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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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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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고약한’ 구절이다.
- 난해한 구절이 많기 때문에 고약하고,
- 고약한 주장을 하는 근거 구절로 오용되었기 때문에 고약하다.
특히 15절에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 우월의식에 빠진 사람이 교회 안에 많다.
- 게다가 자신은 성령 충만하기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며,
- 정작 하는 짓은 점쟁이 노릇이나 하는 목사도 많다.
본문을 이렇게 오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지혜’, ‘성령’, ‘분별’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
바울은 지혜를 세상에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지만,
- 반면에 자신은 소유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 특히 그 지혜를 통해 하나님은 바울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셨다고 말한다.
[고전 2:7] 우리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영세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성령 역시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고전 2:11]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 그 성령을 통해 바울 자신은 남들과 달리 하나님의 선물을 깨달았고, 성령의 말을 한다고 말한다.
[고전 2:12~13]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신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이 선물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에서 배운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것을 가지고 신령한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혜와 성령을 가진 바울 자신만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자신은 신령하기에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다고 한다.
- 여기서 14절의 ‘분별’은 15절의 ‘판단’과 원어로 같은 단어이다.
[고전 2:14] 그러나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며, 그는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고전 2:15]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 그러나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아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지혜, 성령, 분별을 통해 바울은 말한다.
- 자신은 참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서 성령을 받았다.
- 그래서 자신은 남들과 다르고, 영적으로 특별하다.
- 자신만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다.
- 그래서 자신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 반면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
한마디로, 바울 자신만 지혜와 성령을 받아 분별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 이것이 맥락을 배제한 본문의 표면적 의미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본문이 고약한 것이다.
- 바울은 이후에 설명할 특정한 맥락과 이유 때문에 자신을 높였다.
- 점쟁이 노릇을 하는 고약한 목사의 논리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 오히려 바울은 자신을 낮춘다.
- 자신에게 지혜가 없다고 말한다.
[고전 2: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2: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본문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용되었다.
- 바울이, 남들과 달리, 지혜와 성령을 받아 분별할 수 있었던 것처럼,
- 자신도, 남들과 달리, 특별한 지혜를 깨달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 구절로 이용되었다.
- 그래서 자신의 말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에, 무조건 옳다는 것이다.
바울의 의도 -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결론적으로 바울의 의도는 자신을 높이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다.
- 아무도 자신을 높여서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고전 1: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자신이 지혜와 성령을 받아 특별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전혀 지혜와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고전 1:19]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고전 1:20]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회가 이런 착각에 빠져 있었다.
고린도 교회는 자신만이 특별히 지혜롭고 능력 있다고 착각했다.
[고전 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자신이 받은 지혜와 성령을 자랑하며, 왕 행세를 했다.
[고전 4:7~8] 누가 그대를 별다르게 보아줍니까?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받아서 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나 된 듯이 행세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노릇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부정하고 거부하기까지 한다.
- 바울을 지혜롭지 못하다고 비난하며, 사도가 아니라고까지 주장한다.
-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 자신이 복음으로 낳은 자녀 같은 사람에게 말이다.
[고전 4:1]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전 9: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나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표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왜 이렇게 고약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냐?
- 지혜, 성령, 분별이 갖는 매력 때문이다.
- 신앙과 상관없이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세상에 자랑하며 자신을 높이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지혜, 성령, 분별을 세상에서 사용하는 뜻과 다르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 엄격하게 정의하여 세상에서 사용하는 뜻과 차별화한다.
어떻게 정의하는지 본문에서 자세히 보자.
6~9절: 지혜 - 비밀로 감추어져,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시작부터 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 자신이 말하는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완전히 다르다고.
[고전 2:6] 그러나 우리는 성숙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나 멸망하여 버릴 자들인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닙니다.
- 비밀로 감추어져 있고, 세상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고전 2:7~8] 우리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영세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8)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 세상이 인정하고, 탐내며, 매력적으로 느끼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다.
- 세상이 알 수 있도록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는 어리석고, 거리낌을 주며,
- 매력 없고, 세상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 1:21]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울이 지혜를 왜 이렇게 말하냐?
- 바울 자신이 지혜를 정말 이렇게 어리석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다.
- 바울은 지혜를 ‘영광스럽게 하는’, 즉 ‘영광이신 주님’에 이르게 하는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고전 2:7~8] 우리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영세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8)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세상의 헛된 지혜에 빠져서,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게 여겼다.
- 바울이 말하는 지혜의 본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고전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 분명히 고린도 교회 사람들도 그 지혜를 듣고 믿어 구원을 받았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문안드립니다. ・・・・
-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 거룩함,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고전 1: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 이후부터 미묘하게 빗나갔다.
-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거부하지 않았다.
- 하지만 세상의 지혜도 조금씩 받아들였다.
세상의 지혜를 받아들인 이유는 굉장히 상식적이다.
