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를 설교하면서 가장 많이 반복하는 말을 다시 하면,
- 본문은 주님의 만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 주님의 만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 복음을 믿고 따르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 주님의 만찬은 교회의 본질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의식이고,
- 의식의 본질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서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도록 독려하는 이야기이다.
- 다시 말해서, 주님의 만찬 의식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 주님의 만찬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주제를 주님의 만찬 의식으로 삼는 것은 명백한 오독이다.
- 이는 마치 달을 가리키려고 손을 뻗었더니,
- 달은 보지 않고 손만 보는 꼴이다.
본문의 주제는 교회의 본질이다.
-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교회 공동체가 함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교회 공동체를 이룬 고린도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몰랐다.
- 특히 교회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야 할 주님의 만찬 의식에서 교회의 본질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편지를 쓴 것이다.
- 단순히 주님의 만찬 의식에서 고린도 교회의 사소한 행위 일부를 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 사소한 행위 때문에 주님의 만찬 전체가 망가졌고,
- 그로 인해 고린도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잃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펜 끝은 주님의 만찬 의식 중 식사 시간을 향한다.
- 그러나 바울의 시선은 교회 전체를 향한다.
- 고린도 교회에 식사 시간‘만’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 교회 전체 문제가 식사 시간‘까지’ 악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본문을 식사 시간‘만’의 문제로 축소해서 해석하려 한다.
- 주님의 만찬 의식만 잘 행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해석한다.
특히 27~28절이 그 오해에 불을 지핀다.
- 주님의 빵과 잔을 마시기 전에만 나쁜 짓 하지 않으면,
- 혹은 나쁜 짓을 했더라도 자기를 잘 살펴서 회개하기만 하면,
-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고, 의식을 통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 11:27~28]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28)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다.
- 주님의 만찬 중의 식사 시간을 보고 있다.
- 빵과 잔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 보고 있다.
- 식사 형태를 통해 식사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 식사 태도를 통해 교회의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교회에 대한 마음을 보고,
- 교회에 대한 마음을 통해 믿음의 본질을 보고 있다.
이렇게 바울은 주님의 만찬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믿음을 교정하려는 것이다.
- 단지 죄를 지었냐 아니냐도 아니고,
- 주님의 만찬 의식을 더욱 경건하게 행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문을 보자.
17~22절: 문제 제시 - 주님의 만찬 의식에서 드러난 분열
바울이 지적하는 문제는 단순하다.
- 교회에서 모여 밥을 먹을 때 일부가 공동체 식사가 시작하기도 전에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었다.
- 그래서 가져온 음식으로 풍족하게 먹은 사람과 음식을 가져올 수 없어서 배고픈 사람이 공존했다.
- 이는 가져올 음식이 있는 부자와 없는 가난한 자 사이의 분열로 번졌다.
[고전 11:21]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저녁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상황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 어떻게 한 교회에 모여 함께 식사하는 공동체가 각자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
- 부족하더라도 함께 나눠 먹어야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 오히려 부를 가진 주인 계급과 그렇지 않은 노예 계급이 같은 자리에서 식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 게다가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이 같은 음식을 먹는 것도 있을 수 없었다.
- 주인 계급이 그 계급에 적합한 음식의 종류와 양을 먹어 배부르고,
- 노예 계급이 그 계급에 적합한 음식의 종류와 양을 먹어 배고픈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나 바울은 당연한 상황을 문제로 봤다.
- 세상에 계층으로 나눠진 상하 관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시하지는 않았다.
- 그러나 세상의 상하 관계가 교회 안에서까지 지속되는 것을 문제시했다.
- 그래서 계급에 따라 정해진 음식의 종류와 양이 교회 안까지 영향을 줘서,
- 주님의 만찬 의식에서조차 주인 계급은 배부르고 노예 계급은 배고픈 일을 바울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단명하다.
-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한 몸과 피를 함께 나눈 교회 공동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 계급이 달라도, 그래서 먹는 것조차 달라도, 교회 안에서는 하나이다.
- 주인과 종의 구분이 없다.
