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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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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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멸망하는 이스라엘이 겪을 고통을 자세히 묘사한다.
- 18~20절에서, 이스라엘은 영광스러운 면류관인 백성을 모두 잃어서, 왕의 존립조차 위협받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 참고로, 18절의 '그들의 영광스러운 (면류관)'과 20절의 '네가 그처럼 자랑하던 (네 백성)'은 원어로 'beautiful'이라는 같은 단어로, 면류관은 단순히 왕관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다.
- 즉, '면류관이 벗겨졌다'는 것은 백성을 잃은 왕의 절망적인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 21~23절에서, 멸망하는 이스라엘은 마치 '자녀에게 공격당하듯', '여인이 해산하듯', '성폭행당하듯' 극도의 수치와 고통을 느끼며 신세를 한탄하는 상황이다.
- 게다가 24~27절에서, 이스라엘은 산산이 흩어져 수치를 당하면서도, 언제 회복될지조차 알 수 없는 암담한 상황이다.
- 이렇게 본문은 멸망하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자세히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 본문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심정을 표면에 드러내면서, 내면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담는다.
대표적인 예가, 21절이다.
[렘 13:21] 네가 손수 기른 자들이 너를 공격하고 지배하면, 네 심정이 어떠하겠느냐? 너는 해산하는 여인처럼, 온갖 진통에 사로잡히지 않겠느냐?
- 여기서 '네가 손수 기른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표면적으로는 '바벨론'이다.
- 현재 시점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지배할 대상은 바벨론뿐이다.
-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조공 받친 행위를 '손수 기른' 것에 비유했다.
- 이스라엘은 친교를 맺는 대가로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쳤지만, 바벨론에게 배신당하고 공격당해서 멸망했을 때 이스라엘의 심정을 묻는 질문이다.
- 그 배신당한 심정이 해산의 고통과 같이 극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네가 손수 기른 자들'은 내면적으로 '이스라엘'을 암시한다.
- 풀어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이스라엘아, 너도 네가 손수 기른 자들(바벨론)이 공격하니까 속상하지? 나도 내가 손수 기른 자들(이스라엘)이 공격하니까 속상해.'라는 뜻이다.
- 표면적으로는 바벨론에게 공격당하는 이스라엘이 받을 고통스러운 심정을 경고하는 것이지만,
- 내면적으로는 바벨론에게 공격당하는 이스라엘에 빗대어, 이스라엘에게 공격당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호소하는 것이다.
- 자녀에게 공격당하고 지배당하는 부모의 굴욕적인 심정에 비유하여, 이스라엘에 배신당한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 그 고통이 마치 해산의 고통처럼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과 같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믿고 사랑했던 이스라엘이기에, 배신당했을 때의 고통과 상실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하나님은 같은 질문으로 이스라엘이 겪을 심판의 고통을 경고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이 겪을 고통에 공감할 것을 호소하신다.
- 지금 하나님의 심정이 자식에게 공격당하는 부모처럼 참담하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하는 짓이 부모를 공격하는 자식처럼 죄악되다는 것이다.
- 그러니 실제로 고통을 당하기 전에 돌이키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을 손수 기르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부모를 공격하는 자식의 대표로 '탕자'를 떠오르게 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의 질문에 두 가지 메시지를 함께 담았을까?
- 왜 이스라엘이 겪을 고통을 예고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정을 호소하셨을까?
- 둘 다 '배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배신당했다.
- 이스라엘이 배신당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배신당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 그런데 하나님을 배신한 주체가 자신이고,
- 자신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끔찍하게 고통당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배신을 멈추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배신을 경험하도록 하신 것이다.
-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공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 심판의 본질적 목적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에 대한 '벌칙'이 아니다.
일반적인 형법에서 형벌은 벌칙의 성격을 갖는다(응보형론).
- 가해자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게다가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인식이 이 착각을 강화한다.
- 흔히 잘못에 대해 마땅한 해악을 가해지는 것을 공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조차 가해자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고 착각한다.
