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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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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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제물 고기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명확하다.
- ‘먹어도 되. 그렇지만 먹지 마.’이다.
[고전 8:4]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고전 8: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먹어도 된다고 말한 이유는 우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믿으니,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게 된다.
- 그렇게 우상 자체가 없으니, 우상 제사에 쓰인 고기를 먹더라도 아무런 악영향이 없다.
- 그러니 우상 고기를 먹는다고 우상이 몸 안으로 들어와 우상의 지배를 받는 일도 없다.
- 고기는 고기일 따름이다.
- 따라서 우상 제물 고기를 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반면에 먹지 말라고 말한 이유는 약한 신도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 고린도 교회에 믿음이 강하여 우상 존재를 부정하여 우상 제물 고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먹는 사람이 있었다.
- 강한 사람에게는 우상 제물 고기를 먹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
- 하지만 여전히 믿음이 연약하여 우상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 그래서 약한 사람은 우상 제물을 먹고 우상의 영향력을 받아 우상에게 소원을 빌고 싶은 충동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 우상에게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인식 속에서 평생 살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믿음을 지키고자 그 충동을 간신히 절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한 사람이 마음껏 우상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고 절제가 흔들렸다.
- 충동을 실현할 용기를 얻었다.
- 저 사람도 하니 자기가 하는 것도 괜찮다고 합리화했다.
- 그래서 우상 고기를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 우상에게 소원을 빌며 소원 성취까지 기대하게 되었다.
- 그들에게 아직 우상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다.
- 그래서 실제로 약한 사람이 망하는 일이 있었다.
- 따라서 우상 제물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고전 8:9]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0)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고전 8:11]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이 다루는 표면적인 문제이다.
- 믿음이 강한 무리가 자유롭게 우상 제물 고기를 먹는 것 때문에 믿음이 약한 무리가 걸림돌에 걸려서 넘어졌다.
- 그래서 바울은 ‘고기를 먹어도 되지만, 먹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이것이 아니다.
- 만약 단순히 우상 제물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아닌가의 논쟁이라면,
- 그래서 먹지 말라는 바울의 처방으로 충분히 해결될 일이라면,
- 이렇게 편지까지 쓰지 않았을 것이다.
- 바울은 이미 이러한 처방을 이전에 충분히 전했고,
- 고린도 교회 역시 바울의 처방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거부했다.
- 지식보다 사랑이 우선이라는 바울의 권면을 부정하고, 계속해서 지식을 추구했다.
- 여전히 우상 제물 고기를 마음껏 먹었다.
- 그로 인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편지까지 써서 책망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 우상 제물 고기 문제 이면에 고린도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고린도 교회의 문제 - 자유 숭배
결론부터 말해서, 고린도 교회 문제의 본질은 ‘자유를 숭배하는 태도’이다.
- 풀어 말하면,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을 믿었다.
- 그런데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 제한적이고 왜곡된 모습으로 믿었다.
- 즉, 하나님의 역할을 지혜와 지식의 전달자로 한정했다.
- 여기서 지혜와 지식은 고린도 지역을 장악한 헬라 철학에서 궁극의 선을 상징한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을 이런 방식으로 믿은 동기는 악하지 않다.
- 하나님이 절대자, 유일신이라고 믿기 위해 자신의 문화를 차용했다.
- 헬라 문화에서 절대적 존재인 지혜와 지식을 하나님과 연결했다.
- 하나님을 지혜와 지식의 전달자로 이해하면, 하나님을 쉽게 절대자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났다.
- 원래 의도는 하나님이 절대자라는 사실을 믿기 위한 목적으로 지혜와 지식을 수단 삼은 것이다.
- 하나님을 궁극의 선인 지혜와 지식보다 더 높은 분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을 얻기 위해 수단으로 전락했다.
-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최상위 가치인 지혜와 지식을 하나님과 연결한 것인데,
- 오히려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의 전달자 혹은 수호자로 전락했다.
그래서 악한 결과가 일어났다.
-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혜와 지식까지 숭배했다.
- 물론 겉으로 하나님보다 지혜와 지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 그러나 평생을 지혜와 지식이 최고라는 가치 체계에서 산 이들 마음 안에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지혜와 지식의 전달자로 제한했다.
- 이 때문에 하나님의 독점적 지위를 부정하게 되었다.
- 이는 명백한 악이다.