[고전 10:16~17]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1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그 한 덩이 빵을 함께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
[갈 3:27~28] 여러분은 모두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급에 따른 음식 차이도 없어야 했다.
- 적어도 교회에서만큼은 모두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종류의 음식을 같은 양 먹어야 했다.
- 그렇게 하나 됨이 주님의 만찬 의식이 상징하는 것이며,
-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이다.
[고전 11:26]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은 하나 됨을 교회 밖으로까지 끌고 가지는 않는다.
- 세상 전체의 계급을 전부 없애려 하지 않는다.
- 그래서 교회 밖에서까지 같은 음식을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먹으라고 허용한다.
- 모든 사람에게, 특히 주인 계급에게 모든 권력과 재산을 전부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고전 11:22]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물론 바울은 주인 계급이 모든 것을 포기하길 바란다.
- 단순히 교회 안에서 특권을 포기하고 같은 음식을 먹는 것뿐만 아니라,
- 인생 전체에서 모든 특권과 소유를 포기하고 주인과 노예의 구분을 제거하여
- 평생 모든 인류, 즉 주인 계급뿐만 아니라 노예 계급까지 자기 몸처럼 사랑하길 바란다.
마치 바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바울은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이 되어, 이방 사람에게는 이방 사람이 되어, 약한 사람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었다.
-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말이다.
[고전 9:19~22]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 (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것까지 요구하지 않는다.
바울의 요구는 교회 안에서이다.
- 적어도 교회 안에서만큼은 가진 권력을 포기해야 한다.
-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똑같은 음식을 똑같은 양만큼 먹어야 한다.
- 적어도 교회 안에서만큼은 모두가 동등한 하나라는 것을 온몸으로 표출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는 한 몸이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 만약 교회 공동체가 동등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한 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고,
- 이는 한 몸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 예수님의 죽으심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 다른 음식을 먹은 고린도 교회를 이토록 정죄하는 것이다.
[고전 11:22]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23~26절: 교회의 본질 - 주님의 죽으심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정죄하는 근거로 주님의 만찬을 제시한다.
- 한마디로, 주님의 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상징한다.
- 빵과 잔이 십자가에 매달린 몸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전 11:26]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죽으심은 무엇을 뜻할까?
- 죽음을 감수한 사랑의 극치이다.
-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걸려 죽으셨다.
- 이를 통해 예수님이 목숨보다 인류를 더 사랑하셨음을 입증하셨다.
[고전 11:24]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롬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주님의 만찬을 명령하신 이유는 단지 교회가 함께 식사하라는 것이 아니다.
- 식사를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 그것을 통해 실제로 교회 안에서 죽음을 감수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 그 사랑이 교회 전체 그리고 인류 전체까지 확장하기 위한 초석이 바로 주님의 만찬이다.
그런데 ‘초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 첫째로, 초석은 위에 쌓는 건물을 결정짓는 핵심적 토대이다.
- 그만큼 초석인 주님의 만찬은 교회의 본질인 사랑을 응축하고 있다.
- 응축되어 있기에 주님의 만찬에서 사랑을 쉽게 추출할 수 없지만,
- 응축되어 있기에 주님의 만찬을 깊이 음미하면 사랑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 즉, 소박한 식사 시간으로 전할 수 있는 사랑은 제한적이지만,
- 식사에 담긴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면, 사랑이 갖는 완전한 희생과 헌신을 배울 수 있다.
둘째로, 그러나 초석은 초석일 뿐 건물이 아니다.
- 아무리 튼튼한 초석으로 강력한 토대를 만들었다고 해도,
- 그 위에 건물을 짓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 이것이 초석의 한계이다.
즉, 주님의 만찬은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고 몸으로 배우는 시간이다.
- 그런데 사랑을 배우는 이유는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 예수님이 행하신 죽음을 감수한 사랑을 배워서 먼저 교회 안에서 실현하고,
- 이후에 세상 끝까지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 이웃 사랑, 인류 사랑이라는 건물을 짓기 위해 초석인 주님의 만찬을 행하는 것이다.
- 그러나 만약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주님의 만찬은 아무 소용 없다.