-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벌칙으로 생각하는 것은 전형적인 인간의 관점이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고통당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시면서 마음에 있던 응어리가 풀리시겠는가?
- 분명히 사람은 복수할 때 쾌감을 느낀다.
- 가해자의 고통을 보며 즐거워한다.
- 그러나 하나님도 그러실까?
하물며 사람조차 아무리 잘못한 자녀라고 해도, 자녀의 고통을 보며 기뻐하는 부모는 없다.
- 그런데 과연 하나님이 그러시겠는가?
- 하나님이 죄를 저지른 이스라엘이 벌을 받아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시겠는가?
- 그것을 정말 공의롭다고 보시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벌칙이라는 목적으로 절대로 가해자에게 해악을 가하시지 않는다.
- 이스라엘이 고통받는 그 자체에는 절대로 의미를 두지 않으신다.
-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이스라엘처럼 고통을 자처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고통에 하나님은 사람보다 더 아파하신다.
- 자녀의 아픔을 자녀보다 부모가 더 아파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 행위의 목적은 언제나 사랑이다.
-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하여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
- 관계가 연결되고, 더욱 단단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심판의 목적도 똑같다. 오직 사랑이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공감하고 이해하여 사랑하도록 하고,
- 끊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깊은 관계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 벌칙의 의미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왜 심판하시냐?
왜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만드시냐?
- 그 고통이 벌칙으로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배신당해서 고통당하도록 하셨다.
-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고통을 준 가해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당하여 형평성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 하나님이 당하신 고통을 이스라엘도 똑같이 경험하여, 하나님의 고통에 공감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깨닫고,
- 잘못된 행위를 멈춰서, 하나님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 그런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 그 사랑에 감동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 심판의 본질적 목적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심판하실 것이다.
- 해산의 고통과 같은 극심한 고통을 주실 것이다.
-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아도, 그 고통이 너무 커서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고통을 하나님이 겪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고통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게 하실 것이다.
-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고통 말이다.
- 그래서 자신 때문에 겪으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실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 때문에 고통당하시는 하나님께 동질감을 느끼고,
- 하나님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져서,
- 하나님으로 인한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죄를 속히 멈추고,
-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실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 이렇게 고통스러운 심판이 꼭 있어야만 할까?
- 이런 고통 없이 하나님을 공감하고 사랑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 이런 고통 없이 심판받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은 없을까?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면, 고통당하기 싫기 때문이다.
- 고통 없이 구원받고 싶기 때문이다.
- 아무런 희생 없이, 아무런 변화 없이, 아무런 손해도 감수하지 않고, 구원의 열매만 따 먹고 싶기 때문이다.
- 누가 고통을 좋아하겠는가.
고통을 피하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 정작 하나님이 고통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면, 하나님을 왜 믿겠는가.
-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이 질문은 단순히 상상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앞에서 불쾌하고 흥분된 얼굴로 내뱉은 말이다.
- 그것도 신앙 좋다는 사람이 말이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의문이다.
- 특정한 소수의 반론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심판의 고통 없이 구원은 없다.
만약 심판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 하나님이 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뜻이다.
왜 그런지 최대한 짧게 설명하면, 십자가의 죽음 부활이 그것을 말해준다.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죽여서 심판한 후, 예수님과 함께 살려서 구원케 하신다는 뜻이다.
[롬 6:4~5]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조차 구원을 위해 심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만약 심판 없는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님 역시 굳이 고통스럽게 죽지 않으셨을 것이다.
- 굳이 죽지 않고, 살아계신 상태 그대로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변화하셨을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수치스럽게 심판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신 이후에 비로소 영광의 생명으로 부활하셨다.
그런 예는 무수히 많다.
- 이스라엘 역시 회복 이전에 멸망했고,
- 바울도 구원 이전에 실명하고 삶의 목표를 잃는 과정이 있었고,
-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포자기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과정이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
- 회복의 구원 경험을 하기 전에 해산에 고통에 맞먹을 심판의 경험을 할 것이다.
