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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19) 10:14~11:1 식사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다.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어쨌든 본문의 결론은 우상 신전에서 식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 우상 신전에서 식사하는 것은 우상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고,

- 우상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귀신과 친교를 갖는 것이며,

- 귀신과 친교를 갖는 것은 귀신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인데,

-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사람은 귀신의 식탁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니 고린도 교회도 우상 신전에서 식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

[고전 10:18] 육신상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제물을 먹는 사람들은, 그 제단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고전 10:20]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귀신에게 바치는 것이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귀신과 친교를 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고전 10:21] 여러분은, 주님의 잔을 마시고, 아울러 귀신들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고, 아울러 귀신들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핵심이 우리도 우상 신전에서 식사하지 말라는 뜻일까?

- 그러면 본문에 순종하여 우상 신전에서 식사하지 않기만 하면 충분한 것일까?

- 그런데 우리는 이미 우상 신전에서 식사하지 않으니, 의로운 것일까?

- 게다가 우리는 우상 신전에 갈 일도 없고, 우상 신전에서 식사할 일은 더욱 없으니, 본문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일까?

본문은 우상 신전 식사 금지를 말하지만, 우상 신전 식사 금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우상 신전 식사 금지를 통해 우상 신전 식사 금지 외에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 우상 신전 식사를 통해 경고하려는 삶의 모습이 있다.

- 단순히 우상 숭배 외에도 말이다.

- 본문을 우상 신전 식사에 한정해서 이해하면, 우상 신전과 상관없는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말씀이 된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신앙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말 그대로, 마음과 입술로 예수님을 믿겠다고 다짐하고 고백하기‘만’하면 충분한가?

- 마치 우상 신전 식사 금지 말씀 따라 우상 신전 식사‘만’하지 않으면 충분한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 전체를 바꾸겠다는 뜻이다.

- 새로운 삶의 태도를 갖겠다는 것이다.

- 단번에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을지라도, 매일매일 꾸준히 변화된 삶을 살겠다는 뜻이다.

- 당연히 예수님을 믿겠다는 다짐과 고백이 포함되지만,

-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근원적인 뜻이다.

 

따라서 본문도 마찬가지이다.

- 단지 우상 신전 식사‘만’ 금지한 것이 아니다.

- 훨씬 더 크고 근원적인 뜻이다.

우상 신전 식사가 상징하는 삶의 태도 전체를 금지한 것이다.

- 그렇게 해석할 때만 본문은 20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 현재 우리 삶에 경고하는 말씀이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상 신전 식사가 상징하는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

- 이 질문의 답을 본문에서 찾아보자.

 

14~22절: 주님의 식탁과 귀신들의 식탁의 배타성

바울은 두 가지 식사를 비교한다.

- 주님의 식탁과 귀신들의 식탁에서 식사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식사라는 것이다.

- 주님의 식탁에서는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잔과 빵을 먹는다.

- 귀신들의 식탁에서도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다.

- 이 공통점 때문에 바울은 두 가지를 맞세운다.

- 하지만 강조해서 말하는데, 이는 먹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이 두 가지를 맞세워서 내리는 결론이 있다.

- 두 식사를 동시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이다.

-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반드시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 즉, 이 둘은 배타적이다.

하지만 바울의 의도가 교회에서 밥 먹은 사람은 우상 신전에서 밥 먹지 말라거나,

- 반대로 우상 신전에서 밥 먹은 사람은 교회에서 밥 먹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 실제로 이런 해석을 많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은 두 식탁이 상징하는 삶의 태도가 배타적일 만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배타성을 왜 강조할까?

- 두 식탁이 상징하는 삶의 태도가 무엇이길래 배타적이기까지 할까?

- 배타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두 식탁이 상징하는 삶의 태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본문은 두 식탁이 상징하는 삶의 태도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본문을 삶의 태도가 아니라 식사 문제로 취급한다.

- 하지만 바울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밥 먹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이고,

- 또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다.

- 이는 바로 신앙의 본질이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 자체이다.

- 이것을 본문이 말하지 않지만, 이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는 것은 무엇일까?

- 모두 알다시피, 일시적이고 특정한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태도이다.

