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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31) 16:16-40 간수의 구원 - 신의 한 수

본문은 세 가지 사건이 이어져 있다.

① 16-22절: 바울이 여종에게 축귀 기적을 행한 후 투옥됨

② 23-34절: 바울을 지키는 간수가 기적을 통해 구원 받음

③ 35-40절: 바울을 부당하게 투옥한 치안관들 사과함

세 가지 사건 중에 간수의 구원이 중심이라는 것에 이견은 없다.

- 여종의 축귀와 치안관들의 사과는 간수의 구원을 위한 사전 준비와 사후 마무리이다.

- 여종의 축귀 사건은 바울이 간수를 만나게 된 계기를 마련한다.

- 치안관들의 사과는 간수를 위한 투옥으로 훼손된 바울의 명예를 회복한다.

이를 통해 바울의 투옥은 부당한 것이었으며,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음을 증명한다.

- 바울은 스스로 선택하여 투옥된 것이고, 그 선택은 간수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 마치 예수님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 예수님의 죽음도 부당한 것이었으며, 예수님의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였고, 그 선택은 인류의 구원을 위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 그러니까 여종의 축귀도 투옥을 통해 간수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고, 치안관들의 사과도 투옥이 얼마나 간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는지 증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간수의 구원 사건만 잘 보면 된다.

- 문제는 사건 기록이 너무 이상하다는 것이다.

첫째로, 사건의 전개가 너무 갑작스럽다.

- 다른 말로 개연성이 없다.

예를 들어, 

- 감옥에서 갑자기 찬양하다가,

-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고,

- 또 갑자기 수갑과 차꼬가 풀린 후,

- 갑자기 감옥 문까지 열린다.

- 그로 인해 갑자기 간수가 자결하려 하고,

- 바울의 저지에 갑자기 엎드려서 구원을 구한다.

- 그렇게 믿음을 가진 간수는 갑자기 온 가족이 침례를 받고, 갑자기 음식을 대접한다.

많은 사람은 각 사건들을 개연성 있는 것으로 연결한다.

- 찬양 때문에 지진이 일어났고,

- 지진 때문에 수갑과 차꼬가 풀렸으며 감옥 문까지 열렸다.

- 그로 인해 간수는 자결하려 했으나,

- 도움을 준 바울에게 구원까지 구했다는 것이다.

- 그 결과 간수의 가족까지 구원을 얻게 되고, 바울과 간수는 친밀한 교제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연성이 있다고 보는 입장과 없다고 보는 입장 모두 명확한 근거는 없다.

- 본문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문이 개연성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지진이 어떻게 수갑과 차꼬를 풀 수 있으며 감옥 문까지 열 수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만약 정말 감옥 문까지 떨어져 나갈 정도의 큰 지진이었다면, 

- 감옥 자체가 무너져 내렸어야 했고,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 돼야 했었다.

- 그랬다면 본문에서처럼 간수가 바울과 노닥거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 그러니 지진은 건물을 흔들었지만 무너뜨리지는 않을 정도였을 것이다.

- 감옥 문이 부서져 열릴 정도의 심각한 지진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수갑과 차꼬가 풀리고 문이 열린 것은 지진과 구분되는 개별적인 기적이다.

- 그런 측면에서 간수의 자결도 간수의 구원 요청도 간수 가족의 등장도 갑작스럽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은 이 사건을 왜 이렇게 묘사했을까?

결론부터 말해서, 전도 여행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 간수의 구원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 일을 위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부터 마케도니아까지 그리고 빌립보 지역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 사실 더 멋있는 이유를 생각하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 본문의 더 정확한 의미를 알려고 많이 찾고 읽었는데, 없었다.

만약 간수의 구원 자체를 강조하려 했다면 다르게 표현했을 것이다.

- 일단 간수에 대해 더 자세히 소개했어야 했지만, 간수라는 것 외에 아무런 설명도 없으며 이름조차 없다.

- 직전에 루디아가 이름, 고향, 혈통, 신앙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된 것과 상반된다.

- 또 바울 만나기 전의 영적 상태와 바울에게 구원을 구한 경위를 기록했어야 했다.

- 하지만 사도행전은 간수에게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바울에게 관심이 있느냐?

- 그것도 아니다.

- 간수를 만나러 감옥에 일부러 간 것도 아니고, 감옥에서 찬양한 것 외에 한 일도 없다.

- 간수에게 바울이 한 것이라고는 '주 예수를 믿으시오.'라는 한마디 말 밖에 없다.

이렇게 주연이 간수도, 바울도 아니기에, 억지로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사건을 일으키셨을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일으키셨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 첫째로,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 힘들었다는 뜻이다.

- 둘째로, 하나님은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할 분명한 이유를 가지셨다는 뜻이다.

 

먼저 간수의 구원이 왜 일어나기 힘든 일일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억지로 바울을 끌고 가시지 않는다면 일어나기 힘들다는 뜻이다.