- 이것이 주님의 만찬이 가진 한계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주님의 만찬을 행했지만,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다.
- 인류 사랑까지 확장해야 했지만,
- 교회 공동체 사랑조차 실현하지 못했다.
- 이는 튼튼한 건물을 짓기 위해 초석을 쌓으라고 했더니,
- 건물은커녕 초석조차 제대로 놓지 못한 꼴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주님의 만찬을 먹지 않았다’라고 지적한다.
- 사랑이 극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주님의 만찬에서 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이 나뉘어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음식을 먹었다.
[고전 11:20] 그렇지만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주님의 만찬 - 수직 관계의 사랑
그러나 주님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음식을 드셨다.
-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빵과 잔을 나눠주셨다.
이는 단순한 음식 이야기가 아니다.
- 사랑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 예수님은 제자를 창조주 신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로 보지 않으셨다.
- 동등하게 여기셨고,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셨다.
-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과 동등해지셨고,
-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지막 목숨까지 나눠주시며 사랑하셨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다.
- 하나님이 창조주 계급으로서 피조물 계급인 인간을 사랑하셨다고 생각한다.
-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상하 관계를 전제하고 사랑을 이해한다.
-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의 자녀 사랑에 비유한다.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부 담지 못한다.
-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보다 크다.
- 부모의 사랑은 상하 관계를 전제하며,
- 부모라는 강자가 자녀라는 약자를 향한 사랑이다.
상하 관계의 사랑은 사랑의 본질을 전부 담지 못한다.
- 강자가 가진 잉여의 힘을 약자에게 베푸는 것은 좋은 것이다.
- 대부분의 강자는 잉여의 힘을 오직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강자의 사랑은 마지막 생명까지 남김없이 헌신하는 예수님의 사랑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재벌 친구가 베푸는 성대한 식사와 가난한 친구가 떼어 주는 자기 밥 반 공기의 차이이다.
- 재벌 친구는 많이 베풀었지만,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았다.
- 그러나 가난한 친구는 조금 베풀었지만, 많은 것을 희생했다.
[눅 21:1~4]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거기에 렙돈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3)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이렇게 상하 관계의 사랑은 동등한 관계의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
- 그래서 부모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부 담지 못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랑에 비해 부모의 사랑은 하찮은 것이다.
- 수직 관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사랑을 넘어선다.
- 수직 관계의 사랑이 아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셨다.
- 하나님은 남는 잉여의 힘을 아무런 희생 없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은 가난한 친구처럼, 두 렙돈을 낸 가난한 과부처럼 자기 전부를 희생하셨다.
- 정확하게 말해서, 사랑하기 위해, 희생하기 위해 하나님이시길 포기하시고 인간이 되셨다.
- 동등한 관계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빌 2:6~8]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여전히 교회 안에서조차 수직 관계를 유지했다.
-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 그 차이가 주님의 만찬 의식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울이 주님의 만찬을 지적하는 것이다.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당시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 극단적으로 말해서, 주인 계급은 노예 계급을 사람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 사람 모양을 하고 사람 말을 알아듣는 짐승이었다.
-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에 주인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노예를 부릴 수 있었다.
- 우리가 소와 돼지 고기를 불에 구워 맛있게 먹듯이 주인은 노예를 마음껏 이용했다.
그런 주인이 노예를 자신과 동일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 함께 주님의 만찬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정확하게 이것을 요구한다.
- 주인 계급에게 노예 계급과 한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먹으라고 말이다.
- 주인이 노예를 자신도 동일한 존재로 인정하라고 말이다.
- 게다가 죽음을 감수하고 사랑하라고 말이다.
- 이렇게 바울은 대부분의 사람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과격하고 무모한 요구를 하고 있다.
왜 바울은 무모한 요구를 할까?
- 바울이 어리석기 때문일까?
- 이유는 단순하다.
-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어리석게 들리는 무모한 요구를 한 것이다.
예수님은 왜 과격하고 무모한 사랑을 하셨을까?
- 왜 굳이 인간이 되셔야 했고, 왜 굳이 추하게 죽으셔야 했을까?