- 다르게 말해서, 신앙 고백을 한다든지, 예배에 참석한다든지, 침례를 받는다고 무조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 삶의 태도 전체가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 마치 부부 관계가 사랑 고백을 했다고, 프러포즈를 했다고, 결혼식을 했다고 무조건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반복해서 배우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지속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태도가 도대체 무엇일까?

 

주님의 식탁이 상징하는 삶의 태도 - 한 몸

본문은 그것을 명확하게 정의한다.

- 바로 ‘한 몸’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뜻하는 바를 믿고,

- 그것을 자기 삶의 유일한 태도와 기준으로 삼는 사람의 모임인 교회를 ‘한 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 그것이 주님의 식탁이 상징하는 것이다.

[고전 10:1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그 한 덩이 빵을 함께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

한 몸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 몸에 눈, 코, 입, 귀가 있고, 각 지체가 전부 다르지만,

- 그것이 모여 한 몸이 되고,

- 각 지체가 서로를 위해 역할에 충실할 때 모든 지체의 합인 몸까지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특히 그것을 위해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전 12:14~17] 몸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겠습니까?

[고전 12:26~27]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교회 공동체를 한 몸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 어떻게 해야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 가장 우선적이고 본질적으로 존재에 대한 기본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서로를 공감하지 않고 있다.

- 왜냐하면 ‘수직 관계 인식’ 때문이다.

- 존재마다 가치를 가지고 있고,

- 가치의 크기에 따라 존재 사이에 상하 관계가 있어서

- 강자는 더 큰 권력을 갖고 약자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는

- 서로에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감할 수 없다.

그런 수직 관계 인식에서는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고통과 기쁨을 느끼는 인격으로 보기 어렵다.

-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인격보다 가치를 먼저 본다.

- 자신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여,

- 강자에게는 존경과 찬양과 함께 통제당할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갖고,

- 어떻게 하면 덜 통제당하면서 더 많은 가치를 얻어올 수 있을지 고민한다.

- 반면에 약자에게는 무시와 조롱과 함께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 어떻게 하면 더 많이 통제하면서 자신이 더 가진 가치를 덜 빼앗길지 고민한다.

수직 관계 인식은 이런 복잡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다른 사람의 인격에 관심을 갖기 어렵다.

- 그래서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공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평 관계 인식’은 다르다.

-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고 판단한다.

- 하나의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여 수직 위계를 만들지 않고,

- 각 사람이 가진 서로 다른 가치를 전부 인정하여 모두 동등하다고 인식한다.

마치 손과 발을 동등하다는 것과 같다.

- 힘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발이 손보다 우월하고,

- 섬세함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발이 손보다 열등하지만,

- 누구도 손과 발을 비교하여 우열을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발이 아플 때 손이 감싸안아 주고, 손이 아플 때 발이 멀리 있는 약까지 데려다준다.

- 방식은 다르지만, 언제나 서로를 위해 봉사한다.

- 왜냐하면 한 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존재 전체를 수평 관계로 인식할 때만 서로의 고통과 기쁨에 공감할 수 있다.

- 특히 다른 사람을 자기 욕망 성취의 수단으로 삼기 위해 상대방의 가치 평가에 집중하지 않고,

-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사람의 가치가 아닌 인격에 집중할 수 있다.

- 그럴 때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을 수 있다.

이렇게 한 몸 되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식탁이 상징하는 삶의 태도이다.

 

귀신들의 식탁이 상징하는 것 - 욕망

하지만 수직 관계 인식에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을 수 없다.

- 애초부터 사람을 느끼고 말하는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로 본다.

- 단지 좋은 도구와 나쁜 도구 혹은 도움이 되는 도구와 그렇지 않은 도구로 나눌 뿐이다.

그래서 강자에 대해 좋은 도구라고 판단하면,

- 존경과 찬양을 하며 통제당하길 바란다.

- 그렇게 복종할 때 그를 밟고 올라서서 욕망을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반면에 강자를 나쁜 도구라고 판단하면,

- 통제당하지 않기 위해 경계심을 갖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 너무 가까우면 통제당하고, 너무 멀면 징계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통제 범위 안에 있지만 통제당하지 않는 경계선에 머문다.