- 또 다르게 표현해서, 바울에게는 간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전도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뜻이다.

- 한 번 더 정교하게 말하면, 바울은 간수와 같은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을 터부시하지는 않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다.

바울을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굉장히 새롭고 위험하다.

- 왜냐하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이며, 땅끝까지 가서 온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 게다가 이방 지역에서 1차 전도 여행을 끝냈고, 또다시 마케도니아까지 2차 여행 중이기 때문이다.

-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의 짐을 제하여달라고 요청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이런 바울에게 여전히 간수와 같은 사람이 전도 대상에서 배제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말하냐?

- 지금까지 1차, 2차 여행을 하면서 바울은 '언제나' 회당에서 전도했다.

- 물론 회당이라고 전부 유대인은 아니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 즉 이방인이지만 유대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도했다.

-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이러한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다.

- 그래서 이방인에 대한 전도 역시 회당을 통해서였다.

게다가 16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까지 행한다.

- 디모데에게 할례가 필요한 이유는 전적으로 유대인 때문이다.

- 디모데가 회당에서 사역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바울의 머리 속에 회당 바깥에서의 사역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 아직까지 바울에게 회당을 벗어난 복음 전도는 상상할 수 없었다.

- 회당 바깥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바울의 계획 속에는 없었다.

- 만약 바울이 회당 바깥에서의 사역을 염두에 뒀다면, 굳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고 회당 바깥 사역을 맡겼을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통해 추정해볼 때, 바울이 아시아와 비두니아로 가려는 의도에는 회당 사역이 중심에 있었다.

- 비교적 회당이 많았던 곳을 돌아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회당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 그래서 회당이 없는 마케도니아의 빌립보로 경로를 트신 것이다.

- 빌립보에 회당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안식일에 성문 밖 강가에 있는 기도 처소로 간 것이다.

[행 16:13] 안식일에 성문 밖 강가로 나가서, 유대 사람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곳을 찾아갔다. 우리는 거기에 앉아서, 모여든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 베드로가 처음 고넬료에게 전도할 때도 하나님의 기적으로 마지못해 갔었던 것처럼, 바울도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끌려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 유대인도 아니며, 회당과도 상관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부류에 복음을 전하신다.

- 그것이 간수의 공동체이다.

간수는 바울의 머리 속에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부류였다.

-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전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말도 안 되는 기적을 통해 바울과 간수를 만나게 하신 것이다.

- 이는 바울의 경험, 상식, 세계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지만, 이러한 계기로 세계관의 파괴와 확장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 힘든 이유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자연 법칙을 어기면서까지 이 일을 일으키셨을까?

간수의 구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길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일까?

- 간수의 구원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것은 무엇인가?

- 사도행전 맥락 안에서 간수의 구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몇 가지 오답을 말해보면,

첫째로, 단순한 사실 기록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 특정한 메시지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단순 사실 기록이란 없다.

- 아니, 성경뿐만 아니라 어떤 기록도 사실 그 자체는 없다.

- 기록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에 의해 취사 선택된다.

- 이는 일기를 써도 마찬가지이다.

둘째로, 간수의 구원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는 입장도 있다.

- 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바울을 멀리서 데려오셨다는 것이다.

- 물론 그런 일은 가능하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적어도 이 사람의 이름 정도는 기록했어야 했다.

- 바로 전에 루디아는 사건도 훨씬 단순하고 비중도 적지만 이름이 기록되었다.

- 아마도 이 이름을 당시 사람들이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 인물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수는 유명하지 않았다.

- 교회 공동체에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 회당도 없는 이방 지역에서 온 가족이 믿음을 가졌으면 영향력 있는 공동체로 성장했을 법 한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 따라서 본문은 간수라는 인물 자체에도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것은 사건이 갖는 상징성이다.

- 사건 자체가 복음에 있어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는 것이다.

그것이 뭐냐?

- 바로 바울의 인식 전환이다.

- 회당 중심의 세계관이 깨진 것이다.

- 하나님께서 유대교와 관련 없는 사람에게조차 전도하길 원하신다는 뜻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나만의 소설인데,

- 나는 바울이 이때를 계기로 '땅끝'의 경계가 확장되고 로마에 가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전까지 바울은 땅끝을 아시아의 에베소 혹은 비두니아라고 생각했다.

- 목표는 지금의 터키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 그곳을 땅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배를 타고 마케도니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한 것이다.

그런데 배를 타고 넘어가 보니, 간수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 전도할 수 있을 거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 말이다.

- 그것도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주도적인 이끄심을 통해서 말이다.

그제야 바울의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 땅끝은 아시아와 비두니아가 아니라, 로마이며 스페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회당이라는 경계에서 벗어나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 그래서 결국 바울은 천부장, 총독 벨릭스, 총독 베스도, 아그립바 왕, 네로 황제까지 복음을 전한다.

