는 것처럼, 헛된 욕망은 우리를 해친다.

- 자녀가 안 자고 놀면 다음 하루를 망치듯, 우리가 헛된 욕망을 추구하면 인생 전체를 망친다.

그런데 심판이 욕망을 어떻게 제거하냐?

- 반복되는 좌절을 통해서이다.

- 마치 묶인 채로 어린 시절을 보낸 코끼리가 성장해서도 여전히 묶인 채로 있는 것처럼 말이다.

- 묶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 이것이 나쁘게 사용되면 억압이고 학대이지만, 좋게 사용되면 절제가 된다.

그래서 심판은 엄격하고 가혹해야 한다.

- 그래서 헛된 욕구 성취 가능성 자체가 박탈되어야 한다.

- 그래야만 매여있던 헛된 욕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회복 이후 자유가 주어졌을 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자유를 헛된 욕구 충족에 허비하지 않고,

- 온전히 사랑하는데 쓸 수 있다.

 

그러나 가혹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 서커스장의 코끼리처럼 우리를 묶어두신다는데, 

- 그래서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박탈하신다는데,

- 그 하나님을 누가 좋게 보겠는가.

이 점이 신앙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다.

- 얼마나 어둡냐면, 이 사실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너무 화가 나서 하나님을 죽이기까지 할 만큼 거부감이 드는 부분이다.

- 신앙의 이런 부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 바리새인은 모든 인생을 율법에 올인했는데, 율법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시며 자신들의 구원 가능성을 박탈하셨는데, 그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 그래서 바리새인은 모든 인생을 걸고 율법을 부정하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모든 가능성을 박탈하신다는 말을 들었으면, 우리도 하나님을 죽였을 것이다.

- 더 정확하게, 이미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죽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 오직 심판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심정에 공감할 때에만 심판을 받아들일 수 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위엄있고 당당한 심판관이자 왕으로 상상하면,

- 누구도 그 심판에 자발적으로 들어갈 수 없다.

- 두려움으로 인해 거부감이 든다.

- 위압적인 하나님을 더 위압적으로 죽이려 든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때, 어쩔 줄 몰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신다.

- 아무것도 못하시고, 입술을 깨물며, 발만 동동거리시면서, 애간장이 썩어 문드러지는 심정으로 바라보신다.

- 심판받는 우리가 오히려 위로해드려야 할 지경이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할 때만 우리는 심판에 자발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

- 왜냐하면 그 심판 속에서 우리 때문에 벌벌 떨고 계신 하나님의 애달픈 사랑을 보기 때문이다.

- 그 심판이 나의 가능성을 전부 박탈하는 좌절감을 주지만,

- 하지만 그조차 하나님의 사랑이고,

- 그 이후에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다.

-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심판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의 가능성을 박탈하시는 것이다.

-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밤에 놀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을 준비해놓지 않으셨겠는가.

- 그러니 그 하나님께 나아가자.

- 물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심판 속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