약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좋은 도구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더욱 가혹하게 통제할지 고민한다.

- 그래야 그를 이용하여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반면에 나쁜 도구라고 판단하면,

- 조롱과 무시로 최대한 거리를 둔다.

- 나쁜 도구는 자기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을 수 있겠는가.

-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에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마음에 무감각해질수록 다른 사람을 더욱 가혹하게 이용하고,

- 가혹하게 이용할수록 더욱 무감각해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따라서 수직 관계 인식의 세계는 서로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려는 전쟁 상태가 된다.

- 단순히 강자만 약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 약자도 강자를 이용한다.

그래서 모두가 인격 없이 욕망만 남은 존재가 된다.

- 즉, 사람이 아닌 사람만 남게 된다.

 

이렇게 두 식탁은 완전히 다르다. 배타적이다.

- 귀신들의 식탁이 상징하는 세계는 욕망만 있다.

- 인격이 없다.

- 사람은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이다.

- 이 때문에 사람의 고통과 기쁨은 방해 요소일 뿐이다.

-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데 방해되기 때문이다.

- 자신의 감정조차 말이다.

반면에 주님의 식탁이 상징하는 세계는 인격만 있다.

-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을 듣고 인격을 알아가는 것만 있다.

- 그렇게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세계이다.

- 자기 자신에게조차 말이다.

 

이 때문에 바울이 주님의 식탁에 참여한 사람은 귀신들의 식탁에 참여할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

- 단순히 두 장소에서 밥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 두 식탁이 상징하는 두 세계가 극단적으로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 그만큼 사람을 욕망을 위한 도구 삼는 세계가 위험하고,

- 그만큼 사람을 인격 그 자체로 존중하여 한 몸 되는 세계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고전 10:21] 여러분은, 주님의 잔을 마시고, 아울러 귀신들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고, 아울러 귀신들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참고로, 바울은 욕망의 세계를 귀신들의 식탁에 비유했다.

-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귀신들의 식탁에서 ‘귀신들’에 초점을 둔다.

- 그래서 귀신들의 식탁에 참여하면 악한 영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바울은 우상과 귀신을 구분하며,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 그래서 우상 신전에서 제물을 먹어도 아무 영향도 없다고 말한다.

[고전 10:19~20] 그러니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우상은 무엇이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무엇입니까? (20) 아무것도 아닙니다. ・・・・

[고전 10:25~26]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한다고 하여 그 출처를 묻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먹으십시오. (26) ‘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들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상 신전에서 먹는 귀신들의 식탁은 악영향이 있을까, 없을까?

- 결론적으로, 음식 자체에는 없다.

- 그래서 바울은 마음껏 먹으라고 말한다.

- 우상 제물조차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 점에서 우상 제물을 먹으면 귀신들의 악영향을 받는다는 해석은 틀렸다.

하지만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귀신들의 식탁이 상징하는 세계에 참석하는 것은 악영향이 있다.

- 욕망만 있는 세계에 참여하면, 다른 사람의 인격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까지 파괴한다.

따라서 바울이 ‘귀신들’이라는 용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 악한 원리나 가치관이다.

- 이는 바울이 ‘귀신들(δαιμόνιον, 다이모니온)‘을 사용한 디모데 전서 4장 1절에서 확인된다.

- 바울은 ‘귀신(악마)’과 ‘교훈’을 함께 배치하여 귀신이 단순히 영적 존재가 아니라,

- 사람이 가진 악한 생각, 사고 방식, 가치관을 상징하는 뜻으로 사용했다.

[딤전 4:1] 성령께서 환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를 것입니다.

 

귀신들의 식탁에 참석하는 고린도 교회의 실태

하지만 귀신들의 식탁에 참여하지 말라는 바울의 경고에도 고린도 교회는 여전히 참석했다.

- 이는 고린도 교회가 수직 관계 인식을 갖고 욕망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에 귀 기울이지 않고,

- 오직 욕망 성취 수단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사람을 욕망 성취 수단으로 삼는 대표적인 예가 간음이다.

- 이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 상대방의 마음은 전혀 상관없이 오직 자기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행위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 단지 간음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 고린도 지역에서는 우상 신전에서 간음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 거룩하고 성스러운 행위로 생각했기 때문에,

- 무조건 간음이 나쁘다는 논리는 아무 소용 없다.

