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을 딱 하나만 꼽으면 이것이다.
- 구원의 유일한 기준은 믿음 뿐이다.
- 반대로 믿음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구원 받을 수 없다.
-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은 믿음 뿐이다.
- 율법을 지키는 것도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구원에 방해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행 15:9]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율법이 있기 때문에 구원에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 유무로 차별을 두지 않으신다.
- 단, 믿음 유무로만 차별하신다.
[행 15:11]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 우리, 즉 유대인도, 그들, 즉 이방인도 모두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
- 이것이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의 최종 결론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을, 야고보는 구약 성경을 말한다.
-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할 때 할례를 행하지도 율법을 지키지도 않았다.
- 그러니 하나님께 율법과 할례가 구원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 게다가 구약 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은 이방 사람의 구원을 예정하셨다.
[행 15:17] 그래서 남은 사람이 나 주를 찾고, 내 백성이라는 이름을 받은 모든 이방 사람이 나 주를 찾게 하겠다.
-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방 사람은 율법과 할례가 없는 사람을 말한다.
-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율법과 할례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의 대표 베드로와 예루살렘의 대표 야고보는 율법과 할례를 폐한다.
- 이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권위 있는 두 사람이기 때문에, 이들의 결정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을 것이다.
- 그래서 여전히 할례와 율법을 구원의 기준으로 여겼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행 15:1] 몇몇 사람이 유대에서 내려와서, 이렇게 신도들을 가르쳤다. "여러분이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행 15:5] 그런데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일어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 이들의 이러한 주장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 그 내용을 이번 본문에 맞게 정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 바로 이 구절이다.
[행 15:20]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이 4가지 금지 항목의 의미이다.
왜 이것을 다루냐면, 이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율법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 할례를 대체하는 새로운 구원의 방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인이 되는 새 기준 삼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선지국 안먹는다고 구원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선지국을 먹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다.
- 선지국을 먹고 안먹고가 대수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선지국 이면에 있는 구원에 대한 인식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선지국 말고도 많은 대체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 신앙 때문에 선지국을 안먹는 사람은 주일성수도, 십일조도, 말씀 읽고 기도하는 것도 전부 새로운 율법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 그런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믿지 않는다.
- 물론 입으로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말한다.
- 하지만 본심에는 자신의 행위가 구원에 충분한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행위를 반드시 해야 하고, 하지 않는 사람을 정죄한다.
그렇기 때문에 4가지 금지 항목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율법에 대한 오해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며, 참된 복음에 한 걸음 나아가게 해준다.
그것을 위해 먼저 당시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어떤 의미를 가졌을지 깊이 상상해보겠다.
- 그래야 공의회는 왜 율법을 폐했는지, 그러면서도 새로운 금지 항목은 왜 만들었는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의미
모든 종교가 그렇듯 율법의 역할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 이 구분을 표현하는 용어를 어떻게 써야할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생각나는대로 써보면,
- 영적/육적 역할, 하나님/이웃과 관계 맺는 역할, 종교적/정치적 역할, 초월적/현실적 역할이다.
- 나는 종교적/정치적 역할로 표현하겠다.
- 종교적 역할은 초월적인 영역을 다루고, 정치적 역할은 현실적 영역을 다룬다.
- 모든 종교에는 이 두 가지 역할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두 가지 역할을 가진 종교만이 역사 속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종교적 역할은 뭐냐?
-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초월적 욕구를 해소시켜 주는 것이다.
- 모든 인간은 한계를 느끼고, 한계를 느낄 때 한계를 초월한 무엇인가를 떠올린다.
- 그리고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고, 그 존재와 가까워지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 이를 기독교에서 천국, 불교에서 해탈, 유교에서 성인군자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 욕구를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종교의 제 1 역할이다.
- 방법은 다양하다.
- 굿과 같이 대신 접신을 해줌으로, 분신사바처럼 직접 접신하게 해줌으로, 수행과 같은 행위로, 정안수 떠놓고 비는 행위로, 열심히 공부해서 성인군자가 되는 행위로, 율법과 같이 엄격한 행위로.
