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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03) 1:26~2:5 부끄러운 예수 그리스도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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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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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두 가지를 연결한다.

- 복음을 처음 듣고 믿었을 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의 처지와

[고전 1:26]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 복음을 처음 고린도 교회에 전했을 때 바울의 처지를 나란히 배치한다.

[고전 2: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2: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부끄러운 처지였다.

- 드러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지혜, 권력, 가문이 아무것도 없었다.

- 세상의 어리석은 것, 약한 것, 비천하고 멸시받는 것뿐이었다.

[고전 1:27~28]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세상에 내세우며 자랑할 것이 없었다.

- 부끄러워서 세상에 숨기고 싶은 것뿐이었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 부끄러운 것뿐이었다.

- 세상에서 듣기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가 없었다.

- 오히려 약함, 두려움, 떨림만 있었다.

추정하건대, 바울은 실제로 건강이 좋지 않았을 수 있다.

- 질병을 하나님의 징벌로 여겼던 당시 상황에 바울은 안질, 혹은 간질을 앓았다.

- 그래서 많은 사람이 바울을 부끄럽게 여기며, 그의 말을 무시하고 부정했다.

- 바울에게 육체적 약함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약함까지 있다고 평가했다.

- 바울은 그런 처지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고후 12:7]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갈 4:13~14]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14)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말주변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대면하여 말할 때 심하게 떨리고 긴장하였다.

[고후 10:10]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수사학과 연설이 유행하던 당시 기준으로 바울은 부끄러운 존재였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 사람들도 바울도 당시 기준으로 어리석고 약하고 부끄러운 존재였다.

-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과 고린도 교회를 부끄러움으로 연결한다.

 

그런데 부끄러운 존재가 또 있다.

-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이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치욕스럽고 어리석으며 부끄러운 일이었다.

 

‘부끄러운’ 그리스도를 ‘부끄러운’ 바울을 통해 ‘부끄러운’ 고린도에 전한 이유

그런데 왜 바울은 부끄러운 그리스도를 전할까?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 

왜 어리석고 부끄러운 십자가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일까?

[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왜 하나님은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 즉 부끄러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사람들을 구원하실까?

[고전 1:21] ・・・・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왜 부끄러운 그리스도가 지혜, 의, 거룩함, 구원이 되셨을까?

[고전 1: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이는 상식을 벗어난다.

-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을 전하기 위해 그 대상의 부끄러운 면을 부각하는 것은 이상하다.

- 그 대상의 자랑스럽고 강한 면을 부각하는 것도 모자라는데 말이다.

- 누구도 부끄러운 존재를 믿고 의지하기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텔레비전 광고에서 상품을 소개하는데, 

- ‘이 상품은 약하고, 잘 부서지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사세요.’라고 말하는 꼴이다.

- 그런 광고를 보고 누가 상품을 사겠는가.

-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그렇게 광고하고 있다.

도대체 하나님은, 예수님은, 바울은 왜 그랬을까?

 

바로 이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 이것을 알아야 본문을 이해할 수 있다.

- 부끄러운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능력, 지혜, 의, 거룩함, 구원이 된 이유를 알아야,

- 하나님께서 ‘부끄러운’ 바울을 통해 ‘부끄러운’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그리스도를 전한 이유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다.

 

결론부터 말해서,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 지난 본문을 통해 이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했다.

그런데 이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다.

- 무한대라는 개념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고, 직관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많은 경우 하나님을 자기 경험의 한계 안으로 구겨 넣는다.

- 왜곡하여 변질시킨다.

- 그 과정에서 자기 욕망을 투영시킨다.

-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든다.

 

그 결과 무한대이신 하나님을 자기가 경험한 가장 강한 존재보다 더 강한 존재로 격하시킨다.

- 누군가는 하나님을 ‘가장 강한 존재보다 더 강한 존재’로 부르는 것을 충분하다고 여긴다.

- 이것이 왜 격하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것이 격하인 이유는 하나님을 여전히 유한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 ‘가장 강한 것보다 더 강한 존재’와 ‘무한한 존재’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마치 무한대를 억, 조, 경, 해보다 더 큰 숫자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 무한대는 해를 해 번 곱한다고 가까워질 숫자가 아닌데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 - 무한대가 아닌 아주 큰 수

어쩌면 이러한 오해는 자연스럽다.

- 그냥 해보다 해를 해 번 곱하면, 직관적으로 무한대에 조금 더 가까울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 해를 해 번 곱한 수를 다시 해 번 곱해도 무한대에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이 직관에서 벗어나서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을 무한대가 아닌 엄청 큰 수로 격하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하나님이 해보다 훨씬 크다고 해도,

- 해를 해 번 곱한 수보다 크다고 해도,

- 해를 해 번 곱한 수를 다시 해 번 곱한 수보다는 그렇게 크지 않으며,

- 그 수를 또다시 해 번 곱한 수보다는 작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유한하신 하나님은 가능성이 작더라도 사람이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 이를 또 다르게 말하면, 사람은 노력하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

-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사람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무리 큰 수라고 하더라도 유한한 수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부정된다.