- 숨겨져서 보이지 않고, 알기 어려운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보다 잘 보이고 알기 쉽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역설적인 지혜보다 세상의 지혜가 더 직관적이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칭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비유를 하자면, 어린 아이가 깊고 오묘한 맛의 청국장보다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맛의 소시지를 더 좋아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의 지혜를 받아들인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는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서, 거짓된 자신을 부정하고 참된 자신을 찾도록 한다.
- 반면에 세상의 지혜는 사람을 왕위에 앉혀서, 참된 자신을 부정하고 세상이 인정하는 모습을 갖게 한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를 받아들인 고린도 교회는 왕이 된 듯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 실상은 점차 예수 그리스도에서 멀어지며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지혜를 부정한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만이 진정한 지혜이고,
- 세상의 지혜로는 절대 진정한 지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전 2:6] 그러나 우리는 성숙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나 멸망하여 버릴 자들인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지혜만 인정한 것이다.
- 우월의식을 가진 사람처럼 자신이 자기를 자의적으로 옳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만 말하기 때문이다.
- 풀어 말하면, 바울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옳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자신도 옳은 것이다.
- 만약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다면,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것도 말한다면,
- 자신도 지혜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10~13절: 성령 -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게 하는 분
여기서도 바울은 성령의 뜻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 성령은 오직 ‘이런 일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계시하는 분이시다.
[고전 2:10]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시니,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살피십니다.
-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경륜’,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선물‘을 깨닫게 하신다.
[고전 2:11]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고전 2:12]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신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설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다.
- 이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희생당한 자가 구원자가 된다는 역설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 세상에서 어리석은 것과 거리낌으로 여겨진다.
-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다.
이렇게 바울은 성령의 능력을 철저하게 제한한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한정한다.
-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의적인 해석을 철저히 배제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성령을 잘못 이해했다.
-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언변, 지식, 은사를 주시는 분으로 오해했다.
[고전 1:5~7]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서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잡았습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언변, 지식, 은사를 자랑하려 했다.
- 그것은 세상에서도 지혜롭게 보이는 것이고,
- 그것을 자랑하면 세상에서 인정받고 칭찬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로 인해 부작용이 생겼다.
- 여전히 언변과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바울을 무시했다.
- 바울은 어리석게 들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전했기 때문이다.
[고전 1:21]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그런 바울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단정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을 항변했다.
- 진정한 성령은 어리석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며,
- 여전히 어리석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자신이 진정한 성령을 받은 자라고.
- 오히려 어리석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벗어나 지혜롭다고 인정받는 고린도 교회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그러니까 바울은 성령을 받아 지혜롭게 된 ‘자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 반대로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깨닫게 한 ‘성령’을 강조하는 것이다.
-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높이려는 것이다.
14~16절: 분별 - 어리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능력
고린도 교회는 분별도 남용했다.
- 자신은 지혜롭기에 하나님의 뜻을 구분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추정하건대, 고린도 교회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신앙을 하나님의 뜻으로 판단했다.
- 그래서 세상에서 인정받는 지혜, 언변, 지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 반대로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소홀히 여겼다.
게다가 고린도 교회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 부정했다.
- 하나님이 어리석은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하시자,
- 고린도 교회는 그런 하나님을 가르치려 했다.
- 어리석은 예수 그리스도로는 전도할 수 없으니,
- 세상도 인정하는 지혜, 언변,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고전 2:16]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누가 그분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렇게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까지 가르치려 들었다.
그러니 그런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배척하는 것은 당연하다.
- 바울은 여전히 어리석게 예수 그리스도만 전했기 때문이다.
- 바울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다고 ‘분별’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지적한다.
-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을 이해할 수 없다고.
- 그들에게 진정한 분별력이 없다고.
[고전 2:14] 그러나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며, 그는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분별력이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 세상에서 어리석다고 평가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과 동일하게 어리석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 즉, 세상과 같은 기준으로 신앙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분별의 기준은 무엇이냐?
-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 어리석게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지혜로 판단하는 것이 진정한 분별이다.
따라서 분별의 기준은 반드시 세상에서 어리석은 것이어야 한다.
[고전 2:14] 그러나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며, 그는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라 치부하고,
- 오직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만 진정한 지혜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명확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를 분별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다.
[고전 2:15]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며,
- 이는 곧 분별하기 가장 어려운 대상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 지혜로 판단한 것은 가장 어려운 지혜를 분별한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나머진 모든 지혜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참 지혜로 판단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다.
- 이미 최고의 분별력으로 스스로를 분별했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다.
- 그래서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었고,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고전 4:3]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미 바울에 대한 심판이 이뤄졌다.
이런 비극이 일어난 이유는 단순하다.
- 고린도 교회는 어리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 세상의 지혜를 추구했고,
- 바울은 세상의 지혜에 저항하며, 여전히 어리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인정받았지만, 실상은 분별력이 없었고,
- 바울은 세상에서 어리석다고 판단 받았지만, 실상은 분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별력 없는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마구 정죄했다.
그런데 더 비극적인 것은 지금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 15절을 근거로 자신은 성령 충만하기에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교회에 있다.
- 그러면서 하는 짓이라고는 점쟁이 노릇이나 한다.
- 성공하는 법, 문제 해결하는 법, 건강 회복하고 부자 되는 법 따위나 조언한다.
