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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26) 13:13-52 예언서에서 말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특별히 이번 본문을 해석할 때 주의점이 있다.

- 본문의 특징은 덩어리가 크다는 것이다.

- 40절짜리 긴 글이다.

- 왜 기냐면, 논리가 여러 단계를 거치기 때문이다.

- 논리 단계 별로 각각의 주제가 있고, 각 주제가 연결되어 하나의 메시지를 전한다.

-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딴 길로 새기가 좋다는 것이다.

- 여러 단계의 논리를 통해 최종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 전에 중간 단계에 멈춰버리는 것이다.

- 각 단계의 논리가 개별적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가다가 최종 논리까지 안가고 중간에 멈출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 a-b-c-d 라는 논리 단계로 연결된 이야기를 했을 때,

- 화자는 a, b, c 라는 과정을 통해 d라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 따라서 화자는 청자가 d라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d의 진위 여부에 대해 동의/반박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 물론 d를 검증하기 위해 a, b, c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

- 그러나 철저히 d의 관점에서 a, b, c를 봐야 한다.

- a, b, c를 개별적으로 다루면 안된다. a, b, c에서 멈추면 안된다.

- 그것은 화자와의 대화에서는 의미가 없다.

- 만약 a, b, c를 개별적으로 다루며 논쟁할 때, 화자는 적정한 논쟁이 아니라 말장난, 딴지라고 느낀다. 

- 주제에서 벗어난 무의미한 대화라고 느낀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가는 길이었다.

- 그런데 지나가는 차와 부딪혀서 크게 다칠뻔 했다.

- 하지만 다행히 살짝 상처만 나고 괜찮았다.

- 너무 깜짝 놀랐는데, 안다처서 다행이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면, 

- 기대하는 반응은 큰일 날 뻔 했구나, 정말 다행이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다. 정도일 것이다.

- 이 이야기를 한 것은 놀람과 안도감을 공유하여 공감받고 싶은 목적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대답을 듣는다면,

- 야, 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자나!

- 너 자전거 타지 말라고 했자나!

- 혹은, 너 자전거 탈줄 알아?

- 너 자전거 뭐야?

- 너 무슨 학교 다니니?

- 혹은, 정부가 문제야. 다 대통령 때문이야.

- 이런 대답을 들으면, 정말 말하기 싫어진다.

- 우리는 보통 부모로부터 이런 반응을 들어왔다.

- 그것이 반복되니, 부모랑 대화를 하지 않는다.

- 특히 놀라고 무섭고 슬펐던 일은 더욱 더 하지 않는다.

- 공감 받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 대화의 의도를 무시한 채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야기를 들을 때 화자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화자의 이야기를 너무 자세하게 들어서, 자전거나 학교 자체에 집중하면 안된다.

- 반대로 화자의 이야기를 너무 확대 해석해서, 단순한 사고에서 정부와 대통령까지 소환해서는 안된다.

물론 두 가지 질문을 가질 수 있다.

- 자전거가 필요한 사람은 자전거가 궁굼할 수 있고, 정부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

- 그래서 자전거의 정보를 얻어 좋은 자전거를 구할 수 있고, 정부를 개혁해서 자전거 사고가 안나는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도 있다.

-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화자의 의도를 읽고 공감한 이후에 이뤄져야 한다.

- 화자의 의도를 아는 것이 먼저이다.

본문을 해석하는데서도 같은 실수가 있다.

- 너무 미시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지역에 집중해서, 바울이 왜 이 지역으로 전도를 갔는지 한참을 설명한다.

- 이 지역이 전 본문에서 나온 서기오 바울의 고향이기 때문에 갔다는 것이다.

- 반면 너무 거시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바울 사역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죽음 부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 한참을 설명한다.

- 이러한 두 설명 모두 본문 안에 있지만, 본문을 벗어난 설명이다.

물론 왜 바울이 갑자기 구브로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갔는지 나도 궁굼하다.

- 지도를 보면 너무 쌩뚱맞다.

- 길도 너무 험하다.

- 3000m 짜리 산을 넘어야 하고, 1000m의 고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 얼핏 보기에, 노력 대비 성과가 적기 때문이다.

