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에 대한 이야기이다.
- 신앙과 신비는 뗄 수 없다.
- 신앙의 본질이 영적인 것, 그래서 감각과 이성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를 배제하고는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
-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분을 믿는 다는 것도 신비고, 그런 분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도 신비며, 그 분께 헌신하는 것도 신비다.
그러니 신앙 생활에 신비가 일어나는 것도 자연스럽다.
- 믿음으로 갑자기 평안이 오기도 하고, 기도 응답이 일어나기도 하며, 병이 치유되기도 하고 죽은 사람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 따라서 신앙의 시작에서부터 신앙 생활의 전반에 너무 신비해서 해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 그래서 신앙에서 신비를 배제하고 오로지 합리와 이성으로 해석하려 했던 자유주의 신학은 정통 신학에서 배척되었다.
- 그들이 신앙에서 신비를 배제하자, 신비와 함께 신앙까지도 배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 경우도 있다.
- 신비주의이다.
- 단순하게 말해서, 이들은 신앙에서 이성과 합리를 배제하였다.
- 판단과 결정을 내릴 때, 인과 관계를 따지기보다 느낌대로 내린 후 신비로 포장했다.
- 그렇게 신비로 포장된 느낌은 결국 이성에 의해 절제되지 않고 욕망의 분출구 역할만 하게 된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 있다.
- 마음 속으로는 신비를 기대하면서도, 신비주의를 경계하며 갈등한다.
- 신비를 구할 때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신비를 내려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은근히 원망한다.
그래서 이 기회에 갈등을 풀어보려 한다.
- 신비를 구하면서도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합리적인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신비를 기대하는 신앙을 갖기를 바란다.
- 신비에 대해서 어떤 태도는 배제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두 가지를 믿는 태도이다.
첫째로, 모든 신비를 전부 기대해야 한다.
- 신앙이 우리의 필요를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 죽은 사람도 살아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 특히 내가 부족한 믿음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의심이다.
- 과연 저 사람에게 회개가 가능할까? 라는 의심을 많이 한다.
- 어떤 신비로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회개와 가장 멀리 있었던 나도 회개했다면, 회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 따라서 신앙이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둘째로, 그 신비가 내가 예상한대로, 기대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사랑하는 사람이 크게 다쳤다면, 우리는 회복될 신비를 기대한다.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대로 회복시키지 않으실 수 있다.
- 죽게 놔두실 수 있다.
-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그 죽음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 그래서 죽은 우리를 살리실 것이다.
이 두 가지 태도가 있을 때 신비는 제 역할을 한다.
- 그 역할은 오직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상은 둘 중에 하나만 갖고 있다.
- 하나님은 어떤 기적도 일으키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신비롭게 주어지길 바란다.
- 그래서 그런 신비가 일어나지 않으면 실망한다.
- 반대로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기적은 일으키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 그래서 하나님 없이 모드 문제를 홀로 해결하며 힙겹게 살아간다.
- 두 경우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힘들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상된 신비'를 일으키시지 않는다.
- 예상된 신비는 신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 신비(神祕)라는 말 자체가 숨겨져있다는 뜻이다.
- 기독교 신비주의 마술사처럼 장풍 쏴서 계획대로 생사람이 넘어가는 일은 신비가 아니다.
- 그리고 나의 계획을 기도해서 응답 받고 그 계획대로 되는 순간 신비는 사라진다.
- 오히려 기도해서 나의 계획은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엉뚱하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졌을 때, 나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을 때, 상대방에 대한 없던 사랑이 생겼을 때 그것이 정말 신비이며 기적이다.
신비에 대한 이런 태도 속에서 기도하자.
-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 그런데 그것을 시작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자.
- 문제가 문제가 되는 나를 돌아보자.
- 이 문제가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 나를 기대하자.
- 그래서 아무 문제 없이 자유롭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나 되기를 기도하자.
- 그것이 정말 신비이다.
- 절대로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나'가 되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왜 신비 이야기를 하냐?
사도행전 16장에는 수차례 신비가 나온다.
-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경로가 마케도니아로 정해지는 과정
- 귀신 들린 여종이 치유되는 과정
-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수갑과 차꼬가 풀리는 과정
우리에게도 비숫한 일이 일어난다는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 진로를 정하기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갈 길을 알려주신다면.
- 아픈 사람을 단번에 치유할 수 있다면.
- 문제가 있을 때 갑자기 해결된다면.
- 신앙 생활 할 맛 날 것이다.
하지만 사건을 자세히 보면 골치아프다.
- 어느 것 하나 바란대로 된 일이 없다.
- 예상된 신비는 없다.
먼저 바울의 전도 경로를 보자.
- 바나바와 헤어진 후 바울의 첫 목적지는 1차 전도 여행지(지도에서 ①)를 재방문하는 것이다.
-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 다음이 문제이다.
- 바울의 계획은 에베소가 있는 소아시아 지역(지도에서 ②)을 가는 것이었다.
[행 16:6]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으시므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가서,
- 하지만 방향을 돌려서 비두니아(지도에서 ③)로 가려했지만 그것도 막힌다.
[행 16:7] 무시아 가까이 이르러서,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정리하면,
- 바울이 ①을 지나온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②와 ③ 뿐이었다.
- 그런데 둘 다 막힌 것이다.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케도니아로 간 것이다.
이러한 신비가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자.
- 고3 때 원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는데 떨어졌다.
-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재수까지 했는데 또 떨어진 것이다.