- 특히 목사 중에 이런 사람이 많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가 처한 문제이다.
- 이 문제 때문에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다.
- 이 문제가 바울이 가장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바울의 의도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 성공하는 법, 부자 되는 법도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세상에서 어리석다고 조롱당한다.
- 성공하는 법, 부자 되는 법은 세상 누구보다 알지 못한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상 모든 지혜 중에 최고의 지혜가 담겨 있기에,
-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최고의 지혜가 있기에 세상에서 어리석다는 판단을 받는다.
- 왜냐하면 최고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 특히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 부귀, 명예를 포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어리석다는 판단을 받은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정죄 받은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세상의 지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인정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론 - 하나님과 동시에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지혜, 성령, 분별이 없다고 판단했다.
- 그래서 바울의 권위와 그의 복음을 부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 권위와 복음이 옳다고 주장한다.
-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혹은 경험적, 혹은 결과론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판단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고 진정한 지혜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 자신은 성령을 받았고, 바르게 분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옳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 바울을 거부하면서까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 무엇 때문에 지혜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것까지 받아들였을까?
- 그래서 예수님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을까?
많은 사람이 고린도 교회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을 것으로 생각한다.
- 예수님을 믿고 그렇게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 성령의 능력을 강하게 경험한 교회가 변질되려면,
- 그에 상응하는 심각한 죄를 범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믿게 되는 것도 어렵지만,
- 예수님을 믿던 사람이 믿지 않게 되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인은 생각보다 소박하다.
-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싶지만,
- 동시에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 죽어서 천국도 가고 싶지만, 살아있을 때도 인정받고 안정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대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 동시에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세상의 지혜도 받아들였다.
-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훼손했고,
-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바울까지 거부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동시에 세상의 지혜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의 지혜가 상당 부분 상충하는 것은 알지만,
- 일부는 중첩되지 않는가?
- 중첩되는 부분만큼은 세상의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 예수님을 믿어도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 세상의 지혜를 완전히 배제하고 살 수 없는 것 아닌가?
-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이렇게 묻는지 완전히 공감된다.
- 인지상정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마음이다.
- 누가 세상에서 부정당하며 살고 싶겠는가.
- 나도 예수님 믿어 죽어서 천국에도 가고,
- 당연히 살아서도 나름 인정받으며 살고 싶다.
신앙생활을 하는 변질된 이유 - 투자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렇게 신앙생활 한다.
- 신앙 때문에 엄청난 희생을 한다.
- 돈, 명예, 권력을 포기한다.
- 헌금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높은 자리를 포기하고 낮은 자리로 가려 한다.
- 그래서 목사나 선교사가 되려는 사람도 있고,
-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왜 희생하냐?
- 지금 돈을 포기하면, 결국 나중에 부자가 되리라는 기대로 포기한다.
- 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돈 걱정하지 않고 살리라는 기대를 한다.
- 지금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 고생하면, 나중에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으리라 기대한다.
즉, 희생하는 이유가 천국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인정받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대는 틀렸다.
- 기대하며 희생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투자이다.
- 그것은 편의점에서 껌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로 돈을 ‘희생’하는 것과 똑같다.
- 그래서 그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고, 투자 혹은 구입이라고 하는 것이다.
희생은 말 그대로 돌려받지 않는 것이다.
- 희생 그 자체에 가지를 두는 것이다.
- 희생에 대한 감사 인사조차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희생으로 인한 손해와 불이익까지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가 돈을 희생하여 헌금하는 이유는 그 행위 자체가 가치 있기 때문이다.
- 우리 돈과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행위이다.
- 이는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나온 결과 행위이다.
- 이 행위가 원인이 되어, 또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 안 된다.
- 그러면 헌금은 투자 혹은 구입이 된다.
그래서 헌금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포함한다.
- 가진 돈의 일부를 희생했기 때문에, 희생한 만큼 돈이 부족해질 것이고,
- 그만큼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할 것이며,
- 그만큼 세상에서 인정과 안정을 누리지 못할 것이고,
- 그만큼 세상에서 어리석다는 판단을 받을 것이다.
이것을 감수하는 마음이 있을 때만 희생이 투자로 변질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헌금하며 이렇게 기대한다.
- 언젠가 헌금한 금액의 열 배가 되어 돌아오기를.
- 직접 돌아오지 않더라도, 돈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기를.
- 돈 때문에 일어날 사고를 하나님이 미리 예방해 주시기를.
- 그래서 세상에서 인정받으며 안정되게 살 수 있기를.
이것은 헌금이 아니라 전형적인 투자며 구매이다.
- 하나님을 상대로 장사한 짓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처한 문제이다.
-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가르치려 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 결국 바울을 부정하는데 이른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왜 신앙생활 하는지 되돌아보자.
- 희생과 포기 그 자체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
- 아니면 희생과 포기를 통해 더 나은 삶으로 보상받을 기대를 하고 있는지.
만약 후자라면, 당장에는 문제없어 보이지만,
- 결국 고린도 교회처럼 예수님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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