그러나 간음이 고린도 교회가 가진 수직 관계 인식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고전 10:8] 간음하지 맙시다. 그들 가운데 얼마가 간음을 하였고,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나 쓰러져 죽었습니다.

 

게다가 8장에서 바울이 다룬 우상 신전 식사 문제도 동일하다.

- 우상 신전 식사 문제의 핵심은 배려와 사랑이다.

- 원칙적으로 우상 신전 식사가 아무 문제 없지만,

- 약한 사람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배려와 사랑으로 절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바울의 권면을 거부했다.

- 우상 신전 식사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이자 자유이고,

- 우상 신전 식사를 금지하는 것은 바울의 불신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배려와 사랑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 태도가 숨어있다.

- 이러한 태도는 수직 관계 인식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궁극적으로 경고하는 것은 간음도 아니고, 우상 신전 식사도 아니다.

- 간음과 우상 신전 식사를 통해 드러나는 수직 관계 인식이다.

-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을 듣지 못하고,

- 모든 사람을 욕망 성취 수단으로 이용하는 태도이다.

그래서 바울은 두 식사가 배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수평과 수직이 배타적이듯 주님의 식탁과 귀신들의 식탁은 배타적이고,

-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에 귀 기울이는 태도와

- 욕망에 빠져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을 듣지 못하는 태도 역시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욕망 성취는 적당히 버무려서 둘 다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 반드시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남은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만약 하나를 포기하지 못하면, 둘 다 잃는다.

 

물론 욕망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 사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 간음하는 매춘부와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 성공만을 위해 달리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때가 있다.

- 그런 사람을 보면 사랑과 욕망 성취가 배타적이라는 것에 의문이 생긴다.

- 사랑과 욕망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태도는 극적인 상황에 드러난다.

- 사랑과 욕망이 상충하여 하나를 선택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 그 사람이 가진 삶의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 수천억 원 규모의 사업 발표를 위해 가는 길에 거지가 구걸하고 있다면,

- 지갑에서 만 원이든 십만 원이던든 줄 수 있다.

- 이 상황에는 사랑과 욕망이 상충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런데 눈 앞에서 사람이 쓰러졌는데, 도와줄 사람이 자기밖에 없을 때,

- 그래서 사업 성공과 생명 구조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

- 이런 때에 그 사람의 태도가 드러난다.

- 이렇게 사랑과 욕망은 배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귀신들의 식탁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 단순히 밥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 사랑을 위해 욕망을 포기하라는 것이며,

-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에 귀 기울이라는 것이고,

- 수평 관계 인식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그런 인식을 가질 때만 간음과 우상 신전 식사를 하지 않을 수 있고,

- 주님의 식탁이 상징하는 사랑과 배려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하나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인정하고,

-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정하는 것이다.

[고전 10:22] 우리가 주님을 질투하시게 하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보다 더 힘이 세다는 말입니까?

 

23~11:1절: 수평 관계 인식의 적용

바울은 사랑과 욕망의 배타성을 또 이렇게 표현한다.

- 자기 유익 추구는 욕망 성취, 간음, 우상 신전 식사,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 무관심에서 드러난 수직 관계 인식을 뜻하고,

- 남의 유익 추구는 사랑, 우상 신전 식사 절제,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에 귀 기울임에서 드러난 수평 관계 인식을 뜻한다.

- 그런데 자기 유익은 포기하고 남의 유익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고전 10:24]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물론 자기 유익과 남의 유익이 일치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그럴 때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 바울은 자기 유익과 남의 유익이 상충할 때, 

- 그래서 자기 유익을 선택하면 남의 유익이 박탈되고, 

- 반대로 남의 유익을 선택하면 자기 유익이 박탈될 때,

- 그래서 자신과 남 중에 반드시 한 사람이 고통당해야 할 때,

- 자신의 고통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몸과 피를 내어주신 것처럼 말이다.

 

또 그렇다고 무작정 희생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 바울이 귀 기울이라는 고통에는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도 포함된다.

