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마치 관절과 같은 역할을 한다.
- 겉으로 보기에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 관절만으로는 너무 연약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 몸을 이루는데 뼈가 더 중요해 보인다.
- 그러나 관절이 없으면 뼈는 움직일 수 없다.
- 뼈와 뼈 사이를 관절이 적절하게 연결시켜줘야 뼈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본문도 중요해보이지 않는 몇 가지 사건이 나열되어 있다.
- 베드로의 해명, 안디옥에서의 이방인 전도, 바나바의 등장, 바나바와 바울의 동역, 기근 예언과 예루살렘 구제 사건이 단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 각 사건의 분량도 짧고, 그러다보니 의미있는 메시지도 없다.
- 그래서 본문이 왜 있는지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 베드로의 해명은 10장의 요약, 반복이다.
- 안디옥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도 고넬료를 통해 이미 일어났었다.
- 바나바와 바울은 개연성 없이 갑자기 나왔다.
- 기근 예언도 맥락과 상관 없는 독립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이 단편적인 사건들이 모여서 큰 전환을 이뤄낸다.
- 결론부터 말하면, 복음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 이전까지는 아무리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해도 예루살렘 교회가 중심이었다.
-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인 베드로가 직접 하거나, 적어도 베드로가 방문해서 확인했다.
- 안디옥에서의 전도도 결국 예루살렘 통제 아래에 있었다.
- 하지만 본문을 기점으로 안디옥은 예루살렘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 그래서 13장에서는 예루살렘의 허락 없이 자발적으로 1차 선교 여행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본문은 예루살렘과 안디옥이라는 큰 뼈 사이를 연결하는 관절과 같다.
- 전환이 매끄럽게 이뤄지도록 전환의 단계를 세분화 하였다.
- 그러한 전환은 7장에서 스데반이 죽는 것부터 시작하여, 15장에서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의 의무를 제하여 주기로 결정하는 것에서 완전히 끝난다.
- 그 이후에는 베드로도 등장하지 않으며, 예루살렘도 복음 전도의 주체로는 나오지 않는다.
- 안디옥과 바울이 복음 전도의 주체가 된다.
이러한 전환이 8장에 걸쳐 길고, 단계 별로 세분화하여, 섬세하게 이뤄지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 하나님은 사람을 위한 아무리 옳은 계획이라 하더라도, 무작정, 폭력적으로,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행하시지 않는다.
- 섬세하게, 계획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내적인 동력을 끌어내시며 자신의 뜻을 이뤄나가신다.
- 이렇게 하나님의 행위는 동기와 목적이 사랑인 것은 물론이고, 과정 역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흔한 말이 되어서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 그래서 예를 들면, 육아에서 여실히 느낀다.
- 누구나 부모라면 사랑의 동기와 목적으로 자녀를 양육한다.
- 이것은 비교적 쉽다. 부모라면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 그러나 그 자녀는 우리가 사랑으로 정성스럽게 계획한 방향으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 그럴 때 우리는 분노한다.
- 분노하지 않아도, 폭력과 강압을 쓴다.
- 폭력과 강압을 쓰지 않아도, 설명하고 설득하다가 지쳐버린다.
- 그 지치는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고 계신 것이다.
- 마치 성인이 되지 않는 자녀를 영원히 길러야 하는 부모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아와 같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포기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 단지 포기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고 싶으셨다.
-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능력으로 주변 사람들과 관계 맺고,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도록 말이다.
-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부모가 유아를 다루듯 친절하고, 섬세하게, 주변 상황들을 조정하고, 격려하고 자극하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 그런 과정에 수 없이 지키고 힘들어도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우리도 신앙 생활이 힘들지만, 하나님의 신앙 생활은 우리보다 더 힘들다.
- 마치 부모와 자녀의 인생을 비교해보면, 자녀보다 부모의 인생이 더 힘든 것처럼 말이다.
- 자녀는 자기 자신만 돌보면 된다.
- 그리고 가끔 부모 마음 알아주면, 폭풍 칭찬을 받는다.
- 하지만 부모는 자신과 식구 전체를 돌봐야 한다.
- 게다가 아무리 자녀 마음을 알아줘도, 칭찬 받지 못한다.
- 잘 자라는 자녀를 보며 홀로 위로할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 그 사랑 때문에 본문의 자잘한 사건들이 섬세하게 연이어 일어난 것이다.
- 하나님께서 지치는 과정을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사랑으로 이루신 것이다.
둘째로, 우리의 어리석음이다.
- 하나님은 왜 이렇게 세심하게 ,단계 별로, 지치지만 인내함으로, 차근차근 사건을 일으키셨냐?