- 있으면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좋지만,

- 없어도 노력으로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것을 기반으로 기복 신앙이 나온다.

- 하나님이 도움 주는 존재로 전락한다.

- 사람의 생명과 안위를 지켜주기 위한 수호천사로 말이다.

 

그런데 만약 그 하나님이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면?

- 사람은 그 하나님을 버린다.

- 지켜주지 않는 수호천사는 필요 없다.

그래서 베드로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버린 것이다.

- 자기가 원했던 이스라엘 독립을 도와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 바리새인도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 율법을 통해 쌓은 명예와 권력을 허물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호천사가 아니라 창조주이다.

- 인생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본질이다.

- 잘 살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 신앙생활 하는 것만이 잘 사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인 무한대로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증명하는 방법 - 자랑스러운 존재를 부끄러운 존재로

그런데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증명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의 가장 높은 존재와 가장 낮은 존재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사람의 관점에서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의 높이(9000m)와 바다 끝의 깊이(-9000m)는 18000m라는 차이가 있다.

- 바다 끝보다 에베레스트 산은 18000m 높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에베레스트 산까지의 거리와 바다 끝까지의 거리가 똑같이 무한대이다.

- 그런 관점에서 바다 끝과 에베레스트 산은 완전히 높이가 같다.

이를 지난 본문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따라서 에베레스트 산과 바다 끝이 똑같다는 것을 증명할 때,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이 증명된다.

- 그래서 하나님은 에베레스트 산을 바다 끝까지 낮추시기도 하고,

- 바다 끝을 에베레스트 산까지 높이기도 하신다.

이를 바울의 표현으로 바꾸면,

- 하나님은 에베레스트 산과 같이 자랑스러운 세상의 지혜를 바다 끝과 같이 어리석게 만드셨다고 말한다.

[고전 1:20]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 또한 반대로, 바다 끝과 같이 부끄러운 세상의 거리낌과 어리석음을 에베레스트 산과 같이 자랑스럽게 만드셨다고 말한다.

[고전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랑스러운 세상의 지혜가 부끄럽고,

- 부끄러운 세상의 어리석음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증명한다.

 

본문에 대한 오해 - 교만 정죄가 아닌 하나님의 무한대이심

그런데 많은 사람이 본문을 오해한다.

- 하나님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시고, 세상의 어리석음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신 이유를 단지 교만한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전 1: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틀렸다.

- 교만한 사람을 정죄하여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수단이다.

- 에베레스트 산에 있는 사람을 바다 끝으로 내리는 것뿐이다.

-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대이심 증명이다.

[고전 1: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하냐?

- 이전에 말했듯, 본문의 내용 자체가 직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넘어, 이해하기 싫기 때문이다.

- 그래서 본문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은 못 본 척 넘어가고,

- 본문이 수단 삼는 ‘사람의 교만’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다.

본문의 주제가 사람의 교만에 한정되어야, 

- 다른 사람을 교만하다고 정죄하며, 정죄의 대상에서 자신을 제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 겸손한 자신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높은 지위가 유지되고,

- 자랑스러운 에베레스트 산에서 부끄러운 바다 끝으로 격하되는 것을 피하며,

- 자신은 의와 지혜에 상당히 가까우니,

- 조금만 노력하면 굳이 하나님 없이도 존재 가치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만한 자신을 훼손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인정하면,

- 아무리 자신이 겸손하다고 자부하며, 모든 사람에게 겸손하다고 인정받아도,

- 무한대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기 때문이다.

- 평생 쌓아 올린 겸손이 하나님께 이르는 데 아무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 본문에서 정죄당하는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자신 사이에 차이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 그로 인해 자기 존재 가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본문을 교만 정죄로 이해하는 것이다.

- 그러면서 은밀하게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본문을 바울의 의도와 정반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 바울의 의도는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증명하여, 

- 모든 인류가 똑같이 부끄러운 바다 끝에 있고, 모두 똑같이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롬 3:10~12]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 인류가 죄인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

- 오직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이 중요하다.

- 하나님이 무한대이시기 때문에 그 결과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본문을 통해 자신을 높인다.

- 자신은 의롭다며 안심한다.

- 자신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니까.

- 본문을 통해 여전히 자신이 에베레스트 산에 있다고 착각한다.

- 하나님께 상당히 가까우며, 조금만 노력하면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의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 자신이 어떤 기준에서건 에베레스트 산에 있으면 자랑스럽다고 착각한다.

