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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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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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핵심은, 지난 본문에 이어서, 평화를 달라는 예레미야의 항변이다.
- 차이가 있다면, 지난 본문에서는 다른 예언자의 말을 인용해서 간접적으로 말했다.
- 반면에 이번 본문에서는 예레미야 자신의 말로 직접 평화를 요구한다.
[렘 14:19] ・・・・ 우리가 기다린 것은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상처가 낫기만을 기다렸는데, 오히려 무서운 일만 당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지난 본문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렘 15:1] 그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 여기서 모세와 사무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표 중재자이다.
- 이들의 특별한 점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켰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바꿨다.
[출 32:30~32] 이튿날 모세는 백성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크나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주님께 올라가서, 당신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빌겠습니다.” (31) 모세가 주님께로 돌아가서 아뢰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32)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결심을 모세가 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신다.
- 이는 단순히 하나님 결정의 단호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은 때때로 중재자의 요청으로 수차례 결정을 바꾸셨다.
- 하나님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제왕적 군주가 아니다.
- 하나님은 이미 결정하신 것도 상호작용을 통해 조정하시는 분이시다.
본문에서 단호함이 부각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단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자신이 범한 죄를 여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자신의 죄를 단지 '우리의 사악함과 죄악을 인정합니다.' 정도의 고백만으로도 충분히 용서받을 수 있다고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렘 14:20] 주님, 우리는 우리의 사악함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또 이를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말만으로는 안되고,
- 죄를 보상할 만큼의 행동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 이는 전형적인 행위 구원이다.
- 이단의 여지가 다분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 고백을 거부하신 이유는 자신의 죄를 여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죄 인식이 없는 죄 고백이 어떻게 진정성이 있을 수 있으며,
- 진정성 없는 죄 고백을 통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 용서받으려면 죄를 떨쳐버리지는 못했어도, 적어도 죄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죄이다.
- '죄를 알지 못하는 죄' 말이다.
- 다르게 말해서, 만약 이스라엘이 정확한 죄 인식 속에서 진정성 있는 죄 고백을 했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심판 결정을 번복하시고 용서하셨을 것이다.
-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전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이스라엘이 죄를 정확하게 인식했다면, 절대로 본문처럼 죄 고백하지 않았을 것이다.
- 본문의 죄 고백을 각색하면 이렇다.
- 하나님, 내가 잘못했어. 하나님 말 다 맞아.
-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됐지? 나 사과했다!
- 그런데도 용서 안 해줘?
- 아이참, 왜 이래. 이 정도면 용서해줘야 하자나.
- 이제 그만 화 풀고 잘 지내보자.
- 마음 풀어. 너만 마음먹으면 되자나.
- 이러면 너만 손해야.
-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용서 안 하는 하나님도 문제 있어.
이렇게 각색한 것이 지나친 감이 있지만, 본문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 19절: 그런데도 용서 안 해줘? 계속 '미워하고', 계속 그렇게 '심하게 칠거야?'
- 이제 그만 화 풀고 '평화롭게' 잘 지내보자.
- 20절: 내가 잘못했어. 미안하다고 했잖나.
- 21절: 이러면 너만 손해야. 계속 그러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보겠어. 실망할걸?
- 22절: 마음 풀어. 너가 마음만 먹으면 되잖아.
예레미야의 죄 고백을 이렇게 각색할 수 있다.
-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시겠는가.
- 그래서 하나님이 화내시면, 예레미야는 죄 고백하고 비굴하게 용서까지 구했는데 용서 안 해주신다고 하나님께 욕을 바가지로 할 것이다.
이런 예레미야의 태도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 죄 용서 달라고 하나님을 협박하는 모습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용서가 당연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죄 고백 했으니, 당연히 용서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문제이다.
- 하나님의 마음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상심하셨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 오로지 자신이 용서받고 심판에서 벗어나 편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만 생각한다.
