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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27) 14:1-28 1차 전도 여행의 성과 - 환난

사도행전은 1차 전도 여행을 왜 기록했을까?

- 누누히 말했지만, 단지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 세상에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일기조차도, 다큐멘터리조차도, 증명 사진조차도 있는 그대로의 기록은 아니다.

- 기록자의 관점에 의해 재구성된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록은 해석이 필요하다.

-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첫째는, 기록의 목적을 해석해야 한다.

- 기록자가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과장 혹은 축소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다.

- 그것을 아는 것이 기록자에 대한 예의라고 지난 번에 말했었다.

이를 사진에 비유해서 말하면, 

- 피사체, 렌즈, 사진 중에서, 피사체가 현실, 렌즈가 기록자의 의도, 사진이 기록물이 된다.

- 피사체는 변하지 않는다.

- 그런데 렌즈에 따라 사진이 달라진다.

- 붉은 필터 렌즈를 끼면 붉은 사진이 나오고, 푸른 필터 렌즈를 끼면 푸른 사진이 나온다.

- 우리는 붉은 사진을 보며 열정을, 푸른 사진을 보며 절제를 표현하고 싶었던 기록자의 의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 따라서 기록물을 볼 때 사실 자체로 보면 안되고, 기록물 이면에 있는 기록자의 의도, 메시지, 목적까지도 읽어야 한다.

그런데 기록의 목적을 알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 사진에 붉은색 필터가 끼워져 있다는 것을 알면, 피사체를 유추할 수 있다.

- 마찬가지로 기록물이 어떤 의도록 기록되었는지 알면, 현실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해석이 필요한 두 번째 관점은 현실이다.

- 기록물은 절대로 현실이 아니다.

- 기록물을 현실로 착각하면, 기록물의 의도도 알 수 없고, 현실도 알 수 없다.

- 기록물을 보는 행위가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기록물을 통해 현실을 유추할 수 있다.

- 직접 보듯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록물을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적절한 대응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는 행위를 세 가지로 분류해보자.

첫째로, 어리석은 읽기이다.

- 기록물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 기록자의 의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 문자 그대로의 표면적인 의미만 생각한다.

- 이들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성경의 메시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 마치 바리새인처럼 말이다.

게다가 기록자의 의도를 알아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 기록자의 의도를 알려하지 않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기록물에 자신의 의도가 투영된다.

-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다.

- 그래서 성경을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왜곡 변질시킨다.

- 마치 바리새인처럼 말이다.

둘째로, 정상적인 읽기이다.

- 기록물을 통해 기록자의 의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 최대한 자신의 의도를 투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문자 이면에 있는 내면적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로, 현명한 읽기이다.

- 기록자가 기록을 한 현실 상황을 유추하고, 기록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생각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하실 말씀을 상상하며 적용하는 것이다.

- 그럴 때 우리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의도는 무엇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를 알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 본문은 1차 전도 여행이 끝나는 부분이다.

- 공식적인 첫 전도 여행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이나믹한 여행이 기록되었을 것을 기대했다.

- 전도가 되었건 박해가 되었건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 그러나 이야기는 수박 겉 핥듯 빠르게 지나간다.

몇 가지 예를 보면, 복음이 전해졌다는 표현은 이것이 전부이다.

[행 14:1]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하였다. 그래서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이 많이 믿게 되었다.

[행 14:21] 바울과 바나바는 그 성에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제자를 얻은 뒤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되돌아갔다.

- 전도했다는 구절에 비하면 전도의 성과를 전하는 구절은 지극히 적다.

- 이고니온과 더베에서는 많은 사람이 믿는 성과가 있었지만, 루스드라에서는 치유 받은 한 사람 외에는 성과가 기록되지 않았다.

- 게다가 루스들에서 치유 받은 사람도 그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만 나올 뿐, 어떻게 믿음을 고백했는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박해 받았다는 표현도 다르지 않다.

[행 14:2] 그러나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유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선동해서, 믿는 형제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하였다.

[행 14:5] 그런데 이방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그들의 관원들과 합세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쳐죽이려고 했다.

[행 14:19] 그런데 유대 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거기로 몰려와서 군중을 설득하고, 바울을 돌로 쳤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그를 성 밖으로 끌어냈다.

-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했다는 사실을 짤막하게 언급할 뿐이다.

-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그들이 왜 바울 복음을 거부했는지, 어떻게 박해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조차 없다.

- 누군가는 15-17절의 설교가 그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데 누가 봐도 저런 설교로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다.

- 이는 단지 자신들에게 제사 드리려는 시도를 멈추게 하려는 일환일 뿐이다.

[행 14:18] 두 사도는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사하지 못하게 겨우 말렸다.

- 그래서 15-17절의 원어 문법을 보면,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이다.'는 문장만 완전한 문장이고, 나머지는 전부 수식하는 보조 문장이다.

- 즉,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제사를 멈추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의도는 무엇일까?