- 하지만 본문은 그것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 그러니 본문의 메시지에는 그것이 포함되면 안된다.

- 먼저 중심 메시지를 봐야 한다.

- 본문이 집중하는 것에 우리도 집중해야 한다.

- 그것이 화자에 대한 청자의 예의이다.

지난 본문을 해석하는데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 본문이 누구에게 초점을 두고 있는가이다.

- 많은 해설서에서 사역의 성과로서 서기오 바울에 초점을 두고 해석했다.

- 바울의 첫 사역을 통해 총독이 예수님을 믿는 큰 성과를 거두었음을 강조했다.

- 하지만 누가 봐도 주인공은 바예수이다.

- 반드시 바예수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

- 서기오 바울이 전면에 등장하면 안된다.

- 그것이 화자에 대한 청자의 예의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초점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 본문의 논리 단계를 보자.

- 본문은 ①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이동하여, ② 바울이 설교를 한 뒤, ③ 유대인과 이방인이 엇갈린 반응을 보인 후, ④ 바울과 바나바는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 이 중에서 본문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것은 ②와 ③이다.

그럼 ② 바울의 설교(16-41)를 분석해보면,

- 16-22절: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

- 23-25절: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나오신 구주 예수님

- 26-31절: 예루살렘 사람들에 의해 죽으시고 하나님에 의한 부활하신 예수님

- 32-37절: 구약에서 약속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우리

- 38-39절: 죄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도록 권면

- 40-41절: 예언서에서와 같이 믿지 않음에 대한 경고

긴 설교의 핵심은 뭘까?

- 구약에서부터 예고된 약속에 따라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권면일까?

- 그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이방인에게 있을까?

- 이렇게 보기 쉽다.

- 바울 설교의 대부분이 이것에 할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 믿도록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음을 확정하는 것이다.

- 믿는 이방인이 아니라,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

- 유대인의 믿지 않음이 이미 예언서에서 예고되었고, 그 예고가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래서 바울이 사역의 대상을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전향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구절들이 있는 것이다.

[행 13:27]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안식일마다 읽는 예언자들의 말도 깨닫지 못해서, 그를 정죄함으로써, 예언자들의 말을 그대로 이루었습니다.

- 예수님 당시 유대인도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예언을 성취했던 전례가 있다.

[행 13:40] 그러므로 예언서에서 말한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 바울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이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을 경고했다.

- 그러나 경고 이면에는 실수를 반복할 것에 대한 우려가 숨어 있다.

[행 13:46]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하게 말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들에게 먼저 전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들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으로 스스로 판정하므로, 우리는 이제 이방 사람들에게로 갑니다.

- 바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 결국 유대인은 바울의 복음 전도도 거부하였다.

- 이로서 바울은 동족 유대인에 대한 책임감을 털어 버리고 받은 소명을 따라 이방인에게 간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바울의 설교를 요약하고 편집해서 담은 저자 누가의 의도이다.

- 이를 통해서, 바울이 유대인을 제처두고 이방인 전도에 뛰어든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이를 단순히 상황 논리로 폄하하면 안된다.

-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단지 유대인에게 전도가 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보다 상황과 예언이 일치한 것이다.

- 아마도 바울에게는 두 가지 말씀이 상충했던 것이다.

-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 받았다는 것과 복음은 언제나 먼저 유대인에게 그런 후 이방인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 그 문제가 이런 식으로 해결되었고, 그런 후에 바울은 더욱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부르심 받은 이방인 전도에 매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배경 설명

1차 전도 여행의 경로를 간략하게 보겠다.

- 이것을 보는 이유는, 바울이 구브로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의 경로가 좀 이상하기 때문이다.

- 첫 사역지가 구브로인 것은, 리더인 바나바의 고향으로서 비교적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 이후의 사역지들은 모두 가까이 연결되어 있어서 쉽게 이해가 된다.

- 오직 구브로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의 경로만 이상하다.

- 지도만 보면, 구브로에서 루스드라나 더베가 더 가까워보이기 때문이다.

- 게다가 지형도 안좋아서,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가려면 3000m 산을 넘어야 한다.