- 즉, 하나님을 이용하기만 할 뿐, 하나님을 공감하고 사랑할 마음은 전혀 없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 인식을 방해하는 최대 장애물이다.
만약 바른 죄 인식에서 죄 고백을 했다면 이랬을 것이다.
- 하나님, 정말 잘못했어. 내가 압박받는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 소홀했어.
- 나는 빨리 문제 해결하려는 마음에 무심코 한 행동인데, 그것이 하나님께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어.
- 반대 입장이 되어서, 누군가가 나에게 그랬다면 정말 기분 나빴을 것 같다.
- 존중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것 같다.
-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조심할게.
- 그리고 압박받아서 정신없는 상황 만들지 않을게.
- 항상 차분한 상황에서 사려 깊이 생각하도록 노력할게.
- 지금 당장 용서해주지 않아도 좋아. 나 같아도 바로 마음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아.
- 항상 하나님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마음 풀리면 얘기해줘.
정리하면, 바른 죄 인식으로 인한 죄 고백은,
- 나로 인한 하나님의 아픔에 공감하고,
- 그런 아픔을 준 것에 사과한 후,
- 용서를 강요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다.
- 즉,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전제에서 용서를 구(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용서하지 않고 단호하게 심판하시는 이유를 오해하면 안 된다.
- 이스라엘이 죄를 지나치게 많이 반복해서도 아니고,
- 죄 고백에 합당한 변화된 모습이 없었기 때문도 아니고,
- 죄 고백을 잘못했기 때문도 아니다.
- 이렇게 구원을 오해하면 행위 구원, 율법주의로 변질된다.
- 물론 이스라엘은 이 세 가지 잘못을 모두 범했다.
- 그러나 이것은 죄의 본질이 아니라 죄의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의 죄를 갖은 방법으로 설명했지만, 실패하셨다.
- 그래서 마지막 방법을 쓰시는 것이다.
-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날 것 그대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 그래서 그렇게 어마어마한 분노를 일으킨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고,
- 이스라엘 죄의 크기가 하나님 분노의 크기만큼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정확한 죄 인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또 뒤집어서 말하면,
- 사실상 우리는 누군가가 실수를 반복하면 짜증 난다.
- 또 누군가가 반복해서 실수하는 데도 아무런 노력이 없으면 화가 난다.
- 게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조차 건성으로 하면 사람 자체가 싫어진다.
왜 그러냐면, 실수를 반복하고, 변화가 없으며, 대충 사과하는 행동은 둘째 문제이고,
- 그 사람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왜 그런 생각이 드냐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받는 상처가 이만큼 큰데,
- 그 사람은 내가 받은 상처에 무관심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만약 내가 받은 상처에 관심이 있었다면,
-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고, 반복한다고 해도 조심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며, 그조차 안된다면 진심 어린 사과라도 했을 텐데 말이다.
- 이 세 가지를 전부 안 했다는 것은, 이 세 가지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이 가진 나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나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그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 나에게 상처 주는 것에 거침이 없다는 것은 나를 무시하고 하대하는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죄를 알지 못하는 죄' 혹은 '죄 용서를 당연시하는 죄'가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심판을 결정하신 핵심 이유이다.
- 그리고 예레미야가 용서를 강요하며 건성으로 하는 죄 고백은 이스라엘의 부정확한 죄 인식을 드러낸다.
- 이스라엘은 여전히 자신의 죄를 몰랐고,
- 하나님께 용서를 강요했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의 크기를 깨달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으로 이스라엘 죄의 크기만큼의 분노의 심판을 쏟아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19~22절의 예레미야의 말을 제외하고는 전부 하나님의 심판 예고밖에 없는 것이다.
- 하나님 분노의 크기를 표출하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서 모든 사람이 참혹하게 죽는다. 예언자, 제사장 등의 지도자조차 죽는다.
[렘 14:18] 들녘으로 나가 보면, 거기에는 칼에 찔려 죽은 사람들이 있고, 도성으로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기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뿐이다. 그렇다. 예언자도 제사장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로 온 나라를 헤맬 뿐이다.