바로 이것이 율법의 첫째 의미이다.
-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면 자신이 갖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고,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자신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도록 통제하려 들었다.
-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음으로 정치적 역할은 뭐냐?
- 단순하게 말해서, 사람 사이에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 그래서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집단이 공유하는 것이다.
- 그러면 집단 내에서 문제가 줄고, 문제가 생겨도 규칙에 근거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다.
- 자연스럽게 사회가 안정된다.
그렇다면 왜 규칙이 필요하냐?
- 이 역시 사람의 욕구 때문인데, 소속 욕구 때문이다.
-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한다.
-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더 적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함께 살면 많은 유익이 있다.
- 발전조차 더 빠르다. 총균쇠에서 배웠다.
- 그러나 그렇게 드러나는 유익과 상관 없이 모든 사람에게는 소속 욕구가 있다.
- 그냥 좋은 것이다.
- 유익이 되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그런데 소속 욕구와 충돌되는 또 다른 욕구가 있다.
- 안전 욕구이다.
-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안전이 위협된다.
- 단순히 자유가 침해될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는 생명이 침해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소속 욕구와 안전 욕구 중 하나를 포기할 수도 없다.
- 둘 다 인간에게 너무 기본 욕구이기 때문이다.
- 안전이 좋다고 산 속에 홀로 살 수도 없고, 소속이 좋다고 살인마 집에 들어가 살 수도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규칙이다.
- 규칙이 있으면 집단에 소속되면서 동시에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다.
- 규칙은 사람들을 모으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둘째 의미이다.
- 유대인은 율법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았다.
- 선한 사람에게 상 주는 법을, 악한 사람에게 벌 주는 법을 배웠다.
- 그래서 함께 살되, 서로에게 최소한의 피해를 주는 적절한 거리를 찾았다.
이러한 율법의 역할을 우리에 맞게 설명해본다면,
- 유대인의 종교는 우리에게 '유교'와 같다.
- 종교적 역할로 '제사'가 있고, 정치적 역할로 '예절'이 있다.
- 제사를 통해 조상신을 숭배했고, 에의범절을 통해 규칙을 만들어 사회를 안정시켰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유교를 부정하면?
- 제사를 금지하고 예절을 폐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 근원적으로는, 초월적 욕구, 소속 욕구, 안전 욕구를 채울 수 없게 될 것이다.
- 마치 배고픈 아기가 울어재끼듯 마구 아우성칠 것이다.
- 이때 느끼는 공포는 생명의 위협에 버금가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적인 문제도 생긴다.
- 상황이 너무 안좋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조상신에게도 의지하지 못하면 극심한 절망에 빠진다.
- 정신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온다.
또한 예절이 없어져서 집단이 혼란스러워진다.
- 무질서의 결정적인 문제는 예측 불가능이다.
- 쉽게 예를 들어,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게 존댓말을 할지 반말을 할지 고민하게 된다.
- 그러면 선택해야 할 것이 늘어나는 것이고, 그만큼 집단 안에서 스트레스가 커지는 것이다.
- 집단적으로 스트레스가 커지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부정하는 것은 이렇게 심각한 위협이 된다.
-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유교가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은 유대인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것이었다.
- 율법을 부정하는 것은 사회 전체를 무너뜨리는 위협이다.
- 실제로 사회가 무너지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율법을 강조한 것이다.
- 예수님이 죽으실 때도, 스데반이 죽을 때도, 이번 본문에서도.
- 바리새인이 이상해서가 아니다.
-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존 본능이다.
4가지 금지 항목이 생긴 이유
유대인에게 율법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유대인이 속한 교회에서는 율법을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가?
- 그럴 수 없다.
- 유대인을 위해 멀쩡히 잘 살던 이방인에게 할례를 해서 죽도록 고생시킬 수 없다.
반대로 이방인에게 고생시킬 수 없다면, 율법을 부정해서 유대인이 공포를 고스란히 느끼도록 놔둬야 하는가?
