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나온 설교문이다.
- 이전 설교문은 13장에서 1차 선교 여행 중에 나온다.
- 바울이 키프로스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회당의 유대인들에게 했다.
[행 13:16] 그래서 바울은 일어나서, 손을 흔들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 시작부터 바울의 대상은 이스라엘 동포였다.
- 이전까지 바울은 회당이라는 틀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회당 밖의 이방인에게 이른다.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 유대교 색채를 완전히 배제한다.
- 성경과 유대교를 알지 못한다고 전제한다.
- 그래서 성경을 인용하지 않는다.
- 오히려 헬라 시를 인용한다.
따라서 본문은 회당 밖에서의 첫 설교문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 주목하여 봐야 할까?
두 가지이다.
- 첫째는 당연하게도, 논리 전개 방식이다.
- 바울이 이방인에게 어떤 논리로 복음을 전하는지 보자.
- 둘째로,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사전 인식이다.
- 어떤 인식에서 그러한 논리가 나왔는지 보자.
이 두 가지를 통해 우리는 바울이 왜 이런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렇게 논리의 방식과 논리의 대상을 함께 볼 때, 논리를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비유로 설명하면,
- 마치 창밖의 풍경을 볼 때, 창문으로 보이는 모습과 동시에 창문 자체를 봐야 하는 것과 같다.
- 창문에 선팅이 되어 있는지, 왜곡은 없는지를 알아야, 실제 풍경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설교문에는 '아테네의 이방인'이라는 필터가 입혀있다.
- 그들의 특징은 종교심과 호기심이다.
- 바울은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한다.
- 따라서 이것이 설교문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보자.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 만약 종교심과 호기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설교문이 필요 없을까?
우리가 이 설교문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 종교에 대한 호기심이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는 시대에 살기 때문이다.
- 종교는 연약한 사람의 위로 수단이며, 비이성, 비논리의 대표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이 설교문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한 호기심이 우리 시대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해서, 종교에 대한 호기심의 본질은 생존 욕구이다.
- 이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지만, 생략하겠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 대충 짐작할 것이다.
- 배고플 때 종교는 위로 수단이 되고, 배부를 때 종교는 유희 수단이 된다.
- 사람은 배부르고 할 일 없을 때 유희 수단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 배부를 때 유희 수단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생존 수단이다.
마치 돈 많고 할 일 없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게임에 연봉을 쏟아붓는 것과 같다.
- 배부른 아테네 시민들은 종교에 인생을 쏟아부으며 생존 욕구를 채웠을 것이다.
이렇게 배고픈 사람은 배고픈 사람대로, 배부른 사람은 배부른 사람대로 종교는 생존 욕구를 채우는 수단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존 욕구를 어떻게 채우는가?
이 질문 이전에 필요한 질문은, 우리는 배부른가 배고픈가이다.
- 답은, 우리는 배고프면서 배부르다.
풀어 말하면, 우리는 여전히 배 채우기 위해 산다.
- 인생에서 배 채우기 위해 소모하는 시간이 상당하다.
- 여전히 인생을 갈아 넣지 않으면 배고플 수 있는 위기 속에 산다.
반면에 배고픈 것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 배를 채우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산다.
- 다시 말해서, 인생의 상당 부분은 유희 수단이다.
- 또 다른 말로, 생존이 아닌 성장을 위해 산다.
- 여기서 성장은, 자아 추구, 자아 실현, 사람들의 인정 등을 포함한다.
이렇게 우리는 생존과 성장 둘 다를 위해 살고 있다.
- 생존과 성장 둘 다 생존 욕구의 발현이다.
- 배고픈 사람은 생존으로, 배부른 사람은 성장으로 생존 욕구를 채운다.
그러면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생존 욕구를 어떻게 채우는가?
- 생존과 성장으로 채운다.
직업을 왜 갖느냐?
- 배고프니까 갖는다.
- 생존을 위해서이다.
- 동시에 배부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갖는다.
- 성장을 위해서이다.
만약 우리에게 돈이 없으면,
- 굶어 죽을 수도 있다.
- 그러나 현재 시대는 돈이 없어서 굶어 죽는 일은 드물다.
- 하지만 돈이 없으면, 사회에서 소외되고 매장당한다.
- 즉, 육체적 죽음에 이르지는 않지만, 사회적 죽음에 이른다.
- 따라서 돈은 육체적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생존), 사회적 죽음을 피하기 위해 더 필요하다(성장).
이것이 우리가 생존 욕구를 채우는 모습이다.
아테네 시민들이 종교에 호기심을 가졌던 이유도 이와 같다.
- 우상을 섬기고 제사를 드릴 때, 자연재해 없이 농작물이 잘 자라서 배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 생존을 위해서이다.
- 또한 이미 배부른 상황에서 더 이상 생존을 위한 노력은 필요 없지만, 생존 그 이상의 성장을 위해 혹은 다른 말로 유희를 위해 종교를 가지고 놀았다.
-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에게 종교가 최첨단의 기술이며, 학문이며, 놀이였기 때문이다.
- 즉, 생존 욕구를 채우기 위해 종교에 호기심을 가졌다.
