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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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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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한마디로 하면, ‘음행을 피하라!’이다.
[고전 6:18]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 권고할까?
- 고린도 교회가 음행이 죄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일까?
- 혹은 알았지만 잠시 잊었기 때문일까?
- 그래서 단순히 음행이 죄라는 것을 다시 알려주려는 것이 바울의 목적일까?
많은 사람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한다.
- 여러 가지 문화적, 사회적 이유로 고린도 사회가 성적으로 문란했고,
- 그에 따라 고린도 교회도 음행이 죄라는 인식이 부족했다.
- 그래서 본문을 통해 바울이 음행을 피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고린고 교회의 무지를 전제하고 해석한다.
- 고린도 교회가 음행이 죄라는 것을 몰랐고,
-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음행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
- 음행이 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신앙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음행은 죄이다.
게다가 고린도 교회는 말 그대로 교회이다.
- 바울이 교회를 처음 세우면서 음행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겠는가.
- 특히 고린도 교회에서는 음행이 죄라는 것을 더 강조했을 것이다.
- 당시에 ‘고린도’를 변형하여 간음(코린티아조)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 그만큼 문란했던 도시였기에 바울은 교회에게 음행에 대해서도 말했을 것이다.
- 일상에 퍼져있었던 음행이 제거되길 원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가 음행에 무지했다는 전제는 불가능하다.
- 고린도 교회는 분명히 음행이 죄라는 것을 알았다.
- 성관계에 대한 바울의 입장, 즉 부부 관계 안에서만 합당하다는 가르침을 정확하게 들었다.
[고전 7:2~3] 그러나 음행에 빠질 유혹 때문에, 남자는 저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도 저마다 자기 남편을 두도록 하십시오. (3)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해석의 전제를 뒤집어야 한다.
- 바울이 본문을 기록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무지 때문이 아니다.
- 단지 음행이 죄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오히려 고린도 교회는 음행이 죄라는 것을 이미 알았다고 전제해야 한다.
-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함께 있을 때는 교회에서 음행에 대한 논쟁이 없었다.
- 비록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았다.
- 그래서 교회는 음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교회를 떠난 후 시작되었다.
-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앎이 억제되었다.
- 음행이 죄라는 사실이 교묘하게 부정되었다.
- 음행이 죄는 맞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는 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이 생겼다.
- 그러면서 죄의 기준이 흔들렸다.
그래서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와 함께 음행을 정죄하는 분위기가 희미해졌다.
- 이런 악순환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음행을 통제할 수 없었다.
- 이렇게 된 이유는 음행이 난무하는 고린도의 사회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 음행이 교회 밖에서는 누구나 범하는 일이기에 교회 안에서도 경각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무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죄라 할지라도 교회 안까지 침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교회 울타리라는 보호막이 있기 때문이다.
- 교회는 세상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호막이 언제 무너지나?
- 교회 구성원 전체의 인식이 바뀔 때이다.
- 그런 일은 한두 사람의 일탈로 일어나지 않는다.
- 교회 각 사람의 사고방식을 바꿀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하다.
- 음행이 죄라는 것을 믿었던 사람이 특정한 음행은 죄가 아닐 수 있다고 믿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 물론 단번에 변하지 않는다.
- 악순환을 통해 서서히 변한다.
음란한 사회 분위기는 상수이다. 언제나 똑같았다.
- 바울 당시도 그렇고, 2000년이 지난 현재도 똑같다.
- 음란이 난무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음란을 물리치고 거룩한 교회는 탄생했다.
- 그러니 이미 탄생한 교회가 음란을 물리치는 것은 얼마나 더 쉽겠는가.
-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음란해진 것은 고린도 사회 때문이 아니다.
- 내부에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인식 변화를 일으킨 원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 어떤 사건이 인식 변화를 일으켰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 사건 때문에 어떤 인식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알 수 있다.
