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반복해서 말하지만,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정죄이다.
- 고린도 교회가 가진 신앙이 바울의 신앙과 완전히 어긋났다.
- 지향하는 방향이 반대이다.
- 부드러운 대화를 통해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 적절하게 타협하여 양측이 조금씩 양보해야 할 상황이 아니다.
- 둘 중의 하나가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상대방의 신앙을 선택하거나,
- 각자의 신앙을 유지한 채 관계를 끊는 방법밖에 없는 상황이다.
- 적어도 바울은 채찍이 필요할 만큼 극단적이고 긴박하다고 판단했다.
[고전 4:21]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 내가 채찍을 들고 여러분에게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의 어조는 그만큼 격정적이지 않다.
-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부정하여 관계가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보기에 바울은 침착하다.
-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칭찬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 성기를 잘라버리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 불편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갈 5:12]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칭찬을 하며 부드러움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 ‘사랑하는 자녀’라고 친근하게 부른다.
- 부끄럽게 하는 정죄가 아니라 사랑이 담긴 훈계라고 다정하게 말한다.
[고전 4:14] 내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같이 훈계하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죄를 작게 평가한다.
- 본문에서 지적하는 죄는 사소한 것이며, 작은 훈계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와 함께 바울의 태도도 오해한다.
- 고린도 교회의 죄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으며,
-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부끄럽게 하는 정죄가 아니라 사랑을 담은 훈계를 하려 한다는 것이다.
표현이 부드러운 이유 - 비극적인 고린도 교회의 상황
하지만 그렇지 않다.
- 고린도 교회의 죄는 심각했다.
- 예수님을 부정하고 있고, 바울과 관계도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게다가 바울의 감정도 숨겨져 있지만 격정적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불쾌한 감정을 부드러운 말로 숨기려 하지만,
-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바울의 본심이 드문드문 드러난다.
- 본문에서도 고린도 교회를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 부르며 부드럽게 말하지만,
- ‘채찍을 들고 가겠다’며 과격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감정을 숨길까?
- 갈라다아 교회에는 가감 없이 드러냈던 감정을 왜 고린도 교회에는 숨길까?
- 많은 사람이 갈라디아 교회의 죄는 심각했기 때문에 과격하게 말하고,
- 고린도 교회의 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차분하게 말한다고 한다.
-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한다.
- 갈라디아서에서 직설적으로 말한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의 죄가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의 정죄를 받아들일 만큼 변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갈라디아 교회와 바울이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바울은 있는 그대로 감정을 표현해도 갈라디아 교회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 그래서 굳이 자기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 적어도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권위를 인정했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에 대한 믿음이 바울에게 없었다.
- 바울이 조금만 직설적으로 표현해도 고린도 교회는 듣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 있는 그대로 죄를 지적하면, 반발할 것으로 생각했다.
- 그만큼 죄가 심각했고, 그만큼 변질되었다.
-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권위조차 부정했다.
- 그래서 바울은 감정을 숨기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직설적으로 정죄할 수 없었다.
- 부드러운 표현과 직설적인 표현을 섞어 썼다.
- 소위 ‘쿠션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 만약 표현이 조금만 과격하여 고린도 교회를 부끄럽고 불쾌하게 만들면, 관계가 완전히 끊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 그래서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고린도 교회의 죄가 너무 심각했던 비극적인 상황 때문이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는 심정 - 비통(슬프고 괴롭다)
이런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을 상상해 보자.
-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다.
- 바울은 지혜롭지 못하며, 이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판단했다.
여기서부터 바울은 슬프다.
- 자신이 사랑해서 목숨 걸고 복음을 전했던 자식 같은 사람들에게 버려졌기 때문이다.
- 목숨이 버려지는 심정이다.
그로 인해 교회는 분열 위기에 있다.
- 바울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
- 서로 자기 지도자가 더 뛰어나다고 서로를 부정한다.
이 또한 바울은 괴롭다.
-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찢기고 있기 때문이다.
- 십자가에서 찢기셨던 예수님이 또다시 고린도 교회에서 찢기며 괴로워하신다.
-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이 말이다.
- 자기 몸이 찢기는 고통보다 더 고통스럽다.
그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싸우고 있다.
-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한다.
- 서로를 지혜롭지 못하다며 신앙과 존재를 부정한다.