- 그럴 수도 없다.
- 이는 마치 우리에게 노인에게 반말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 거북해서 도저히 버틸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
- 답은 단순하다.
- 서로 양보하는 것이다.
- 유대인은 이방인에게 한 걸음 가고, 이방인은 유대인에게 한 걸음 가는 것이다.
- 유대인은 공포를 감수하고 율법을 일부 포기하고, 이방인은 귀찮음을 감수하고 율법을 일부 지키는 것이다.
왜 이래야 하는가?
- 본문에는 이 부분이 상세히 나오지 않는다.
-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공동체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 사랑으로 서로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이 신앙의 으뜸 기준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보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희생해야 하는 것처럼.
- 율법이 너무 중요한 것이라서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고, 율법이 너무 나쁜 것이라서 포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 율법과 전혀 상관 없이, 각자가 서로에게 배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4가지 금지 항목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 원론적으로, 관계이다.
- 금지 항목은 음행을 제외하면 모두 식사 관련 율법이다.
- 음행과 식사 모두 관계에서 중요하다.
개인 영역에서 행해지는 율법은 중요하지 않다.
- 서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던 말던 상관 없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 할례가 그렇다.
문제가 되는 율법은 관계 영역에서 행해지는 율법이다.
- 특히 식사 시간이 큰 문제가 된 것이다.
- 베드로가 고넬로에게 전도하러 가기 전에 봤던 환상도 식사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식사 시간 만큼은 유대인을 위해 이방인이 희생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 그러한 요구는 유대인의 공포를 낮춰주면서도, 이방인이 충분히 배려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할례에 있어서는 이방인의 손을 들어줬다.
- 할례는 개인 영역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 할례 유무가 관계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 그래서 할례는 유대인이 포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4가지 금지 항목은 절대적인 것이냐?
- 모든 지역의 교회가 공통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
-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규범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예를 들어, 금지 항목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존하는 교회에 필요한 것이지, 이방인만 있는 교회에서조차 식사 규범을 지켜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는 바울의 편지에서 증명된다.
[고전 8:4]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고전 8:9]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고전 8: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고전 10:25-26]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한다고 하여 그 출처를 묻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먹으십시오. (26) '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들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0:28]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것은 제사에 올린 음식입니다" 하고 여러분에게 말해 주거든, 그렇게 알려 준 사람과 그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마십시오.
- 이렇게 바울은 언제는 먹으라, 또 언제는 먹지 말라고 말한다.
- 그러니까 식사 규범의 기준은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으로 이루어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 관계를 위해서 먹어야 할 때도, 먹지 말아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금지 항목 역시 이러한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우리에게는 금지 항목처럼 해야하는데 하지 않거나, 율법처럼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고 있는 게 뭐가 있을까?
- 이런 생각을 하면 규칙을 만들기도 허물기도 하는 나로서 굉장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생긴다.
- 매번 현재 상황을 고려해서 규칙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러는 과정에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각 사람의 필요와 아쉬움에 공감하고 절충해서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정작 나는 나의 유익을 위해서만 결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지나고보면 선택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공정하지 않고 한 편에만 유리한 결정을 내릴 때가 많고,
- 그보다 더 많은 경우는 나에게 유리한 결정을 할 때이다.
이는 강력한 하나의 소신을 끝까지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렵다.
-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 상황 분석하고 상황 판단 능력, 대안을 제시하는 창의성까지 너무 많은 것이 필요하다.
-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매번 새롭게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기를, 나를 사랑하지 않기를, 그리고 이 두 가지 생각을 항상 깨어서 하기를 노력하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바리새인들도 어느 순간 이 노력을 멈췄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죽이게 된 것이다.
- 우리도 그렇게 될 위험성이 언제나 있다.
과연 해법이 있을까?
- 없다고 본다.
- 말씀보고 기도하며 교제하는 수 밖에.
- 그래서 선택의 기준이 사랑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며,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대안을 고민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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