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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30) 15:15-21 주님께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까?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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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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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여전히 하나님께 반발한다.

- 예레미야의 말이 워낙 화려해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거침없이 비난한다.

- 특히 자신의 고통과 상처 때문에 하나님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라고 깎아내리고 있다.

[렘 15:18]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반면에 예레미야 자신을 한껏 치켜세운다.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첫 시점부터 이스라엘에게 박해받는 얼마 전 시점까지 예레미야는 '믿음직스럽게' 한결같았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응답했다.

[렘 15:16] 만군의 주 하나님,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말씀을 주셨을 때에, 저는 그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저에게 기쁨이 되었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고,

- 그로 인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로 가득 찬 채로 살았으며,

- 그 때문에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사람들과 단절된 채 살아야 했다.

[렘 15:17] 저는, 웃으며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채우신 분노를 가득 안은 채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고통과 상처는 전부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이다.

- 내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정작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하나도 없다며, 하나님을 비난한다.

- 그래서 자신이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렘 15:15] ・・・・ 주님께서 진노를 오래 참으시다가 그만, 저를 잡혀 죽게 하시는 일은 없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주님 때문에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 줄을, 주님께서 알아 주십시오.

- 예레미야는 이를 '오래 참으심'이라고 점잖게 표현했지만,

- 이 표현에 담긴 예레미야의 진심은 '무능하심'이다.

- 자신이 죽을 지경까지 왔는데도 왜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냐는 울분이다.

- 하나님이 빨리 정신 차리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예레미야의 독촉이다.

 

예레미야의 표현이 너무 고상해서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 같지만,

- 사실상 예레미야는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분', 자신은 '믿음직스러운 사람',

- 하나님은 '방관자', 자신은 '희생자',

- 하나님은 '무능력자', 자신은 '능력자'로 가정하고 있다.

하나님을 비하, 비난하고 있으며, 자신을 격상, 칭송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현재 예레미야의 상태는 심각하다.

- 특히 하나님의 응답에 잘 드러난다.

[렘 15:19] 나 주가 말한다. 네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맞아들여 나를 섬기게 하겠다. 또 네가 천박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귀한 말을 선포하면, 너는 다시 나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 너에게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다.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상태를 세 가지로 표현하신다.

- 첫째로, '네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맞아들여 나를 섬기게 하겠다.'

- 즉, 현재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이고, 하나님께 거부당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

- 둘째로, '또 네가 천박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귀한 말을 선포하면, 너는 다시 나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

- 즉, 현재 예레미야는 천박한 것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대변자 자격을 잃었다.

- 셋째로, '너에게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다.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 즉, 현재 예레미야는 죄를 지은 이스라엘에게 휩쓸린 상태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가정문으로 앞으로 예레미야에게 있을 소망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 가정문 이면에는 예레미야를 향한 정죄가 숨겨져 있다.

-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상태를 심각하게 보고 계시고,

- 예레미야가 속히 돌이키길 기대하고 계신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15~18절에서 예레미야의 반발은 더욱 무례하고 교만해 보인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대상은 누구일까?

예레미야는 엄청난 분노를 하나님께 폭발하고 있는데, 

- 분노를 유발한 대상은 누구일까?

- 예레미야를 핍박하는 원수는 누구일까?

[렘 15:15]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아시니, 저를 잊지 말고 돌보아 주십시오. 저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 

 

당연히 '이스라엘'이라는 생각이 든다.

- 예레미야의 멸망 심판 예언을 이스라엘이 거부했고,

- 메시지를 거부하기 위해 메신저인 예레미야를 박해했기 때문이다.

- 실제로 예레미야서에서 이스라엘에게 박해받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나는 의문이 든다.

- 만약 예레미야의 원수가 정말로 이스라엘이라면,

-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 왜냐하면 바로 이전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 심판을 예고하셨기 때문이다.

-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는데, 왜 예레미야가 이토록 간절하게 또 다시 이스라엘의 멸망을 구하냐는 것이다.

게다가 예레미야는 바로 전에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구하다가 두 번이나 거절당했다.

[렘 14:11]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렘 15:1] 그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 그러니까 현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원하는 사람은 예레미야가 아니다.

-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원하시는데, 예레미야가 말리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원수는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원수는 누구냐?

예레미야가 수모를 당하게 하고, 고통과 상처를 주는 대상은 누구인가?

[렘 15:15] ・・・・ 제가 주님 때문에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 줄을, 주님께서 알아 주십시오.

[렘 15:18]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 이상하게도 예레미야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대상으로 이스라엘을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 오히려 은근하게 하나님을 반복해서 지목한다.

- '주님 때문에' 수모를 당했으며,

-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하나님' 때문에 고통과 상처를 받았다고 말이다.