본문의 기록 목적 - 음행 이면의 신앙
바울이 본문을 기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단지 음행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 바울은 그것을 교회가 시작할 때부터 이미 강조해서 말했다.
- 고린도 교회는 그것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 안에 인식 변화가 일어났고,
- 그로 인해 음행이 죄라는 믿음에 균열이 일어났다.
- 그리고 그 균열은 단지 음행의 영역뿐만 아니라, 신앙 전체로 확장되었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식 변화로 인해 먼저 신앙 전체에 균열이 일어났고,
- 그 균열의 결과로 음행이 죄라는 믿음 또한 흔들린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을 기록한 것이다.
- 표면적으로, 음행을 피하라고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흔들리는 신앙의 근본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많은 사람이 고린도전서를 구체적인 죄 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책이라고 해석한다.
- 그래서 신앙의 본질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말한다.
- 물론 고린도전서에 구체적인 죄 행위가 많이 언급된다.
- 하지만 바울의 초점은 죄 행위에 있지 않다.
- 죄 행위를 초래한 신앙의 본질에 있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음행을 다룬다.
- 하지만 바울의 목적은 음행을 멈추는 것에만 있지 않다.
- 음행을 초래한 신앙의 균열과 변질을 바로잡는 것에 있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
- 그렇게 음행에서 벗어나 본문을 볼 때 본문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도대체 음행을 초래할 만큼 신앙을 변질시킨 원인이 무엇일까?
- 본문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12~14절: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착각한 고린도 교회
이번 단락을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인용구 때문이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의 말을 인용한다.
- 먼저 고린도 교회의 말을 인용한 후, 그 말이 왜 틀렸는지 논증한다.
- 이는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고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 기록의 특성 때문에 인용구 표시가 없다.
- 그래서 인용구와 인용구를 반박하는 바울의 논증 사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 바울의 논지를 알면 쉽게 구분이 되는데,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헷갈린다.
그렇다면 바울의 논지가 무엇인가?
- 핵심은 ‘몸과 주님의 연결’이다.
- 그래서 ‘몸은 주님을 위한 것이고, 주님도 몸을 위하여 계신다.’고 말한다.
[고전 6:13] ・・・・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십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단순하다.
- 몸도 소중하다는 뜻이다.
-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것은 영과 몸을 포함하여 사람 전체를 위한 것이고,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원하신 몸을 예수님을 위해 소중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 외에도 다양한 신학적 해석이 있는데, 그것은 바울의 논지를 벗어난다.
그런데 몸과 주님의 연결을 왜 강조할까?
- 고린도 교회가 몸과 주님의 연결을 깨려고 하기 때문이다.
- 몸은 주님의 구원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 몸은 나약하고 부정하기에 제외되고, 오직 지혜를 담을 수 있는 영만이 구원받는다고 믿었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지혜를 그토록 강조했다.
- 믿음의 바탕이 지혜에 있다고 믿었다.
[고전 2: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몸과 주님의 단절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 몸을 주님을 위해 소중히 여기지 않고, 함부로 사용했다.
- 어차피 몸은 구원의 대상조차 될 수 없고, 결국 종말에 없어질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 몸은 보호하고 아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부로 쓰고 버려도 되는 대상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몸이 음행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믿었다.
- 몸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린도 교회는 자신의 잘못된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바울의 말을 이용한다.
-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선포했다.
- 이방인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에 따라 굳이 할례를 받을 필요 없다고 말했다.
-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갈 2:4]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 때문에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끼여든 자들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율법의 무용함을 뜻하지 않는다.
- 율법 없이 함부로 살아도 되는 자유가 아니다.
- 오히려 믿음의 독보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말이다.
- 예수님은 율법을 초월하시는 분이고,
-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과 상관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율법 폐기론은 아니다.
-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의 본질을 행할 수밖에 없고,
- 할례 행위를 따를 필요는 없지만, 할례가 상징하는 율법의 본질은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 예수님이라는 존재 안에 이미 율법의 본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해서, 진정한 자유는 율법 행위에서 벗어나 율법의 본질을 마음껏 따를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선포한 자유를 왜곡했다.
