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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05) 3:1-9 관건은 예수님이 아니다.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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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바울이 말하고 있다.

- 그러나 바울의 말은 중요하지 않다.

-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 말의 표면적인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근거는 단순하다.

- 바울의 말이 너무 뻔하고 식상하다.

- 말 자체만 놓고 보면, ‘산은 높고 물은 흐른다.’와 같이 당연한 말의 연속이다.

 

육에 속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라고 말한다.

- 바울 편과 아볼로 편으로 갈라져서 분열하지 말라고 말한다.

- 바울과 아볼로는 모두 밭을 일군 일꾼이며,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 반박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 이 말을 알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바울의 말에 새로운 가르침은 없다.

 

많은 해설서에서 바울의 말을 표면적으로만 분석한다.

-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 구분되고,

[고전 3: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 젖과 단단한 음식에는 차이가 있으며,

[고전 3:2] 나는 여러분에게 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 바울 파와 아볼로 파의 분열이 있었고,

[고전 3:4]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바울과 아볼로 사이에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었으며,

[고전 3:6]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고전 3:8]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본문을 해석한다.

[고전 3:7]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 이렇게 바울의 말을 이해하는 선에서 해석을 끝낸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을 재진술한 것에 불과하다.

- 단지 본문을 정리하고 요약한 것뿐이다.

- 아무것도 분석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았다.

- 본문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산은 높고 물은 흐른다.’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은 없다.

- 아, 산은 정말 높구나. 정말 물이 흐르는구나. 라는 반응은 어리석다.

- 그런데 많은 해설서가 이렇게 반응한다.

그 말은 산고수장, 즉 군자의 덕이 산처럼 높고 물처럼 끝없다는 뜻이다.

- 그 말이 나온 정황 안에서만 해석할 수 있다.

- 표면적 의미에 숨겨진 내면적 의미에 도달할 때만 그 말이 가치를 갖는다.

- 표면적 의미에 머무르면, 그 말은 아무 가치가 없다.

 

따라서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느냐이다.

- 왜 바울과 아볼로의 역할을 자세히 분석하면서,

-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뻔한 소리를 진지하게 하고 있냐는 것이다.

- 즉, 바울이 이 글을 쓴 궁극적인 의도이다.

바울의 표면적인 말에 숨겨진 내면적 의도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엄격한 기준에서 본다면, 바울의 의도는 결코 알 수 없다.

-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분석될 수 없다.

-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산발적으로 퍼져있는 희미한 단서를 가지고,

- 당시 바울의 마음을 상상하는 것이 전부이다.

엄청나게 주관적인 작업이며, 불확실하고, 작위적이며, 

- 해석자의 제한된 경험과 편견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 

- 그래서 나의 해석이 정답이라는 확신을 갖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도출된 해석 결과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해석은 마음을 다루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마음은 객관적인 논리와 주관적인 직관이 얽혀있다.

- 마음과 의도에는 분명히 논리가 있지만, 

- 논리만으로는 의도에 다가갈 수 없다.

직관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 여기서 상상력이란, 철저한 추론 과정 없이 주어진 상황에서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마음이다.

-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바울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런 감정을 갖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해석이라는 작업 자체가 본질적으로 논리적일 수 없다.

- 그래서 마음에 있는 논리의 도약을 상상으로 채워야 한다.

- 그래야 얼기설기 짜여 있는 바울의 글을 선명한 그림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직관적인 상상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

- 하지만 그렇다고 상상하지 않는 것은 해석하지 않는 것이다.

- 바울의 마음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바울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 마치 사랑해서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랑을 아예 포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해석하려면 상상이 필요하다.

- 오류의 가능성을 안고 바울의 정신세계 안을 과감하게 상상해야 한다.

- 그러면서 동시에 상상한 세계가 바울의 다른 말과 일치하는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검토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상상하면 안 된다.

- 희미하더라도 본문에 근거하여 상상해야 한다.

- 바울의 논리를 엄격하게 따라가면서, 논리의 빈구석을 찾아야 한다.

- 논리의 빈구석을 제외하고는 엄격하게 논리적이어야 한다.