그의 반에 예레미야 자신은 완벽했다.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도 기쁨으로 응답했고,

- 예언자로 살아갈 때도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있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냐?

-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원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 때문에 분노를 폭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왜 하나님께 분노하는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이 주는 고통과 상처가 커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길 바라는데,

-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지연하시고 참고만 있는 것이 불만이라면,

- 불만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누구보다 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를 더 함 없이 분출하셨다.

[렘 15:13~14] 유다 백성아, 너희가 나라 구석구석에서 지은 모든 죄 값으로, 너희의 재산과 보물을 아무런 값도 못받는 약탈품으로 원수에게 내주겠다. (14) 나는 너희를, 너희가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끌고가서, 너희 원수들을 섬기게 하겠다. 내 분노가 불처럼 타올라 너희를 사를 것이다.

예레미야는 분노를 표출하기보다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셔서 이스라엘의 박해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고에 위로와 평안을 얻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분노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멸망 심판을 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이 몹시 싫었다.

- 그래서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이고, 그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가 직관적이지 않고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 예레미야가 겪는 고통과 상처는 곧바로 이스라엘의 박해가 떠오르고,

- 예레미야의 분노 역시 이스라엘을 향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고 멸망하시려는 하나님께 분노를 분출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낯설다.

하지만 본문에 드러난 논리로만 따지면, 이것 외의 다른 해석이 불가능하다.

- 만약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박해가 싫었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원했다면,

- 예레미야는 더 이상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시겠다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 이 문제에 대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

- 기도는 이미 응답되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멸망 심판이 선포되었는데도 불만을 갖는다는 것은,

- 멸망 심판이 싫다는 뜻이라고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 따라서 분노 분출의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심판을 선포하신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구하다가 두 번이나 거절당한 전적이 있다.

- 이를 종합했을 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랐지만,

-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셨고,

- 예레미야는 그런 하나님께 극심한 분노까지 품게 된 상태에서 본문과 같이 호소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왜 그토록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바로 하기 전에, 이렇게 질문해보겠다.

- 나는 왜 그토록 돈이 많아지길 바랄까?

- 나는 왜 그토록 성공하길 바랄까?

- 나는 왜 그토록 안정되길 바랄까?

- 나는 왜 그토록 건강해지길 바랄까?

- 나는 왜 그토록 사업이 잘되길 바랄까?

- 나는 왜 그토록 전도가 잘되고 교회가 성장하길 바랄까?

- 나는 왜 그토록 자녀가 잘 자라길 바랄까?

이에 대한 답은 하나이다.

-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고, 어려움이 없을 것 같고, 나아질 것 같기 때문이다.

-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나를 구원할 것 같기 때문이다.

- 명확한 문장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 그 목표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조차도 일정 부분 포기하는 이유는 목표를 이루는 것이 가족도 채워줄 수 없는 나만의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 목표를 이뤘을 때 뭐라 말할 수 없는 충만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충만함이 뭐냐?, 그 충만함이 그렇게 중요하냐? 가족보다 더 중요하냐?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 이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 또 막상 질문에 답을 해보면, 그 충만함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 충만함에 엄청나게 이끌리고 있다는 점이다.

- 그래서 의식하지도 못한 채 충만함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이미 포기했다.

- 그리고 목표를 포기한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목표를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

- 이것이 나도 모르게 목표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게다가 이러한 상태가 더욱 문제인 이유는 이성이 배제된 감정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 풀어 말하면, 단순하게 돈과 가족 중에 뭐가 더 중요하냐? 고 물으면,

- 적어도 우리는 '이성적'으로 가족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 그러나 가족을 위해 돈 포기할 수 있냐? 라고 물으면,

- '감정적'으로 동요된다.

-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뭔가 중요한 것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밀려온다.

-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쉽게 했던 대답을 '감정적'으로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이것이 왜 문제냐면, 

- 이성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 이성은 이해하고 표현해서 조정할 수 있지만, 

- 감정은 이해하고 표현하기도 어려워서 조정하기는 더 어렵다는 것이다.

-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의식하기 어렵다.

그래서 감정의 영역에 있는 문제는 문제가 있어도 알아차리기 어렵고,

- 문제를 알았다고 해도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에게 돈 때문에 가족에 소홀하게 대하는 문제가 있다고 해보자.

- 그래서 가족들이 나에게 그런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보자.

- 그러면 나는 그 문제를 바로 인정하고 고칠 수 있냐? 그렇지 않다.

- 먼저 나는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계속 주장할 것이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의 영역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일시적으로 가족에게 소홀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상황 탓이지 내 속마음까지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 그러니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돈을 버는 것도 가족을 위해서라고 자신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래서 가족이 또 이렇게 묻는다고 해보자.