- 사랑을 왜 굳이 구질구질하게 표현하셨을까?
예수님은 수평 관계에서 사랑하고 싶으셨다.
- 그것을 위해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간이 되셨다.
- 인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
이유는 단순하다.
- 완전히 동등한 관계에서만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이 신으로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 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구질구질하게 인간이 되어 과격하고 무모하게 사랑하는 것만이 유일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 이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게 같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신의 특권을 포기하시고 몸과 피를 인류를 위해 내어주셨다.
-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며 실현하라고 주님의 만찬을 명령하셨다.
-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주인 계급도 특권을 포기하고 죽음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 그래서 당시 주인 계급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즉 죽음과도 같은 불명예스러운 일인 노예 계급과 한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만찬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 단순한 식사 이면에 있는 죽음을 감수한 사랑이다.
- 죽음을 감수하고 특권을 포기하는 헌신이다.
- 그래서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이 완전히 하나 되어 동등해지는 것이다.
27~34절: 교회에 적용 - 밥은 집에서 먹어라!
이런 이유로 주님의 만찬이 중요하다.
-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이 하나 되는 시간인데,
- 그것을 위해 주인 계급은 목숨과 같은 특권과 명예를 포기해야 했다.
- 그런데 목숨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포기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했다.
- 자신이 목숨을 포기해도 부활의 능력으로 회복될 것을 믿어야 했다.
- 그런 점에서 주님의 만찬은 믿음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만찬을 ‘합당하게’ 행하지 않고,
-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은
-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 이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몸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주님의 만찬을 합당하지 않게 행하는 것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라고 정죄한다.
[고전 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만찬을 행하기 전에 ‘자기를 살펴야 한다.’라고 말한다.
-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며,
- 그로 인해 ‘병들고 죽은 사람까지 있다’라고 경고한다.
[고전 11:28~30]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29)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30) 이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는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러한 경고를 단순히 거룩한 마음으로 성찬식에 임하라는 뜻으로 오해한다.
- 그래서 성찬식 전에 회개하는 시간을 갖고,
- 죄를 고백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성찬식에 임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해이다.
- 바울이 경고하는 것은 일반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단순히 마음으로 회개하면 해결되는 죄가 아니다.
- 정확하게 말해서,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이 따로 식사하는 것이다.
- 더 근원적으로, 사람 사이에 상하 관계가 있다는 인식이다.
그러한 인식은 하나 됨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예수님을 부정한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 그리고 심판으로 인해 병이 들어 죽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래서 바울은 명확한 처방을 내린다.
- 기다려서 같이 먹으라는 것이다.
[고전 11:33]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십시오.
계속 말하지만, 먹는 이야기가 아니다.
- 죽음을 감수하고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 사람 사이에 상하 관계가 있다는 인식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 사람은 모두 동등하며, 혈통, 신분, 성별로 인한 차이를 완전히 부정하라는 것이다.
[갈 3:27~28] 여러분은 모두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말 배가 고프면 집에서 먹고,
- 교회에서 함께 모일 때는 먹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 특히 동등한 관계의 사랑을 말이다.
- 그것만이 주님의 만찬이 갖는 의미이고,
- 그것만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야만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 11:34]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이는 일로 심판받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 밖에 남은 문제들은 내가 가서 바로잡겠습니다.
결론 -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여긴다는 것
만약 길에서 아무 사람에게 “당신은 사람 사이에 상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 대부분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 왕조 시대도 아니고, 요즘 누가 신분과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고, 사람 사이에 상하가 있냐고 반문할 것이다.
- 사람이 모두 평등하기에, 남녀 차별이나 인종 차별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본문은 그다지 의미 없게 들린다.
-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이 사라진 시대이기에,
- 그래서 누구나 한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이기에,
- 특히 교회에서도 모두 함께 같은 음식을 먹기에,
- 교회에서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 사이에 갈등은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 정말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고 믿을까?
- 외국인 노동자를 우리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존재로 보는가?
- 동성애자도 동등한 사람으로 인식하는가?
- 어린아이와 노인도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가?
- 여자와 남자가 현실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는가?