-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에 생명을 얻었던 사람들이 같은 복음을 들고 서로 죽이고 있다.
바울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 목숨만큼 사랑했던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서로를 아프게 하니 말이다.
- 교회에서 들리는 고통 소리 때문에 바울도 함께 고통스럽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게 하는 고린도 교회에 절규하고 싶다.
- 제발 또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멈추라고.
- 제발 서로를 죽이는 일을 멈추라고.
- 그리고 제발 바울 자신을 죽이는 일을 멈추라고.
그러나 그조차 할 수 없다.
- 고린도 교회의 죄를 직설적으로 정죄하고,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오히려 어리석은 바울이 지혜로운 자신을 정죄한다고 노발대발하며 관계가 끊어질 수 있다.
바울은 어떻게든 고린도 교회를 살려야 한다.
- 그것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할 수 없다.
-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말만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 격동하는 감정을 내리누르고, 침착하고 부드럽게 말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만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 예수님으로부터 어긋난 시선을 다시 끌어와야 한다.
- 바울은 자신의 존재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까지 전부 부정하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다시 집어넣어야 한다.
-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하기 위해 바울은 자기 감정 따위는 뒤로 제쳐둬야 한다.
그렇게 나온 편지가 고린도전서이다.
- 그래서 부드럽게 표현한다. 듣기 좋게 표현한다.
- 어떻게든 고린도 교회 사람들의 귀에 닿게 하려는 절박한 심정으로 말이다.
- 난도질 된 가슴의 고통은 외면한 채 말이다.
그러나 격동하는 감정을 숨길 수 없다.
- 고린도 교회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노골적으로 지적한다.
- 예수님께 속히 돌이키라고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14~15절: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훈계하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14절을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정죄하여 부끄럽게 할 의도가 없고,
- 단지 훈계, 즉 약간 미흡한 부분을 보충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 그러니 고린도 교회의 죄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으며,
- 약간의 도움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고전 4:14] 내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같이 훈계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다음을 전제한다.
- 고린도 교회의 죄는 부끄러워할 만큼 심각하지 않고,
- 훈계로 충분할 만큼 작고 가볍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도 전제한다.
- 고린도 교회의 죄로 지적된 것은 지혜 숭배이다.
- 지혜로운 것만이 바른 신앙이라는 판단이다.
- 이 판단에 근거하여 바울을 지혜롭지 못하다고 규정하고 부정했다.
- 따라서 지혜 숭배 역시 심각한 죄가 아니라 작고 가벼운 죄이며,
- 바울을 부정한 죄조차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해석할 때 함께 따라오는 결론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없다.
-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 바울의 복음을 부정하고 있다.
- 이는 곧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상태는 약간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없고,
- 근원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 교회가 채찍이 필요한 상태라고까지 언급한다.
[고전 4:21]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 내가 채찍을 들고 여러분에게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따라서 14절은 반대로 해석해야 한다.
- 바울의 의도는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다.
- 고린도 교회가 예수님까지 부정하는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여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고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다.
- 예수님과 바울을 부정하던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님과 바울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만약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함을 유지한 채 조금 보충하려고 한다면, 현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역시 고린도 교회의 죄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 자기 죄를 깨닫고 부끄러워하기조차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 바울이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라!’라고 말하면, ‘내가 왜?’ 혹은 ‘네가 뭔데?’라며 반박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돌려서 말한다.
- ‘내 말이 부끄럽게 했고, 불편하고 거슬리게 들렸을 수 있어.
- 그런데 사랑해서 한 훈계야. 그러니까 제발 잘 들어줘.’라고 말한 것이다.
- 부드럽게 표현하여 자신의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말이다.
고린도 교회의 죄를 과소평가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이 바울의 의도를 훈계로 한정하며,
- 고린도 교회의 죄를 과소평가하려 하는가?
많은 사람이 신앙을 예수님 믿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 따라서 고린도 교회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충분히 바른 신앙이라는 논리이다.
- 그러니 고린도 교회의 죄는 심각하지 않고, 훈계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필요조건이다. 충분조건이 아니다.
- 예수님 믿는 것(필요조건)과 함께 예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믿지 않을 때(충분조건)만 바른 신앙이다.
이를 그림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많은 사람이 인류를 예수님 믿는 사람(①+②)과 믿지 않는 사람(③)으로만 구분한다.
- 성경이 이렇게 구분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구분하는 데 관심이 없다.