따라서 바울이 비판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호기심 기저에 있는 생존 본능이다.
- 특히 자신의 생존을 위해 종교를 통해 신까지도 이용하고 거래하는 태도이다.
- 신을 사람의 손으로 섬기면, 생존 욕구를 채울 수 있다는 착각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생각 기저에는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 신을 잘 구워삶으면, 세상을 내가 원하는 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 다른 말로, 주변 사람을 잘 구워 삶으면, 그 사람을 내가 원하는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 세상, 사람, 신이 내 아래 있다는 우월감으로부터 나온 생각이다.
그래서 세상과 주변 사람 그리고 신까지도 이용하고 거래해서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것이다.
- 바울 비판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 모든 인류가 가진 생존 본능과 생존 본능을 구현하기 위한 거래 관계를 비판하는 것이다.
- 그 생각에서 나온 전형적인 현상이 우상 숭배이다.
- 그래서 우상 숭배를 비판하는 것이다.
바울의 호소는 그것이 정말 맞냐는 것이다.
- 정말 세상과 사람과 신이 거래 대상이 될 수 있냐는 것이다.
- 그것을 생존을 위해 그렇게 마음대로 이용해도 되냐는 것이다.
- 그렇게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 그것을 아테네 사람들의 상식과 시를 통해 증명한 것이다.
이것이 아테네 시민과 우리가 연결되는 지점이다.
- 이러한 접점 속에서 볼 때야 비로소 본문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 바울이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호소가 우리 귀에 들린다.
- 우리가 왜 회개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우리도 생존 욕구에 매여 있는 한, 세상, 사람, 신을 언제나 이용 수단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우리는 그것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총동원한다.
-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부정하고, 생존에 필요한가를 기준으로만 평가한다.
- 혹은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도록 변형, 왜곡, 조롱, 칭찬, 격려, 굴욕, 놀림, 억압, 찬양, 예배, 협박, 협상, 합의한다.
이것이 인류가 가진 가장 비극적인 숙명이다.
- 생존 욕구에 매여, 세상, 사람, 신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 순수한 그 자체로의 가치를 깨달을 수 없다.
- 모든 것을 보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 살아있지만, 실상은 죽은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생존 욕구를 위해 종교를 갖고,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육아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 종교와 사업과 직장과 육아 때문에 우리 인생 전체를 전부 죽여버리고 있다.
- 모든 것을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아무것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이 비극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냐?
- 생존 욕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냐?
- 결국 죽음과 부활뿐이다.
- 부활의 믿음 속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욕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래야만 세상, 사람, 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 거래의 수단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볼 수 있다.
- 그러다가 죽을 수는 있지만, 살아 있는 동안 만큼은 말 그대로 살아 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냐?
사람이 어떻게 거래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변화될 수 있냐?
- 세상, 사람, 신을 아무리 거래 관계로 이용, 조정, 통제하려고 해도 안 될 때이다.
- 딱 이 방법 하나뿐이다.
- 한 마디로, 실패이다.
- 내 주변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이다.
그제서야 사람은 그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그것을 모르고 마음대로 이용하려고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 세상 만물이, 신까지도 나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했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이후에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보인다.
- 세상은 세상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신은 신대로 보인다.
- 그리고 각각의 고유한 매력이 보인다.
- 이용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가치가 보인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된다.
-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게 된다.
- 사랑하기 마땅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 생존을 포기하는 것이다.
- 그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 그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면 본문의 논리 방식을 보자.
대전제: 절대 신은 부족한 것이 없다.
- 왜냐하면 절대 신이니까. 이는 상식이다.
[행 17:25]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소전제: 그런데 그 신을 사람은 만날 수 있고 또 알 수 있다.
- 즉, 절대 신의 절대성을 알 수 있다.
- 왜냐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니까.
[행 17:27~28]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결론: 따라서 절대 신을 사람이 만든 우상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즉, 절대 신에게 부족한 것을 제공하여 섬긴다는 생각은 틀렸다.
- 왜냐하면 절대 신은 부족한 것이 없으니까.
[행 17:29]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신을,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새겨서 만든 것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정리하면, 바울은 우상 숭배를 비판하는데, 두 가지 근거를 사용한다.
- 첫째는, 상식이라는 대전제이다.
- '절대 신'은 부족한 것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둘째는, 아테네 시민들의 경험이라는 소전제이다.
- 아테네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
- 이 둘은 아테네 시민들이라면 절대로 반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비판 역시 반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우상 숭배가 일상이며 생존 욕구였던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비판이지만 말이다.
- 그들은 신에게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섬길 필요가 없다는 것(대전제)을 이미 알고 있었다(소전제).
이렇게 바울은 우상 숭배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모순되는지 증명했다.
- 아테네 스타일로 말이다.
- 부족한 것이 없는 절대 신에게는 섬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 그런 신의 절대성을 사람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특히 종교 전문가 집단인 아테네 시민들은 더욱 그랬다.
이들은 신을 섬기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우상 숭배를 한 것이다.
-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기에만 숭배일 뿐, 실상은 지배, 통치, 억압이었다.
