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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35) 18:18-28 문제적 남자 아볼로 - 3차 전도 여행의 촉발자

아볼로를 설교 주제로 삼은 이유는 뒤로 미루고,

- 먼저 성경 읽는 태도 이야기를 하겠다.

여러 번 말했지만, 창문으로 풍경을 볼 때 두 가지가 중요하다.

-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과 <풍경을 보여주는 창문>을 알아야 한다.

- 그래서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에서 창문의 왜곡을 바로잡아야 왜곡 없는 실제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 본문을 통해 보이는 상황과 본문이 왜곡하고 있는 점을 알아야 한다.

- 그래야 바울의 실제 상황이 어땠는지 더 정확하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풍경을 보여주는 창문과 바울을 보여주는 본문에는 차이가 있다.

- 창문은 아무 의도 없이 풍경을 왜곡시키기만 한다.

- 즉, 창문의 왜곡은 단순한 오류이다.

- 반면 본문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바울의 일부를 부각해서 보여준다.

- 즉, 본문의 왜곡은 정보이다.

- 따라서 창문은 왜곡하는 반면, 본문은 강조한다.

다르게 말해서, 성경을 세심하게 읽어야 하는 목적은 두 가지이다.

- 첫째는, 실제로 바울이 어땠냐를 아는 것이다.

- 이는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에서 창문의 왜곡을 바로잡듯, 본문의 강조점을 배제하여 본문을 보는 것이다.

- 그래서 본문이 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 둘째는, 실제로 바울이 어땠느냐는 상관없이, 본문이 무엇을 강조하는지 아는 것이다.

- 이는 어찌 보면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도, 실제 풍경도 아닌 창문 그 자체만 보는 것이다.

- 창문과 다르게 성경 본문에는 의도, 목적, 강조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 창문은 그 자체로 아무 의미 없지만, 본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성경 해설서를 비판하기 위함이다.

- 성경 해설서는 첫째 목적만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 실제 바울이 어땠느냐만 알려고 노력한다.

- 물론 그조차도 생각하지 않고 성경을 일차원적으로만 읽는 경우도 많다.

- 예를 들것도 없이, 우리가 수없이 경험했다.

- 하지만 첫째 목적도 반쪽짜리이긴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수단이다.

- 목적은 그것을 통해 본문이 강조하는 것을 더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 성경을 읽는 목적은 초대 교회 당시의 역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 그것이 성경을 읽는 한쪽짜리 목적이다.

 

성경 해설서가 집중한 것은 다음과 같다.

- 바울이 왜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 했을까?

- 그리고 에베소에서 왜 서둘러 떠났을까?

- 아마도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 또,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게 한 서원은 무엇일까?

-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과 부르기아 지방에서 무엇을 했을까?

- 아볼로가 알지 못했던 것은 무엇인가?

- 아볼로가 고린도로 가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중에 일부는 나도 궁금하다.

- 하지만 알 수 없거나, 알 필요 없다.

- 본문은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숨긴다.

- 왜냐하면 목적한 바를 더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 본문이 숨기고 드러냄으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말이다.

-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려는 이유를 숨긴다.

- 바울이 서원한 것이 무엇인지 숨긴다.

-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과 부르기아 지방에서 무엇을 했는지 숨긴다.

- 본문이 왜 이런 것을 숨겼는지 알아야 한다.

대신에 드러내는 것은,

-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를 들러 예루살렘과 안디옥 방문을 드러낸다.

- 이를 통해 배경의 전환을 드러낸다.

- 또 에베소에 미련이 남았음을 드러낸다.

- 이를 통해 3차 전도 여행에서 에베소에 3년이나 머물 것을 암시한다.

- 그리고 아볼로의 영향력과 고린도 행을 드러낸다.

- 그리고나서 19장부터 본격적인 3차 전도 여행이 에베소에서 시작된다.

- 왜 이런 것을 드러냈는지 알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언제나 그랬듯, 본문이 이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내가 궁금한 것은 숨겨져 있고, 궁금하지 않은 것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 난 전도 여행 중에 왜 갑자기 급하게 예루살렘에 가는지, 갑자기 머리는 왜 깎는지, 에베소에는 왜 다시 오려고 하는지, 갈라디아 지방과 부르기아 지방에서는 어떻게 전도했는지, 갑자기 아볼로가 왜 나왔는지, 고린도에는 또 왜 갔는지 궁금한데, 본문은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두 가지 메시지를 갖는다.

첫째로, 2차 전도 여행이 끝나고 새로운 3차 전도 여행이 시작된다.

- 고린도에서의 작별로 2차 전도 여행의 끝을 알린다.

- 그리고나서 머리를 깎는데, 그 의식은 서원한 것을 끝까지 이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서원이 뭐였는지는 숨기지만, 행위를 통해 종결의 의미를 부각한다.