- 단지 세속적인 관점에서 돈, 명예, 권력이 많으면 자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 종교적인 관점에서 겸손, 율법 행위, 교회 지위가 높으면 자랑스럽다고 착각한다.

-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태도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기준에서 자랑스러운 태도 전체를 부정한다.

- 바울은 자신의 구원 사역조차 부정한다.

[빌 3:13~14]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고전 2: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고전 9: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 자기 존재 전체를 부정한다.

[딤전 1:15] ・・・・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목적이다.

- 세상의 모든 것을 전부 부끄럽게 여기는 것.

-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조차 말이다.

- 단지 돈, 명예, 권력뿐만 아니라, 겸손, 순종, 헌신, 율법 행위를 포함하여,

- 바울 자신이 평생 목숨 걸고 이뤄낸 전도 성과까지 전부 부정하는 것이다.

이유는 딱 하나이다.

- 세상 모든 것이 정말 부끄럽고 나쁜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 바로 하나님이 무한대이시기 때문이다.

- 무한한 수 앞에서 모든 유한한 수는 전부 똑같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26~31절: 부르심을 받을 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의 처지

하나님께서 부끄러운 고린도 교회 사람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명확하다.

- 세상의 모든 것, 특히 자랑스러운 것을 부끄럽게 하고, 없애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고전 1:27~29]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수단이다.

-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고전 1:30~31]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세상에서 아무것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이유는 단지 세상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 세상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무한대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오직 주님만 자랑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님 안에 있기에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지혜롭게 된 것이다.

[고전 1: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 예수님의 무한대이심 안에서 고린도 교회 사람도 무한대가 된 것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고린도 교회 사람은 스스로 지혜롭지 못하다.

- 그들은 여전히 부끄럽고 어리석으며 약하다.

이를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부끄럽고 어리석은 처지였기 때문에,

-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 그래야 그들이 예수님의 은혜로 지혜로워졌을 때,

- 그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지혜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지혜라고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이 그들을 보고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약 자랑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로 더 지혜로워졌다면,

- 그 변화의 원인이 예수님이라고 명확하게 인식하기 어렵다.

-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을 칭송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했다.

- 자신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신이 받은 침례 의식 때문에,

- 그리고 자신에게 침례를 준 지도자 때문에,

- 예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지혜롭다며 자신을 자랑했다.

- 지혜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분열했다.

- 서로 자신의 지혜만이 옳다고 여기며, 서로를 부정했다.

- 자신의 침례와 자신의 지도자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판단했다.

 

바울은 분열의 원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 표면적인 원인은 자신을 자랑하는 교만 때문으로 보이지만,

- 내면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부정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1~5절: 복음을 처음 고린도 교회에 전할 때 바울의 처지

하나님께서 바울이 부끄러운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이유도 명확하다.

[고전 2: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2: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고전 2: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고전 2: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1:21] ・・・・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 지혜와 구원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명확하게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 그래서 바울 자신의 ‘훌륭한 말이나 지혜’를 사용하지 않고, ‘약하고 두려워하며 떨릴’ 때,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전한 것이다.

- 성령의 능력만이 찬양받도록 말이다.

- 고린도 교회의 믿음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고 말이다.

- 그것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똑같이 행하셨다.

- 자랑스럽고 지혜로우며 강한 모습이 아니라, 부끄럽고 어리석으며 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 로마에 저항하여 이스라엘을 독립하는 강한 지도자가 아니라, 로마의 총독에게 처참하게 죽임당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나타나셨다.

- 바다 끝까지 내려가셨다.

이유는 명확하다.

-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 바다 끝과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가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 그래서 무한대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바다 끝에서 하늘 끝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는 것은 아무 소용 없고,

- 오직 무한대이신 하나님의 은혜만 소중하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믿음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고 말이다.

-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 전한 것이다.

[고전 2: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울은 부끄럽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추락한 것이다.

- 그리고 부끄럽고 어리석은 모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다.

그것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전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바울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반응 - 부끄러워함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부끄러운’ 처지에 있을 때, 

- ‘부끄러운’ 바울에게 ‘부끄러운’ 예수 그리스도을 들었다.

- 그로 인해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얻었다.

[고전 1: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 1: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즉, 부끄러움이 자랑스러움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 그 자랑스러움이 부끄러운 바울을 통해 부끄러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 아니라,

- 자랑스러운 자신 때문이라고 착각했다.

- 그래서 서로 자신만이 옳다며, 분열했다.

게다가 여전히 부끄러운 처지에 있는 바울을 부끄러워했다.

- 그래서 바울이 사도라는 것을 의심하며 부정했다.

- 바울을 정죄하며 심판했다.

[고전 4:3]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바울을 교회는 부정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반복해서 주장한다.

[고전 4:1]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관리인으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고전 9:1~2]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나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표입니다.