- 또한 뭘 해도 죽는다. 염병에 걸려, 칼에 맞아, 굶어서, 포로로 끌려가서 죽는다.
[렘 15:2] ・・・・ 나 주가 말한다. ‘어디를 가든지, 염병에 걸려 죽을 자는 염병에 걸려 죽고, 칼에 맞아 죽을 자는 칼에 맞아 죽고, 굶어 죽을 자는 굶어 죽고, 포로로 끌려갈 자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 게다가 가장 비참하게 죽는다. 칼에 맞아, 개에게 뜯겨서, 새에 쪼아 먹혀서, 들짐승에 먹혀서 죽는다.
[렘 15:3] 나는 이렇게 네 가지로 그들을 벌할 것이다. 그들을 칼에 맞아 죽게 하며, 개가 그들을 뜯어먹게 하며, 공중의 새가 그들의 시체를 쪼아먹게 하며, 들짐승이 그들을 먹어 치우게 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의 분노가 이만큼 크다는 것이다.
- 단순히 조금 고생하는 것으로 안 된다.
- 죽기는 하되, 평화롭게 혹은 명예롭게 죽는 것도 안 된다.
- 죽는 과정조차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어야 하며,
- 죽은 이후의 시체도 참혹하게 훼손되어야 한다.
- 예수님의 비극적인 죽음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화가 났냐?
- 이스라엘이 죄를 반복하기 때문이고,
- 죄를 반복하면서도 변화하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이고,
- 하물며 사과조차 건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 즉, 하나님을 찬양하고 숭배하기는커녕, 무시하고 하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좋게 해결하시려고 수 없이 노력하셨다.
- 이스라엘이 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하시려고 최선을 다하셨다.
- 하나님은 이 짓을 아브라함부터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1000년 이상 반복하셨다.
그러나 실패하셨다.
- 이스라엘은 여전히 죄를 알지 못했다.
- 죄가 뭔지도 모르고 용서만 구했다.
- 용서를 구한 것도 하나님께 공감했기 때문이 아니다.
- 죄로 인한 하나님의 상심에는 관심이 없었다.
- 이스라엘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욕망 충족이었다.
- 욕망 충족을 위해 용서를 구한 것뿐이다.
- 용서를 받아야만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은 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 자신이 죄를 반복해서 짓고 있다는 인식도 못 한 채 말이다.
그래서 죄를 깨닫도록 하는 마지막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신 것이다.
물론 무분별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 감정 조절 능력에 문제가 있는 분노 조절 장애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서 아무렇게나 내뿜으시는 것이 아니다.
- 정확하게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크기만큼만 정제되어 표현하시는 것이다.
- 목적 자체가 분노 표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확한 죄 인식에 있기 때문이다.
-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에서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분노 표출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단순하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삼은 죄이다.
- 마치 매춘을 하듯 말이다.
그래서 죄 고백을 한 대가로 용서를 강요한 죄이다.
- 마치 죄 용서라는 화대를 지불하듯 말이다.
죄 고백과 용서 구함을 빌미로 이스라엘이 원했던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욕망 충족인 죄이다.
- 마치 화대를 충분히 지불하고 매춘을 했으니, 아무런 잘못 없다고 생각하듯 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죄의 본질은 '죄를 알지 못하는 죄', '죄 용서를 당연시 한 죄'이다.
누군가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옹호할 수 있다.
- 하나님도 너무 하시지.
- 그 정도 용서 구했으면 받아 주셔야지.
-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해달라. 했으면 됐지.
- 도대체 얼마나 용서를 빌어야 하는 거냐?
- 손이 발이라도 될 때까지 빌라는 것이냐?
-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굴욕적으로 무릎이라고 꿇기를 바라시는 것이냐?
사과와 회개는 자위가 아니다.
- 내 마음 편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 상대방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과의 핵심은 언제나 '공감'이다.
