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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21) 10:1-35 복음의 포괄성이 갖는 파괴력

언듯 듣기에, 포괄성과 파괴력은 어울리지 않는다.

- 포괄한다고 할 때에는 파괴하지 않고 수용한다는 느낌을 주고, 파괴한다고 할 때에는 포괄하지 않고 배척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파괴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수용할(포괄할) 수가 없다.

- 집에 손님을 들이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파괴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 다른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대해 가지고 있는 내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 따라서 포괄과 파괴는 함께 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수용을 위한 파괴와 배척을 위한 파괴에는 차이가 있다.

- 배척을 위한 파괴는 상대방을 파괴한다.

- 이를 통해 자신을 지킨다.

- 마치 마치 전쟁에서 상대방을 파괴하는 것처럼 말이다.

- 바리새인에게 율법이 그런 역할을 했다.

- 자신들의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을 개 취급 했다.

- 이방인의 인격을 파괴했다.

반면에 수용을 위한 파괴는 자신을 파괴한다.

- 이를 통해 상대방을 지켜준다.

- 마치 사랑하는 관계에서 상대방을 수용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 예수님께서는 인류와 관계 맺으시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셨다.

- 그것이 바로 십자가 죽음의 또 다른 의미이다.

내가 '파괴'라는 강한 단어를 써서 약간 어리둥절 할 수 있다.

- 하지만 복음의 포괄성에 대해 생전 처음으로 몸소 경험한 베드로가 느꼈을 당혹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 마음의 열림, 변화, 전환 등의 단어로도 충분히 같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 하지만 파괴라는 단어만이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

- 그것은 복음이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아름다운 사건에 가려진 괴롭고 슬픈 면이다.

- 마치 인류의 구원이라는 아름다운 사건 안에 예수님의 참혹한 죽음이 있듯이 말이다.

- 구원을 이해하려면 십자가 죽음을 먼저 이해해야 하듯이, 복음의 포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파괴력을 먼저 이해햐아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복음이 이방인을 포괄하는 과정 중에 얼마나 괴로운 '십자가 죽음'이 있었는지를 먼저 이해하자는 것이다.

- 그래야 복음의 포괄성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복음의 포괄성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첫 사건이다.

- 물론 구약에서도 구원 받은 이방인이 나오고, 하나님께서 앗수르나 바빌론과 같은 이방인까지 다스리신다는 것은 여러 번 반복된 주제이다. 

- 그러나 이전까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특별한 예외 상황이었다.

- 언제나 복음의 중심은 유대인에게 있었다.

- 여전히 복음은 혈통, 율법, 성전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었다.

그런데 그 울타리가 드디어 공개적으로 파괴된 것이다.

- 혈통, 율법, 성전과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 정정당당하게 복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작은 관점에서 보면, 한 이방인의 구원, 이방인 전도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 물론 이방인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의미 있는 사건이다.

-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구원 뿐만 아니라 성령까지 받았으니까.

- 따라서 본문을 그렇게 이해하고 해석한 사람이 많으며, 결국 그것의 결론은 고넬료처럼 우리도 구제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 그럴 때 우리에게도 성령이 임하며, 가족과 친구까지 전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 하지만 본문은 그렇게만 보기에는 너무나 상징적인 서건이다.

큰 관점에서 보면, 본문은 복음의 본질이 전환된 결정적인 사건이다.

- 이스라엘 민족 안에 갇혀 계신 하나님께서 세상 밖으로 나오신 사건이다.

- 복음의 능력이 온 인류를 향해 뻗어나가는 첫 사건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제서야 이스라엘로부터 나오신 것일까?

- 왜 처음부터 복음의 포괄성이 전면으로 나오지 않은 것일까?

- 이유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아주 좁은 대상에게 한정하여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다.

- 그래야 효과적이고 정확하게 자신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충분히 하나님의 정체성이 드러난 후에 그것을 확대된 대상에게 전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 그 시점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대중에게 드러내지 않으셨다.

- 한정된 대상인 제자들에게만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드러내셨다.

- 왜나하면 대중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섣불리 말하게 되면, 아무런 소득 없이 오해만 쌓이기 때문이다.

- 오병이어를 먹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 삼으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 그때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호에 호응하시지 않고 비판하시며 자리를 떠나셨다.