- 사도행전은 1차 전도 여행의 의의가 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1차 전도 여행의 초점은 어디에 있을까?

결론부터 말해서, 환난에 있다고 본다.

-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비판적으로 봐주길 바란다.

- 본문의 의도를 찾으려고 이것 저것 많이 읽어봤는데, 1차 전도 여행의 초점을 알고자 하는 해설은 없었다.

- 전도 여행 했던 사실만을 세밀하게 보려는 시도 뿐이다.

- 마치 어리석은 읽기처럼, 바리새인이 성경 읽듯이 말이다.

- 그래서 내가 고민 끝에 혼자 내린 결론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우선 바울이 제자들에게 한 권면 때문이다.

[행 14: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고, 믿음을 지키라고 권하였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 이 멘트는 성경에 많이 나오는 표현이기 때문에 이상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 그런데 과연 이 멘트가 인용 부호까지 붙여가며 강조해야할 것인가?

- 특히 믿음을 가진지 불과 몇 개월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일까?

- 더 필요한 말이 많지 않을까?

-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 멘트는 좀 어색하다.

그래서 이 멘트는 제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1차 전도 여행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 보인다.

- 달리 표현하면, 바울이 제자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한 말로도 볼 수 있다.

- 그래서 주어를 '우리'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고보니 1차 전도 여행 전체가 '환난'의 연속으로 보인다.

-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박해 때문에 이고니온으로 갔고,

- 이고니온에서도 돌로 쳐죽이려는 환난 때문에 루스드라로 갔으며,

- 루스드라에서도 우상 숭배 당하는 환난, 그리고 돌에 맞아 죽기 직전까지 간 환난 때문에 더베로 갔다.

그런데 이렇게 환난을 겪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바울은 이렇게 보고한다.

- 26절에, 이제 그들은 그 일을 다 이루었다.

- 27절에,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셨다.

- 제대로된 성과 보고도 없이 말이다.

- 이방인의 용감한 믿음의 고백도 한 마디 없이 말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이 1차 전도 여행을 기록한 의도는 이것이다.

- 여행의 최고 성과는 환난이라는 것이다.

- 지역을 옮겨 다닐 때마다 환난을 당했고, 환난 때문에 옮겨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여행 때문에 이방인에 대한 믿음의 문이 열린 것이다.

물론 같은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다.

- 환난의 원인은 복음을 잘 전해서이니, 복음 전도가 전도 여행의 최고 성과라고 말할 수도 있다.

- 그런 복음 전도 때문에 믿음의 문이 열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이렇게 환난이 아니라 복음 전도에 초점을 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그러지 않았다.

- 복음 전도 이야기보다 환난 당하여 쫓겨나는 이야기를 더 많이 담았다.

- 사도행전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멋있게 전도하는 바울의 모습이 아니라, 비참하게 환난 당하는 바울의 모습이었다.

- 그것이 1차 전도 여행을 통해 사도행전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결론

그렇다면 사도행전은 왜 비참한 모습을 담으려 했을까?

- 왜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의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훈훈한 모습보다, 환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비참한 모습을 부각했을까?

단순 무식하게 말해서, 당시 상황이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 훈훈하기보다 비참했기 때문이다.

- 올바른 신앙과 따뜻한 공동체로 인한 평화보다 환난으로 인한 비참함이 더 일반적인 경험이었다.

- 그로 인해 신앙에 대한 회의와 믿음에 대한 의심이 생겼을 것이다.

- 그런 사람들에게 사도행전은 바울의 입을 빌려서 하나님 나라는 환난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라고 위로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끔찍한 환난을 당하고 있었던 바울과 사도행전 기록 당시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메시지가 아니다.

- 환난 여부와 상관 없이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유효하다.

- 왜냐하면 환난을 통해서만 믿음이 확증되기 때문이다.

[롬 5:3~4]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굳이 성경을 보지 않아도,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란 말도 있다.

- 환난 속에서 참된 관계가 확인된다는 뜻이다.

- 이러한 원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환난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이 원리가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 우리도 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 우리도 바울의 말처럼 환난을 통해서 바른 신앙에 이르는 중인가?

- 우리가 겪는 사소하고 세속적이며 일상적인 어려움도 바른 신앙에 이르는 환난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

- 단, 우리가 그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공동체와 상의할 때에만이다.

- 어려움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환난이다.

- 그렇게 일상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사람에게만 일상을 벗어나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반면에, 아무리 전도로 인해 받는 박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 없다.

- 아무리 끔찍한 환난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즉, 환난의 종류와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주어진 어떠한 환난이라도 그것을 신앙의 도구로 삼느냐 삼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 어려움을 도구 삼아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환난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공동체와 상의해야 하지만 하지 않고 있는 어려움이 있다면?

- 하나님은 그 어려움을 도구 삼아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다.

- 우리가 함께 어려움을 나누며 기도할 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