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도행전

사도행전(29) 15:22-41 회중은 그 권면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비롯하여 이방인 교회 전체에게 4가지 금지 항목을 제시했다.

- 우상에게 바친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이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권면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행 15:31] 회중은 편지를 읽고, 그 권면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권면이 듣고 기뻐할 만 한 것인가?

- 왜 이들은 금지 항목이 생기고 엄격한 규율이 생겼는데 기뻐했을까?

- 이전보다 불편해졌을 텐데 말이다.

-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던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었을텐데 말이다.

또 반대로 유대인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 4가지 금지 항목 이면에는 이것 말고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 즉, 율법 중에 특히 할례의 의무를 제하여 준 것이다.

[행 15:28] 성령과 우리는 꼭 필요한 다음 몇 가지 밖에는 더 이상 아무 무거운 짐도 여러분에게 지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 율법에 목숨까지 거는 이들 입장에서 과연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런 측면에서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엄청난 것이다.

- 이 결정은 양편 모두가 받아들이기 어렵다.

- 양편 모두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 게다가 양편은 서로 혐오하는 상극 관계이다.

- 그런데 절대로 합의할 수 없는 양편이 합의한 것이다.

- 목숨 걸고 지키던 것을 서로 포기한 것이다.

- 마치 진보적인 민주당과 보수적인 공화당이 합의한 것과 같은 것이다.

- 현실 역사 속에서는 없었던 합의이다.

어떻게 이런 합의가 이뤄졌을까?

- 본문에는 단번에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상상해보면, 

- 먼저 예루살렘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싫어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 그들은 더러운 이방인과 복음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 게다가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특히 이방인에게 율법 없는 이상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못마땅해했다.

- 그를 아무 자격 없는 이단으로 몰고 싶었다.

다음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섞여 있는 이방 지역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유대인은,

-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보다는 조금 더 개방적이다.

- 그래서 이방인과 복음을 공유하고 같은 공동체 안에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진 않았다.

- 그들은 이방인 지역에 살기에 이방인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 게다가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할례를 받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 용납했다.

- 이방인에게 자신들과 똑같은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게 할례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래서 이방인에게 율법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 아무리 개방적인 유대인이라고 해도, 그래서 최대한 양보해서 공동체 안에 있는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해도, 자신들이 직접 율법을 범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 그런데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하게 율법을 범하는 일이 생긴다.

- 아무 생각 없이 좋은 마음에 이방인과 식사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음식 재료가 부정했다.

- 이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 속죄제를 위해 양을 잡고 피를 뿌리고 생난리를 쳐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 이방인이 아무리 좋아도, 유대인은 이방인과 점차 멀어졌을 것이다.

이방인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 율법이 뭐라고, 부정한 고기 좀 먹은 것이 대수라고 그리 호들갑 떠냐며 반박했을 것이다.

- 예수님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믿음 아래에서조차 율법에 벌벌 떠는 유대인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 오히려 이방인은 유대인을 믿음 없다며 무시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는 점차 멀어졌을 것이다.

- 처음에는 호감을 가지고 함께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가까워지기는커녕 더 멀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율법 문제는 정말 복잡하다.

- 복잡한 이유는 율법에 종교와 문화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 율법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잡이 역할을 하며, 동시에 유대인이 살아가는 라이프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유대인이 아무리 복음 믿고 율법의 종교적 역할로부터 빠져나왔다고 하더라도, 살아왔던 방식을 단번에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 율법을 지키는 것이 평생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 마치 우리에게 처음 보는 한참 후배가 손을 들고 '안녕' 했을 때의 당혹감 같은 것이다.

-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후배가 '안녕하세요'라며 목례라도 하지 않으면 기분이 팍 상한다.

하지만 아무리 율법이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해도 그대로 둘 수 없다.

- 율법은 믿음과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 본래 의미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 아무리 본인은 문화로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항변해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분별하지 못하고 율법과 믿음을 혼동하게 된다.

[고전 8:9~11]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0)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11)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 아무리 본인이 자유 안에서 율법을 지킨다고 해도,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된다면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 즉, 문화로서의 율법도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마치 차례상에 절하는 것이 단순히 문화일 수 있지만, 그래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이다.

① 율법을 완전히 금하는 것.

② 율법을 완전히 허하는 것

③ 율법을 일부는 허하고 일부는 금하는 것

논리적으로만 보면 ①과 ②가 더 타당하다.

- 율법을 종교로만 보면, 완전히 금해야 한다.

- 반대로 율법을 문화로만 보면, 완전히 허해야 한다.

- 이렇게 한쪽으로 쏠린 논리가 더 탄탄하다.

- 하지만 완전히 금하거나 허하면, 논란은 확실하게 잠재울 수 있겠지만,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는 깨진다.

- 완전히 금하면 유대인이 떠날 것이고, 완전히 허하면 이방인이 떠날 것이다.

- 그러면 복음은 반쪽짜리가 된다.

그래서 ③인 절충안이 선택된 것이다.

-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아우르기 위해서이다.

- 공동체의 관계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절충안이 언제나 그렇듯 논쟁을 잠재우지 못한다.