게다가 지혜와 지식 숭배는 자유 숭배로 이어졌다.
- 지혜와 지식으로 영혼은 이미 거룩해졌기 때문에, 육체는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육체의 자유를 주장했고, 그로 인해 음행에 빠졌다.
- 아무리 육체가 음행을 저질러도 지혜와 지식을 담은 영혼은 구원받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고전 6:18]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지식을 가진 이들은 우상 제물 고기를 ‘자유롭게’ 그래서 탐욕스럽게 먹었다.
- 그렇게 규범과 질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은 지식을 가진 자의 특권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식’에 대한 비판으로 본문을 시작한다.
- 지식과 자유의 숭배가 문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1~3절: 지식 숭배 비판 -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지식을 비판한다.
[고전 8:1]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지식을 세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지식의 뜻 ① - 우상은 없다.
첫째로, 표면적인 뜻은 우상 제물 고기에 대한 지식이다.
-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상 존재를 부정했고,
- 그러니 우상 제사에 쓰인 고기라고 해도 우상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 우상 제물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지식이다.
- 그래서 그 지식을 믿고 자유롭게 우상 제물 고기를 먹었다.
- 그런데 그로 인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 바울이 지식을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울이 다루는 문제는 우상 제물이다.
- 우상 제물을 마음껏 먹는 무리와 그렇지 못한 무리의 대립이다.
- 지식을 가져서 우상 제물을 먹으면서도 우상 숭배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강한 사람’과
- 지식을 갖지 못하여 우상 제물을 먹으면 우상 숭배를 할 수밖에 없는 ‘약한 사람’의 갈등이다.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갈등의 원인을 약한 사람 탓으로 돌렸다.
- 과정이야 어쨌든 결국 우상을 숭배한 당사자가 잘못이라는 논리이다.
- 그랬기 때문에 해결 방법은 모두가 지식을 갖고 강해지는 것이다.
- 그러면 누구나 자유롭게 우상 제물 고기를 먹을 수 있고,
- 그래도 아무도 걸림돌에 걸리지 않고, 우상 숭배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일석이조’이다.
- 그래서 어떻게든 지식을 교회 전체에 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 즉, 지식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달랐다.
- 바울은 갈등의 원인을 강한 사람에 두었다.
- 약한 사람이 우상 숭배를 한 이유가 자신의 약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 강한 사람이 지식을 근거로 자유를 절제하지 않고 오용했기 때문으로 판단했다.
- 따라서 강한 사람이 사랑을 위해 지식과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 즉, 사랑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권고한다.
이 때문에 바울은 지식을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표면적이고 지엽적이다.
- 빙산 전체에서 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만 표현한 것이다.
- 수면 아래 거대한 빙산이 숨어 있다.
- 바울이 지식을 비판한 것은 맞지만, 지식만을 비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수면 위의 빙산만을 위해 편지를 쓰지 않았다.
- 진정한 의도는 숨어 있다.
- 우리는 숨은 의도까지 내려가야 한다.
- 바울이 비판하는 것은 지식 이면에 있는 무엇일까?
지식의 뜻 ② - 지식 숭배 태도
둘째로, 바울이 지식을 비판한 이유는 지식 숭배 태도 때문이다.
- 지식은 고린도 지역을 장악한 헬라 철학의 최고선이다.
- 그렇기 때문에 지식을 얻어서 영혼이 구원에 이르면, 육체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믿었다.
- 지식을 통한 영혼의 구원을 육체가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만큼 지식의 영향력이 막강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지식을 숭배한 만큼 자유도 숭배했다.
- 지식은 영혼의 구원을 주고, 영혼의 구원은 육체의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 이렇게 지식과 자유는 연결된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음행에도 취약했다.
- 영혼에 지식을 채우는 것에만 집중했고,
- 육체에 해당하는 실제 삶은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 그래서 교회 밖 세상의 삶과 차이를 두지 않았다.
- 세상이 하는대로 음행을 했다.
- 그래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죄책감과 거리낌도 없었다.
[고전 5:1]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일까지 있다고 하니, 그러한 음행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같은 이유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우상에 대해서도 자유로웠다.
- 어차피 지식으로 이미 구원에 이르렀기 때문에,
- 우상 제사 의식에 참여하여 죄를 지어도 상관 없다고 믿었다.
- 그런 자유가 이미 주어졌다고 믿었다.