-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 오히려 예수님 외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①)과 예수님과 다른 것도 함께 믿는 사람(②)을 구분하는 데 집중한다.
- 부자 청년도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재산을 함께 믿었다.
- 그래서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난다.
- 베드로도 예수님을 믿었다.
-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이스라엘 독립을 함께 믿었다.
-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다.
- 이렇게 부자 청년과 베드로는 예수님 믿는 사람 중에 다른 것도 함께 믿는 사람(②)이었다.
부자 청년과 베드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 예수님 믿는 것은 필요하다.
- 그러나 예수님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 예수님 믿는 것과 함께 예수님 외에 아무것도 믿지 않을 때 충분하다.
- 예수님 믿는 것만 있으면, 부자 청년과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같다.
- 고린도 교회가 예수님 믿음을 부정하고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 예수님이 최고의 가치라고 말했다.
- 게다가 고린도 교회가 가진 지혜가 악하고 부정한 것도 아니다.
- 지혜는 인류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 교회의 태도이다.
- 신앙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은 잘 간직한 채 지혜를 또 다른 기준 삼은 것이다.
- 예수님과 함께 지혜를 믿은 것이다.
- 마치 부자 청년이 예수님과 함께 재산을 믿은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민족 독립을 믿은 것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간과한다.
- 지혜를 믿던, 재산을 믿던, 독립을 믿던 상관 없이 예수님을 믿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 주야장천 예수님을 믿으라 한다.
그것 때문에 고린도전서에서 외치는 바울의 절규에 귀가 닫힌다.
- 고린도 교회의 지혜 숭배를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훈계의 대상 정도로 삼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
-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다른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이 너무 소중해서 절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인생에서 예수님이 당연히 최고로 중요하지만,
- 돈도 필요하고, 학벌도 필요하고, 인맥, 직업, 자가, 능력, 성취, 명예 역시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이 ‘예수님은 당연히 중요한데, 세상에서 살려면 돈도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아냐?’라고 반문한다.
- 특히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최고로 중요하지만,
- 예배를 귀하게 여기고, 설교를 잘 들으며, 교회 건물에 오는 것 역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이 전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 있으면 좋다.
- 그런데 없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 마치 고린도 교회에 지혜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그런 것에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
- 지혜로워지기 위해, 풍요로워지기 위해, 능력 있고 강해지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전형적인 우상숭배이다.
- 신을 숭배하고 떡고물을 기대하는 마음이다.
- 이는 숭배가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이 이런 것을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 그것이 신앙의 결과이며,
- 바른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으면 지혜와 풍요는 당연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죄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 예수님 잘 믿으면서 지혜 좀 추구한 것은 큰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눈치 보느라 마음 속에서만 외치는 절규를 들어야 한다.
- 바울은 예수님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 그렇게 말했다면 이렇게 욕먹으며 부정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 외에 아무것도 믿지 말라고 한다.
- 지혜 포기하라고 말한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부정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도 예수님이 아니다.
- 예수님 다 잘 알고 있고, 다 잘 믿는다.
-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 포기하라는 말씀이다.
- 바울은 우리에게 돈, 학벌, 인맥, 직업, 자가, 능력, 성취, 명예 포기하라고 말한다.
- 특히 예배, 설교, 교회 건물 포기하라고 말한다.
-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울의 외침이다.
바울의 엄중한 경고
그러면서 15절에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한다.
- 자신은 수많은 스승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고 독보적인 아버지라고 말이다.
- 여기서 ‘아버지’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처음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탄생하게 했다는 뜻이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독보적인 지위를 내세우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 첫째로, 자신에게 그만한 지위와 자격이 있으니까, 자신을 부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 둘째로, 그런 바울의 말을 따라 지혜를 포기하고 자기처럼 어리석어지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15절에서 스승과 아버지를 비교하며 이렇게 말한다.
- 교회에서 지도자는 스승과 같이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 아버지처럼 따뜻하고 다정하게 마음마저 헤아리도록 하라는 것이다.
- 그러니 바울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15절은 그런 감성적인 구절이 아니다.
- 아버지의 사랑이 풍기는 따뜻한 위로의 말씀이 아니다.
- 바울은 자신이 아버지의 권위를 가졌다는 것을 근거로 고린도 교회를 정죄한다.