- 반대 논리가 반복된다.

- 계속해서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율법을 마구 어기며 방종 하는 사람이 있다.

- 그래서 바울은 거의 대부분의 서신서에서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과 율법 폐기를 주장하는 사람 모두에게 동시에 공격 받는 것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충안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 이제 중요한 것은 절충의 기준이다.

- 어느 선까지 허하고 어느 선까지 금할지 정하는 문제이다.

기준은 관계이다.

- 관계 맺는 데 영향을 주는 율법은 허하고, 그렇지 않은 율법은 금하는 것이다.

- 그래서 개인적인 할례는 지킬 필요 없지만, 함께 교제할 때 필요한 식사 율법은 지키도록 했다.

참고로, 금지 항목에 식사 규범 외에 음행이 들어있다.

- 단순히 음행은 나쁜 거니까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다르게 설명한 논문이 있었다.

[고전 5:1]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일까지 있다고 하니, 그러한 음행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 이 구절을 근거로 음행을 공동체 안에서 행해지는 잘못된 이성 관계라는 것이다.

- 한 사람을 두고 다른 두 명 이상의 이성이 관계 맺는 것이다.

- 꼭 양다리가 아니라 시간차를 두더라도 말이다.

-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음행 역시 교회 관계를 해치는 것이다.

- 즉, 4가지 금지 항목 전체가 공동체 관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까지가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이 엄청난 이유이다.

-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합의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가까스로 관계를 위해 합의된 것이다.

- 단번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수차례 모여, 수많은 논쟁을 통해, 끊임없는 양보와 배려와 사랑을 통해 극적으로 이루어진 합의이다.

 

그렇다면 왜 안디옥 교회는 이 권면을 듣고 기뻐했을까?

-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추정할 수만 있다.

첫째로, 할례를 비롯하여 율법을 다 지킬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 이방인은 할례를 받으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다.

[갈 2:4]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 때문에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끼여든 자들입니다.

- 할례는 엄청난 신체적 고통을 감수해야 하며 동시에 신앙을 침해한다.

-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육체적 기쁨과 영적 기쁨을 모두 느꼈을 것이다.

둘째로, 율법을 포기해준 유대인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 유대인에게 율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며칠만 같이 생활하면 대번에 알았을 것이다.

-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얼마나 간절하게 율법을 지켜주길 바랐는지도 알았을 것이다.

- 그것이 폭력이 아니라 함께 교제하고 싶은 사랑에 기반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율법을 포기해주었다.

- 자신의 바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바람을 더 중요하게 여겨주었다.

- 자신의 가치 기준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존중해주었다.

- 그러니 이방인은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셋째로, 이방인으로서 유대인과 마음껏 사랑을 나누며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유함 때문이다.

- 이전까지 이방인은 유대인과 교제할 때마다 어쩔 줄 몰라 마음이 불편했다.

- 율법을 지키자니 신앙의 양심에 거슬리고, 율법을 지키지 않자니 유대인에게 잘못한 것 같아 불편했다.

- 그래서 유대인을 사랑해서 함께 하고 싶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나 이제 사랑의 길이 열린 것이다.

- 다른 것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관계만 생각하면 되었다.

- 함께 할 때는 철저히 율법을 지키면 되었고, 함께 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 함께 식사할 때 유대인을 위한 음식으로 함께 교제하면 되었다.

- 함부로 이성과 부정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되었다.

- 그렇게 자유롭게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되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실제로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으로 인해 어떤 분위기가 감돌았는지 알지 못한다.

-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결정을 두고 신학적인 측면에서 탐구한다.

- 율법과 믿음의 갈등 속에서 믿음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핵심이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이방인이 굳이 유대인으로 개종하지 않고 이방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다 맞는 말이다.

-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이다.

- 그러나 본문은 그 메시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 만약 그 메시지를 드러내려 했다면, 할례와 율법의 의무가 필요 없음을 강조했을 것이다.

- 복음의 본질에 할례와 율법이 배제되었음을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본문은 4가지 금지 항목을 강조한다.

- 금지 항목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다.

- 복음의 본질은 믿음이다.

- 금지 항목은 관계 맺는 방법의 하나이다.

- 유대인과 이방인이 관계 맺을 때 필요한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 복음의 본질이 관계라는 것이다.

- 관계를 위해서 율법을 금하기도 하며, 허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그 관계를 위해 유대인이 율법을 포기하는 엄청난 희생과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는 엄청난 헌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 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 이렇게 본문은 예루살렘 회의의 신학적 의미가 아닌 관계적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이 나온다.

단순한 사실로 보면, 사건 자체는 어렵지 않다.

- 그러나 이 사건이 갖는 메시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 게다가 예루살렘 회의와 이어지는 맥락에서 보면 더 이해가 안 된다.

예루살렘 회의는 인류 대통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 성경 기록 상황에서 가장 관계 맺기 어려운 유대인과 이방인이 극적으로 합의를 이루고 하나 되어 서로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다.

- 이런 인류 대통합은 전무후무하다.

- 오로지 복음으로만 가능하다.