- 나로 인해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느끼는 것이다.
- 상대방과 함께 나도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이것만이 나의 변화를 일으키는 유일한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 나의 문제로 인해 상대방이 힘들었을 때,
- 상대방의 힘듦이 나의 고통이 될 때에만 나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생긴다.
- 그리고 그 동력은 내가 변화되어 상대방의 힘듦이 줄고, 그로 인해 나의 고통이 줄기 전까지 계속해서 나를 압박한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 만약 사과는 했지만 결국 나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 나의 변화를 압박하는 동기가 없었다는 것이고,
- 이는 상대방의 힘듦으로 인한 나의 고통이 없었다는 것이며,
- 이는 상대방의 힘듦을 공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사과는 문제를 빨리 감춰서 내 마음 편해지려는 자위일 뿐,
- 상대방에 대한 공감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 없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 또 그래서 변화 없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 변화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는 공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공감해서 사과 잘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 공감이 도구가 되면, 더 이상 공감이 아니다.
- 공감은 언제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인생의 목적과 본질이 공감이다.
- 하나님과 하나 되고, 사람과 하나 되는 것이 신앙과 인생의 본질이다.
- 그것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그렇게 공감할 때만, 사랑도 가능하고, 사과도 가능하며,
-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정성 있게 회개하라고 그토록 외치시는 것이다.
- 진정성 있는 회개만이 사람을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살 수 있도록,
- 나를 나로 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회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답게, 인생답게, 사람답게, 나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론 -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 대부분 설교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성령으로.
- 당연히 성령 받으면 하나님 마음 공감할 수 있다.
- 그것이 성령의 역할이다.
하지만 이 답은 마치 이런 것이다.
-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 로또로.
- 당연히 로또 맞으면 돈을 벌 수 있다.
- 하지만 누군가 이렇게 대답하면, 우리는 뒤통수를 날리고 싶다.
- 왜냐하면 이는 돈을 벌지 말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확률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답하는 목사에게도 뒤통수를 날려야 한다.
- 헛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고, 일에 맞는 능력도 키워야 하며,
-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 돈과 관련된 다방면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시간과 노력 없이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100% 사기꾼이다.
- 그리고 이런 터무니 없는 사기를 당한 사람 역시 비판의 여지가 있다.
- 대가 없이 성과를 얻고자 하는 잘못된 욕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사기를 당할 수 있지만 말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 하나님을 공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 '성령으로'라는 말은 너무 맞는 말이라서 오히려 말하지 말아야 할 말이다.
- 다방면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돈을 버는 것처럼 시간과 노력만 있으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 말 그대로, 은혜가 필요하다.
-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시간과 노력이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 세상에서 시간과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신앙을 포함해서 말이다.
게다가 돈도 어떤 면에서 똑같다.
- 시간과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는가?
- 절대 아니다.
-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 우연이 필요하다.
- 반대로, 그렇다고 우연만 있으면 다 돈을 버나?
- 아무리 우연이 있어도, 시간과 노력이 없으면 우연도 소용없다.
따라서 결국 신앙과 돈은 똑같다.
- 은혜와 우연이 필요하다.
- 이 영역은 사람이 통제할 수 없다.
- 동시에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은혜와 우연이 있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시간과 노력이다.
- 많이 배워야 하고, 배운 것을 실행해봐야 하며,
- 그것을 바탕으로 시행착오를 통해 나에게 맞는 그리고 나의 상황과 시대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 돈을 벌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물론 성령 강림이라는 우연도 반드시 필요하다.
- 그러나 이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 생각한다고 해도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 이를 생각하는 것은 100% 낭비이다.
필요할 때가 딱 하나 있다.
- 신앙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이다.
- 그럴 때에는 성령을 기억하며, 앞으로 있을 기쁨의 날을 기대함으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 그것 외에는 아무 필요 없다.
- 아니, 필요 없는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악영향을 준다.