- 바울은 복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람이었지만, 교회에게 사도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았다.

- 그래서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 고린도 교회는 자신에게 복음을 처음 전해서 교회를 세워준 사람에게,

- ‘당신의 복음이 의심스럽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이유는 바울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 자신은 부끄러운 처지에서 복음 듣고 자랑스럽고 지혜로운 상태가 되었다.

- 온갖 언변과 지식이 늘었다. 은사도 풍족해졌다.

[고전 1: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고전 1: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이룬 성과라고 착각했다.

 

그런 착각 속에서 그들은 바울을 봤다.

- 바울은 여전히 부끄러운 처지였다.

- 자신들이 가진 ‘훌륭한 말이나 지혜’도 없었다.

[고전 2: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도 없었다.

[고전 2: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 오직 부끄러운 예수 그리스도만 있었다.

[고전 2: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부끄러운 바울이 싫었다.

-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훌륭한 말과 지혜를 쌓지 않는 게으른 사람으로 보았다.

- 자신은 지혜로운 성과를 이뤘는데, 바울은 아무 성과도 없이 여전히 부끄러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부끄러운 바울 때문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랐다.

- 여전히 부끄러운 바울이 자신의 교회를 세운 지도자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 부끄러운 과거와 함께 부끄러운 바울을 잊고 싶었다.

- 이는 마치 벼락부자가 가난했을 때의 친구들과 단절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부정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에게 훌륭한 말이나 지혜가 없는 것을 항변하는 것이다.

- 고린도 교회가 그것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된 원인은 하나이다.

-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에베레스트 산에 서 있는 자신을 가치 있다고 여겼다.

- 반면에 여전히 바다 끝에 있는 바울을 가치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결론 - 더 나아지려는 욕망 정죄

정죄를 당한 고린도 교회는 억울할 것이다.

-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하나님을 부정했다고 정죄하냐?

-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 부끄러웠던 과거를 뒤로 하고, 세상에 조금 더 당당하고 자랑스러워지고 싶었을 뿐이다.

- 우리는 자랑스러워지기 위해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빼앗을 적이 없으며,

- 언제나 정직하고 성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만약 정직하고 성실하기만 하다면,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소망을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도 우리가 더 나아지고 당당해지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다.

- 우리의 기쁨을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더 나아지려는 욕망’ 자체를 정죄한다.

- 더 나아지려는 욕망은 더 나아지는 것이 좋다는 가치 기준에 근거한다.

- 또 그 가치 기준은 바다 끝보다 에베레스트 산이 더 높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 이는 사람의 기준에서는 합당하다.

-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부당하다.

바다 끝보다 에베레스트 산이 더 높다는 판단은 오직 하나님이 무한대이심을 부정할 때만 가능하다.

- 따라서 더 나아지려는 욕망은 결국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울은 여전히 부끄러운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 훌륭한 말이나 지혜를 갖추려고 하지 않았다.

- 지혜에서 나온 그럴듯한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부끄러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렀다.

- 그래서 여전히 부끄러운 처지였다.

 

예수님도 더 나아지려고 하지 않으셨다.

- 더 많은 능력을 갖추려고 하지 않으셨다.

- 더 많은 사람을 모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더 부끄러운 처지로 추락하셨다.

- 벌거벗겨진 채로 죽임당하는 처지로 전락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바울은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 더 나아지는 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와 바다 끝의 높이가 완전히 같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직 부끄러운 처지에서만 ‘성령의 능력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부끄러워지라는 것이 아니다.

- 부끄러움이라는 가치 기준을 갖고, 더욱 부끄러워지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역시 새로운 가치 기준일 뿐이고, 이 역시 하나님의 무한대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 하늘과 땅을 뒤집어서 판단한 것뿐이다.

 

부끄러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한 것이다.

-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에만 노력하라는 것이다.

[고전 2: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외에는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말라는 것이다.

- 다른 어떤 것도 가치 있다고도, 가치 없다고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 자랑스러운 것이 가치 있고, 부끄러운 것이 가치 없다고 판단하지 말고,

- 반대로 부끄러운 것이 가치 있고, 자랑스러운 것이 가치 없다고 판단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랬기 때문에 여전히 부끄러운 처지에 있었다.

- 예수님도 그러셨기 때문에 부끄러운 처지로 십자가에 죽으셨다.

따라서 우리도 부끄러운 처지가 될 것이다.

- 평생을 살면서 세상의 자랑스러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 그래서 언제나 부끄러움 속에서 살 것이다.

그래서 괴롭고 슬플 것이다.

- 그래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 더 나아지려는 욕망이 생길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싶을 때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말한다.

- 바로 그럴 때, 작정하라!

-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고 작정하라.

- 더 나아지려는 욕망을 억누르라.

- 부끄러운 처지에 머물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그럴 때만 성령의 능력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