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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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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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 첫째로, 다루는 주제가 많고 산만하다.
- 10절에 ‘연합’, 11~12절에 ‘분열’, 13~17절에 ‘침례’, 18~25절에 ‘어리석음과 지혜’이다.
- 네 가지 주제를 하나로 연결해야 바울의 숨겨진 의도를 찾을 수 있다.
둘째로, 18~25절은 내용 자체가 어렵다.
- 담고 있는 주제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역설이다.
- 그래서 표현도 역설적으로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혜로워 보이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대조한다.
- 역설 속에 진실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해석하기 어렵다.
본문 해석
먼저 본문 전체의 큰 그림을 그려서, 바울 논리의 틀을 보겠다.
10절: 연합하라는 권면
10절에서 바울은 가장 먼저 연합하라고 권면한다.
[고전 1:10]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
이것이 바울의 표면적인 의도이다.
- 교회가 한 마음으로 하나 되도록 하는 것이 고린도전서의 표면적인 목적이다.
- 그래서 인사를 마치자마자 첫마디부터 연합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합이 내면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숨겨져 있다.
-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목적은 다른 데 있다.
11~12절: 분열하는 교회 정죄 - 교만
다음으로, 바울이 연합하라고 권면한 목적은 정죄에 있다.
- 11~12절에서 연합하지 못하고 분열하는 교회를 바울은 정죄한다.
[고전 1:1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여러분의 소식을 전해 주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추종하는 지도자에 따라 분열했다.
- 서로 자기 지도자가 더 옳다고 싸웠다.
이 분열의 바탕에는 교만이 있다.
- 자신이 지도자의 올바름을 판단할 능력을 가졌다는 착각이 교회 전체에 퍼졌다.
-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지도자만 옳고 다른 지도자는 틀렸다고 우기는 사람이 난무했다.
- 그러니 교회가 분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죄 역시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 이 역시 진정한 의도를 전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 진정한 의도는 다음 단락에서 구체화한다.
13~17절: 침례 갈등 지적 - 가치 부여 문제
그런데 분열은 침례 갈등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 그래서 바울은 침례 갈등을 분열의 결정적인 예로 가져온다.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서로 자신에게 침례를 준 지도자만을 옳다고 주장했다.
- 이를 통해 자기 지도자의 침례만 진정한 침례이며,
- 진정한 침례를 받은 자기 무리만 진정한 교회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바울은 반대로 자신이 아무에게도 침례를 주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 분열의 불씨가 된 침례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 1:14~15] 내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침례를 준 일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5) 그러므로,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침례 갈등이 얼마나 하찮은지 증명했다.
이러한 침례 갈등의 바탕에는 가치 부여의 문제가 있다.
- 침례 의식 자체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 의로움의 기원이 복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침례 의식에도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 복음을 듣고 믿는 것뿐만 아니라, 침례 의식을 행해야 의로워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그 결과 침례 의식의 주체인 지도자에게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 자기 지도자만 진정한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논리는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이는 단지 침례 의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게 발생한다.
- 비록 복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고 할지라도,
- 다른 것을 두 번째 가치로 여긴다면 고린도 교회와 같은 분열이 반드시 일어난다.
복음 외에 다른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 - 자기 자랑
왜 복음 외에 다른 것에 가치를 부여할까?
- 복음을 듣고 믿음은 자랑하기가 어렵다.
- 믿음을 꺼내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 꾸준하게 일상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밖에 보여줄 수 없는데,
- 그때까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믿음을 꺼내서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을 찾는다.
-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것이 침례였고,
- 바리새인에게는 율법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침례에 가치를 부여했다.
- 복음이 최고의 가치이지만,
- 침례도 복음 다음으로 가치 있는 것이고,
- 그러니 침례도 믿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자기를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 수단이 필요했고,
- 그래서 침례에 가치를 부여하여 자기를 겉으로 보이도록 자랑하려 한 것이다.
- 마치 바리새인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영광 받도록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현대에 믿음을 보여주는 수단은 무엇이냐?
- 교회 부흥과 번영이다.
-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교회의 부흥과 번영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들의 논리 구조는 다음과 같다.
- 대전제: 교회의 부흥과 번영은 올바른 가치를 갖는다.
- 소전제: 그런데 자기 교회는 부흥과 번영을 이뤘다.
- 결론: 따라서 자기 교회는 올바른 가치를 갖는다.
즉, 자기 교회는 부흥과 번영을 이뤘기 때문에,
- 교회가 어떤 복음을 갖는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옳다는 뜻이다.
- 자기 교회가 얼마나 바른 복음을 가졌는지는 드러내기 어렵지만,
- 겉으로 보이는 부흥과 번영은 드러내기 쉽고,
- 이를 통해 자랑하고 과시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부흥과 번영이 나쁜 것은 아니다.