- 우연만 기대하며 방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 돈을 버는데도, 하나님을 공감하는데도 모두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이 말이 무서운 것이 뭐냐면,
- 우리의 시간과 노력은 한정되어 있는데,
- 그 시간과 노력을 돈에 쓰면 하나님께 못 쓰고, 하나님께 쓰면 돈에 못 쓴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 돈도 우리의 시간과 노력 전부가 필요하고,
- 하나님도 우리의 시간과 노력 전부를 요구하신다는 점이다.
- 그래서 반드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까놓고 말해서, 우리의 계획은 인생에서 돈이 8, 신앙이 2 정도의 균형을 맞추고자 한다.
- 그래서 일요일은 반 이상 교회에서 보내고,
- 평일에 한 번 정도 교회 모임 참석하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 이것도 안 하면 뭔가 모르게 부족한 느낌이고,
- 이것보다 더 많이 해서 일요일에 하루 종일, 평일에 두 번 이상 교회 모임 참석하면,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실상은 8이 2를 기회만 되면 침범한다.
- 돈 버는 일이 바빠지면, 여지없이 신앙 영역이 축소된다.
- 그러나 반대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신앙 일이 바빠진다고 돈 버는 일을 줄이지는 않는다.
- 신앙을 포기하지.
게다가 신앙에 대한 우리의 속 마음은 8대 2조차도 안된다.
- 우리가 신앙에 2라도 노력하는 이유는 정말로 하나님께 공감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 교회 안 가면 알 수 없이 찝찝한 마음 해결하기 위해서,
-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하나님께 도움받으려는 마음에서,
-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구원과 영생으로 위로하기 위해서,
- 마지막으로 2만큼의 신앙을 통해 8의 돈 버는 일이 더 잘되게 하기 위해서 등이다.
- 전부 나를 위한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없다.
이렇게 말하면, 8대 2가 아니고 10대 0이다.
-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을 말하는 이유를 오해하면 안 된다.
- 8대 2라도 유지하자는 것도 아니고,
- 5대 5로 변화되자는 것도 아니며,
- 0대 10이 되자는 것도 아니다.
- 물론 0대 10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10대 0, 즉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 우리는 죄인이고, 괴수 중의 괴수이며, 세상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자는 것이다.
- 우리가 말로는 하나님을 알고 싶고, 공감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 실제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노력할 마음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 우리가 지금 하는 노력도 정작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아무리 이것을 부정하고 싶어도, 우리의 일상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신앙의 일에 밀려 돈 버는 일을 미룬 적이 있는가?
- 신앙 때문에 돈 버는 일을 미룬 진짜 이유가 사람 눈치 때문에, 미리 한 약속이라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공감하기 위해서였던 적이 있는가?
- 돈 벌고 싶은 마음에 하나님을 미룬 적은 있지만, 하나님 마음 알고 싶은 마음에 돈 벌기를 미룬 적은 없다.
신앙을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 이런 내 삶의 족적이 하나님을 얼마나 괴롭게 만들었는지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그래서 하나님의 괴로움이 내 마음에 느껴져서 고통스러워져야 한다.
- 그리고 그 고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커야 한다.
- 그래야만 내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거기서 변화가 시작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괴로움을 계속 느끼지 못한다면,
-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괴롭게 하실 것이다.
- 이것이 심판인데,
- 이는 고통 그 자체가 목적인 벌칙이 아니라,
-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공감하도록 하기 위한 기회이다.
- 하나님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셔서,
- 우리 몸이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기 위한 과정이다.
- 여기서 변화가 시작된다.
단순 무식하게 권면한다.
- 돈을 벌고 현재와 같은 일상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공감할 수 있는가?
- 나와 나의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노력하기만 하면 하나님만을 위해 살 수 있는가?
- 그렇다면 지금처럼 살아도 아무 문제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 하나님을 포기하던지, 일상을 포기하던지.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포기하며 살았는지 되돌아보자.
-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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