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해야 하는 성경 읽기 태도가 있는데,
- 성경의 사건이나 인물을 우리와는 다른, 특별하고 신령한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 성경에 신령함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신령함으로만 보는 것이 문제다.
- 모든 것을 신령함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을 자세히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 '하나님이 어련히 잘하셨겠지'라며 그냥 넘어간다.
예를 들어, 바울의 전도 여행 경로를 단지 하나님의 이끄심으로만 해석한다.
- 그래서 그 안에 있는 바울의 고뇌, 갈등, 도전, 합리적인 판단 등을 간과한다.
- 그 결과 신앙 생활도 그렇게 고뇌, 갈등, 도전, 합리적 판단 없이 희희낙락하며 하나님만 따라다니는 것으로 오해한다.
- 그리고 그렇게 순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것이라고 정죄한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우리와 똑같이 언제나 고민했고 실수했다.
- 고정 관념, 편견, 이전 경험에 매여 바른 길로 가지 못했다.
- 그렇게 실수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상황을 바로 잡아 주셨다.
- 하나님의 은혜로 바른 길로 갈 수 있었다.
그런 예로, 빌립보 간수의 구원 사건이 있다.
- 바울이 이전 경험에 매여 회당 밖 이방인에게 전도하지 않자, 하나님은 우연을 가장하여 강제로 전도를 시키셨다.
- 이 경험을 통해 바울은 실수를 바로 잡고, 아테네에서 회당 밖 이방인에게 전도한다.
- 회당 안이라는 이전 경험이 극복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등장하시길 바란다.
- 환상과 기적을 통해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시길 바란다.
-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사건만 기억에 오래 남기 때문이다.
- 실제로 성경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른 길로 가고 있다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다.
- 하나님에 의해 잘 만들어진 자연 질서를 굳이 하나님이 파괴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신다.
- 가만히 두고 보시며, 우리에게 용기만 북돋아 주신다.
- 그것이 신앙 생활의 대부분이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시점은, 우리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이다.
- 가만 놔둬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가버릴 위험이 있을 때이다.
-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바른 길로 인도해주신다.
- 바울처럼 말이다.
따라서 신앙 생활에서 기적은 많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적으면 좋은 것이다.
-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잘 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성경 속의 사건들도 대부분은 일상적, 정상적인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 신령한 관점을 가급적 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사람은 언제나 극적이고 신령한 사건을 잘 기억하기 마련이다.
- 그러니 우리는 의지적으로 신령한 관점을 배제하려 노력할 때 균형 있는 관점을 가질 수 있다.
- 즉, 성경을 신령함이라는 편견 없이 바르게 읽을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바울을 보자.
본문에서 신령함으로 오해될 수 있는 부분은 세 부분이다.
- 첫째는, 바울이 아테네에서 고린도로 간 것.
- 이것을 단지 하나님께서 이끄셨다고 생각한다.
- 둘째는, 바울이 환상을 본 것.
- 말할 필요도 없다.
- 셋째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일 년 반 동안 머무른 것.
-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 나머지 사건, 즉 바울이 회당에서 전도하는 것, 회당에서 박해를 받는 것, 회당을 떠나는 것, 이방인 디디오 유스도의 집으로 가는 것, 총독에게 재판을 받다가 무혐의로 풀려나는 것 등은 누가 봐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상황이다.
첫째로, 바울이 아테네에서 고린도로 간 것.
아테네까지 온 바울이 고린도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 아테네에서 78km로 가깝다.
- 고대 그리스 시대에 정치 중심지가 아테네였다면, 경제 중심지는 고린도였다.
- 그리스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두 개의 항구(겐그레아, 레카움) 덕분에 경제 번역을 이뤘다.
- 사도행전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는 아테네보다 더 큰 도시였다.
게다가 고린도에서 일어나는 사건도 이전과 비슷하다.
- 바울은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다.
- 그러면 다수는 거부하고, 소수 사람들이 수용한다.
- 그렇게 바울의 영향력이 조금씩 커지자, 유대 사람들이 힘을 모아 바울을 박해한다.
여기서부터는 이전과 차이가 나는데,
- 이전에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박해를 받은 즉시 떠났다.
-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환상과 총독의 도움으로 일 년 반 동안 머문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둘째로, 바울이 환상을 본 것.
바울은 호방하게 회당 문을 박차고 나왔다.
- 이방인에게 갈 것이라며 옷의 먼지까지 털어버렸다.
그런데 갈 곳이 없다.
- 처음 와본 곳인데 아는 사람도 없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다.
- 그러니 어디를 가겠는가.
- 갈 곳이라곤 또 역시 회당에서 만난 사람의 집뿐이다.
- 물론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
- 회당장까지 전도를 했다.
하지만 바울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유대 사람들의 박해에 못 이기고 고린도를 떠나려 했다.