- 무슨 초딩 다루듯, 유아 다루듯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다루는가?
- 왜냐하면 우리가 초딩보다, 유아보다 더 어리석기 때문이다.
- 이렇게 섬세하게, 조심스럽게, 차근차근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근거는?
- 구약이다.
- 우리는 구약을 볼 때마다 쟤네들 왜 저러나 싶다.
- 무슨 메멘토도 아니고, 왜 돌아서면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일까?
-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니라, 구약 성경 내내 하나님께 돌아섰다 말았다를 반복한다.
- 이렇게 초딩보다, 유아보다 못한 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이고, 그것을 통해 인류 전체의 실상을 고발하는 것이다.
또 근거가 있다.
- 나 자신이다.
-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필요를 깨달았다가도, 힘든 상황이 조금 지나면 또 언제 그랬나 한다.
- 이것도 한 두번이 아니라, 계속 반복한다.
- 우리가 그만큼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받아들였다고 해도 금세 돌아선다는 것이다.
- 어느새 신앙을 왜곡, 변질시켜서 자신에게 손해되는 부분은 살짝 가리고, 이익되는 부분은 살짝 강조한다.
그래서 차근차근 기초부터 탄탄하게, 가능하면 돌아설 수 없도록 하시는 것이다.
- 물론 그래도 우리는 돌아서지만,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시는 것이다.
- 베드로도 돌아설 때가 있었는데, 하물며 우리라고 다르겠나.
그래서 1-18절에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도하는 긴 이야기를 불필요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 얼마나 믿기 힘든 일이면 이랬겠는가.
- 왜 이 긴 얘기를 두 번이나 반복했는가를 한참 고민하며 찾아봤다.
- 두 이야기의 차이를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그것도 없다.
- 유일한 이유는, 사람들이 얼마나 믿지 못했으면 두 번이나 다시 썼겠는가.
-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도 율법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계속해서 싸우는 바울의 편지를 통해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 율법 문제가 우리한테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고넬료 사건 이후로 수십 년간 논쟁은 계속된다.
- 우리로서는 쓸모없는 논쟁을 계속하는 당시 교회가 어리석어 보인다.
- 하지만 우리도 똑같이 어리석은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자.
- 우리에게도 율법처럼 하나님께서 아무리 반복해서 알려줘도 논쟁하며 거부하는 영역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본문에서처럼 반복해서, 세심하게, 지루하게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또한, 19-21절에 안디옥에서 이방인 전도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의미 없이 지루하게 설명한다.
- 먼저, 페니키아, 키프로스(구브로), 안디옥에 전도가 일어났는데,
- 유대인에게만 전도를 했다.
- 그런데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은 안디옥에서 이방인에게까지 전도를 했는데,
- 그 효과가 컸던 것이다.
이 의미 없어 보이는 설명을 통해, 두 가지 의미 있는 단어가 부각된다.
- '키프로스 사람'과 '안디옥'이다.
그래서 22-24절에서 키프로스 사람이었던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게 된다.
- 그러면서 바나바를 길고 지루하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25-26절에서 바나바를 지랫대 삼아, 바울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 이제 드디어 바울이 사도행전의 전면에 등장한다.
정리하면,
- 페니키아, 키프로스, 안디옥에서 키프로스와 안디옥이 선택되고,
- 키프로스를 통해 바나바가 선택되고,
- 바나바를 통해 바울이 선택되어,
- 안디옥에서 바울이 사역하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27-30절에서 안디옥은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보내는 것으로 끝난다.
- 이는 안디옥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얻는 것을 상징한다.
- 이전까지 안디옥은 예루살렘의 통제를 받았다.
- 바나바도 예루살렘이 보내준 사람이었다.
- 그러나 구제금을 보내는 것에 있어서는 스스로 결정한다.
- 그만큼 안디옥이 성장했다는 뜻이다.
이는 바로 전에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처음 사용되었다는 구절과 연결된다.
- 그만큼 교회의 정체성이 확고해졌다는 것이다.
- 교회 외부에 의해서도 유대교와의 차별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 예루살렘 교회도 이루지 못한 유대교로부터의 독립을 안디옥 교회가 이룬 것이다.
이 역시 정리하면,
- 예루살렘에서 내부 결속이 일어나자, 스데반의 죽음으로 강제적 외연 확대가 일어난다.
- 섬세한 외연 확대로 인해 복음은 다시 안디옥에 정착한다.
- 그러자 안디옥에서 복음은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내부 결속이 일어난다.
- 그래서 누구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인정하게 되기까지 한다.
이를 단 네 줄로 요약했지만, 기간으로 따지면 약 12년이다.