- 바울도 베드로도 바른 복음을 전하여 수천 명에게 전도하는 부흥을 경험했다.
하지만 바울이 의로운 이유는 부흥을 이뤘기 때문이 아니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전했기 때문이다.
- 부흥에는 독립적인 가치가 없다.
- 복음에 종속되어 복음의 가치를 드러낼 뿐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바울이 아무런 부흥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전했다면, 바울은 의롭다는 뜻이다.
- 오직 복음에만 가치가 있다.
즉, 의로움의 기준에는 오직 복음만 있다.
- 부흥은 터럭만큼도 없다.
- 부흥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겉으로 보이는 침례나 부흥을 자랑하지 않았다.
-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자랑했다.
[고전 1: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전 1: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갈 6:14]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침례 의식은 좋은 것이다.
- 복음을 믿는 자가 행하는 훌륭한 신앙 고백 행위이다.
하지만 그것이 독립적인 가치를 갖지 않는다.
- 복음에 종속되어 복음의 가치를 드러낼 뿐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침례 의식에 독립적 가치를 부여했다.
- 물론 복음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고, 침례 의식에는 그보다 낮은 가치를 부여했다.
하지만 복음과 별개로 침례 의식 자체에도 가치가 있다고 착각했다.
- 침례 의식을 수단 삼아 예수님이 아닌 자기를 자랑하려 했다.
이 착각 때문에 갈등과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 침례 의식에 가치가 있다는 공통된 착각이 교회 전체에서 일어났다.
- 그래서 복음 외에도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착각이 일어났다.
- 이 공통된 착각을 교회 안에서 서로 합의하고 인정했다.
그러자 그 이후로는 각각 자기만의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 침례 의식에 가치가 있다는 공통 합의 안에서,
- 자신의 침례 의식이 더 가치 있다는 주장을 할 여지가 생겼다.
- 이를 통해 자신이 남보다 더 낫다고 자랑한다.
이것이 분열의 시작이다.
많은 경우 분열을 조정하기 위해 이렇게 논의한다.
- 침례 의식을 두고 분열이 일어나면, 올바른 침례 의식이 무엇인지 논의한다.
- 율법 행위를 두고 분열하면, 올바른 율법이 무엇인지 논의한다.
- 예배 의식을 두고 분열하면,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지 논의한다.
- 그런데 논의할수록 분열은 강화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
- 왜 분열을 조정하기 위한 노력이 분열을 강화하냐?
- 올바른 침례, 율법, 예배 논의가 침례, 율법, 예배의 가치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 그럴수록 복음 외에도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공통된 착각을 강화하고,
- 이 착각은 자기가 주장하는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착각을 강화한다.
- 그래서 자기가 남보다 낫다는 착각을 강화한다.
그러니 서로의 주장이 더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고,
- 갈등과 분열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분열을 조정할 방법은 딱 하나이다.
- 침례 의식을 두고 분열하면, 침례 의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 율법 행위와 예배 의식을 두고 분열하면, 율법과 예배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침례, 율법, 예배를 두고 분열한 이유는
- 복음 외에도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공통된 착각 때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 그래서 복음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공통된 착각을 인식할 때만, 그리고 복음만 인정할 때만 분열이 조정된다.
복음 외에도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착각은 명백한 죄이다.
- 이는 복음이 절대적이며 유일한 가치이고,
- 복음 외에는 가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신앙의 핵심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비록 복음을 부정하지 않아도, 복음 외에 다른 것에 아무리 작은 가치라도 부여하면,
- 이는 곧 복음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 복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 물론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로 부정하지 않았다.
- 오히려 복음의 가치를 인정하고 찬양했다.
그러나 복음과 함께 침례 의식에도 작은 가치를 부여했다.
- 그 작은 부여 때문에 복음이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교회가 분열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는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풀어 말하면, 바울의 목적은 침례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 그래서 복음 외에 침례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침례 의식에 가치를 부여했고,
- 그러니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침례 갈등을 문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침례 갈등 지적도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 침례로 갈등하게 만든 고린도 교회의 근원적인 죄가 있었다.
- 그것을 밝혀 해결하는 것이 바울의 진정한 목적이다.
18~25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역설
본문을 해석하기 전에 단순하지만 직관에서 벗어난 산수 문제를 다루겠다.
a: 천국(∞)과 땅(0) 사이의 거리는? / ∞ - 0 = ?
b: 천국(∞)과 고층 빌딩 꼭대기(300m) 사이의 거리는? / ∞ - 300 = ?
c: 천국(∞)과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9000m) 사이의 거리는? / ∞ - 9000 = ?
d: 천국(∞)과 가장 깊은 바다 끝(-9000m) 사이의 거리는? / ∞ - (-9000) = ?
e: 천국(∞)과 지옥(-∞) 사이의 거리는? / ∞ - (-∞) = ?