- 그래서 지식을 가진 사람은 마음껏 우상 제사 의식에 참여하여 우상 제물 고기를 먹었다.
바울도 이들의 논리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기에 우상은 존재하지 않고,
- 그러니 우상 제사에 참여하여 우상 제물을 먹는다고 우상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논리를 바울도 인정한다.
- 바울 역시 이 지식은 참이라고 믿었다.
- 지식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고전 8:4]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고린도 교회를 비판하는가?
- 바울이 겉으로 드러내는 근거는 ‘사랑’이다.
- 아무리 지식이 옳다고 하더라도 지식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 사랑 없는 지식은 죄일 뿐이라는 뜻이다.
[고전 8:1]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다르게 말해서, 고린도 교회와 바울은 죄를 판단하는 기준이 달랐다.
- 고린도 교회는 올바른 지식이었고, 바울은 사랑이었다.
- 그래서 지식을 근거로 정당성을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은 사랑을 근거로 부당함을 설득한다.
- 그래서 우상이 없다는 지식을 근거로 우상 제물을 먹는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은 사랑이 없다는 근거로 정죄한다.
이것이 바울의 표면적인 논리이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런 논리를 전개했을까?
- 고린도 교회의 어떤 태도를 지적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을까?
정죄의 핵심은 고린도 교회가 단지 지식을 추구했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다.
- 지식 추구는 신앙에 필요하다.
- 옳고 그름을 판단할 지식을 배워야 하고,
- 그 중심에 있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 지식을 배워야 한다.
-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지식을 추구했기 때문에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고린도 교회가 지식 외의 모든 것, 특히 사랑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 사랑은 육체에 속한 일이기에 하찮다고 판단했다.
- 그래서 사랑이 중요하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무수히 들었지만,
- 그것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지식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 바울이 편지까지 써가며 고린도 교회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랑을 부정했을까?
- 바울이라면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을 텐데 말이다.
- 고린도 교회가 단지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숭배했기 때문이다.
추구와 숭배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추구는 다양한 것을 동시에 할 수 있지만,
- 숭배는 딱 하나만 할 수 있다.
- 그래서 지식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사랑도 추구할 수 있지만,
- 지식을 숭배하면, 사랑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
이는 신앙에서도 동일하다.
- 하나님은 숭배의 대상이어야 한다.
- 그래서 하나님을 믿기 위해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믿지 말아야 한다.
- 그러나 많은 사람이 추구의 대상으로만 삼는다.
- 그래서 하나님도 믿고 동시에 돈도, 우상도, 부귀와 명예도 믿는다.
- 그 결과 자기도 모르게 죄를 범한다.
- 이는 믿음을 숭배가 아니라 추구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죄는 ‘지식 숭배’이다.
- 바울이 편지를 쓴 이유는 단지 우상 제물 고기를 먹었기 때문도 아니고,
- 지식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며,
- 사랑을 몰랐기 때문도 아니다.
- 편지에서 바울은 ‘우상 제물 고기 먹지 말라.’ 그리고 ‘사랑하라.’라고 말하지만,
- 그래서 많은 해설서에서 본문을 ‘사랑을 위해 우상 고기를 먹지 말라.’라고 해석하지만,
- 이는 표면적이고 지엽적인 해석이다.
고린도 교회는 우상 제물 고기 먹을 자유와 그것의 근거인 지식을 숭배했고,
- 사랑을 배척했다.
- 그들에게 사랑은 지식과 자유를 가로막는 방해물이었다.
-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상 제물 고기를 먹지 않고 참아야 하는데,
- 이는 우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식과 지식에 근거한 자유를 거부하는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 우상 제물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단순한 절식이 아니었다.
-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까짓 우상 제물 고기 먹지 않고 다른 고기 먹으면 될 일인데,
- 끝까지 고집부리는 고린도 교회가 이상해 보인다.
- 왜냐하면 우리는 지식과 자유가 추구해야 할 유일한 가지, 즉 숭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지식과 자유를 숭배했다.
- 그들에게 우상 제물 고기를 먹지 않고 참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유일한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 이는 곧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고,
- 결국 생명을 위협받는 고통이다.
- 이는 마치 우리에게 앞으로 돈 벌지 말고, 가진 돈도 이웃에게 전부 나눠주라고 권면한 것과 같이 극심한 고통을 준다.
그랬기 때문에 우상 제물 고기 먹지 말고 사랑하라는 권면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지식을 추구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숭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한다.