- 율법 없이 함부로 살아도 되는 자유로 말이다.
- 어차피 몸은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되니, 어떻게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 그래서 몸으로 음행하는 것 역시 상관없다고 믿었다.
영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 그로 인해 몸은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 자유를 얻었으니,
- 몸으로 행하는 음행은 죄가 아니라는 논리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인용구 - 자유에 대한 착각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말을 이렇게 인용하는 것이다.
-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라고 두 번 인용한다.
[고전 6:12]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인용한 이유는 명확하다.
-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말을 비틀어서 음행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 음행이 죄가 아니라는 잘못된 주장에 근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인용구에 대한 바울의 첨언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 바울은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 이는 자유를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 할 수 있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해도 좋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 모든 것이 허용된 자유는 아무것이나 함부로 하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
- 정말 유익하고 좋은 것을 하기 위한 자유라는 것이다.
- 이전에 자유가 없을 때는 정말 좋은 것을 할 능력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이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 이 역시 복음을 성적 욕망 성취 수단으로까지 이용하는 교회의 실상을 고발하는 것이다.
- 그만큼 고린도 교회가 성적 욕망에 ‘제재’, 다른 말로 지배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 성적 욕망에 지배되어 복음이 준 자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 자유는 성적 욕망에서 벗어나 아무것에도 제재받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 고린도 교회는 반대로 자유를 빙자하여 하나님을 벗어나 성적 욕망에 지배당했다.
[갈 5: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이것이다.
- 어떤 것에도 지배당하지 않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서,
- 복음을 통해 율법의 본질을 자유롭게 따르는 상태이다.
- 그래서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아무것이나 함부로 하지 않고,
-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몰입할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진정한 자유를 버리고 거짓된 자유를 취하였다.
- 사랑할 자유를 버리고 음행할 자유를 선택했다.
-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핑계로 함부로 음행을 범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욕망에 지배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고발하는 것이 첫 번째, 두 번째 인용구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메시지이다.
세 번째, 네 번째 인용구 - 몸과 주님의 연결
13절에도 인용구가 있다.
- 많은 사람이 첫째 문장만 인용구이고, 둘째 문장은 인용구를 반박하는 바울의 말이라고 해석했다.
- 그래서 한글 번역 성경에도 그렇게 인용 부호를 달았다.
- 첫째 문장에만 인용 부호를 달고, 둘째 문장에는 인용 부호가 없다.
[고전 6:13]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십니다.
게다가 그러한 해석을 강화하기 위해 두 문장 사이에 접속사 ‘데(δὲ)’를 ‘그러나’로 번역했다.
- ‘데(δὲ)’는 ‘그리고’와 ‘그러나’ 모두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 그런데 번역자는 둘째 문장이 첫째 문장을 반박하는 바울의 말이라고 해석해서 역접 접속사인 ‘그러나’로 번역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 둘째 문장까지가 인용문이기 때문에, ‘데(δὲ)’는 ‘그러나’가 아니라 ‘그리고’로 번역해야 한다.
- 이미 NIV 번역본은 개정판에서 그렇게 번역을 바꾸었다.
[고전 6:13, NIV2011)] You say, “Food for the stomach and the stomach for food, and God will destroy them both.” ・・・・
둘째 문장이 인용구인 이유는 명확하다.
- 이전에 말했듯이 바울의 논지는 몸과 주님의 연결이다.
- 고린도 교회는 몸을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된다고 믿었지만,
- 바울은 몸 역시 구원의 대상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둘째 문장은 ‘하나님께서 음식도 배도 전부 없애 버리신 것’이라고 말한다.
- 이는 배, 즉 몸은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된다는 뜻이다.
- 따라서 둘째 문장은 바울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말이다.
- 바울이 부정하고 반박하기 위해 인용한 말이다.