답은 모두 똑같이 무한대이다.
- 무한대에 어떤 수를 빼도 똑같이 무한대이다.
풀어 말하면, 천국에서 보면, 땅, 빌딩, 에베레스트 산, 바다 끝까지의 거리가 똑같다.
- 게다가 지옥까지 전부 같은 거리로 보인다.
- 즉, 땅, 빌딩, 에베레스트 산, 바다 끝, 지옥이 전부 똑같다는 뜻이다.
이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 고층 빌딩 바로 앞에 서서 빌딩 꼭대기를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 작은 인간이 어떻게 저 높은 건물을 세웠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에베레스트 산 앞에 서면 어떻겠는가.
- 놀랄 수도 없다. 꼭대기가 보이지 않으니.
- 인류 중에 극소수만 꼭대기를 보았다.
게다가 바다 끝은 에베레스트 산 높이보다 더 깊다.
-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른 사람보다 바다 끝까지 간 사람은 더 적다.
그런데 이 높이와 이 깊이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 무한대 높이에 있는 천국을 기준으로 했을 때 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상당하다.
- 높음을 선, 낮음을 악이라고 해보자.
- 에베레스트 산이 최고의 선, 바다 끝을 최고의 악이라고 해보자.
- 사람의 관점에는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선과 상상할 수 없는 최고의 악이 있다.
- 사람은 최고의 선을 보며 감탄과 경이를 느끼고,
- 최고의 악을 보며 탄식과 역겨움을 느낀다.
그런데 하나님은 최고의 선과 악을 어떻게 보실까?
- 완전히 같다고 하신다.
- 역설적으로 선을 악하다고 하시고, 악을 선하다고 하신다.
이는 직관과 경험에서 너무 벗어나기에 이해하기 어렵지만,
- 고등학교에서 무한대의 개념을 배운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점이 본문의 바탕이 되는 전제이다.
- 이 전제 때문에 역설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 사람의 관점에서 최고의 선과 최고의 악의 차이는 말할 수 없이 크다.
-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최고의 선은 최고의 악과 완전히 같다.
- 최고의 선은 최고의 악이고,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이다.
이 개념을 말로 표현하면, 역설적으로 들린다.
- 그러나 개념 자체는 역설적이지 않다.
- 무한대의 성질이 만든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개념이 더 추가된다.
- 바로 구원이다.
- 땅, 빌딩, 에베레스트 산, 바다 끝에 있는 사람이 천국에 올라가려면, 얼마큼 높이 올라가야 할까?
- 에베레스트 산에 있는 사람은 높으니까 조금만 올라가면 되고,
- 바다 끝에 있는 사람은 낮으니까 훨씬 더 많이 올라가야 할까?
- 천국과 더 가까운 사람이 있고, 천국과 더 먼 사람이 있을까?
직관적으로 보면, 에베레스트 산에 있는 사람은 천국과 가까워 보인다.
- 바다 끝에 있는 사람은 천국과 멀어 보인다.
- 그래서 에베레스트 산에 있는 사람은 더 선해 보이고,
- 바다 끝에 있는 사람은 더 악해 보인다.
- 그로 인해 현실에서는 에베레스트 산에 있는 사람을 선하다고 칭송하고,
- 바다 끝에 있는 사람을 악하다고 비난한다.
- 그래서 선한 사람은 자기 선함을 자랑하며, 악한 사람을 업신여긴다.
그러나 실상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 에베레스트 산에 있는 사람도, 바다 끝에 있는 사람도 완전히 똑같이 무한대만큼 올라가야 한다.
-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천국까지의 거리는 똑같다.
구원에 이르는데 선인과 악인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 똑같이 무한대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오해한다.
- 자신은 선행을 많이 했고, 최선을 다해서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 올라갔으니,
- 천국에 가깝다고 착각한다.
- 특히 바다 끝에 있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깝다고 착각한다.
- 그래서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며, 타인의 악행을 정죄한다.
- 그렇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고 안심한다.
이는 사람의 직관적인 반응이다.
- 에베레스트 산 높이까지 선행을 한 사람을 악행을 하여 바다 끝까지 추락한 사람과 어떻게 같겠는가.
- 평생 가난하게 살며 이웃을 돕고 성실하게 산 사람과 탐욕에 절어서 남의 것을 빼앗기만 한 사람을 어떻게 비교하겠는가.
선인을 보면 감탄하고, 악인을 보면 탄식하는 것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이는 사람의 전형적인 착각이다.