- 이를 통해 복음이 갖는 통합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 직후에 복음 전도자들이 싸워서 갈라선다.

- 복음의 본질이 달라서도 아니고, 사소한 이유로 싸운다.

마가를 전도 여행에 데리고 가느냐 마냐의 문제다.

- 정답이 없는 문제이다.

- 데리고 간다고 해도 가지 않는다고 해도 큰일이 나지 않는다.

- 복음이 전해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서로 양보하고 합의해서 잘 결정하면 될 문제다.

- 유대인과 이방인도 합의했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합의하지 못할 문제가 어딨겠는가.

- 도대체 이러한 갈등으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 갈등 자체가 갖는 의미도 너무 아리송하다.

- 갈등이 일어났다.

- 그리고 그 갈등이 성경에 기록되었다.

- 따라서 이 사건은 인류 전체에게 기억될 필요가 있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뭘 말씀하시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건은 네 가지로 해석된다.

① 바울이 잘못한 것

② 바나바가 잘못한 것

③ 둘 다 잘못한 것

④ 둘 다 잘못하지 않은 것

첫째로, 바울이 잘못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 이전에 있었던 일은 마가의 단순 실수였고, 용납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는 것이다.

- 그러나 바울은 근시안적, 감정적으로 판단하여 마가를 배제한 것이다.

- 하지만 그 이후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 성공적으로 사역했고, 결국 바울에게까지 인정받고 용납된다.

[딤후 4:11] 그대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그 사람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입니다.

- 이러한 재회는 바울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바울의 일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지적하는 입장이다.

- 바울이 마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바나바의 관계보다 전도 사역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관계를 모두 끊고 홀로 전도 여행을 간 것이다.

- 이는 일보다 관계를 중시하는 복음에 반하는 판단이다.

- 바울은 마가의 잘못된 행동보다 그 이후 회개하고 사과를 구하는 태도를 봤어야 했다.

-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했다.

- 바울과 달리 바나바는 마가를 용서했고, 이를 통해 마가 복음이라는 엄청난 결실을 맺었다.

둘째로, 바나바가 잘못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 바나바가 경솔하게 마가를 데려가려고 한 것이다.

- 조카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허용했다.

- 전도 여행에는 죽음의 위협이 필연적인데, 아직 마가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는데도 말이다.

- 마가 한 사람 때문에 전도 여행 전체가 실패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셋째로, 둘 다 잘못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서로 양보하지 않고 합의하지 않은 둘 다 잘못이다.

- 바로 앞에서 서로 상극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합의도 있었다.

-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바울과 바나바가 합의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넷째로, 둘 다 잘못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경우이다.

- 단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둘을 갈라서 사역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바나바는 이전 사역지를 다시 가도록 하고, 바울은 새로운 지역으로 가서 복음이 더 넓게 전해지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읽어보면 바로 느껴지겠지만, 넷 다 뭔가 찝찝하다.

- 그러니까 이 사건은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바울이 잘못했다고도, 바나바가 잘못했다고도, 둘 다 잘못했다고도,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사건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기록 의도를 알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 그냥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의 경로가 정해진 경위를 설명해준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겠다.

 

결론

복음의 능력은 바로 이것이다.

- 통합력이다.

- 서로 혐오하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 인류 전체를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다.

- 교회가 한 몸 되게 하는 능력이다.

-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양보하고, 합의하여,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

- 그것을 위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선이 연결되어 뇌가 완전히 하나 되도록 하는 능력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론이 날 수 있었다.

- 유대인에게는 율법의 폐기를, 이방인에게는 금지 항목 제시를 하게 된 것이다.

- 그것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희생과 헌신을 뜻하는지 공감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 결정 속에 서로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서로가 헌신과 희생을 감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랑이 어떻게 생겼겠는가.

- 이러한 공감과 상호 이해가 어떻게 생겼겠는가.

- 이는 사람의 영역이 아니다.

-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 복음의 능력이다.

-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감수한 사랑, 자기 부정을 감수한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이제 자기 반성 시간이다.

- 작은 것 하나도 양보하지 못하는 나를 본다.

- 아내에게, 자녀에게, 그리고 교회 식구들에게.

-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조차 이해, 공감, 양보, 합의, 희생, 헌신이 안된다.

- 내 틀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성질이 난다.

- 나를 지키기 위해 상대가 사라져버렸으면 한다.

아마도 살인도 이런 마음에서 시작되는 거겠지.

- 내가 죽기 싫어서 남을 죽이는 행위.

- 정당 방위로 포장해서 말이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믿음만이 살인을 그만두게 한다.

- 살인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오기 때문이다.

-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 살인하지 않는다.

- 상대가 나의 틀을 건드려도 상대를 밀쳐내지 않을 수 있다.

-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여 품고 사랑할 수 있다.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이 있기를.

- 그래서 나라는 틀이 물렁물렁해지기를.

- 그래서 고통, 걱정, 위험, 아픔, 두려움, 싫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 그래서 상대방의 고통, 걱정, 위험, 아픔, 두려움, 싫음이 더 잘 느껴지기를.

- 그래서 상대방을 품고 사랑하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