이렇게 세 번째, 네 번째 인용구를 통해 드러나는 고린도 교회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 고린도 교회는 몸을 부정했다.
-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했다.
- 몸은 주님과 아무런 관계없는 대상으로 치부했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국 몸을 없애 버리실 것이고,
- 배가 상징하는 몸은 음식이 상징하는 욕망을 위한 도구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이상한 결론을 맺는다.
- 그런 몸을 함부로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다.
- 어차피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몸에 음행을 범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 안에 사고 방식의 변화가 생겼다.
- 음행에 대한 교회 울타리가 사라졌다.
- 그러니 세상의 음행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바울은 몸과 주님의 연결을 주장하는 것이다.
- ‘몸은 주님을 위하여 있고,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시다.’고 말이다.
- 특히 14절에 하나님은 주님을 살리셨는데, 하나님이 살리신 대상은 주님의 몸이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하실 대상은 우리 몸까지 포함된다는 뜻이다.
[고전 6:14] 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리셨으니, 그의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실 것입니다.
몸과 주님의 단절 배경 - 이원론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는 왜 인식 변화가 일어났을까?
- 왜 몸과 주님의 ‘연결’에서‘단절’로 인식이 변했을까?
변화의 중심에는 ‘지혜’가 있다.
- 당시 고린도 지역은 헬라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 그런데 헬라 철학에서 지혜는 최고선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이 고린도 교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 믿음의 대상이자 최고선이신 예수님을 지혜에 빗대어 이해했다.
- 시작은 지혜를 통해 예수님을 쉽게 이해하고 쉽게 전하려는 의도였다.
- 하지만 결국 지혜가 예수님을 대체하는 최고의 가치로 변질되었다.
- 지혜가 예수님을 전달하는 수단에서 예수님을 대체하는 목적이 되었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 교회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혹은 예수님 대신에 지혜가 최고 가치를 갖게 되었다.
- 그런데 지혜는 어디에 담기는가?
-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 마음에 있는 이성만이 지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로 인해 몸과 마음, 육체와 영혼의 구분이 생긴다.
- 몸과 육체는 악한 것이고, 마음과 영혼은 선한 것이며,
- 몸과 육체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고, 마음과 영혼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바로 여기서 13절에 ‘하나님께서 배를 없애 버리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생긴다.
- 배로 상징하는 몸은 악하고 구원받지 못하기에, 하나님 역시 몸을 없애실 것으로 믿었다.
- 그리고 그로 인해 몸은 자유롭게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 대상이며,
- 그렇기 때문에 몸에 범하는 음행은 죄가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따라서 바울이 본문을 통해 지적하는 것은 단순한 음행이 아니다.
- 몸과 마음을 구분하는 사고 방식이고,
- 이를 확장하여 사람을 몸과 마음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이며,
- 더 확장하여 세상 만물을 이원론의 관점으로 보는 태도 전체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원론 자체가 죄이다.
-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이원론은 구분하는 것인데,
- 구분하여 판단하는 주체가 생긴다.
- 그러면 자연스럽게 구분의 주체는 권력을 갖고,
- 그 권력으로 자신이 속하지 않은 대상을 배제한다.
이렇게 이원론은 필연적으로 이유 없이 배제되는 피해자가 생긴다.
- 이 피해자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포함된다.
- 구분의 주체로 인해 하나님이 가진 선악 구분 능력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이다.
- 그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했다.
- 명확하게 이원론의 관점을 가졌다.
- 그리고 율법 해석 권력을 독점했다.
- 그래서 구분의 주체가 되었다.
이를 통해 얻은 유익은 상당하다.
-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얻었다.
- 율법 해석 권력으로 자신이 행하기 쉬운 규칙을 만든다.
- 그리고 그 규칙을 잘 지키는 부류는 의롭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불의하다고 칭한다.
- 그런 다음 자신은 그 규칙을 잘 지킨다.
- 그러니 자신은 의롭다고 칭한다.