 

그것을 위해 바울은 로마에 가려고 그렇게 애쓴 것이다.

- 21장에서 3차 전도 여행 말미에 바울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전도 여행을 말린다.

- 성령의 감동을 받아 두 차례나 가지 말라고 간곡히 말한다.

- 이렇게 공동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도 여행을 계속했던 것은 이때 정확하게 깨닫게 된 사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간수의 구원은 말 그대로 신의 한 수였다.

- 바울이 로마로 갈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으며, 로마를 통해 전 세계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결론 - 사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바울이 사명을 받게된 경위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 바울은 우리와는 다르게 단번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방인의 사도로 매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 그래서 우리도 신비롭게 사명이 임하기만 하면 바울처럼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핑계를 댄다.

그러나 바울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 사명 받는 과정 중에 신비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언제나 신비는 경험을 통해 해석된 이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예수님 죽음 이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수차례 들었다.

-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부활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과 완전히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일어난 이후,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임한 성령 강림을 목격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한 이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눈앞에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 예고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비웃는다.

- 마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 왜냐하면 사람은 경험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 경험의 경계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아무리 확실한 진리라고 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그 지식은 뇌에 자리 잡지 못한다.

- 자리 잡는다고 하더라도 경험의 틀에 난도질당한 채로 왜곡된다.

-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신앙을 포기했다.

- 제자들만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포함하여 온 인류의 문제이다.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라는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먼 눈을 치유해주는 아나니아를 통해 들었을 것이다.

- 그러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 알았다고 해도 고작 회당에 있는 이방인에게 전도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 여전히 바울은 유대교 회당이라는 경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수의 구원을 경험하고 경험의 틀이 확장되자 비로소 사명을 이해하게 된다.

- 이것을 위해 이토록 개연성 없는 사건이 사도행전에 있는 것이다.

-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기 위해 바울의 도움을 받았는데, 바울에게 간수의 구원은 사명을 정의해준 결정적인 사건이기에 사도행전에 꼭 담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도 베드로와 바울과 똑같은 인간이다.

- 경험의 틀에 짓눌려있는 존재이다.

- 경험의 틀에서 눈곱만큼이라도 벗어난 사실에 대해서는 맹인과 다름없다.

-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반복해서 듣고도 예수님의 죽음 앞에 절망하는 꼴이다.

- 그와 비슷한 어리석음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산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말씀을 들었다.

- 복음이 뭔지, 죽음 부활의 의미가 뭔지, 믿고 따르는 것이 뭔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

그런데 문제는 그 지식이 경험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언제나 알듯 말듯 한 것이다.

- 예수님의 죽음 부활 예고를 들은 제자들처럼 말이다.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은?

- 경험을 많이 하면 될까?

- 여행도 많이 다니고, 사람도 많이 만나면 될까?

- 그래서 경험의 틀이 넓어지면 될까?

이것으로는 불가능하다.

-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경험을 쌓은 베드로도 못했다.

- 회심부터 2차 전도 여행 시점까지 15년 동안 돌아다닌 바울도 못했다.

결국 신비의 영역이다.

- 베드로도 보자기에 담긴 벌레 환상을 통해, 바울도 신비한 간수의 구원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 이러한 신비 경험을 통해 경험의 틀이 파괴 그리고 확장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어디서 일어나냐?

-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난다.

-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은 경험의 틀을 부수시고 확장하신다.

- 그래서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 우리는 경험의 노예이기 때문에, 경험의 확장을 통해서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신비가 일어나길 넋 놓고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

- 한편으로는, 그렇다.

- 별 달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 감 나무 밑에 누워 감 떨어지기를 입 벌리고 기다릴 수 밖에 없다.

-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과 전혀 상관 없이 마음대로 행하신다.

- 어쩔 수 없이 은혜로 주어지기를 하염 없이 기다리는 수 밖에.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너무 무책임하니, 한 마디만 더 하면,

- 경험의 확장이 진리를 깨닫게 하는데 필요한 두 가지 노력이 있다.

첫째로, 진리를 지식적으로라도 알아야 한다.

-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적어도 머리로는 알았던 것처럼 말이다.

-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셨을 때,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며 참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그러니 성경 읽고 이해하는 것은 깨닫던 못하던 계속 해야 한다.

- 성경을 모르면 아무리 경험의 확장이 일어나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둘째로, 일상을 신앙과 연결시킬 줄 알아야 한다.

- 그래야 일상에서 일어난 신비를 통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 그렇지 않으면 신비는 단지 재밌었던 일로 전락한다.

- 그래서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눅 21:36]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과 기도 뿐이다.

- 나머지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실 것이다.

- 베드로가 고넬료를 통해 복음이 유대인에서 온 인류로 확장된 것처럼.

- 바울이 간수를 통해 땅 끝을 깨달은 것처럼.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