- 그러면 당장 돈 포기하고 가족에게 헌신할 수 있냐?

- 그 질문을 듣는 나는 가장 원초적으로 두려움, 불안감, 불쾌함과 같은 감정이 훅 들어올 것이다.

- 그래서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일 것이다.

- 첫째로, 돈을 포기하지 않을 명분을 열거할 것이다.

- 돈이 없으면 가족에게 피해가 생긴다며, 자신의 불안감을 숨기고, 상황 논리에 의존하여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하려 할 것이다.

- 둘째로, 포기하겠다고 말하면서, 그것으로 생길 모든 문제를 상대방에게 떠넘길 것이다.

- 그래서 내가 포기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상당한 위협을 줄 것이라고 협박할 것이다.

- 어쨌든 둘 다 포기하기 싫어서 나오는 발버둥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대화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 나에게 돈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움 감정을 주는지 인식하기도 어렵고,

- 인식했다고 해도,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 나는 여전히 두려움에 매여 가족을 희생하고 돈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뭐냐?

궁극적인 해결책은 내가 나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 나에게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 그 두려움을 내가 먼저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 그래야 두려움이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고,

- 돈보다 가족이 중요하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감정적으로 수용하여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내가 나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냐?

- 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는 상담과 치료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 나는 일정 부분 도움이 되지만, 궁극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이는 마치 성경 공부, 교제, 기도가 구원을 받는 데 도움이 되지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인 것과 같다.

 

진정한 공감은 오직 하나님이 나를 공감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경험할 때 시작된다.

-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시고 공감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 그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경험할 때이다.

- 공감이라는 것이 단순한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며,

- 뇌가 하나로 연결되듯 완전한 연합, 일치, 하나됨이라는 것을 깨닫고 경험할 때이다.

- 하나님이 나의 아픔과 두려움을 공감하고,

- 공감 때문에 나보다 더 아파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경험할 때이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공감을 경험할 때 진정한 공감이 시작된다.

- 그때에야 비로소 나를 공감할 수 있다.

- 나의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그렇게 감정을 느낄 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또 그렇게 나를 이해할 때, 남도 이해할 수 있다.

- 남의 감정을 느끼고, 남의 정체성을 이해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렇지 못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인생의 목표였다.

- 어찌 보면 당연하다.

- 이스라엘 민족인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 하나님을 거역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의 구원이 중요하냐고 말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의 멸망이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 마치 우리가 돈과 가족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예레미야는 '의식적'으로는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하나님을 존중하는 표현이 곳곳에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감정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행동했다.

- 하나님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요청한다.

-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원 요청을 거부하신 하나님 때문에 고통과 상처에 휩싸인다.

- 그래서 고통과 상처를 준 대상으로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을 지목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했냐?

- 자신의 감정을 몰랐기 때문이다.

- 자신이 지금 하나님을 포기하고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 마치 우리가 가족을 포기하고 돈을 선택하며 살아가면서도, 그런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 이성과 반대되는 감정적인 행동을 하며 사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해결책은 뭐냐?

- 먼저 예레미야는 자신을 공감해야 한다.

- 자신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얼마나 중요하게 느끼는지 깨달아야 한다.

- 이스라엘의 구원을 자신의 구원과 일치시키고 있다는 착각을 깨달아야 한다.

- 그래야 자신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필요하다.

- 하나님께 공감받아서, 공감 능력이 되살아나야 한다.

- 그래서 자신을 공감하고, 하나님을 공감해야 한다.

- 그리고 이스라엘도 공감해야 한다.

그렇게 공감할 때에만 이스라엘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 이스라엘이 속히 멸망하고 재창조될 때만, 이스라엘이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응답하시냐?

예레미야 문제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뤄져야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이다.

- 마치 우리가 돈을 벌고 성공해서 안정을 이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성경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 단순히 어려움에서 벗어나 내가 바라는 삶을 사는 막연한 의미의 구원이다.

사실상 성공과 구원은 전혀 상관없다.

- 큰 성공을 한다고 해서, 마음의 안정과 충만함이 생기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성공하면, 지금 성공을 유지할 수 없을까 봐 더 두려워진다.

- 그런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공과 구원을 연결 짓는 이유가 있다.

- 마음에 있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해결하고 싶은데,

- 두려움을 해결하려면 주변에 안전 장치를 많이 두면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 그런데 안전 장치를 얻기 위해서는 돈, 성공, 명예 등이 필요하기에,

-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구원과 성공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자신의 구원과 연결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상관없이 두려움을 해소해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해도 예레미야는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구원받을 것이라는 예고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구원하여 주겠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신다.