- 그런 후 빈구석을 상상으로 채울 때만 올바른 상상이 가능하다.

그럴 때 특히 자신의 해석이 상상에 기반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그래야 수정할 수 있다.

- 그런 셀 수 없는 수정의 과정을 통해서만 바울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

논리와 상상이 결합한 전체 과정을 통해서만 해석이 일어난다.

- 이를 통해 끊임없이 바울의 세계에 다가가야 한다.

 

그런데 이 해석의 첫 단계가 바로 ‘질문’이다.

- 바울의 표면적인 말을 ‘수용’하기만 하면, 바울의 마음에 다가갈 수 없다.

- 표면적인 말 이면에 있는 의도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일방적인 수용을 거부하고 능동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 바울이 왜 이 말을 했을까?

- 바울의 의도는 무엇일까?

- 표면적인 말 이면에 숨겨진, 바울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자신에게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계속 해야 한다.

 

글 이면에 숨겨진 바울의 의도

그렇다면 바울은 이 뻔한 말을 왜 이렇게 간곡하게 호소하나?

-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바울이 이 말을 하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바울이 애초에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의 구분을 중요하게 여겼고,

- 바울과 아볼로의 미묘한 관계 분석 자체를 말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관점에서 바울의 말을 표면적으로만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두 가지 이유로 틀렸다고 생각한다.

- 첫째로, 이런 관점은 게으르다.

- 글 이면에 있는 바울의 의도를 알려고 고민하지 않고,

- 글 자체가 바울의 의도라고 단정 짓는다.

- 바울이 이 글을 쓴 의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글을 말하려는 것이다. 라고 답하는 꼴이다.

- 아무런 고민이 없다.

물론 글 자체가 바울의 의도인 경우도 있다.

- 그러나 그 결론은 숨겨진 바울의 의도를 찾아 헤매는 노력 이후에 나올 때만 타당하다.

- 아무리 고민해도 표면적인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만 타당하다.

 

둘째로, 맥락을 볼 때, 바울은 육과 영의 구분,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에 관심이 없다.

-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관심이 없다.

[고전 2: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려고 쓴 글이다.

바울은 육과 영,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 따위나 말하려고 글을 쓰지 않는다.

- 육과 영을 구분해서 무슨 유익이 있으며,

- 아볼로가 과거에 물을 주었다는 것이 현재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다 지나간 일이다.

따라서 표면적인 글 자체는 바울의 의도가 아니다.

- 표면을 걷어 내야만, 글을 들어내야만 그 안에 바울의 세계가 숨어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1~4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다.

본문의 핵심은 정죄이다.

- 설명이 아니다.

-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을 단순히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 고린도 교회가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고전 3:3~4]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4)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서 많은 질문을 할 수 있다.

- 우선, 바울은 왜 고린도 교회를 정죄하는데,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가?

이유는 명확하다.

- 바울에게 육과 영을 구분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 바울은 육과 영의 구분을 좋아하지 않는다.

-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육을 입고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 안에서 육과 영의 구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개념을 사용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는 자신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 지혜의 원천은 성령이라고 생각했다.

- 그렇게 자신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고전 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전 2:10]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시니,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살피십니다.

자신이 영에 속했다는 증거로 언변, 지식, 은사를 과시하도 했다.

[고전 1:5~7]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서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잡았습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추정컨대, 언변, 지식, 은사, 지혜를 얻은 고린도 교회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가지 말아야 할 한 발 더 내디뎠다.

- 세상의 명성을 얻은 자신과 달리 여전히 부끄러운 상태에 있는 바울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고전 2:15]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고전 4:3]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인정받지 못하고 여전히 부끄러운 상태에 있었던 이유는 하나이다.

-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만 전했기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이 어리석다고 판단하지만, 진정한 지혜이며 능력이기 때문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세상은 어리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울을 어리석다고 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도 바울을 어리석다고 부끄러워했다.

 

육과 영의 구분

이것이 바로 바울이 육과 영을 구분한 이유이다.