- 그런 후 나중에 때가 되서야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대중에게 공개하셨다.

- 이렇게 내부 단결과 외부 확장은 모두 중요하지만, 내부 결속이 먼저 필요하다.

그런데 그 복음의 포괄성을 가장 전면에서 맞딱드린 사람이 바로 베드로다.

- 이전에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은 있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통, 율법, 성전은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었다.

- 그래서 이때까지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혈통을 제외하고 율법과 성전에 참여해야 했다.

-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냐면, 사도행전 15장에서까지 여전히 이 문제를 두고 논쟁한다.

[행 15:5] 그런데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일어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복음의 포괄성을 믿지 않고, 율법과 성전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유대인이 많았다는 것이다.

- 그러니 그것을 처음으로 마주한 베드로가 느낀 당혹감은 얼마나 컸겠는가.

복음의 포괄성이 가진 파괴력이 조준한 표적은 베드로였다.

- 특히 베드로의 혈통, 율법, 성전이었다.

- 베드로 안에 여전히 있었던 혈통, 율법, 성전에 대한 신념을 복음을 산산히 파괴한 것이다.

- 본문에서 파괴 과정을 좀 우스꽝스럽게 벌레 환상으로 설명해서 그렇지, 실상은 베드로의 가장 중요한 신념이 묵살당하는 굉장히 괴로운 사건이다.

-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진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전부 나눠주라는 환상을 주신 것과 같다.

- 이때 우리도 돈에 대한 신념이 묵살당하며 굉장히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 우리에게 돈이 빼앗기는 것과 유대인에게 율법이 빼앗기는 것은 정확하게 같은 괴로움이다.

물론 베드로에게 복음의 포괄성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는 아니다.

- 하나님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강압적, 폭력적으로, 무대포로 복음을 확장하시지 않으신다.

- 예수님은 이미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등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 승천하실 때에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다.

- 이미 예수님을 통해 복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경험했다.

따라서 베드로도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질 수 있다고는 생각했을 것이다.

- 그러나 문제는 그 일을 자기가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그래서 막상 그 일이 일어나자, 율법을 포기하기가 너무 무서웠을 것이다.

-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 마치 우리도 모든 것 포기하고 선교지에서 전도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멋있어 보이고 약간은 부럽지만, 막상 지금 당장 작은 것이라도 포기하라고 하면 너무 무섭고 떨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 복음의 파괴력이다.

- 천년 넘에 이어져 온 혈통, 율법, 성전도 파괴한다.

- 이는 단순히 복음이 많은 사람에게 전해졌다는 의미 이상이다.

-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뭐든지 파괴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 또한 복음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괴력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 만약 우리집 문이 자유롭게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라면, 사람이 들어올 때 굳이 문을 파괴할 필요 없이 쉽게 열면 된다.

- 복음이 전해질 때 마음의 문을 쉽게 열 수 있다면 파괴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문은 복음에 대해서 자유롭게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 아니다.

- 오히려 굳게 잠겨 있는 문이다.

- 하나님께서 수천 년 동안 인류의 마음 문을 두드리셨지만, 인류는 여전히 문을 열지 않았다.

- 부수지 않으면 절대로 열리지 않는 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괴가 필요한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사람은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 그 마음을 예수님의 죽임당함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우리도 마음을 잠그고 있다.

- 우리 마음도 절대로 쉽게 열리지 않는다.

- 부수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문이다.

따라서 복음은 우리 마음의 문을 파괴할 것이다.

-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이다.

- 그런 파괴가 일어난 후에야 우리 마음 안에 복음이 들어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 하나님은 우리와 전혀 상관 없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 복음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고, 복음은 우리의 마음 문을 파괴하고 들어올 것이다.

- 이런 것은 우리가 굳이 생각할 필요 없이 기대하며 기다리면 된다.

- 인류가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막을 수 없듯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마음 문의 파괴는 막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음 문이 파괴 되지 않고는 열리지 않는 잠긴 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 즉,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 우리가 결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 우리에게 준비된 것은 지옥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파괴를 보고 하나님의 폭력이라며 원망하지 않을 수 있다.

- 오히려 파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다.

- 즉, 자신이 파괴 되어야 할 존재임을 믿고, 파괴가 일어날 날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