- 그 동안 죽을 위기도 여럿이었고, 실제로 죽은 사람도 있었다.
- 게다가 바울은 다소에서 약 8년 동안 묻혀 지냈다. 아무런 기록이 없다.
- 그만큼 다사다난했고 힘들었던 과정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내부 결속과 외연 확장이 일어나기를.
- 그것을 위해 12년의 죽을 위기를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생기기를.
- 동시에, 믿음이 아니라면 어떤 내부 결속과 외연 확장이 일어나지 않기를.
결론
진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복음의 핵심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시작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고, 서로 사랑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특히 모든 사람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경쟁의 대상, 거래의 대상, 이용의 대상, 유익을 얻는 수단, 성공의 수단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조차 말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겪는 가장 비참한 현실이다.
이게 왜 비참하냐면, 그런 사람에게 세상은 지옥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모든 사람을 먹이 아니면 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만만한 사람은 밟아 죽이거나 무시하고,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동맹을 맺거나 피하는 선택지만 있기 때문이다.
- 마치 정글처럼 말이다. 겉모습만 점잖을 뿐이다.
그러한 생각 속에서 제국주의 정복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 사람이 사람을 상품 소비 대상, 상품 생산 수단으로만 생각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 그래서 강제로 상품을 팔거나, 상품을 살 여력이 없는 사람은 노예로 잡아온 것이다.
- 그리고 둘 다가 아닌 사람은 다 죽여서 그들의 영토를 사용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 100여년 전 무식했던 선조들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 그때는 법이 없어서 실행했던 것이고, 지금은 법이 있어서 못하는 것 뿐이다.
게다가 더 무서운 것은, 제국주의가 기독교 신앙에 의해 합리화되었다는 것이다.
- 잉카 문명을 학살하려 출발할 때, 스페인 군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었다.
- 그리고 학살하고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승리에 감사했다.
- 이렇게 사람은 무식하면 잔인해진다.
-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은 유익을 위해서는 잔인함을 불사하며, 잔인함을 위해 일부러 사고를 멈춘다.
-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신앙으로 뒤덮는다.
- 비슷한 일이 인류 역사에서 너무 많이 일어났다.
- 세계 대전, 홀로코스트, 십자군 전쟁 등.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인간의 처참한 현실이다.
-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비극적인 역사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이 이를 증거한다.
- 단지 지금은 가려져 있을 뿐이다.
- 거대하게 조직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뿐이지, 개인적인 영역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
- 그러한 비극적인 현실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합리화하고 있을 뿐이다.
- 마치 잉카 문명과 인디언 부족의 학살을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핑계로 무감각하게 서술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역사를 통해 증명된 인간의 본성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게 된다.
-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참한 현실 속에서 더 이상의 살인을 멈출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살인을 멈추면 필연적으로 살해를 당한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 예수님께서 죽임당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 그러니 나와 같이 먼저 죽임 당하신 예수님께 동병상련을 느끼게 된다.
- 그러니 예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 예수님만이 우리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시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시다.
-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시다.
- 그러니 더욱 더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정리하면,
-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 죽고 죽이는 인류의 비극적인 현실을 깨닫게 되고,
- 그러면 살인을 멈추게 된다.
- 그러나 살해 당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고,
- 우리보다 먼저 살해 당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며,
- 결국 예수님을 통해 부활의 은혜를 입어 다시 살아나게 된다.
-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더 깨닫게 되고,
- 인류의 비극적인 현실을 더 깨닫게 되고,,,
이것이 계속 순환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더욱 깨닫게 되는 것이 신앙 생활인 것이다.
- 그러한 과정 중에 내부 결속과 외연 확장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신앙 안으로 들어가는 은혜가 임하기를.
- 내 인생의 비극을 깨닫고, 살인을 멈추고 살해 당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더 깨닫게 되기를.
- 그래서 내부 결속과 외연 확장이 함께 일어나기를.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25) 13:1-12 왜 바울의 첫 선교지의 첫 사역이 정죄와 심판일까? (0) | 2021.01.16 |
---|---|
사도행전(24) 12:1-25 베드로의 퇴장을 일으킨 헤롯과 헤롯을 죽이신 하나님 (2) | 2021.01.09 |
사도행전(22) 10:36-48 이방인을 위한 베드로의 첫 설교 - 로고스 (0) | 2020.12.26 |
사도행전(21) 10:1-35 복음의 포괄성이 갖는 파괴력 (0) | 2020.12.19 |
사도행전(20) 9:32-43 유대에서 이방으로 복음의 전파 과정 - 참 친절하신 하나님 (0) | 2020.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