-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고, 예루살렘과 성전이 불타 없어지며, 민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처럼 말이다.
- 우리의 정체성이 붕괴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빼앗기며, 가치관이 부정당할 것이다.
- 경제적, 사회적, 영적 죽음을 겪을 것이다.
그런 이후에 부활과 회복의 구원을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또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한다.
- 예수님이 모든 죄를 지시고 죽고 부활하셔서 죄를 제거하셨는데,
- 왜 우리가 또 죄에 대한 심판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냐고 말이다.
- 그것은 이중 처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심판의 고통이 우리 죄에 대한 처벌이라면,
- 우리가 받아야 할 처벌의 정도는 단순히 고통을 겪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된다.
- 우리 죄에 합당한 처벌은 반드시 생명을 잃어야 하고, 잃은 상태가 영원토록 지속되어야 한다.
- 결코 회복되면 안 된다.
- 그것이 예수님의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서 처할 운명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 심판의 고통을 겪은 후에 회복되어 구원의 기쁨을 누린다.
- 오히려 그때 겪은 심판의 고통은 하나님을 더욱 공감하고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 심판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가 얼마나 나쁜지 몸으로 배우고, 죄에서 멀어지게 된다.
- 그리고 같은 고통을 겪은 하나님과 동질감을 느끼고,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하게 된다.
그러나 또 묻는다.
- 정말 심판의 고통 경험이 구원 과정에서 그렇게 필요하고 중요한가?
- 그 경험이 있으면 좋다는 것은 알겠는데,
- 그 경험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 그 경험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받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없다.
- 심판의 경험 없이는 구원도 없다.
-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 동참한 사람만 예수님과 함께 부활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롬 6: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예수님과 함께하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고,
-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구원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다.
따라서 심판의 고통 경험은 필수이다.
- 그리고 구원의 경험이 인생에서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것처럼,
- 심판의 경험도 반복된다.
- 그래서 반복해서 하나님의 심정에 공감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신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면, 모든 구절에 이중적인 메시지가 있다.
18~20절은 백성을 잃은 왕이 왕의 지위조차 위협받는 비극적인 이스라엘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 이는 하나님이 처하신 상황과 일치한다.
- 하나님 역시 백성을 잃고 하나님의 지위를 위협받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이 면류관이 벗겨져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상실감을 느끼는 것처럼,
-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 백성을 잃고 더 이상 하나님으로 사실 수 없는 상실감을 표현한다.
[렘 13:18] 너는 저 왕과 왕후에게 전하여라.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낮은 곳에 앉으라고 하여라. 그들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머리에서 벗겨져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여라.
- 하나님도 하나님이라고 불러줄 대상이 있을 때 하나님의 정체성을 갖는데,
- 그래서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잃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그토록 간절하게 찾은 것이다.
특히 '네 백성이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는 이스라엘을 찾는 하나님의 절박함이 담겨 있다.
[렘 13:20] 예루살렘아, 눈을 뜨고, 북녘에서 오는 적들을 보아라. 네가 돌보던 양 떼, 네가 그처럼 자랑하던 네 백성이,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
- 물론 표면적인 의미는 백성조차 잃어버린 이스라엘 지도자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다.
- 책임지고 지켜야 할 백성을 잃어버린 지도자의 직무태만을 고발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을 잃은 하나님의 탄식과 끝까지 이스라엘을 찾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도 담겨 있다.
21~23절에서도 바벨론의 배신으로 멸망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의 심정을 설명하는데,
- 이 역시 하나님의 상황과 같다.
- 하나님도 정성스럽게 돌본 이스라엘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을 잃어버릴 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찌하여 내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은 하나님의 심정을 더 잘 드러내 준다.
[렘 13:22] 그 때에 너는 ‘어찌하여 내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내가 대답하마. 네 치마가 벗겨지고 네 몸이 폭행을 당한 것은, 바로 네가 저지른 많은 죄악 때문이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위로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빼앗고 굴복시킬 수 있었다.
-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자유롭게 하셨다.
- 지배하고 굴복하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상호 관계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유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버려졌다.