-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에서처럼 말이다.
- 이것이 이전 경험에 매여 있었던 바울의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돌변하셨다.
- 이전처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으셨다.
- 이러한 돌변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고린도에 특별한 계획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 반면에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바울을 그냥 두면 아무런 성과 없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것이다.
- 그래서 그냥 놔두면 하나님의 전도 계획이 틀어질 위기에 놓이신 것이다.
- 이를 보다 못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돌변하셔서 적극적인 개입을 하신 것이다.
-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너무 못 알아들어서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상을 보이셨다.
-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명령하신다.
- 왜냐하면, 바울이 너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잠자코 있지 말아라!'고 명령하신다.
- 왜냐하면, 바울이 두려운 나머지 잠자코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뭘 두려워했을까?
- 먼저 유대 사람들의 박해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 예수님처럼 유대 사람에 의해 로마 총독에게 죽임당할까 봐 두려워했을 것이다.
- 다음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두려워했을 것이다.
- 아테네에서는 광장이라는 무대라도 있어서 전도할 수 있었지만, 고린도는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역이 무위로 돌아갈지 몰라 두려워했을 것이다.
- 마케도니아(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가야(고린도)까지 와서 도망만 다녔지 제대로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온 환상은 바울이 믿음에 굳건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다.
- 믿음이 흔들려, 갈 곳 잃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 가만두고 보실 수 없어서 나온 것이다.
- 신령한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불신의 결과이다.
셋째로, 바울이 고린도에서 일 년 반 동안 머무른 것.
왜 바울은 고린도에서 오래 머물렀을까?
- 과연 하나님의 계시 때문일까?
- 박해도 없었던 아테네에서는 바로 떠난 것과 비교된다.
추측하기로, 아테네에서는 반응이 나빴기 때문이다.
- 회당에서도 반응이 적었고, 광장(아고라)에서 역시 듣기만 할 뿐 반응은 없었다.
- 얼마나 적었으면, 교회 공동체조차 만들어지지 않았겠는가.
반면에 고린도에서는 반응이 좋았다.
- 심지어 회당장 그리스보까지 예수님을 믿게 된다.
- 게다가 유대 사람들의 박해도 총독이 막아줬다.
-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하에 바울은 고린도를 선택한 것이다.
- 신령한 계시 때문이 아니다.
이렇게 바울은 신령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이 아니다.
- 자신의 이전 경험을 극복하고 새롭게 도전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 그냥 하던 대로 했고, 상황에 맞게 합리적인 결정을 했다.
- 물론 전도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그 역시 한계가 있었다.
- 박해 앞에 도망가기 바빴다.
이것이 본문에 나온 바울의 실상이다.
- 물론 상상이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환상과 바울을 비하하려 한다.
- 가급적 신령한 관점을 배제하려 한다.
- 환상은 기도할 때 얻은 영감과 크게 다르지 않고, 바울의 사역 역시 우리의 직장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 환상이 필요 없고, 바울이 하찮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환상이라는 사건 자체, 바울이라는 인물 자체의 매력에 매몰되지 않기 때문이다.
- 오로지 하나님의 신령하심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 그것이 성경의 기록 목적이기 때문이다.
- 환상과 바울의 매력에 매몰되면, 모든 것을 주도하신 하나님이 소외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얼마나 철저히 지키시냐면,
- 하나님 자신의 몸이신 예수님까지도 가혹하게 비하하신다.
-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찬란한 영광을 비하하고, 배제하고, 박살내시기 위해 예수님을 가차 없이 죽이신다.
-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매력에 사람들이 매몰되지 않도록 예수님을 제거해버리신다.
- 하나님은 이만큼 이 목적에 민감하시다.
- 이 목적을 방해하는 존재는 잔인하게 대응하신다.
또한 이는 우리가 읽고 있는 에스겔에 잘 나온다.
- 하나님은 자신이 영광 받아야 할 유일한 존재이며 주인이심을 다양한 방법으로 증명하신다.
-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렇게 많이 말이다.
- 한번 훑어보자.
[겔 6:7] 너희 한가운데서는 칼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을 것이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6:10]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런 재앙을 내리겠다고 공연히 말한 것이 아님도 알게 될 것이다.