- 고린도 교회가 왜 지식을 추구했고, 사랑은 배척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까지 물어야 한다.
- 그 기저에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 고민해야 한다.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이 당연한 말이 고린도 교회 안에 침투하지 못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 바울이 셀 수 없이 말했던 사랑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고린도 교회의 사정이 있었다.
- 많은 해설서에서 고린도 교회가 단지 어리석고 무지하기 때문이고,
- 고린도 지역이 워낙 우상 숭배가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데,
- 이는 게으른 태도이다.
- 게으름을 이기고 끝까지 질문해야 한다.
- 그것이 신앙 생활이다.
지식의 뜻 ③ -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
셋째로, 바울이 지식을 비판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을 영원불변하고, 전지전능하며, 완전한 형태를 지속하는 절대적 존재로 인식했다.
- 한마디로, ‘정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진 사람은 세상은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 하나님이 고정불변하는 정적인 존재라는 것을 근거로 세상의 모든 가치 역시 고정불변한다고 믿는다.
- 완전한 하나님이 설계하신 완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가치 기준 역시 고정불변하고 영원하다.
- 이에 따라 자신의 가치 기준이 영원히 옳고, 그 외의 다른 가치 기준은 틀리다.
- 그래서 절대적 가치 기준을 가지며,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또한 이러한 인식을 가진 사람은 모든 가치가 고유한 값을 가진다고 믿는다.
- 그렇기 때문에 각 가치는 서로 비교 가능하다.
- 그래서 하나님을 최정점에 놓고, 모든 가치에 순위를 매긴다.
- 한마디로, 가치 체계가 수직적이다.
- 그로 인해 더 좋은 가치와 더 나쁜 가치가 있고,
- 그 관계는 절대불변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사람이 소유한 가치를 근거로 타인과 자신의 가치도 순위를 매긴다.
- 그래서 사람의 가치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 더 좋은 사람과 더 나쁜 사람이 있기에,
- 사람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인식한다.
이를 근거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더 좋은 가치를 소유해야 한다고 믿는다.
- 그런데 좋은 가치는 나쁜 가치에 비해 희소하기 때문에,
- 좋은 가치를 소유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경쟁한다.
-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가치를 얻어야만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 다른 사람이 가진 가치를 빼앗아야 한다.
- 그래서 다른 사람과 협력하기보다 경쟁할 수밖에 없다.
-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더 좋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세상을 전쟁터로 만든다.
- 타인은 가치를 빼앗아야 할 적이고,
- 자신의 가치를 빼앗아 갈 수 있는 도둑이다.
- 그리고 타인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짓밟고 올라가야 할 발판이고,
- 언제든 자신을 짓밟고 올라서려 하는 경쟁자이다.
- 그로 인해 세상은 서로 아무도 신뢰할 수 없고 협력할 수 없는 전쟁터가 된다.
서로 협력할 유일한 기회가 있다.
- 혼자서는 이길 수 없는 강한 적을 만났을 때이다.
- 그때는 몇 사람이 협력하여 강한 적을 무너뜨리고, 적이 가진 가치를 서로 나눈다.
그러나 협력은 곧바로 깨진다.
- 적이 가진 가치를 자신이 더 많이 갖기 위해 다시 경쟁한다.
- 조금이라도 더 가져야 상대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 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굴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도 이러한 인식을 가졌다.
- 하나님을 정적인 존재로 인식했고,
- 그 존재에 이르기 위해 지식을 소유하여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야 한다고 믿었다.
- 그래서 지식을 소유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이르러서 구원을 얻을 수 있고,
- 그렇게 얻은 구원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훼손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육체의 자유를 주장하며 실상은 방종했다.
- 구원을 정적으로 인식했기에, 훼손된다는 두려움이 없었다.
- 그래서 무분별하게 음행을 저질렀고,
- 마음껏 우상 제물 고기를 먹었다.
그래서 이들은 바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바울은 사랑을 위해 지식과 자유를 포기하라고 했는데,
- 그들에게 이 말은 구원을 포기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 그들은 지식과 자유를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믿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지식을 추구하며 사랑을 배척했던 것이다.
- 아무리 바울이 사랑을 가르쳐도 말이다.
- 사랑을 위해 지식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은 그들 입장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으라는 뜻으로 들렸다.
-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살기 위해 바울을 거역했다.