- 바울 자신을 부정하고 세상의 지혜에 빠진 고린도 교회의 죄를 지적하고,
- 죄에서 돌이키라고 엄격하게 경고한다.
본문에서 바울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분노에 귀 기울여야 한다.
16~17절: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바울에게 아버지라는 권위가 있기에 그 권위에 근거하여 더 과감하게 권면한다.
- 자신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말이다.
- 이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마땅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고전 4:16]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 입장에서 바울을 본받으라는 말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 그러나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 거북한 말이다.
-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어리석고 지혜 없는 사람으로 평가했고,
- 그것을 근거로 예수님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 지혜롭게 말하는 아볼로만을 진정으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말은 도발적이고 과격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바울을 본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당연히 바로 전 단락인 11~13절에서 나타난 바울의 모습이다.
- 세상의 쓰레기, 만물의 찌꺼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선명하다.
- 예수님 외에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것이다.
-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 특히 지혜를 버리라는 것이다.
지혜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 쓰레기나 찌꺼기가 특별히 소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치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 세상의 모든 것을 쓰레기와 찌꺼기로 만들어버릴 만큼 말이다.
- 그래서 쓰레기를 대하듯 모든 것을 당장 버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쓰레기가 되었다.
-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 쓰레기가 그렇듯 아무 쓸모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바울이 이렇게 된 이유는 딱 하나이다.
- 예수님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 예수님만 믿고 그 외에 아무것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가치있는 모든 것일 잃고 가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전하기 위해 바울은 17절에서 디모데를 보낸다고 말한다.
- 디모데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지만,
- 본문의 맥락 안에서 디모데 개인은 아무런 역할이 없다.
- 오직 바울이 이 말을 얼마나 간절하게 전하고 싶은지 보여주는 역할만 한다.
-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는 딱 하나 ‘이 일 때문에’,
- 즉 바울 자신과 같이 예수님 외에 아무것도 믿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 이 말이 굳이 디모데까지 보내서 전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전 4:17] 이 일 때문에 나는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얻은 나의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 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그대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의 역할을 한정한다.
- ‘바울의 생활 방식’을 알려주는 것이다.
- 특히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친 그대로’ 말이다.
여기서 생활 방식은 11~13절에서 말한 ‘쓰레기 같은 삶’이다.
- 바울은 그것이 자기만의 특별한 삶이 아니라,
- 자신이 가르쳐서 모든 교회가 행하고 있는 보편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도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18~21절: 채찍을 들고 가지 않게 하십시오.
이제 바울은 1장에서 시작된 고린도 교회의 근원적인 죄 논의를 마무리한다.
- 마무리의 핵심은 방문 예고이다.
-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와 같은 마무리이다.
방문하는 이유는 바울의 부재를 틈타고 교만해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자신이 지혜롭다는 교만에 빠져 예수님만 말하는 바울을 부정했다.
- 바울이 없었기에 그러한 주장이 더 쉽게 퍼졌다.
- 그들을 바로잡기 위해 바울은 직접 방문을 예고한다.
[고전 4:18~19]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교만해진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19)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교만해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 본문은 말이 아니라 능력을 기준으로 판단한다고 말한다.
- 따라서 말과 능력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고전 4:19~20]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20)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말은 지혜, 능력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 즉, 예수님과 함께 지혜를 믿는 고린도 교회가 지혜를 버리고 예수님만 믿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고전 2: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바울은 말과 지혜를 연결한다.
- 이를 통해 예수님을 지혜로운 말로 표현하는 것에만 빠져 예수님을 잃어버린 고린도 교회를 비판한다.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는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
그리고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한다.
- 여기서 이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 않다.
- 예수님으로 인한 실제 능력인지, 종말에 일어날 구원의 능력인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능력인지 모호하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능력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다.
[고전 1: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의 의도를 더욱 한정할 수 있다.
- 바울이 정죄하는 교만한 사람은 말로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어 부자가 되고, 왕처럼 되며, 강해지고,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이다.
- 반면에 바른 신앙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어리석고, 약하며, 세상의 쓰레기, 만물의 찌꺼기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고전 4: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나 된 듯이 행세하였습니다. ・・・・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으나,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고전 4:13] ・・・・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이것이 바울이 전달하려는 것이다.