여전히 정치판에서는 여자와 남자를 구분하여 민심을 얻으려는 세력이 있다.
- 여자는 남자를 육체적 위해를 가하는 잠재적 범죄자라고 인식하도록 하고,
- 남자는 여자를 평등이라는 명목으로 우월한 지위를 얻으려는 욕심쟁이로 인식하도록 한다.
- 여자와 남자는 상대방 때문에 불평등이 심해진다고 손가락질한다.
이는 여전히 남녀 평등이 요원하다는 사실만 부각할 뿐이다.
- 그러니 나머지 불평등은 얼마나 심각하겠는가.
- 내국인은 외국인 노동자 때문에 일자리를 빼앗겨 삶의 기틀이 무너질 것이라고 분개하고,
- 외국인 노동자는 자신도 사람답게 일하게 해달라고 분개한다.
- 이성애자는 동성애자 때문에 건강과 도덕이 무너질 것이라고 분개하고,
- 동성애자는 자신도 자기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분개한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목숨 걸고 차별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 이는 단지 우리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다.
이 전쟁을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모두가 목숨 걸고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 목숨이 걸렸기 때문에 양보와 타협이 불가능하고,
- 그렇기 때문에 끝나지 않는 평행선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분열 역시 이와 같다.
- 주인과 노예가 동등해지려면, 목숨처럼 소중한 주인 계급의 특권을 포기해야 한다.
- 목숨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고,
- 그랬기 때문에 주님의 만찬에서조차 해결할 수 없었으며,
- 예수님의 죽으심을 부정하면서까지 주인과 노예가 한자리에서 먹을 수 없었다.
- 즉,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걸린 문제이다.
따라서 목숨이 걸린 문제를 해결하려면 죽음을 무력화해야 하는데,
- 그 방법은 부활에 대한 믿음밖에 없다.
- 부활이 없다면, 죽음을 감수할 수 없다.
- 물론 죽음을 통해서 자기의 명성을 영원토록 남길 수 있다면, 죽음을 감수할 수 있다.
-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감수하고 위인으로 등극했다.
- 죽음을 통해 명성을 산 것이다.
하지만 주인 계급이 특권을 포기하고 노예 계급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유익이 없다.
- 당시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부활에 대한 믿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 여전히 차별이 있고,
- 여전히 상대방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으며,
- 인간으로 여겨도 열등한 인간으로 본다.
- 세상에서는 당연하고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대표적으로, 교회 안에 직분이 있고,
- 직분의 고하에 따라 상하 관계가 생긴다.
- 그래서 상하 관계에 따라 식사 장소마저 정해지기도 한다.
- 고린도 교회에 비해 나아보이지만,
- 여전히 현대 교회에도 계급에 따라 상석과 하석이 있고,
- 음식도 드러나지 않게 차이가 있다.
- 목사, 장로, 권사는 뭐라도 하나 더 얻어먹는다.
- 게다가 많은 사람이 이를 당연히 여긴다.
- 왜냐하면 그들이 더 높은 사람이고, 높은 사람에게는 더 먹을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교회에조차 여전히 상하 계급이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지적을 두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직분을 가진 사람이 조금 더 먹는 것이 무슨 문제냐는 것이다.
맞다.
- 일 많이 하고 밥 많이 먹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 그러나 문제는 밥을 많이 먹는 이유가 단순히 일을 많이 했기에 배고파서가 아니라,
-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 근원적으로, 사람을 상하로 구분 짓는 수직 관계 인식이 문제이다.
- 예수님은 수직 관계를 부수고 모두가 하나 되도록 죽으셨는데,
- 여전히 수직 관계 인식을 가져서 예수님의 죽음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여전히 피라미드식의 위계 질서를 가지고 있다.
- 담임 목사를 필두로 평신도까지 확고한 수직 관계를 갖는다.
그런데 바울은 수직 관계를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라고 정죄한다.
- 그렇다면 바울이 현대 교회를 보고 뭐라고 말할까?
-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너희는 지금 심판을 먹고 마시고 있다.
- 밥은 집에서 먹어라.
- 그래서 모이는 일로 심판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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