[겔 6:13]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서 전쟁에서 죽은 시체들은 그들의 우상들 사이에서 뒹굴고, 그들의 제단들 둘레에서도 뒹굴고, 높은 언덕마다, 산 봉우리마다, 푸른 나무 밑에마다, 가지가 무성한 상수리나무 밑에마다, 자기들이 모든 우상에게 향기로운 제물을 바치던 곳에는, 어디에나 그 시체들이 뒹굴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내가 주인 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겔 6:14] 내가 그렇게 나의 손을 펴서 그들을 치고, 그 땅을 남쪽의 광야에서부터 북쪽의 디블라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거주하는 모든 곳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내가 주인 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겔 7:4] 내가 너희를 아끼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겠다. 오히려 나는 너희의 모든 행실에 따라 너희를 벌하여, 역겨운 일들이 바로 너희의 한가운데서 벌어지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내가 주인 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겔 7:9] 내가 너희를 아끼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겠다. 오히려 나는 너희의 모든 행실에 따라 너희를 벌하여, 역겨운 일들이 바로 너희의 한가운데서 벌어지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주가 이렇게 치는 것임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겔 7:27] 왕은 통곡하고, 지도자들은 절망에 빠지고, 이 땅의 백성은 무서워서 벌벌 떨 것이다.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이 심판받아야 하는 그대로 그들을 심판하겠다.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11:10] 너희가 칼에 쓰러질 것이다.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의 국경에서 심판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11:12]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정하여 둔 율례대로 생활하지 않았으며, 내가 정하여 준 규례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너희의 주위에 있는 이방 사람들의 규례를 따라 행동하였다.
[겔 12:15] 내가 그들을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흩어지게 하며, 모든 나라 가운데로 쫓아 버릴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겔 13:9] 헛된 환상을 보고 속이는 점괘를 말하는 그 예언자들을 내가 직접 치겠다. 그들은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올 수도 없고,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 등록될 수도 없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 하나님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17:21] 그의 모든 군대 가운데서 도망한 사람들은 모두 칼에 쓰러질 것이며, 살아 남은 사람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이렇게 말한 것이 나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20:38] 나는 너희 가운데서 나에게 반역하고 범죄한 사람들을 없애 버리겠다. 그들이 지금 거주하는 땅에서, 내가 그들을 데리고 나오기는 하겠으나, 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20:42] 내가 이렇게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곧 내가 너희 조상에게 주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면,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20:44]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너희의 악한 길과 타락한 행실에 따라, 그대로 너희에게 갚았어야 했지만, 내 이름에 욕이 될까봐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겔 22:16] 너는 이방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23:49] 너희가 음행을 저지른 이유로 형벌을 받고 나면, 그리고 너희가 우상들을 섬기다가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을 받고 나면, 그 때에야 너희는 내가 주 하나님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24:24] 에스겔이 이와 같이 너희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너희도 그가 한 것과 똑같이 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에야, 너희는 비로소 내가 주 하나님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24:27] 그 날에 네 입이 열려 그 탈출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다시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표징이 되면,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25:5] 내가 랍바를 낙타의 우리로 만들고, 암몬 족속이 사는 곳을 양 떼가 눕는 곳으로 만들겠다. 그 때에야 너희가 비로소, 내가 주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겔 28:23] 내가 네게 전염병을 보내고, 너의 거리에 피가 냇물처럼 흐르게 하겠다. 사방에서 적들이 몰려와서 칼로 너를 치면, 사람들이 네 한가운데서 쓰러질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28:26] 그들이 집을 짓고, 포도나무를 심고, 평안히 그 땅에서 살 것이다. 내가, 그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모두 심판하면, 그들이 평안히 살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나 주가 자기들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겔 29:6] 그 때에야 비로소 이집트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 족속을 속이는 갈대 지팡이밖에 되지 못하였다.
[겔 30:19] 내가 이렇게 이집트를 심판할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33:29] 그들이 저지른 그 모든 역겨운 일 때문에, 내가 그 땅을 황무지와 폐허로 만들어 놓으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34:27]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은 그 소산을 내어 줄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평안히 살 것이다. 그들이 멘 멍에의 나무를 내가 부러뜨리고, 그들을 노예로 삼은 사람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하여 주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34:30]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나 주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과, 그들이 내 백성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겔 35:4] 내가 네 성읍들을 폐허로 만들면 너는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겔 35:11]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분노를 터뜨리고 질투를 한 것과 똑같이, 나도 네게 보복하겠다. 내가 너를 심판할 때에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겔 35:12] 그 때에야 비로소 너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또 이스라엘의 산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 산들이 황폐해졌으니 너희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며 조롱하였지만, 내가 너에게 보복하는 날, 너는 네가 조롱하는 소리를 내가 다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겔 37:6]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작은 일에 쉽게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 바울은 유대 사람들의 박해로 인해 위축되었다.
- 두려움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 이전에 그랬던 것과 같이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만, 그것을 현실의 문제 앞에 적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못난 바울에게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 환상을 통해 바울을 진정시키셨다.
-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던 바울을 붙잡아 두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능력을 일부 맛보기로 보여주신다.
- 그것이 총독 갈리오의 판결이다.
- 그는 총독 빌라도와는 다르게 종교 문제를 정치 문제와 혼동하지 않았다.