- 자신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며 바울을 육에 속했다고 정죄한 고린도 교회 때문이다.

- 육과 영의 구분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본문을 통해 육과 영의 구분을 주장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죄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 그러지 말라고 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논리를 뒤집는다.

-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너희가 바로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고전 3: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 그리고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너희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고전 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는 육과 영을 구분해서 고린도 교회가 육에 속했다고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 육과 영의 구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 그런 구분은 어리석은 고린도 교회 따위나 하는 짓이다.

 

중요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영에 속했다고 판단한 근원적인 기준을 정죄하려는 것이다.

- 판단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 세상의 인정이었다.

-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에, 자신을 지혜롭고 영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에서 지혜로운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고전 1:20]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바울은 이 가치 기준을 정죄하는 것이다.

 

젖과 단단한 음식의 구분

바울이 젖과 단단한 음식을 구분하는 이유도 똑같다.

- 바울이 그러한 구분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구분하여 자신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는 자신이 영적이고 지혜롭기 때문에 젖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당연히 젖은 초보적인 가르침이고, 단단한 음식은 더 복잡하고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 젖이 무엇이겠는가?

- 고린도 교회가 초보적이어서 이미 성숙한 자신에게 필요 없다며 무시하는 가르침이 무엇인가?

-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 이미 자신은 초보 단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유치하다고 치부한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 말고 단단한 음식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 너희는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전 3:2]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정말로 젖과 단단한 음식을 구분한 것이 아니다.

- 바울은 가르침에 차등을 두지 않았다.

- 바울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하나만 가르쳤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자신에게 젖이 필요 없다고 하니까,

- 그 논리를 역이용하기 위해 그 논리를 차용한 것뿐이다.

 

따라서 바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젖이라고 치부하는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는 여전히 젖이 필요한 어린 아이이다.

-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이다.

[고전 3: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5~9절: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울은 어린 아이같이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대표 현상 하나를 언급한다.

- 그것은 분열로 인한 시기와 싸움이다.

[고전 3:3]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분열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명하다.

-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는 각자 자신의 가치 기준을 주장하고,

- 그러면 필연적으로 서로의 주장이 충돌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 충돌이 지도자를 두고 일어난 것이다.

- 각자의 가치 기준이 달랐고, 가치 기준에 따라 선호하는 지도자가 달랐다.

- 그러니 선호하는 지도자에 따라 분열했다.

그래서 바울 파와 아볼로 파가 나뉜 것이다.

 

여기서도 분열 자체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 분열 문제에 바울은 관심이 없다.

- 교회 전체가 바울을 부정하고 아볼로를 따른다고 해도, 바울은 상관없다.

바울의 관심은 분열을 일으킨 근원적인 원인에 있다.

-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젖과 같이 유치하다고 무시하는 태도,

-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가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것을 지적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 바울이 역할의 차이를 중요시했다.

- 당연히 교회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 자라는 과정에 심는 역할과 물 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 그래서 교회 안에 복음을 직접 전하는 사람과 복음 들은 사람을 뒤에서 돌보는 사람이 필요하다. 라고 오해한다.

이는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 바울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 그런 역할 구분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쓴 글이다.

 

오히려 바울과 아볼로의 역할을 구분한 이들은 고린도 교회였다.

- 추정하건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격하하고 아볼로를 격상하기 위해 이런 구분을 사용했다.

그들의 논리를 유추해 보면,

- 바울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같이 젖만 주는 어리석은 지도자인 데다가,

- 교회가 세워질 때도 씨를 심기만 했지, 정작 물을 주고 관리한 사람은 아볼로라는 것이다.

- 게다가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만 말하지 않고, 당시 그리스 철학을 적절히 사용하여 지혜롭게 들리는 가르침을 준다.

- 그래서 아볼로가 바울보다 더 많은 성과를 이뤘고, 따라서 더 많은 삯을 받게 될 것이다.

- 그러니 진정한 지도자는 바울이 아니라 아볼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이러한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그들의 구분 방식을 차용한다.

- 그러한 구분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것이다.