하지만 끊어짐과 함께 이어짐을 부각한다.

- 에베소에 다시 올 것을 약속한다.

- 그런 후 가이사랴, 예루살렘, 안디옥, 갈라디아 지방과 부르기아 지방을 거쳐 다시 에베소에서 사역이 시작된다.

- 본문은 에베소를 떠나서 다시 에베소로 돌아오는 여정을 단 몇 줄로 요약했는데, 실제로는 3000km 정도의 거리이다.

- 그것도 계속 이동만 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를 전도하면서 말이다.

- 그런데 그 긴 여정을 생략했다.

- 그것을 통해 에베소에서의 전도가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를 전한다.

 

그렇다면 왜 끊어짐과 이어짐을 부각했을까?

- 이어짐은 당연히 전도가 계속해서 이어짐을 상징한다.

- 반면에 끊어짐은 전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음을 상징한다.

- 그것이 뭘까?

일단, 모르겠다. 단서를 박박 긁어 모아보면,

- 2차 전도 여행은 바울의 전도 여행의 사실상 끝이다.

- 왜냐하면 갈라디아, 부르기아, 아시아, 마케도니아, 아가야까지 모두 전도했기 때문이다.

- 이 지역들을 이미 2차 전도 여행에서 모두 방문했다.

- 3차 전도 여행은 그 지역을 다시 돌아보는 것뿐이다.

- 새로운 곳은 없다.

- 3차 여행에서 굳이 새로운 것을 찾자면,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며 아시아 일대를 전도한 것뿐이다.

따라서 끊어짐이 상징하는 것은 전도 여행의 끝이다.

- 바울은 이미 맡은 바를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이때까지 계시로 받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뤘다.

- 아마도 그래서 바울은 서원한 것을 다 이뤘다는 뜻으로 머리를 깎은 것이다.

- 여기까지가 바울이 가진 경험의 한계 안에서 이른 마지막 장소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계지어진 바울을 가만두시지 않는다.

- 다시 에베소로 보내셔서 3차 전도 여행을 하게 하신다.

- 그런데 그 계기를 설명하는 것이 본문이 갖는 두 번째 메시지이다.

두 번째 메시지는, 아볼로의 영향력과 한계이다.

- 아볼로는 영향력이 컸다.

- 엄청난 말빨로 에베소에서도, 고린도에서도 유대 사람들을 전부 무찔렀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논증했다.

[행 18:24~25]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아볼로라는 유대 사람이 에베소에 왔다.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25) 그는 이미 주님의 '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예수에 관한 일을 열심히 말하고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는 요한의 침례밖에 알지 못하였다.

[행 18:28] 그가 성경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면서, 공중 앞에서 유대 사람들을 힘있게 논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에 티가 있었다.

- 요한의 침례밖에 알지 못한 것이다.

- 즉, 오순절에 성령이 이미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여전히 앞으로 오실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 성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 이 문제를 알게 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 교정된다.

[행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하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의 말을 듣고서, 따로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아볼로의 문제가 바울을 소환한다.

- 아볼로의 영향을 받은 에베소 역시 성령을 잘못 이해했다.

[행 19:2~4]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바울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침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요한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4) 바울이 말하였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침례를 주었습니다."

-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다시 왔고, 그곳에서 3년 동안 많은 사역을 한다.

- 아볼로의 문제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에서 전도하며 오래 머물게 된 것이다.

게다가 바울은 이곳에서 로마로 가야 할 자신의 새로운 사명을 깨닫는다.

[행 19:21] 이런 일이 있은 뒤에,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마음에 작정하고 "나는 거기에 갔다가, 로마에도 꼭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이것이 3차 전도 여행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다.

- 그러니까 아볼로는 3차 전도 여행 뿐만 아니라 로마행의 촉발자인 것이다.

 

게다가 비슷한 문제가 또 있다.

- 바로 아볼로가 에베소 다음으로 간 고린도에서이다.

- 고린도 교회는 '아볼로 파'라는 괴상한 말이 나올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고전 1:11~1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여러분의 소식을 전해 주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문제의 핵심은 성령에 대한 오해였다.

- 즉, 아볼로는 성령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해 에베소 교회에 이어 고린도 교회에도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이다.

- 고린도전서는 아볼로가 고린도 사역을 한 직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사역을 하고 있을 때 기록된다.

 

따라서 본문의 두 가지 메시지를 정리하면,

- 하나님께서 선교 여행을 일단락하신다.

- 이미 모든 지역에 전도가 끝났다.

- 그러나 동시에 전도 여행을 이어 나가신다.

- 전도가 계속되어야 할 여지가 남아 있다.

- 그것은 로마까지의 확장이다.

- 아직 바울의 머리 속에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확장 계획을 바울의 머리 속에 넣어주신다.

그 확장에 빌미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문제적 남자 아볼로이다.