- 강함이 아닌 약함, 풍요가 아닌 빈곤, 나아짐이 아닌 못해짐, 지혜로움이 아닌 어리석음, 영광이 아닌 천대, 칭찬이 아닌 비방, 보물이 아닌 쓰레기, 알맹이가 아니라 찌꺼기가 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약함과 어리석음을 숭배하라는 것이 아니다.
- 예수님만 숭배하라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 외에 모든 것, 즉 강함, 풍요, 나아짐, 지혜, 영광, 칭찬, 보물, 알맹이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 예수님도, 바울도 그랬다.
- 그러니 고린도 교회도,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관건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 예수님 외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다.
결론 - 예수님과 바울을 따르는 길은?
우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 왜 예수님을 믿는가?
- 왜 바울의 편지를 읽는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이다.
-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 이를 확장하면, 사람이 인생을 사는 이유도 똑같다.
- 시간과 열정을 넣어서 가치 있는 것을 얻고, 그것으로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산다.
여기에서 문제 삼을 것은 없다.
- 자기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고,
- 쓰레기, 찌꺼기가 되려고 예수님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가 높이고자 하는 가치가 정말 가치 있는 것일까?
- 돈, 명예, 풍요, 지혜, 능력이 인생을 투자하기에 합당한 것일까?
당연하게 많은 사람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 돈 많이 벌어서, 세상에서 칭찬받으며, 지혜롭게 능력을 발휘하는 인생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 그렇게 된 사람을 추앙하며, 자신도 그렇게 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
- 그것보다 예수님을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것의 의미는 명확하다.
- 예수님만을 독보적인 절대 가치로 여기고,
- 예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 그러니 인생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예수님께만 쏟고,
-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 그래서 예수님을 얻었고,
- 예수님의 기준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다른 모든 것에 아무 열정도 쏟지 않았다.
- 그래서 돈, 명예, 풍요, 지혜를 전부 잃었고,
- 세상의 기준에서 쓰레기, 찌꺼기가 되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가진 전형적인 방식이다.
- 자기 가치 기준에서 가치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 반대로 가치 없는 것은 포기했기 때문이다.
- 차이가 있다면, 바울은 많은 사람이 가진 가치 기준과 달리,
- 그리스도인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 산 것뿐이다.
그렇게 상식적, 합리적 과정을 통해 바울은 쓰레기, 찌꺼기가 되었다.
바울은 자신이 쓰레기, 찌꺼기가 된 것이 기뻤겠는가?
- 세상에서 멸시, 천대받는 자신의 신세가 자랑스러웠겠는가?
- 자신도 싫었다. 괴로웠다. 부끄러웠다.
- 복음 때문에 어리석어진 자신이 부끄러웠다.
- 그래서 바울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 이는 반대로 복음이 부끄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롬 1: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기뻐했다. 자랑스러워했다.
- 예수님을 얻었고, 예수님의 기준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착각한다.
- 예수님을 믿으면 지혜, 영광, 풍요를 얻는다고.
- 그 착각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지혜를 추구했고,
- 지혜를 추구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 그래서 지혜로워졌고, 영광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바울과 멀어졌다.
- 게다가 예수님과도 멀어졌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한다.
-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 영광이 아닌 천대, 강함이 아닌 약함을 얻으라고.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이다.
- 예수님이 멸시, 천대받으며 죽으신 길을 따라 똑같이 죽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과 멸시, 천대가 그 자체로 귀하기 때문이 아니다.
- 예수님이 그만큼 절대 가치이고, 그로 인해 나머지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 믿으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하여, 아무것도 없는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 여전히 나는 예수님 믿는다고 말하고 싶은가?
- 바울은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러 올 것이다.
- 즉, 우리가 바울을 본받아 쓰레기, 찌꺼기가 되고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멸시, 천대 받고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말로는 천국 갈 수 없다.
- 예수님 따라 십자가를 지고 있는지로만 갈 수 있다.
'고린도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전서(10) 6:1~11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고린도 교회 (1) | 2024.12.28 |
---|---|
고린도전서(09) 5:1~13 교회에서 죄인을 쫓아내라! (0) | 2024.12.14 |
고린도전서(07) 4:1~13 세상의 쓰레기, 만물의 찌꺼기가 되어라! (1) | 2024.11.16 |
고린도전서(06) 3:10~23 또 다른 기초를 놓은 고린도 교회 (0) | 2024.11.02 |
고린도전서(05) 3:1-9 관건은 예수님이 아니다. (0) | 2024.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