- 더 이상 공부할 수 있는 돈도 없고, 공부할 수 있는 정신력, 체력 다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군대에 갔는데, 그 곳에서 평생의 의인을 만난 것이다.
바울에게 일어난 신비는 마치 이런 것이다.
- 결론만 놓고 보면, 군대는 신의 한수였다. 신비로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 하지만 결론을 모른채 재수도 실패하고 군대 끌려가기 직전이라고 생각해보자.
- 그에게 군대가 신비롭게 느껴지겠는가?
- 군대는 인생의 실패와 좌절이 낳은 사생아일 뿐이다.
- 내가 가진 모든 선택지 중에 가장 고르기 싫은 마지막 선택지이다.
- 나의 예상과는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다.
- 이러한 조건이 전제될 때 비로소 신비가 일어날 준비가 된 것이다.
- 이렇게 신비는 예상되지 않고 숨겨져 있을 때 비로소 참 신비가 된다.
다음으로, 귀신 들린 여종의 치유이다.
- 바울은 이 여자를 왜 치유했느냐?
[행 16:18] 그 여자가 여러 날을 두고 이렇게 하므로, 바울이 귀찮게 여기고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하고 말하니, 바로 그 순간에 귀신이 나왔다.
- '귀찮게'로 번역했는데, 같은 단어를 4장 2절에서는 '격분해서'라고 번역했다.
- 정확한 늬앙스는 분노이다.
- 사랑, 연민, 긍휼이 아니라 짜증이 폭발해서 일어난 기적이다.
- 간단하게 말해서,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사람에게 화풀이로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 어찌보면 기적이라기보다 공격 마법이다.
거기다가 한술 더 뜬다.
- 전도 잘 하려고 일으킨 기적 때문에 전도를 아예 할 수 없게 된다.
- 그 일로 감옥에 갖히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같은 신비가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 그래서 원하는 것을 못 이루게 되는 것은 물론, 이룰 수 있는 가능성마저 사라진다면?
- 신비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 하지만 이 신비를 계기로 참 신비가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감옥에서 수갑과 차꼬가 풀린 일이다.
- 언듯 좋아 보인다.
-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 그것도 바울이 찬양하고 있을 때 절묘하게 일어나서 뭔가 더 신비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기적으로 바울이 얻은 유익은 없다.
- 왜냐하면 수갑과 차꼬가 풀리고 감옥 문까지 열렸지만, 탈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는 간수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신비가 일어난다면?
- 우리를 통해 신비가 일어나고, 누군가 그것을 보고 신앙을 갖게 된다면?
- 셋 중에 그나마 제일 기분 좋은 신비이다.
- 나에게는 유익이 없지만, 적어도 보람은 있기 때문이다.
- 나로 인해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을 보며 기쁘기는 하니까.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 이러한 기쁨을 얻기 위해 바울은 모든 계획이 좌절되는 신비와 감옥에 갖히는 신비를 감수했다.
- 그러한 비극적인 신비 속에서도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했다.
- 그렇게 어렵게 얻은 기쁨이 고작 남 잘되는 것 보며 흐믓해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신비가 일어난다면?
- 내가 했던 고생의 결과가 남 잘되는 것 뿐이라면?
- 내가 했던 고생의 결과가 다른 사람의 기쁨을 보며 함께 기뻐하는 것 뿐이라면?
- 과연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까?
- 여전히 신앙을 위해 살 수 있을까?
- 여기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성경의 신앙고 어긋나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쁨을 위해 바울은 한평생을 바쳤다.
- 이것이 정말 신비다.
-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 어떻게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할 수가 있을까?
-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 어떻게 그 사랑만으로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 우리는 필요한 것이 이렇게 많은데 말이다.
결론 - 정말 바울에게 일어난 신비가 우리에게 일어나길 바라는가?
바울에게 일어난 신비는 항상 바울의 예상에서 벗어났다.
- 여행 경로를 바꿔야 했고, 감옥에 갖혀야만 했으며, 탈옥하지 못했다.
- 신비 그 자체로만 보면,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다.
그러나 나의 실패는 하나님의 성공이다.
- 나의 인생이 나의 계획에서 하나님의 계획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 그래서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정련되는 과정이다.
- 그것을 위해 신비가 일어나는 것이다.
- 그래서 바울은 전세계에 복음이 전해지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신비는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다.
-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 실패와 좌절을 반복해서 겪는 것이다.
- 그렇게 인생이 몰락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의 목적지는 인생의 몰락이 아니다.
- 인생의 몰락은 단지 경유지이다.
- 목적지는 하나님이다.
- 하나님과 맺는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다.
- 그것이 신비의 목적이며, 또한 가장 신비로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왜 우리에게는 신비가 일어나지 않는가?
- 신비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 예상된 신비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 예상되지 않은 신비는 거부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바울이었다면,
- 끝까지 내가 정한 여행 경로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 계획했던 길로 밀어부쳤을 것이다.
- 또한 절대로 귀신 들린 여종을 치유하지 않았을 것이다.
- 욕먹을 일을 왜 하겠나.
- 그리고 감옥 문이 열리자마자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쳤을 것이다.
- 날 가둔 간수 걱정 따윈 하지 않는다.
- 그래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신비는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 그리고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는 신비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참 신비를 구하자.
- 내 계획이 어긋나고, 내 뜻이 좌절되고, 내 인생이 몰락하길 구하자.
- 그래서 전혀 예상할 수도, 원하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인생이 틀어지길 구하자.
그렇게 간 곳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그 곳에서만 신비의 주 되신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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