- 이스라엘은 '자유롭게'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 우상숭배하고, 외세 의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았다.
그렇게 버려진 하나님의 신세가 마치 성폭행당하고 버려진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 여기서 '성폭행'의 의미는 대상이 주는 유익만 취하고 그 대상 자체는 버리는 태도이다.
- 즉, 거래 관계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익만 뽑아 먹힌 후 가차 없이 버려지셨다.
- 그렇기 때문에 현재 하나님의 신세를 성폭행당한 것에 비유하는 것이다.
- 그만큼 수치스럽고 상실감이 큰 신세이다.
24~27절은 '사막의 바람에 나부끼는 검불(먼지)처럼' 회복 가능성조차 없는 이스라엘을 설명하는데,
- 이는 회복 가능성 없이 상처 입은 하나님의 심정과 같다.
[렘 13:24]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사막의 바람에 나부끼는 검불처럼, 산산이 흩어 놓겠다.
특히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지내려느냐?'는 물음은 하나님의 암담함을 부각한다.
- 바람에 날아간 먼지가 다시 모여 하나 될 수 없듯이, 이스라엘 역시 흩어진 백성이 다시 모여 회복될 수 없고,
- 동시에 하나님의 상처 입은 심정과 훼손된 정체성 역시 회복 가능성이 없어서 암담한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멸망과 고통은 하나님의 훼손과 상처였다.
이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상태를 완전히 공유한다.
- 그만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약속 그리고 약속 성취로 만들어진 민족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체성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드러내셨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체성 역시 이스라엘에 속박된다.
- 즉, 이스라엘을 잃은 하나님 역시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이러한 긴밀함 때문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고통을 공유하는 것이다.
- 이스라엘의 수치가 하나님의 수치가 되고, 이스라엘의 파괴가 하나님의 파괴가 된다.
- 반대로 이스라엘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이 된다.
이렇게 상태를 공유하는 것이 개인화된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진다.
-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 그러나 과거 공동체 중심의 사회에서는 당연하였고,
- 현재도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
역시 대표적으로, 부모 자식 관계이다.
- 만약 부모가 죄를 지으면, 자녀는 '죄인의 자식'으로 낙인찍힌다.
- 동시에 자녀가 죄를 지으면, 부모 역시 '죄인의 부모'로 낙인찍힌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부모 자식 관계가 그만큼 긴밀하기 때문이다.
- 문제 있는 부모가 키운 자녀는 당연히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고,
- 동시에 문제를 일으킨 자녀의 원인은 당연히 부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서로 의존하듯, 자녀의 정체성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고, 부모의 정체성 역시 자녀에 의해 표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상태를 공유하듯, 부모와 자녀도 상태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당연한 사실을 이스라엘이 몰랐다는 점이다.
- 자신에 의해 하나님의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것을 몰랐다.
- 자신이 멸망하여 파괴될 때 하나님도 파괴된다는 것을 몰랐다.
-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몰랐다.
그래서 자신 때문에 정체성이 파괴되어 모든 것을 잃은 하나님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 하나님은 울며불며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고 호소하셨지만,
-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 쓸데없이 하나님 의지하는 데 시간 낭비하지 않고,
-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우상과 강대국을 찾아 의지했다.
-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몰랐다.
- 그런 선택이 정작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 자기 자신을 위한답시고 했던 선택이 무식하게도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이라는 것을 말이다.
- 오히려 쓸데없어 보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 2500년이 지나서 보는 우리는 다 아는데, 그들은 몰랐다.
이것이 인류가 반복하는 비극이다.
- 우리도 이스라엘을 비판하면서, 똑같이 비극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 나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 그것이 결국 파멸의 길인지 모른 채, 성공의 길이라고 착각한 채, 무작정 달린다.
우리보다 먼저 이런 방식으로 평생을 산 사람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 우리 부모 세대이다.
- 돈, 명예, 안정, 인정만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
-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다.
- 그러나 그 대신 인생을 잃었고, 자기 자신을 잃었다.