- 생명이 걸린 만큼 치열하게 저항했다.
이에 더하여, 이들에게 사랑하라는 바울의 말은 세상 물정 모르는 유치한 소리였다.
- 세상은 전쟁터이다.
- 타인을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타인에 의해 밟힌다.
- 소유를 지키지 못하고 빼앗기면 추락하고,
- 추락하지 않기 위해 타인의 소유를 빼앗아야 한다.
- 그렇게 지식을 소유할 때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랑으로 타인을 위해 지식을 포기하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이다.
- 물론 투자의 관점에서 사랑을 통해 장기적인 수익을 만들라는 말은 이해할 수 있다.
- 하지만 수익에 대한 기대 없이 사랑하라는 말을 고린도 교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적인 존재라는 인식 때문이다.
- 하나님을 절대적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 이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생명을 걸고 바울에게 저항한다.
- 목숨 걸고 지식을 지키며, 사랑을 거부한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이러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세계 - 역동적인 하나님
그렇다면 바울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믿었다.
- 하나님 존재의 근원을 세 분의 하나님이 서로 역동적으로 맺는 관계로 믿었다.
물론 하나님이 절대적 존재라는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 바울도 하나님을 영원무궁하고, 절대불변하며, 완전무결한 분으로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 정적 속성보다 상대적, 역동적 속성을 우위에 두었다.
- 절대적 속성은 역동적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제한했다.
-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은 세 분의 역동적인 관계인데,
- 그 관계를 영원무궁하게 이어가는 절대적 존재로 이해했다.
- 그것이 삼위일체가 뜻하는 바이다.
그래서 바울은 절대적 속성을 역동적 속성보다 우위에 두지 않았다.
- 영원무궁, 절대불변이 본질인 하나님 세 분이 자기 존재를 굳건하게 지키는 상태로 계신다고 믿지 않았다.
- 만약 하나님이 정말 그랬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전쟁과 경쟁 상태였을 것이다.
- 서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 상대방의 영역을 빼앗으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존재의 본질 안에서 평화와 공감은 전무했을 것이다.
- 인간 세계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한다.
- 하나님이 역동적이기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가치 역시 역동적이라고 믿는다.
- 그래서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가치 기준 역시 변할 수 있다.
-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가치 기준은 영원하지 않고,
- 지금은 가치 없어 보이는 것도 언젠가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 그래서 상대적 가치 기준을 가지며, 다른 가치 기준을 가진 사람을 포용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인식은 모든 가치에 고유하고 불변하는 값이 없다고 믿는다.
- 그렇기 때문에 각 가치는 비교할 수 없다.
- 하나님이 가치의 최정점에 있는 것은 맞지만, 나머지 모든 가치는 동등하다.
- 한마디로, 가치 체계가 수평적이다.
- 더 좋은 가치와 더 나쁜 가치란 없고,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가치가 역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를 소유한 사람 간의 비교 역시 불가능하다.
- 그래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인식한다.
- 그렇다고 상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부자와 거지가 있고, 도덕적인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으며, 강자와 약자가 있다.
- 하지만 그 차이가 일시적, 제한적이다.
- 언젠가는 그 관계가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가치를 소유하고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더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 그러니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많은 가치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 상하 관계라는 틀이 모래 위에 세운 탑처럼 무너지기 쉽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냐?
- 그렇지 않다.
- 노력의 방향이 다를 뿐이다.
수직 사회에서는 높은 곳이 좋은 곳이다.
- 상위 계층은 좋은 사람이고, 하위 계층은 나쁜 사람이다.
- 그래서 상위, 하위 계층 모두 더 높아지려 노력한다.
- 동시에 자신보다 하위 계층을 무시하고 비난한다.
- 따라서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칭찬받기 위해 모두가 더 높아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수평 사회에서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관된 기준이 없다.
- 부자와 거지가 있지만, 부자를 칭찬하지도 거지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 사회에는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이 있지만, 그것으로 칭찬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 그래서 누구도 더 높아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높아지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냥’ 노력한다.
- 다르게 말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 노력한다.
- 좋아하는 일을 위해 왜 노력하냐?
- 그 일을 통해 돈을 벌고, 명예를 얻으며, 상위 계층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 말 그대로, 좋아하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뿐이다.
- 또 다르게 말해서, 노력하는 이유가 좋아한다는 것 외에 없다.