- 자기 욕망에는 귀를 닫을 필요가 있지만,

- 그렇다고 자기 고통까지 무조건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무작정 자기 목숨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 만약 그러셨다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이려 할 때 피하지 않으셔야 했다.

- 적당한 때를 선택하셨다.

[요 11:53~54]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께서는 유대 사람들 가운데로 더 이상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에서 떠나, 광야에서 가까운 지방 에브라임이라는 마을로 가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다.

 

따라서 목숨 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관계 인식을 갖느냐이다.

-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일관되게 수평 관계 인식을 가지셨다.

- 일관되게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에 귀 기울이셨다.

- 다른 사람을 자기 욕망 성취 수단으로 삼지 않으시고,

- 인격 그 자체로 인정하셨다.

- 즉, 자기 인격과 남의 인격을 동등하게 여기셨다.

- 무조건 남의 인격을 낮추지도 않으셨지만,

- 무조건 남의 인격을 높이지도 않으셨다.

이렇게 수평 관계 인식이 핵심이다.

 

그 관점에서 바울은 음식 문제를 다룬다.

- 결론부터 말해서, 바울은 희생을 요구한다.

남의 유익을 위해 먹기 싫어도,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도 먹으라고 한다.

[고전 10:27] 불신자들 가운데서 누가 여러분을 초대하여, 거기에 가고 싶으면, 여러분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위한다고 하여 묻지 말고, 드십시오.

- 그리고 남의 유익을 위해 먹고 싶어도 먹지 말라고 한다.

[고전 10:28]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것은 제사에 올린 음식입니다” 하고 여러분에게 말해 주거든, 그렇게 알려 준 사람과 그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마십시오.

동시에 바울은 무조건 희생은 경계한다.

-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신의 정당한 자유와 권리는 지키라고 한다.

- 싫은 것은 하지 말고, 원하는 것은 하라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의 눈치 보지 말라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의 인격이 자신보다 낮지 않은 것처럼 높지도 않기 때문이다.

- 수평 관계 인식에서 말이다.

[고전 10:29~30] ・・・・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의 비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30) 내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면, 내가 감사하는 그 음식 때문에 비방을 받을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의 말이 모순으로 들린다.

- 28절에서는 다른 사람의 양심에 신경 쓰라고 하고,

- 29절에서는 다른 사람의 양심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 그러나 28절은 다른 사람의 인격이 자신보다 낮지 않고 동등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고,

- 29절은 다른 사람의 인격이 자신보다 높지 않고 동등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야 하지만,

- 그렇다고 자기를 무조건 파괴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 자기만큼 남도, 남만큼 자신도 사랑하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한다.

[고전 1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 수평 관계 인식이 왜 하나님의 영광일까?

- 모든 사람, 더 나아가, 모든 존재가 동등하다고 믿는 이유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 천지 만물이 모두 주님의 것이기에, 모든 것을 동등하게 소중히 여기는 삶의 태도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다.

[고전 10:26] ‘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들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하나님의 교회도 동등하게 소중히 여기고,

- 그들도 자기 몸처럼 사랑하여,

- 그들도 최고의 유익인 구원에 이르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이유이고,

-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사람이 살아야 할 삶의 태도이며,

- 그것이 바울 자신의 삶이며,

- 고린도 교회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이다.

[고전 10:32~33] 여러분은 유대 사람에게도, 그리스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33) 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결론 - 수평 관계 인식을 갖는 방법

세상은 수직 관계 인식으로 움직인다.

- 강자와 약자가 있고,

- 강자는 약자를 조정하여 유익을 얻으려 하고,

- 약자는 강자를 등에 업어서 유익을 얻으려 한다.

- 서로의 고통과 기쁨에 귀 기울이기보다 자기 유익에 몰입한다.

-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기도 하지만,

- 그 역시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이용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때문에 누구도 수직 관계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 태어나서부터 숨 쉬듯 접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대부분의 사은 이렇게 생각한다.

- 자신이 약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 약자에서 벗어나 강자가 되고 싶어 하며,

- 동시에 강자가 되어 약자를 괴롭힐까 봐 걱정하여,

- 강자가 되어서 약자를 도와주겠다는 결심을 한다.

- 그래서 인생의 목표가 약자에서 벗어나 강자가 되는 것,

- 혹은 강자가 되지만 약자같이 사는 것이 된다.