- 그래서 평생을 살았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처량한 신세를 극복하기 위해 혹은 부정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본다.
- 모든 대화의 끝은 불평, 한탄, 후회, 원망뿐인 비극적인 인생을 본다.
우리는 어떠한가?
- 우리 역시 보고 배운 것은 그것뿐이다.
-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안다.
-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 우리의 선택은 부모 세대를 답습한다.
- 약간의 여유가 생겨서 가끔 문화 생활을 하는 것뿐, 기본적인 마인드는 똑같다.
여기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인생의 끝에 불평, 한탄, 후회, 원망만 가득 찰 것이다.
- 만나는 사람마다 똑같은 원망만 내뱉는 사람이 될 것이다.
-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바로 그 사람이 내가 될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상태가 죽은 이후에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그렇게 서로 원명하고 불평하며, 후회하고 한탄하는 곳이 지옥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끝이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과 마음을 얼마나 공유하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는가?
-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나도 기쁘고, 하나님이 슬퍼하실 때 나도 슬픈가?
- 반대로, 내가 기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내가 슬플 때 하나님도 슬퍼하실 것이라고 믿는가?
그렇다면 왜 이것이 안 되는가?
- 어떻게 하면 이것이 될 수 있을까?
- 과연 우리는 어떤 경우에 타인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가?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는 가장 쉬운 예는, 스포츠 경기를 응원할 때이다.
- 우리 팀이 잘하면, 우리 팀을 응원하는 우리 전체가 함께 기쁘고,
- 우리 팀이 못하면, 우리 전체가 슬프다.
또 다른 예는, 내가 주식을 산 기업이 잘 돼서 주식이 오르면 기쁘다.
- 또한, 내 자녀가 잘 돼서 기뻐하면 나도 기쁘다.
즉, 어떤 경우에 감정이 공유되냐?
- 대상에 나의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시간적 가치가 투입되었을 때이다.
-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응원한 팀, 돈을 들여 주식을 산 기업, 마음과 정성을 들여 양육한 자녀이기 때문에 감정의 공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듯이, 몸(정신, 육체, 물질, 시간)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진다.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몸이다. 마음이 아니다.
- 상대방과 몸을 공유할 때에만, 자연스럽게 마음이 공유된다.
- 아무리 마음을 공유하려고 애써도, 몸이 공유되지 않으면 절대로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왜 우리는 하나님과 마음을 공유할 수 없을까?
몸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 시간, 정성, 돈, 인생을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 투자한 것이 없어서, 하나님과 멀어져도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마음도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은 의미 없다.
- 어차피 마음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없다.
-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은 몸을 움직이기 싫기 때문에 하는 변명일 뿐이다.
- 몸을 움직이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마음을 움직이려는 노력은 아무런 수고가 들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도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반대로 왜 우리는 직업이 그렇게 소중하냐?
- 내 평생이 거기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의 모든 노력의 결과로 현재 직업을 얻었고,
- 하루의 전부를 거기에 쏟아붓고 있으며,
- 그런 하루를 수 년 동안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 내가 투자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온통 그것에 쏠리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과 직업 중에 끝까지 나를 책임져 줄 대상은 누구인가?
- 생각 없이 보면, 직업이 나를 책임져 주는 것 같다.
- 돈을 줘서 생활할 수 있게 해주고, 일의 성과를 통해 나의 가치를 확인하게 해주며, 일이 잘되었을 때 성취감이라는 재미도 준다.
- 기본적인 생활, 정체성 확인, 정서적 재미까지 모든 것을 직업이 준다.
- 그래서 우리가 직업을 의지하는 것이다.
- 우리 인생 전체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까지일까?
- 내가 쓸모 있을 때까지만이다.
- 100%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토사구팽 당한다.
- 직업에게 버려질 것이다.
- 내가 받는 가치에 비해 내가 만드는 가치가 조금이라도 작아지는 순간 바로 내버려진다.
- 그리고 그 순간은 시점의 차이만 있을 뿐 반드시 온다.