- 그래서 ‘그냥’이 적절한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한다.
-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과 이기적인 것을 혼동한다.
- 이기적인 것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 자기 ‘유익’에 집중하는 것이다.
- 그래서 자기 가치를 높여서 상위 계층에 올라가는 것에만 집중한다.
- 자기가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상관없이 말이다.
- 이는 절대적 가치 체계 안에서 수직적 관계를 전제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유익을 고려하지 않는다.
- 말 그대로, 자기 자신만 고려한다.
-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
- 예를 들어, 과학 기술, 문학 작품, 새로운 사상 등을 만든다.
- 오로지 자기 기쁨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기쁨을 충족했기에, 그리고 처음부터 유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 굳이 작품을 소유하지 않는다.
- 사람들에게 나눈다.
- 자기에게 필요 없기 때문에,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
여기서 기쁨을 또 얻는다.
- 자신을 통해 필요한 것을 받은 사람을 보고 충만함을 얻는다.
그러면 자기 내면에서 일어난 기쁨과 다른 사람을 통해 얻은 기쁨이 새로운 동기가 된다.
- 그래서 또 다시 노력한다.
- 더욱 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 그리고 더욱 더 다른 사람이 필요한 것을 만들기 위해 말이다.
역동적인 가치 체계를 가진 세계에서는 모두가 이렇게 산다.
- 자기 유익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데,
- 그로 인해 서로에게 유익을 준다.
- 그래서 결국 모두가 유익을 얻는다.
물론 많은 사람 중에 생산성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유익을 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소수의 사람이 다수를 먹여 살리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이렇게 지적한다.
- 그런 사회에는 꼭 무임승차 하는 사람이 생긴다.
-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의존하여 게으름 부리는 사람이 생긴다.
- 그러면 이중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 게으른 사람을 게으르게 놔둬서 생산성이 떨어지고,
- 능력 있는 사람 역시 성과의 결과가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 실망하여 성취 동기를 잃고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렇게 비판하는 기저에는 또 다시 수직적 관계가 전제된다.
- 생산성이 높은 것이 좋고, 게으른 것은 나쁘다는 절대적 가치 체계가 전제된다.
- 그러나 역동적인 세계에서는 애초부터 누구도 높은 생산성으로 많은 유익을 얻어 높아지길 원하지 않는다.
- 누구도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았다.
- 자기 만족을 위해 일했고, 타인의 만족을 위해 일했다.
그러니 자기에게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는다.
- 또한 게으른 사람이 자기가 만든 유익으로 산다고 실망하지 않는다.
- 오히려 그것 때문에 기뻐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역동적으로 인식하는 세계는 서로 관계가 깊어진다.
- 그래서 서로 사랑한다.
- 서로를 적이나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자나 동반자로 생각한다.
- 능력 있는 사람도, 능력 없는 사람도 서로를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창조 세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권면한다.
- 지식보다 사랑을 우선시하라고 말이다.
- 지식을 숭배하면 상하 계층이 생기고, 서로 경쟁하게 하고, 세상이 전쟁터가 되기 때문이다.
- 반면 사랑은 상하 계층이 있더라도, 서로 협력하게 하고, 세상을 하나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 즉 앎이 아무 소용 없다고 말한 것이다.
-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며’ 지식을 숭배하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할’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고전 8:2]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 역동적 관계를 맺은 사람은
- 하나님도 그를 알고 동시에 그도 하나님을 안다.
- 여기서 ‘안다’라는 동사는 중간태, 즉 능동과 수동의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 그래서 단지 하나님만 그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도 하나님을 안다는 뜻이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지식을 얻는다.
[고전 8:3]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따라서 진정한 지식은 자신 안에 소유할 수 있는 정적인 형태가 아니다.
- 그래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 지식도 갖지 못한 것이다.
진정한 지식은 역동적이다.
- 그래서 소유할 수 없다.
- 오직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만 발견된다.
-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만 잠시 보였다가 관계가 멈추면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진정한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 하나님과 사람이 역동적으로 관계 맺을 때만 발견된다.
이것이 지식과 사랑을 통해 바울이 궁극적으로 전하려는 것이다.
-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절대적, 정적 존재가 아니라, 상대적, 역동적 존재라는 것이 있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를 권고한다.
하나님이 역동적 존재라는 증거 - 예수님의 죽음 부활
하나님이 절대적, 정적이기보다 역동적, 상대적 존재가 우선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증명된다.