-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뒤섞여 있지만,

- 분명한 것은 수직 관계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도 아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 예수님이 수직 관계를 파괴하실 때, 강자의 위치에 있었던 바리새인이 반발한 것은 당연하다.

- 자신의 특권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약자였던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 수직 관계를 파괴하여 강자의 특권을 없애시려는 예수님을 약자였던 베드로는 왜 거부했을까?

- 베드로 역시 수직 관계 인식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 지금은 약자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미래에는 강자가 될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수직 관계 파괴는 바리새인의 특권만 파괴한 것이 아니라,

- 베드로의 소망까지 파괴했다.

수직 관계는 이만큼 모든 인류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이고,

- 수직 관계 인식에서 수평 관계 인식으로 전환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려운 일을 우리는 어떻게 이뤄내야 할까?

- 분명히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우리에게 수평 관계 인식을 가지라고 권고하는데,

- 현재의 특권과 미래의 소망까지 파괴하는 수평 관계 인식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 수평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 먼저 수평 관계 안에서 사랑을 받고, 그런 다음 사랑을 하고,

- 그런 후에 또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다시 사랑을 받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 그 과정을 통해 뇌의 연결 회로가 바뀌어야 한다.

- 사람을 볼 때 그의 가치를 먼저 인식하는 뇌 연결 회로가 점차 끊어지고,

- 그의 인격을 먼저 인식하는 뇌 연결 회로가 강화되어야 한다.

- 이러한 뇌 연결 회로의 재배치는 정말 오래 걸리는 과정이다.

- 길고 고단한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수평 관계 인식이 생성된다.

 

그렇다면 이 경험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 결국 첫 시작은 하나님을 통해서밖에 할 수 없다.

- 창조주로서 절대 강자이신 하나님이 약자인 우리를 이용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 그런데 그것은 부족하다.

- 약자를 사랑하는 강자는 많다.

- 강자가 약자를 사랑하여 약자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은 비교적 쉽다.

- 신하를 사랑하고 보살폈던 왕은 역사에서도 많다.

- 사랑은 수직 관계에서도 일어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하는 것을 넘어 창조주의 지위에서 피조물의 지위로,

- 강자의 위치에서 약자의 위치까지 내려오신다.

-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서 말이다.

-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것 이상이다.

- 강자도 약자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아도,

- 예수님이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아도,

-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전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다.

- 강자와 약자, 창조주와 피조물의 수직 관계까지 소멸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 이 때문에 예수님이 약자가 되어 죽으신 것이다.

 

이점을 베드로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인생을 포기할 만큼 감동했었다.

-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다.

- 하지만 베드로가 믿은 사랑은 강자의 사랑이었다.

- 그래서 강자였던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포박되어 약자가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베드로는 여전히 수직 관계 인식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다.

- 수직 관계에서 사랑이 아니라, 수평 관계에서 사랑을 깨닫는다.

- 자신에게 여전히 강자가 되려는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한다.

- 그리고 수평 관계의 사랑을 실현하여 교회 공동체의 반석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 생활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 과정이다.

-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 그런데 사랑을 주신 하나님이 강자가 아니라 약자라는 것까지 깨달아야 한다.

-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과 같이 강자가 되려는 욕망이 깨져야 한다.

- 많은 사람이 여기에서 돌아선다.

- 베드로같이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약자라는 것을 깨닫고 수직 관계 인식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 하나님과 내가 동등한 세계, 그래서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사라진 세계,

- 그래서 누구도 이용하고 착취하지 않는 세계,

- 그렇기 때문에 항상 서로의 고통과 기쁨에 귀 기울이는 세계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강자로서의 특권과 약자로서의 소망이 부서질 것이다.

- 그것이 두려워 완강하게 거부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평 관계가 주는 자유로움은 수직 관계가 주는 특권과 소망을 생각나지 않게 할 것이다.

- 자유로움 안에서 자신을 되찾는 기쁨은 생명을 얻는 희열을 줄 것이다.

바로 이 기쁨을 주기 위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고,

- 이 기쁨을 주기 위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귀신들의 식탁에 참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며,

- 이 기쁨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일상의 안락함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