[렘 15:20~21] 내가 너를 튼튼한 놋쇠 성벽으로 만들어서 이 백성과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에게 맞서서 덤벼들겠지만, 너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어서, 너를 도와주고, 너를 구원하여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21) 내가 너를 악인들의 손에서도 건져내고, 잔악한 사람들의 손에서도 구하여 내겠다.

-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근원적 두려움을 해소해 줄 때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랄 필요가 없게 된다.

- 그래야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기 때문인데,

-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내가 원하는 성공을 방해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은 아무런 안전 장치 없이 오직 하나님으로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려고 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 없이 돈과 성공과 같은 안전 장치를 많이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가 느끼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안전 장치를 제거해서 더욱 두려움에 빠지도록 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분노를 분출한 이유도 이와 같다.

- 예레미야의 안전 장치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하나님이 파괴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공과 구원의 연결 고리를 끊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불가능하다.

- 마치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구원과 자신의 구원의 연결 고리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성공과 구원의 연결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냐?

결국 성공과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고 보호하신다는 믿음,

-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해소해주시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 경험을 어떻게 하냐?

- 십자가 죽음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풀어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조차 참혹하게 죽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전달될 때 가능하다.

- 자기 아들조차 포기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어찌 우리를 보호하시지 않겠냐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다.

- 이는 소중한 것 하나만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신다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것이다.

[롬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마음 속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길은 이스라엘의 구원밖에 없다고 착각했다.

- 그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뤄주시지 않는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이 예레미야의 두려움을 해소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음 속 두려움에 떨고 있다.

-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길은 돈과 성공밖에 없다고 착각한다.

-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돈과 성공을 주시지 않는다.

- 왜냐하면 돈과 성공이 우리의 두려움을 해소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다.

-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닌 예레미야의 구원 말이다.

- 그래서 예레미야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해소해주셨다.

- 왜냐하면 그것이 예레미야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 물론 예레미야는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하고, 전혀 필요 없는 이스라엘의 구원만 구했지만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하셨다.

- 돈과 성공이 아닌 우리의 구원 말이다.

- 그래서 우리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해소해주실 것이다.

-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 물론 우리는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하고, 전혀 필요 없는 돈과 성공만을 구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끝까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요구했다.

- 그것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거침없는 분노를 분출하기까지 한다.

-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흔들린다.

우리도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 끝까지 돈과 성공을 요구할 것이다.

- 그것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분노를 분출하며 돌아설 것이다.

- 그리고 모든 열정을 다 바쳐 돈과 성공을 얻어내려고 발버둥 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결론 - 하나님의 사랑을 믿자.

우리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두려움에 빠져 있다.

-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해서, 사회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건강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돈이 없어서 춥고 배고플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다.

- 이 두려움이 동기로 작동하여 돈과 성공, 안정과 인정을 위해 내달리고 있다.

때로는 우리도 의심한다.

- 과연 내가 이렇게 노력한다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자살하는 유명인과 비극적으로 죽는 재벌 회장을 보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으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갖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던 길을 돌이키지 않는다.

- 이유는 두 가지이다.

- 첫째로, 가던 길 외의 새로운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한다.

- 마치 당장이라도 지금 직장을 그만두고 싶지만, 그만두면 막상 갈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계속 다니는 사람처럼 말이다.

- 둘째로, 가던 길을 가도 어느 정도는 두려움이 완화되기 때문이다.

- 두려움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지만,

- 적어도 정신없이 일할 때는 두려움 생각이 나지 않고,

- 나와 같이 사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소속감 때문에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지만, 두려움을 잊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던 길에서 돌이켜서 새로운 길, 즉 하나님의 길로 가기 위해서도 두 가지가 필요하다.

- 첫째로, 돈과 성공이 아니어도 하나님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 둘째로, 돈과 성공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 이 믿음이 있어야, 새로운 길로 갈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그러면 이 믿음은 어떻게 얻냐?

- 경험이다.

-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경험 말이다.

- 하나님이 날 그렇게 사랑하신다면, 두려움도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또 그러면 경험은 어떻게 얻냐?

- 믿음이다.

-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죽고 부활하게 하셨음을 믿을 때, 일상에서도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믿음과 경험 중에 뭐가 먼저냐?

- 알 수 없다.

-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모두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 믿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성경으로 공부하고,

- 하나님의 사랑을 되뇌며,

-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인지 질문하고 답하고,

-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 경험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공동체와 교제하고,

- 일상에서 안전 장치를 제거하여,

-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과정 중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믿음의 경험을 주실 것이다.

-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의 믿음을 더 바라시기 때문이다.

- 우리보다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보다 더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음의 경험이 생기면,

- 우리가 바라던 것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아도 두려움에서 벗어날 것이며,

-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끼면,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될 것이고,

- 그제야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두려움에 쫓기는 삶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때에만,

-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고,

- 죽는 순간에 '다 이루었다.'는 후련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