- 이를 통해 종교 권력을 갖고, 자신이 가진 율법 해석 권력을 강화하였다.
둘째로, 사람에게 명예를 얻었다.
- 이렇게 얻은 종교 권력을 가지고 자신을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한다.
- 그러면 주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수밖에 없다.
- 이를 통해 명예를 얻는다.
셋째로, 돈을 얻었다.
- 이렇게 얻은 율법 해석 권력을 이용하여 새로운 율법을 만든다.
- 값비싼 제물로 제사를 드리면, 자신처럼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든다.
- 그래서 사람들이 값비싼 제물을 바치도록 한다.
- 이를 통해 경제 권력까지 얻는다.
그렇다면 바리새인 때문에 어떤 사람이 배제되는가?
- 단순하게 말하면, 돈이 없는 사람이 배제된다.
- 돈이 없어서 값비싼 제물을 바칠 수 없는 사람이다.
- 그들은 바리새인의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릴 수 없으니, 하나님께 의로움도 얻지 못하고,
- 또한 사람들에게 명예도 얻지 못한다.
결국 돈도, 명예로, 의로움도 없는 이들은 사회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다.
- 그들을 연료 삼아 바리새인의 권력은 더욱 강해진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아, 과부, 장애인을 특별히 챙기셨던 것이다.
- 그들은 스스로 돈을 벌 기회가 제한된 이들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회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바리새인 폭압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실태이다.
- 그리고 이렇게 된 근원에는 이원론이 있다.
이원론을 파괴하신 예수님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눈엣가시였다.
- 예수님은 이원론은 파괴하셨기 때문이다.
- 바리새인이 세운 율법 규칙의 기준을 뒤흔드셨다.
이유는 명확하다.
- 배제된 희생자가 있기 때문이다.
- 이들이 이유 없이 낙오된 원인이 이원론에 있기 때문이다.
- 이원론을 파괴하여 희생자들이 희생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이다.
- 오히려 바리새인의 폭압 때문이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이다.
그랬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이원론을 파괴하는 예수님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 예수님 때문에 돈, 명예, 의로움을 전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이 세운 규칙의 정당성이 예수님 때문에 의심받으면,
- 자신이 만든 규칙을 지켜서 얻은 의로움이 훼손되고,
- 그 의로움으로 얻은 명예가 실추되며,
- 그로 인해 누구도 값비싼 제물을 바치지 않아 경제 권력을 잃기 때문이다.
- 즉, 이원론이 흔들리면, 바리새인은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니 바리새인이 이원론을 파괴하는 예수님을 얼마나 죽이고 싶었겠는가.
- 자신의 전부를 파괴하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바리새인은 자신의 전부를 걸 수밖에 없다.
-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원론을 파괴하기 위해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 안식일에 환자를 고치시고, 이방인과 식사하시며,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칭하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다.
- 이를 통해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분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고발한다.
- 안식일과 그 밖의 날, 이방인과 유대인, 성전과 성전 밖, 죽음과 삶의 구분을 파괴하신다.
- 특히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가장 극복할 수 없다고 믿는 죽음과 삶의 구분까지 파괴한다.
- 왜냐하면 구분하는 이원론에는 반드시 권력이 기생하기 때문이고,
- 그 권력 때문에 이유 없이 희생되는 피해자가 생기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행위 중에 특히 혈루증 여인 치유 사건이 이원론 파괴를 잘 보여준다.
- 레위기 15장에 혈루증 환자는 부정하여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다.
- 혈루증 환자가 부정한 것은 당연하고, 혈루증 환자와 접촉하는 사람 역시 부정하다.
- 이렇게 혈루증은 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혈루증 환자가 예수님을 만졌다.
- 불의와 의가 만났다.
- 그것을 본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단순하다.
- 혈루증 환자와 접촉한 예수님 역시 불의하고, 혈루증 환자와 접촉하지 않은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한다.
- 의로움과 불의가 확고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 혈루증 환자가 치유되었다.