- 예수님의 성육신, 즉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출생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의 절대성은 약화되고 역동성은 강화된다.
- 예수님이 세상에 육체를 입고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성에 균열을 내고, 그 사이에 역동성이 침투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역동성 모두 드러내신다.
-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드러낸다.
- 예수님도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 그런데 하나님의 절대성은 모든 사람이 가진 지식이다.
- 예수님이 절대성을 드러내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지,
-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선시하는 속성은 역동성이다.
- 역동성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절대성은 알지만 역동성은 몰랐고,
- 그로 인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출생부터 역동적이다.
- 불변하는 하나님이 썩어 없어질 육체를 입으셨다.
공생애 중에도 예수님은 역동하는 감정을 보여주신다.
- 불변하는 하나님이라면 감정도 일정해야 했다.
- 하지만 예수님은 분노, 슬픔, 기쁨, 절망 등을 드러내신다.
특히 죽으시기 직전 골고다 언덕에서 하신 기도에 예수님의 역동하는 감정이 잘 드러난다.
- 전지전능하신 절대자 하나님이라면, 앞으로 있을 죽음을 이미 아시고,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 물론 주님의 뜻대로 해달라는 기도로 마무리하시지만,
-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피땀까지 흘리신다.
- 이것이 바로 역동적인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이 얼마나 예수님의 절대성을 부정하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 하나님이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죽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 단,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우선시한다는 조건 아래서는 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특히 베드로조차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의심했다.
- 베드로도 예수님의 역동적 속성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바로 그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부정한다.
-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절대적 존재로만 믿는 사람의 운명이다.
결국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셨고, 이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 부활 이전에는 죽은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은 죽을 수 없으니,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부활 이후에는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을 보며,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니, 하나님은 죽고 부활할 수 있는 역동적 존재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 절대적 존재로만 생각했던 하나님의 기존 인식이 깨지고,
- 진정한 하나님은 역동적 존재라는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4~6절: 지식에 근거한 하나님의 절대성
다시 말하지만, 바울도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 그래서 절대성을 상징하는 고린도 교회의 지식을 옹호한다.
-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절대적 존재, 즉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는 존재이니,
- 신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우상은 없다는 것이다.
[고전 8:4]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세상과 사람에게까지 확장한다.
- 하나님이 절대자이기에, 세상 만물의 근거, 즉 창조주이시다.
- 따라서 만물도, 우리도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 만물도, 우리도 예수님의 피조물이다.
- 이렇게 하나님의 절대성에 근거하여 세상을 설명한다.
[고전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정하지만,
- 그렇다고 고린도 교회의 지식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 이 안에도 고린고 교회에 대한 비판이 숨어있다.
- 하나님의 절대성에 균열을 내고, 그 사이에 하나님의 역동성을 넣어놓았다.
바울은 분명히 절대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말한다.
- 절대적 존재가 여럿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한 분’이신 절대자가 ‘두 분’이다.
- 하나님도 ‘한 분’, 예수님도 ‘한 분’이다.
-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절대성에 균열이 생긴다.
이를 통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 하나님이 영원불변하고, 전지전능하며, 완전한 형태를 지속하는 절대적 존재라는 고린도 교회의 주장은 옳다.
- 그러나 그 절대자가 한 분이 아니라 두 분으로 존재한다.
- 따라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여 무한한 자유를 누리시는 분이 아니다.
- 하나님은 언제나 상호작용을 하시며, 하나님 안에서조차 자유를 제한하신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독재자 하나님처럼 무한한 자유를 앞세운다.
- 자신에게는 지식이 있으니 자유롭게 우상 제물 고기를 먹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 그 자유를 하나님이 보장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 하나님조차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신다.
- 사랑하는 예수님과 성령님을 위하여.
- 그러니 고린도 교회도 제한해야 한다고 바울은 권고한다.
이렇게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역동성을 우선시한다.
7~13절: 먹는 자유보다 우선한 성도의 생명 - 하나님의 역동성
바울 주장의 핵심은 지식으로 인한 자유가 때로는 죄가 된다는 것이다.
[고전 8:11~12]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12)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 절대적 가치 체계에 기반하여 지식과 자유를 숭배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 이는 마치 예절을 숭배하는 문화에서 존댓말도 죄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에게 ‘존댓말이 죄니, 앞으로 존댓말 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말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도, 자유도 아니다.
