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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25) 13:1-12 왜 바울의 첫 선교지의 첫 사역이 정죄와 심판일까?

본문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해가 안된다.

첫째로, 사역 성과에 대한 설명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을 받아 행한 첫 사역이다.

- 게다가 총독이 예수님을 믿는 엄청난 성과를 얻었다.

- 성과가 없어서 안적었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총독이 예수님을 믿는 엄청난 성과를 얻었는데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로, 정죄와 심판 사건이 중심을 이룬다.

- 본문은 사역을 방해해서 정죄 심판 받은 바예수에게 초점을 둔다.

- 인물을 설명할 때도 바예수를 더 자세히 설명하며, 서기오 바울은 바예수를 설명하기 위한 인물로 소개된다.

- 이 부분이 한글 번역에서는 모호한데, 원어에서는 총독에 대한 설명이 독립된 문장이 아니라 관계 대명사로 연결되어 바예수 소개의 보조 문장으로 나온다.

- 게다가 전도의 첫 사역이 정죄 심판이라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약 내가 바울의 전도 여행의 첫 사건을 기록했다면,

-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복음을 전했더니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록했을 것이다.

- 서기오 바울을 만나게 된 계기, 만나서 전한 메시지, 서기오 바울의 반응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를 자세히 썼을 것이다.

-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바울의 전도를 얼마나 강하게 돕고 계신지 보여줬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아예 안나오는 것도 아니다.

- 바로 다음 단락에 나온다.

- 13장 16-41절에서 엄청나게 길게 바울의 전도 메시지를 담아 놓았다.

- 그런 후 42-52절까지 바울 전도에 대한 강력한 반응이 나온다.

- 바울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반응과 강력하게 거부하는 반응이 함께 나온다.

이런 기록이 딱 내가 예상하는 내용이다.

- 그런데 이것이 왜 첫 사역에 안나오고 둘째 사역에서 나오는 것일까?

- 왜 본문은 사역 대상이 아니라 사역의 방해꾼에게 초점을 두는 것일까?

- 왜 본문은 전도 메시지가 아니라 정죄 심판에 초점을 두는 것일까?

일단 결론은 모르겠다.

- 알고 싶어서 온갖 자료를 다 봤지만, 이 질문을 담은 내용은 전무했다.

- 왜 서기오 바울보다 바예수가 더 분량이 많은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 난 왜 이런게 이렇게 궁굼할까.

- 이 고민 때문에 본문에 대해 다른 고민은 많이 하지 못했다.

희미하게나마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 사도행전에서 정죄 심판 사건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 첫째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다.

- 이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된 직후 일어났다.

- 둘째는 8장에서 마술사 시몬이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다가 베드로에게 정죄 받은 사건이다.

- 이는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스데반의 죽음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난 사마리아에 도착한 직후에 일어났다.

- 그리고 바울의 첫 사역에서도 정죄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다.

[눅 11:21-22] 힘센 사람이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그의 소유는 안전하다. (22) 그러나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이 달려들어서 그를 이기면, 그가 의지하는 무장을 모두 해제시키고, 자기가 노략한 것을 나누어 준다.

- 이는 예수님께서 축귀 사역에 대해 비판을 받으시자, 축귀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 사탄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속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의 왕인 사탄을 축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면,

- 본문은 단순하게 총독에게 복음을 전한 사건이 아니다.

- 또한 바예수를 정죄한 것도 전도하다가 생긴 우연한 일이 아니다.

- 오히려 앞으로 있을 바울의 전도 여행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방인의 왕인 사탄을 축출하는 본질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바울은 바예수를 이렇게 부른다.

[행 13:10]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짓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 '악마의 자식', '모든 정의의 원수'라고 부른다.

- 단지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복음을 방해하는 악한 권세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본다.

- 바울은 바예수를 무력화시킴을 통해 앞으로 이방인 전도를 방해하는 모든 존재를 무력하시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의 첫 증거로서 서기오 바울을 예로 든 것이다.

- 이렇게 볼 때, 서기오 바울의 소개를 바예수 소개 안에서 보조적으로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 그리고 전도 여행의 첫 성과인 서기오 바울의 회심을 이렇게 짧게 언급하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행 13:12] 총독은 그 일어난 일을 보고 주님을 믿게 되었고, 주님의 교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결론

한 집을 도둑질 하기 위해 가장 힘센 사람을 먼저 제압해야 한다는 개념은 상식적이다.

- 예를 들어, 경비 아저씨를 제압한다던지, 세스코를 고장낸다던지.

그에 따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무력화시키셨다.

- 세상 전체가 죽음의 권세, 즉 사탄의 장악력 안에 있기 때문이다.

[롬 5:17]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합니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죽음을 정복하셨다.

- 그리고 사탄을 무력화시키셨다.

- 그래서 예수님 죽음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사탄에 굴복했던 인류를 구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개념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 우리의 신앙 생활을 방해하는 원인은 모두 사탄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 그래서 축귀 의식을 통해서만 구원의 길이 열릴까?

- 사탄이 퇴치되는 기적을 통해서만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까?

-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사탄의 영향력은 막강하다는 것이다.

- 사탄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며, 나답게, 인간답게, 사랑하며 사는 것을 방해한다.

- 그래서 서로를 이용하게만 하며, 겉으로 잘지내는 것처럼 보이게 할 뿐,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 그것이 사탄의 핵심적인 역할이다.

- 누구도 이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둘째로, 예수님은 사탄보다 더 세셔서 사탄을 완전히 제압하셨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때에만 사탄에서 벗어날 수 있다.

-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고, 나답게, 인간답게, 사랑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다.

- 그것이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이유이다.

- 세상의 가장 강한 자를 제압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 인생을 방해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 함께 생각해보자.

-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신앙은 아니다.

-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려다보면,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