편의점 예를 들어보자.
- 우리는 한 달 동안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혼신을 다해 직장에서 일한다.
- 그렇게 한달의 인생을 갈아 넣어서 거룩하고 귀한 월급을 받는다.
- 그 소중한 월급을 조심스럽게 가지고 경건한 마음으로 편의점에 간다.
- 편의점 아저씨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드린 후, 거룩한 마음으로 돈을 바친다.
- 그러면 아저씨는 위엄 있는 표정으로 필요한 물건을 하사하신다.
- 우리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그 물건을 받아 감격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실상이다.
- 우리는 다 안다.
- 겉으로 보기에는 편의점 아저씨를 숭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돈으로 아저씨를 지배, 통치, 억압하는 것이다.
- 실상은 돈을 제공하는 사람이 갑, 받는 사람이 을이다.
- 언제나 갑이 을을 지배한다.
- 이것이 우상 숭배의 우스운 실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바울은 회개를 선포한 것이다.
[행 17:30] 하나님께서는 무지했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 우상 숭배는 그 자체로 신에 대한 모독이며 신을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신과 거래하려는 생각에서 돌이켜 신을 신답게 여기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전보다 회개가 더 중요해진 이유는 심판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행 17:31]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자신이 생명의 주권자임을 증명하셨다.
- 그 주권자께서 생명을 완전히 빼앗으실 날이 가깝기에 속히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반응은 둘로 갈렸다.
- 비웃는 사람도 있었고,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었다.
- 그럼에도 일부가 믿음을 가졌다.
- 그러나 아테네 교회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아, 그 세력이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결론 - 세상의 지배자는 누구인가? 돈인가, 하나님인가?
바울의 삼단 논법을 우리에게 맞게 변형하면,
- 대전제: 돈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 소전제: 그러한 돈의 본질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 결론: 따라서 돈을 의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아테네 시민은 우상이 원하는 것을 줄 것이라고 착각했다.
- 게다가 그들은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 이것이 그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 생존 욕구에 눈이 가려,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조차 깨닫지 못했다.
- 자기 기만에 빠졌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돈이 원하는 것을 줄 것이라고 착각한다.
- 돈이 우리에게 명예든, 안정이든, 인정이든 뭐든 줄 것으로 생각한다.
- 돈을 확장하여,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 세상은 우리에게 이용당해주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 세상은 가혹하게 동시에 은밀하게 우리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곳이다.
-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것처럼 속여서 세상 안으로 끌어들인 후, 철저하게 이용한 후 단물이 다 빠져서 쓸모없어지면 탑골 공원으로, 노인정으로, 요양원으로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무덤으로 퇴출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에 헌신한다.
- 생존 욕구에 눈이 가려,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 자기 기만에 빠진다.
- 처음에는 세상이 원하는 것을 줄 것이라는 세상의 거짓말에 속는다.
- 그리고 이후에는 세상이 원하는 것을 줄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기만한다.
그러나 세상이 원하는 것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세상 모독'이다.
- 세상을 무시하는 생각이다.
-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존재라면, 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주겠는가.
- 그 능력으로 우리를 이용하지.
- 세상은 우리에게 이용당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 세상이 우리에게 이용당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우리가 어리석은 것이지.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사과해야 한다.
- 세상을 무시했던 것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
- 세상의 능력을 인정하고, 이용 대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존중해야 한다.
- 세상을 이용하기 위해 사랑했던 것을 그만두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 그럴 때야 비로소 우리는 세상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유 하나만 더 하겠다.
우리는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돈 없이 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입고, 먹고, 자는 것, 이동하기 위한 교통비, 숨쉬기 위한 마스크까지 전부 돈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이면 충분하고 돈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 우리는 비웃는다.
- 정말 돈 없이 살 수 있는지 두고 보자며, 계속해서 주시한다.
- 그러다가 돈이 없어 애타하는 모습을 보면, 겉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럴 줄 알았다며 비웃는다.
- 그를 보며 돈으로 안정적인 삶을 사는 자신의 모습에 안도한다.
그런데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자.
- 만약 이와 같은 생각을 하나님 나라에서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 하나님 나라에서조차 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 입고, 먹고, 자고, 이동하고, 숨 쉬기 위해 하나님 나라에서도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 하나님은 웃으실 것이다.
- 정말 돈으로 살 수 있는지 두고 보자며, 계속해서 주시하실 것이다.
- 그러다가 돈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을 보시고, 그럴 줄 알았다며 안타까워하실 것이다.
- 하나님이면 입고, 먹고, 자는 것에 충분한데 말이다.
하나님은 같은 마음으로 세상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실 것이다.
- 돈으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데도, 돈에 인생을 쏟아붓는 우리를 보시며 안타까워하실 것이다.
- 우리가 돈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안타까워하듯, 하나님은 돈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우리를 안타까워하실 것이다.
- 과연 누가 옳을까?
세상이 돈에 의해 움직이는지,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 세상이 돈에 의해 움직이며 세상 사는데 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 순진한지, 아니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며 돈 없이 하나님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더 순진한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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