그래서 더 이상 인생에서 정체성 확인과 정서적 재미를 전부 잃는 순간이 온다.
- 즉, 직업을 잃는 것과 함께 인생 전부를 잃는 순간이 온다.
- 그때 사람은 원망, 불평, 후회, 한탄만 남는다.
- 그래서 우리 부모 세대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신다.
- 죽는 순간까지, 그리고 죽은 이후에도 말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기본적인 생활, 정체성 확인, 정서적 재미까지 약속하셨다.
-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들풀도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소중하고 사랑하는 우리를 그냥 놔두시겠는가.
[마 6:26]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8~29]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 이렇게 하나님은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 그리고 하나님만이 우리를 가장 잘 아시며, 우리가 참 나 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신다.
- 그 과정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은 세상 어떤 재미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께 투자해야 하지 않겠는가.
- 돈이던, 시간이던, 몸이던 뭐든지 간에 하나님께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
- 삶의 의미와 가치를 주시는데, 직업처럼 한시적이 아니라, 영원토록 주신다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 나는 오직 나에게만 투자한다고.
- 절대 다른 것에 투자하지 않는다고.
- 난 나만 의지하지,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 직업을 갖는 것은 직업을 믿어서 나를 직업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직업을 이용해서 나 잘되려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투자는 반드시 나 외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 내가 잘되려면 이용할 대상이 필요하고, 그 대상을 잘 되게 만들어서 그중 일부를 유익으로 취하는 것이 투자이다.
- 나만을 위해 살기 위해서도 투자할 대상을 선택해야 한다.
- 그리고 그 대상은 정말로 나에게 유익을 줘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더 나에게 유익을 주냐는 말이다.
- 직업이냐, 하나님이냐?
- 결국 팽당할 직업을 선택해야겠냐, 영원토록 책임져줄 하나님을 선택해야겠냐.
- 어디에 내 인생을 투자해야 하겠냐.
직업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 직업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직업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 우리가 말로는 아무리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의 하루, 일주일, 한 달을 돌아보자.
-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얼마나 많은 열정과 얼마나 많은 몸을 직업에 쏟았는지 말이다.
- 나는 직업을 의지하지 않고, 살기 위해 직업을 이용하는 것뿐이라고 말하지만,
- 실상은 내 인생 대부분을 직업이 빨아들이고 있다.
- 내가 원해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전부를 직업이 결정하고 있다.
더 양보해서, 지금은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일하지만, 직업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 나는 직업에 매여있지 않고, 언제든 원하면 나올 수 있다. 라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적어도 직업에서 풀려난 이후에 대한 계획은 있어야 한다.
- 어떻게 먹고 살지와 같은 경제적인 계획이 아니라,
-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나답게, 사람답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누리며 살지에 대한 계획 말이다.
- 돈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 '나'이기 때문에 뿜어져 나오는 나됨을 어떻게 발산하고 표현하며 살지에 대한 계획 말이다.
- 단지 먹기 위해 사는 동물로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 인간으로서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해도 적어도 계획을 세우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
- 직업이 인생의 중심이 아니라고 말하려면, 직업이 없어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나만의 방식이 있어야 한다.
- 그것을 고민하는 흔적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직업을 배제하면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 직업에서 해방된 이후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고,
- 계획을 짜고자 하는 마음도 없으며,
- 계획을 짤 여유 시간도 없다.
이는 곧 인생의 중심이 직업이라는 뜻이다.
- 살기 위해 먹기보다 먹기 위해 살고 있다는 뜻이다.
- 아무리 부정해도 반론의 여지가 없다.
100% 확언하건대, 이렇게 살면 우리 부모 세대와 똑같은 인생의 끝을 맞이할 것이다.
- 입만 열면 원망, 불평, 후회, 한탄만 늘어놓다가, 후회하며 죽을 것이다.
-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투자하자.
- 나를 기능과 성과로 평가하는 분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께 말이다.
- 그럴 때에만 죽을 때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는 후련함과 성취감 속에서 충만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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