여기에서 고약한 질문을 해보자.
- 혈루증 환자의 치유 시점은 언제일까?
- 예수님을 접촉한 이후일까, 이전일까?
- 만약 이후라고 하면, 예수님은 불의하게 된다.
- 왜냐하면 혈루증을 가진 상태의 환자와 접촉했기 때문이다.
- 반대로 만약 이전이라고 하면, 예수님은 의로울 수 있다.
- 혈루증에서 이미 치유된 상태의 환자와 접촉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접촉하기도 전에 치유되었다면, 치유의 근원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의와 불의의 구분을 파괴하셨다.
- 이원론의 관점으로 이 사건을 해석할 수 없다.
- 예수님은 단순히 불의를 의롭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 예수님은 의와 불의의 구분 자체를 파괴하신 분이다.
그렇다고 또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의와 불의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구분의 주체가 특정한 사람에게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 구분의 주체가 특정한 사람이 되면, 반드시 폭력과 배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구분은 있되, 구분의 주체가 없는 상태이다.
- 의와 불의의 구분은 있지만, 아무도 구분의 기준을 독점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구분 기준을 만드는데,
- 기준을 만드는 이유가 자신의 유익을 제한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확대하기 위해 만들 때 가능하다.
- 이렇게 사랑할 때, 모두에게 의와 불의가 구분되지만, 아무도 구분의 주체가 되지 않는 상태가 된다.
15~17절: 그리스도의 지체인 몸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한다.
- 몸과 마음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음행을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 그러니 몸을 따로 떼어서 창녀와 합하여 창녀의 지체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 어차피 지혜를 담지 못하는 몸은 사라 없어질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고전 6: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몸까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 마음과 몸은 구분되지 않는다.
- 예수님은 몸 없이 마음만 죽고 마음만 부활하지 않으셨다.
- 몸과 마음이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 마음과 몸까지 함께 부활할 것이다.
- 그러니 몸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고전 6:14] 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리셨으니, 그의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실 것입니다.
그만큼 몸까지 중요하다는 것이다.
- 창녀의 몸과 합하는 사람은 창녀의 몸이 되고,
- 주님의 몸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의 몸이 되기 때문이다.
[고전 6:16~17] 창녀와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7)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영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몸’이 아니라 한 ‘영’으로 표현했다.
- 여기에서 영은 몸과 구분된 것이 아니다.
- 몸과 마음을 전부 포함하여 존재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19절에서 몸을 ‘성령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이는 단지 몸이 성령을 담는 껍데기라는 뜻이 아니다.
- 아무도 성전을 하나님을 담는 껍데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성전이 하나님 그 자체인 것처럼 몸 역시 하나님과 하나 된 하나님 그 자체이다.
- 이렇게 몸과 마음, 몸과 영의 구분이 사라진다.
18~20절: 음행을 피하라!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음행 행위를 제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 세상에서 유입되어 음행을 합리화하게 만든 이원론을 고발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또 고린도 교회의 말은 인용한다.
- 그들은 또다시 안과 밖을 구분한다.
- 모든 죄는 몸 밖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그러니 지혜를 가지고 있기만 하면, 음행과 같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안과 밖의 구분을 부정한다.
- 안과 밖의 구분은 없고,
- 모든 죄, 특히 음행은 몸 안에 짓는 죄라는 것이다.
- 그러니 몸까지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고전 6:18]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몸이 왜 중요하냐?
- 첫째로, 성령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 이는 단지 몸이 성령의 껍데기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 그 자체라는 뜻이다.
- 둘째로, 그렇기 때문에 몸까지 하나님의 소유이다.
- 고린도 교회는 마음만 하나님의 소유이니 마음에만 지혜를 담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바울은 몸까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전 6:19~20] ・・・・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20)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결론 - 우리는 무엇을 구분하고 있는가?
모든 사람은 자신을 구분 짓는다.