- 아볼로의 가르침이 더 지혜롭게 들린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바울과 아볼로는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고전 3:8~9]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바울과 아볼로는 같은 것을 전했는데, 고린도 교회는 다르게 들었다는 점이다.

- 왜 그랬냐?

- 고린도 교회가 가르침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 오히려 가르침을 담고 있는 지혜로운 표현 방식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사회에서 인정받았던 그리스 철학으로 표현했던 아볼로의 가르침만 가치 있고,

- 그리스 철학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바울의 가르침은 평가 절하하였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실상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받아들였다.

-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성도라고 부른다.

- 게다가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정죄할 때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다.

[고전 3: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의 지혜를 포기하지 못했다.

-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그래서 세상에서도 지혜롭게 들리도록 가르친 아볼로가 더 뛰어나며,

- 지겹도록 예수 그리스도만 말하는 바울은 어리석다고 판단한다.

 

물론 교회 안에서 역할이 구분될 수 있다.

- 하지만 모든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 전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지, 전하는 내용은 같다.

따라서 전하는 내용이 같으니, 동역자이고 하나이다.

- 그러나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서 자라서 믿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그러니 날카롭게 표현하면,

- 바울의 의도는 역할의 차이도, 하나님의 주관하심도 아니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빗겨나 있었다.

- 그래서 바울을 단단한 음식은 주지 않고 젖만 주는 어리석은 지도자라고 비난하고,

- 아볼라가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는 진정한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 이런 문제가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지적하고 교정하는 것이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결론 - 관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고린도 교회가 육에 속하여 여전히 어린 아이 신앙에 머물렀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다.

- 이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 그 점을 바울도 인정한다.

관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 세상의 지혜에 영향받은 자기만의 가치 기준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여전히 자기만의 가치 기준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건은 세상 포기, 자기 포기이다.

 

이런 경우는 수두룩하다.

- 대표적으로, 부자 청년이다.

- 그는 하나님을 믿고 십계명을 철저히 지켰다.

- 그것을 예수님조차 인정하셨다.

그러나 재산을 포기하지 못했다.

[마 19: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 여전히 재산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기준을 가졌고,

- 자기 가치 기준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

- 구원은 믿음으로 인한 것인데,

- 믿음이면 충분하지, 왜 포기라는 행위까지 요구하냐?

-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복음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 아닌가?

답은 단순하다.

- 포기 행위가 구원을 이뤄줄 수 없다.

- 그러나 포기 행위는 믿음의 참됨을 드러낸다.

- 포기 행위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 포기 행위로 증명된 믿음의 참됨으로 구원받는다.

 

더 자세히 말하면,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만’ 믿는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해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만,

- 예수님 외에 부처님, 알라신, JMS, 돈 역시 구원자로 믿는다면,

-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 예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었다.

- 그러나 재산도 믿었다.

게다가 예수님이 재산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 예수님과 재산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 예수님과 재산이 충돌했을 때,

- 어쩔 수 없이 재산을 선택하고 예수님을 포기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 분명히 예수님을 믿었다.

- 하지만 동시에 세상의 지혜와 자기 가치 기준도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과 세상의 지혜가 충돌하는 상황이 왔다.

-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 세상의 지혜를 포기하고 예수님만 전하는 바울을 인정하던지,

- 예수님을 포기하여 세상의 지혜가 없는 바울을 거부하던지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바울을 거부한다.

 

누군가는 바울을 거부하는 것이 무슨 큰 대수냐고 반문할 수 있다.

- 바울이 무오류의 신도 아닌데 말이다.

- 바울이 잘못했으면 거부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맞다. 바울을 거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 아마 바울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바울을 거부한 이유이다.

- 그것이 세상의 지혜 때문이라는 점이다.

- 세상의 지혜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포기가 신앙에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포기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인 것이다.

- 포기 행위는 믿음과 별개로 구원에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 믿음에 속하여 믿음의 참됨을 드러내는 요소이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 나는 정말 예수님을 믿는가? 가 아니라,

- 나는 정말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믿지 않는가? 로 말이다.

만약 예수님 외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위해 평생 헌신했더라도,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