- 바울이 유대교 안에서는 문제가 될지언정, 로마를 반역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로써 바울은 오랫동안, 편안하게,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 그래서 고린도에는 큰 교회 공동체가 생긴 것이다.
- 고린도 전후서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길 만큼 크고 복잡한 교회 말이다.
마지막으로 다룰 것은 재판 후의 상황이다.
갑자기 유대 사람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때린다. 왜일까?
- 아마도 재판에서 진 것에 대한 보복성인 것 같은데, 그 대상이 왜 하필 회당장 소스데네일까?
- 단지 그가 회당장이라는 이유 때문일까?
- 재판에서 진 것이 그렇게 군중에게 맞을 만큼 큰 잘못일까?
결론적으로 추정하길, 이 소스데네는 유대 사람들에게 스파이였다.
- 왜냐하면 소스데네가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가 재판을 무혐의로 끌어내는데 일정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고린도전서 때문이다.
[고전 1:1]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가,
- 고린도전서의 공동 발신자로 소개되기 때문이다.
- 게다가 고린도전서에 소스데네 직전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도 언급된다.
[고전 1:14] 내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침례를 준 일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물론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름을 언급할 만큼 고린도 교회에 유명하다면, 회당장 소스데네일 가능성도 크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소스데네를 때린 것이다.
- 바울의 스파이로서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스파이까지 보내셔서 바울을 보호하신 것이다.
- 이렇게 바울은 큰 보호 속에서 사역했다.
- 바울이 과감하게 복음을 전했던 사역 뒤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셨다.
- 바울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린 셈이다.
결론 - 바울이 한 것은 별로 없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 바울은 그냥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할 일이 없으니 기도한 것뿐이다.
-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한 것은 분명하다.
- 그러나 누구라도 그 상황과 그 자리에 있었으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을 보고 바울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 특히 중세 로마 교회가 그랬다.
- 바울을 숭배했다.
그러나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 바울을 우리와 구별한다.
- 바울과 같은 사역은 바울이니까 한 것으로 치부한다.
- 우리는 바울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한다.
- 우리는 바울의 신앙을 동경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바울처럼 될까 봐 두려워한다.
- 결혼도 안 하고, 평생을 떠돌면서, 매나 맞고 욕이나 먹는 바울의 인생이 우리 인생에 조금이라도 들어오면 몸서리친다.
이것이 바울 숭배의 가장 큰 문제이다.
- 바울이 위대해질수록 하나님은 처량해진다.
- 하나님의 능력은 한없이 작아진다.
- 동시에 우리의 신앙도 함께 작아진다.
- 바울이 우리의 무능력한 신앙을 합리화해주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바울을 내리누르는 것이다.
- 바울을 누르는 만큼 하나님이 올라가시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올라가시는 만큼 우리 신앙의 능력도 함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 우리도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 우리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좋으니까 말이다.
바울도 매 순간마다 두려워했다.
- 그래서 입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 잠자코 있기만 했다.
우리도 신앙 생활을 생각하면 두렵다.
- 입도 굳고 몸도 굳는다.
- 인생에 정말 큰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된다.
- 안정과 인정이 위협 받을까 봐 두렵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위로하고 격려하신다.
- 단지 말뿐인 위로가 아니다.
- 실제로 상황을 바꾸신다.
- 두렵지 않도록 박해를 막아주신다.
- 마음껏 전도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 주신다.
-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문제점을 분석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지 않아도 된다.
- 하나님께서 상황을 통해 깨달을 수밖에 없도록 해주신다.
그렇다고 아무런 고통도 없는 탄탄대로라는 것은 아니다.
- 여전히 박해는 있다.
- 깨달은 것을 순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신다.
-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다.
- 바울이 아테네에서 고린도에 간 것처럼, 그리고 고린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성경에서 제시하는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성찰, 윤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희생, 정치학에서 말하는 설득 기술 등 우리 힘으로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 그런데 자기 성찰, 자기 희생, 설득 기술을 모두 가졌다고 생각되는 바울조차 실제로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 하나님이 주신 것뿐이다.
- 한번에 뿅이 아니라 긴 전도 여정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하셨다.
- 게다가 깨달은 것을 순종할 기회까지 만들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위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 우리가 믿음이 굳건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 하나님 때문에 성경에서 나오는 신앙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 바울의 자기 성찰, 자기 희생, 설득 기술을 모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이렇게 매력적이다.
- 인간의 잠재력을 최대로 끌어 올려준다.
- 그래서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 심리적으로,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최고의 인간을 만들어준다.
-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같이 만들어준다.
이것이 바로 신앙 생활이다.
- 이렇게 좋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초대하시는 것이다.
- 우리를 이용하고 부려먹으시려는 것이 아니다.
- 우리에게 생존과 성장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바로 그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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