- 이 때문에 학자들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서기오 바울의 고향이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것이다.

- 서기오 바울 가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문서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 그래서 서기오 바울의 부탁을 받아, 그리고 그의 호위를 받아 구브로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갔던 것으로 본다.

그런 후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는 모두 큰 길로 연결된 큰 도시이다.

- 그러니 바울은 자연스럽게 길을 따라 전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결론

설교를 통해 드러나는 바울의 의도는 오묘하다.

- 바울의 표면적인 의도는 구약의 슬픈 예언이 성취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행 13:40] 그러므로 예언서에서 말한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 구약에는 유대인이 예수님을 거부할 것이라고 예고되어 있는데, 바울은 구약의 예고와 달리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 그래서 언듯 보기에 바울이 구약 예언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바울이 구약 예언을 믿었던 것이다.

- 바울은 구약 예언과 같이 유대인이 예수님을 거부할 것을 이미 예감한 것이다.

- 즉, 바울의 의도는 유대인에게 예수님을 전하면서도,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진짜 의도는 이것이다.

- 유대인이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것을 드러내어, 이방인에게 전향하는 것이다.

이것의 목적은 세 가지이다.

- 첫째로, 구약 예언 성취이다.

- 유대인이 예수님을 거부할 것이라는 구약 예언이 사실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 둘째로, 예수님 말씀 성취이다.

- 언제나 맞아들로서 유대인을 우선시하셨던, 동시에 유대인을 통해 이방인까지 아우르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다.

- 셋째로, 부르심 받은 소명 성취이다.

- 이로서 바울은 이방인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한 사건을 통해 상충되는 다양한 하나님의 말씀이 동시에 성취될 수 있었다.

-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한 번 삐딱하게 생각해보자.

- 만약 바울의 설교를 통해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 그랬다면 구약 예언 성취가 실패한 것일까?

- 그것이 하나님이 틀렸다는 증거가 될까?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증명되는 사건일 것이다.

- 유대인이 회심한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 온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 약속이 성취된 사건이 될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 먼저 나쁘게 말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이다.

-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도 끼워 맞출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현실 상황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아무렇게나 막 적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더욱 더 신중하자는 것이다.

- 바울에게 유대인 전도 성공도 전도 실패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 성취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바울과 상황은 동일하다.

- 현실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 그리고 성경 말씀이 성공을 지지할 때도 있고 실패를 지지할 때도 있다는 것도 안다.

- 우리는 성공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고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성공과 실패가 모두 하나님의 뜻이니, 그냥 막 대충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일까?

맞다.

- 궁국적으로, 현실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도 상관 없다.

- 빌라도 총독처럼 성공한다고 해도,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을 죽이는 일 뿐이다.

- 반대로 예수님처럼 무고하게 죽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임을 확증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 이러한 두 경우가 현실의 무용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막 살라는 것인가?

- 현실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는 초연해지되, 매 순간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 현실을 말씀으로 해석하고, 말씀이 현실에서 성취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도 그랬다.

- 유대인 전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 이방인 전도가 성공했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 바울은 말씀 따라 유대인 전도에 매진했다.

- 그리고 유대인 전도가 실패한 것을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 성취로 해석했다.

- 그리고 상황 논리에 따라 이방인 전도에 매진하게 되었다.

- 그리고 그 상황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믿고 이방인에 헌신했다.

결국 바울에게 중요했던 것은 유대인이냐 이방이냐가 아니다.

-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며,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때로는 말씀 믿고 거침없이, 또 때로는 말씀 때문에 주저하며 살았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조건은 다 주어졌다.

- 현실에서의 성공과 실패가 반복된다.

- 그리고 말씀이 성공과 실패를 모두 지지한다는 것도 안다.

- 따라서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 믿음이다.

- 하나님께서 현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믿음이다.

- 떼로는 성공을 통해, 때로는 실패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을 증명하고 계신다.

- 그것을 믿는 사람은 바울처럼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사는 것이다.

- 반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유대인처럼 하나님께서 눈 앞에서 일으키시는 일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예언을 성취하고 있는 것일까, 빌라도처럼 믿지 않음으로 예언을 성취하고 있는 것일까?

-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