- 오직 하나님만이 중요하고,
-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 피조물 중에 특히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여 생명을 주신 성도이다.
그런데 그 성도가 자유 때문에 망하고 있다.
-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부정되고 있다.
이 때문에 바울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 자유로 인해 예수님이 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바울이 지적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자유와 성도의 생명 간의 충돌이다.
- 고린도 교회는 자유를 우선시해서 성도의 생명이 훼손되었다.
- 그래서 바울은 성도의 생명을 위해 자유를 제한하라는 것이다.
물론 고린도 교회도 성도의 생명이 훼손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 그들에게도 성도는 소중했다.
- 그러나 자유를 생명과 같이 절대시했기에, 자유의 훼손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 그래서 성도의 훼손을 묵인했다.
- 여는 하나님이 절대적 존재라는 인식에 근거하여 자유를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 자유가 하찮은 것은 아니지만, 성도의 생명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 우상 제물 고기 먹을 자유가 분명히 있지만,
- 그 자유가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은 아니라고.
- 그 자유가 없다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도 아니고,
-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라고.
- 그래서 바울은 음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고전 8:8]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음식 대신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신 성도이다.
- 음식을 먹을 자유는 누리든 훼손되든 죄가 되지 않지만,
- 성도의 생명이 훼손되면 그리스도가 훼손되고, 이는 명백히 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의 생명을 위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 이렇게 다짐한 이유는 고기가 절대로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 이러한 판단은 하나님이 절대적 존재라는 인식에 기반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역동적 존재로 인식했다.
- 그래서 하나님 외에 절대적 기준은 없다고 생각했다.
- 고기를 먹건 말건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도를 훼손하는 것은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 그것은 역동적 관계를 존재의 본질로 하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성도를 훼손하는 고기를 절대로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만약 반대로 고기 먹지 않는 것이 성도를 훼손한다면, 평생 고기만 먹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 그만큼 바울은 하나님이 역동적 존재라는 인식에 기반하여 변화무쌍한 원칙을 세웠다.
[고전 8: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결론 - 절대성과 역동성의 관계
다시 말하지만, 절대성은 무조건 나쁘고, 역동성은 무조건 좋다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은 절대적 속성을 가지셨다.
-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절대자이다.
- 이는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
- 대표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자 중에 극단적인 일부는 그렇게 주장한다.
- 예수님은 훌륭한 스승이지만, 절대적 존재가 아니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지나치게 역동성, 상대성에 치우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 이 역시 하나님을 부정하는 죄이다.
하지만 절대성에 치우치는 것 역시 심각한 죄이다.
- 절대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최고의 지위로 인정하는 것은 좋다.
- 그런데 똑같이 절대성에 근거하여 하나님 아래로 이어지는 계층이 있다는 인식은 나쁘다.
- 그러한 인식 때문에 지식과 자유 숭배가 생기고,
- 사람 사이에도 차등을 두어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지식과 자유를 숭배하고,
- 지식이 없는 하위 계층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 이는 결국 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성과 역동성의 관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그 관계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에 잘 담겨있다.
- 죽음은 하나님의 절대성이 훼손되는 사건으로 역동성을 상징한다.
- 죽음을 감수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열정이 드러난 사건이다.
- 반면에 부활은 훼손된 절대성이 회복되는 사건으로 절대성을 상징한다.
-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이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셔서 하나님은 영원불변하다는 것을 증명하신다.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각각 중요한 것처럼 절대성과 역동성 모두 중요하다.
그런데 무엇이 우선하는가?
- 죽음이 먼저인가, 부활이 먼저인가?
- 죽음 없이 부활의 참 뜻을 알 수 없다.
- 죽음의 절망과 좌절 없는 부활은 흔한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다.
-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죽음 이후에 부활을 경험할 때만 부활이 참 의미를 갖는다.
-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생명이 된다.
마찬가지로 절대성보다 역동성이 먼저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랑하시는지,
- 우리와 함께할 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 그러나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여 얼마나 괴로워하시는지
-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얼마나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렇게 역동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만 하나님의 절대성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권력을 독점하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분이 아니다.
- 이는 역동성보다 절대성을 우선시한 태도이다.
하나님은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를 세상 만물과 맺고자 하는 마음을 영원불변하게 가지시며,
- 그것을 위해 전지전능한 능력을 사용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진정한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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