-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키가 크고, 잘생겼고, 똑똑하고, 힘이 세다고.
- 반대로 난 다른 사람과 달리 키가 작고, 못생겼고, 머리가 나쁘고, 힘이 약하다고.
- 이렇게 구분하여 자신을 옳다고 혹은 틀렸다고 규정한다.
게다가 이렇게 구분 짓는 사람도 있다.
- 나는 다른 사람처럼 키도 보통, 얼굴도 보통, 머리도 보통, 힘도 보통이라고.
- 이를 통해 자신은 소수의 사람과 달리 평범하고 대중적이라고 규정한다.
왜 이렇게 구분 짓는가?
- 구분의 주체가 되어 권력을 얻으려는 것이다.
- 자신이 특별히 옳으니, 자기 말을 따르라고 주장하고,
- 자신이 특별히 틀리니, 불쌍한 자기 말을 들어 달라고 주장하며,
- 자신은 특별히 평범하니, 많은 사람을 대변하는 자기 말을 따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욕망 때문이다.
- 고린도 교회가 몸과 마음을 구분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 교회를 지배하여 아무도 자신의 음행을 정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구분을 파괴한 것이다.
- 먼저는 음행을 저지하고,
- 다음으로 교회가 사람의 지배에서 벗어나며,
- 마지막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구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통치하실까?
- 언뜻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독단적으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시고,
- 모든 사람이 그 기준에 따르도록 이끌어가시며,
- 기준에 합당한 사람에게는 구원을,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내리실 것으로 생각한다.
-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이원론의 사고 방식이다.
-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방식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게 옳은 기준을 제시하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기준을 완벽하게 공정하게 집행하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 옳은 기준과 공정한 집행만 있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 이러한 사고 방식에는 절대 옳은 기준과 절대 공정한 집행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 그러면 옳은 기준과 공정한 집행만 있으면, 누가 다스려도 옳은 것이며,
- 이것이 확장하여 자신의 기준과 집행이 옳고 공정하니, 자신은 무조건 옳다는 신념이 생긴다.
- 이것이 요즘 화두가 되는 공정과 상식의 다른 말이다.
이 신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절대 의로 믿기에, 누구와 타협하지 않는다.
- 그래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삼고 제거하려 한다.
- 마치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통치하신다.
- 하나님은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신다.
- 오직 포용하고 사랑하신다.
- 자기 전부를 내어주심으로 상대방과 구분 없이 하나 되길 바라신다.
- 삼위일체에서 누렸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확장되길 바라신다.
- 그래서 모든 인류가 서로 사랑하길 원하신다.
- 이것이 하나님 통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과 인류가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하신다.
- 서로가 자신보다 상대방을 위해 선택하도록 하신다.
-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규칙을 스스로 찾도록 하신다.
- 그것이 율법이다.
-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면, 서로 사랑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생긴다.
- 율법은 자기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그런 사람들은 율법을 벗어나 사랑을 거부하며 하나님을 떠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오도록 최선을 다하신다.
- 이것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떠난 사람들을 돌아오도록 하는 하나님의 노력이 무한하지 않다.
- 하나님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 사람과 세상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사람에게 돌아오도록 무한한 기회를 주신다.
- 그러나 사람은 무한한 기회를 다 쓰기 전에 죽는다.
- 또는 무한한 기회를 다 쓰기 전에 세상이 사라진다.
- 그래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 지옥에 간다.
-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 곁에 있는 사람은 천국에 간다.
하나님은 아무도 구분하지 않으셨다.
- 사랑하셨을 뿐이다.
- 그러나 사람 스스로 선택하여 구분된다.
- 하나님을 사랑할지 말지 말이다.
따라서 우리도 아무것도 구분하지 말자.
- 구분 짓기 자체가 죄이다.
- 구분 짓기는 지배와 폭력을 유발할 뿐이다.
사랑하고 포용하자.
-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살자.
그런데 사랑하기와 사랑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 하나님조차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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