- 아볼로가 일으킨 문제 때문에 바울은 선교 여행을 지속한다.

- 그리고 그 과정에서 로마 전도 계획을 세우게 된다.

- 그래서 2차 여행과 3차 여행 사이를 쫙 벌려서 아볼로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담은 것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문제를 일으킨 아볼로에게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 바울은 아볼로를 비판하지 않는다.

- 오히려 바울은 아볼로를 인정한다.

[고전 3:5~6]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6)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 또한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는 에베소에서 바울은 아볼로와 함께 있다.

[고전 16: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내가 그에게 다른 형제들과 함께 여러분에게 가라고 여러 번 권하였지만, 그는 지금, 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때가 오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실력이 부족했다.

- 에베소 교회에서는 요한의 침례밖에 전하지 못했다.

-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다시 전한다.

-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볼로 파'가 생기는 분열을 막지 못했다.

-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다.

 

나는 성경에 아볼로가 있다는 것이 굉장한 위로가 된다.

열정은 있지만, 실력이 없어서 사방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적 남자 아볼로.

- 그로 인해 에베소 교회는 반쪽짜리 복음을 듣고, 고린도 교회는 분열된다.

- 하지만 에베소 교회의 문제 때문에 바울은 3차 여행을 시작한다.

- 그리고 그 여정 중에 로마 전도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 또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 때문에 고린도전서라는 성경이 탄생한다.

아볼로는 상당한 문제를 일으켰지만, 그 문제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 고린도전서를 읽는 우리까지도 말이다.

아볼로는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듣고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 다시는 고린도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책했을 것이다.

- 그리고 바울에게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 그러면서 자신의 전도 방식을 돌아봤을 것이다.

그런 아볼로에게 바울은 위로했을 것이다.

- 다 내가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을 것이다.

- 그리고 함께 기도했을 것이다.

그랬더니 이런 전화위복이 일어난 것이다.

- 바울의 전도 여정을 로마까지 확장했고, 우리에게 고린도전서를 통해 고린도 교회를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를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스타일이다.

 

나도 열정은 있지만, 실력이 없다.

- 그래서 사방에 문제만 일으키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 전화위복을 일으키실 것을 믿는다.

 

결론 -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인가, 막는 자인가?

아볼로는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오히려 막았다.

- 동시에 아볼로는 복음을 막았지만, 결국 복음 전도의 촉발자가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만, 실상은 막고 있다.

-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신앙 이야기를 꺼낸다.

-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의 삶에 실망하여 오히려 신앙에서 멀어진다.

-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데, 오히려 설쳐서 긁어 부스럼 만든다.

- 우리의 변질된 삶 때문에 변질된 신앙만이 전해진다.

-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복음을 막는 자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전해진다.

- 우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다.

- 우리가 긁어 부스럼 만든 것을 하나님은 부스럼을 잘 모아서 멋진 복음을 만드신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언제나 결과까지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

- 실력이 부족하면 부족한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는 우리에게 타격을 입힌다.

- 그리고 타격이 누적되면 결국 넉다운 되어 세상에서 도태된다.

하지만 신앙은 다르다.

-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다.

- 실력이 부족해서 부족한 결과가 나와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

- 죽은 자를 일으키시듯, 실패한 결과를 성공으로 재창조하신다.

이것이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왔던 나에게 신앙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이다.

 

게다가 세상에서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나만 잘해서는 안 된다.

- 단순하게 말해서, 타이밍이 더 중요하다.

- 그렇기 때문에 성공을 위해서는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 세상의 흐름에 내 몸을 던져야 한다.

-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는 사라진다.

반면에 신앙에서는 의도와 동기는 중요하다.

- 나만 잘하면 된다.

- 믿음으로 했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 관계를 위해 했다면 성과가 없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 나의 마음이 바르다면, 결과가 나빠도 하나님은 인정해주신다.

- 좋은 결과는 언제든지 하나님이 뚝딱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에 집중하게 된다.

-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나'를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은 이렇게 '나'에게 집중하게 하신다.

- 나에게도 '나'가 소중하지만, 하나님께도 '나'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문제가 생긴다.

- 이기적으로 주변을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다.

- 결과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나쁜 결과가 계속될 수 있다.

- 그래서 복음을 막는 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를 알게 되어, 올바로 회개한 사람만이 비로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들과 말이다.

- 성과를 위한 거래 관계가 아닌 서로를 위한 사랑의 관계 말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복음이 전해진다.

- 우리가 이뤄낸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성과로 말이다.

-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복음의 방해꾼 역할밖에 없지만, 그 방해꾼을 통해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신다.

- 죽은 사람을 일으켜서 복음을 전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 우리가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말이다.

그래야만 복음이 전해졌을 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 성과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임을 마음 속 깊이 인정할 수 있다.

-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내가 복음의 통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정말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 그때 나오는 찬양이 정말 찬양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찬양을 하는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