- 에베레스트 산(9000m)이 바다 끝(-9000m)보다 천국(∞)에 더 가깝다는 착각 말이다.
- 과연 ∞ - 9000 < ∞ - (-9000) 일까?
아니다.
- 에베레스트 산과 바다 끝에서 천국까지의 거리는 똑같이 무한대이다.
- 천국과 에베레스트 산의 거리: ∞ - 9000m = ∞
- 천국과 바다 끝의 거리: ∞ - (-9000m) = ∞
- ∞ - 9000 = ∞ - (-9000)
이런 착각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 천국을 무한대가 아니라 엄청나게 크지만 유한한 수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천국의 높이를 만 미터라고 하자.
- 이는 엄청나게 높지만 유한한 높이이다.
- 그러면 에베레스트 산이 바다 끝보다 천국에 더 가깝다.
- 천국과 에베레스트 산의 거리: 10000m - 9000m = 1000m
- 천국과 바다 끝의 거리: 10000m - (-9000m) = 19000m
- 무려 19배 차이가 난다.
이렇게 천국이 유한한 높이일 때, 에베레스트 산과 바다 끝은 확연히 달라진다.
- 에베레스트 산과 바다 끝의 차이가 확실해진다.
- 그래서 에베레스트 산에 있는 사람은 자랑할 것이 생기고,
- 구원에 더 가깝다는 확신과 안도감을 얻는다.
그런데 천국의 높이를 무한대가 아니라 유한한 수라고 착각하는 것은
- 하나님을 절대 유일의 창조주가 아니라,
- 최고로 뛰어나지만 유한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이며,
- 이는 곧 하나님의 존재를 격하시키고 부정하는 태도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높이를 만, 억, 조, 경, 해까지 격상시킨다고 해도,
- 그러한 태도로 아무리 하나님을 찬양하며 숭배한다고 할지라도,
- 하나님을 유한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부정하고 깎아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은 에베레스트 산에 있다고 자랑하며,
- 바다 끝에 있는 사람과 다르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 그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높여서 조, 경, 해까지 격상시키며 하나님을 찬양 숭배하더라도,
-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 점이 본문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 무한대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 이것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무한대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 단순히 하나님은 너무 크고 높은 분이라서,
- 웬만한 노력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 이를 반대로 말하면, 웬만한 노력으로는 안 되지만,
- 특별한 노력으로는 하나님께 이를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 이르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높이를 조금은 높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 특별한 노력으로도, 죽음으로도 하나님께 이를 가능성이 전무한 것은 물론이고,
- 자기 높이를 조금이라도 높일 가능성조차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 억, 조, 경, 해에 억, 조, 경, 해를 더하고 곱해도 무한대에서 보기에는 땅과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사람은 유한한 수이다.
- 물론 사람의 관점에서 에베레스트 산처럼 높고 선한 사람이 있고,
- 바다 끝처럼 낮고 악한 사람이 있다.
- 그리고 대부분은 땅처럼 그리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보다 높고 선한 사람을 보고 감탄하며 칭송하고,
- 그에 비해 낮고 악한 자신을 자책하고 부끄러워한다.
- 동시에 자신보다 낮고 악한 사람을 보고 비난하며 정죄하고,
- 그에 비해 높고 선한 자신을 자랑하며 안도한다.
그러나 실상은 에베레스트 산처럼 높은 사람도, 바다 끝처럼 낮은 사람도, 땅에 있는 보통 사람도 전부 똑같다.
- 아무도 자신을 자랑하고 안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하나님이 무한대이시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고 안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무한대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을 기록했다.
-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여 하나님의 무한대임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부정하는 죄를 지으면서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 죄를 자각하도록 말이다.
- 자신의 지혜와 선함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음과 악함과 같다는 것을 알도록 말이다.
[고전 1:19]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고전 1:20]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지만, 단순히 지혜롭고 선한 사람을 멸하고 폐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다.
- 수단이다.
- 바울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무한대임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무한대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 에베레스트 산과 바다 끝이 완전히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무한대에서 볼 때만 에베레스트 산과 바다 끝이 같아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바울은 에베레스트 산과 같이 지혜로운 사람을 바다 끝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대 증명 방법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에베레스트 산과 바다 끝이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 그것은 바로 바다 끝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을 에베레스트 산으로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올라가신 분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지혜, 총명, 선함, 능력과 반대되는 ‘거리낌’이고 ‘어리석음’이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 본문은 에베레스트 산을 지혜, 바다 끝을 어리석음으로 표현했다.
그중에 지혜의 대표가 현자, 학자, 변론가이다.
[고전 1:20]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 그래서 하나님은 지혜를 어리석음으로 추락시키셨다.
반대로 어리석음의 대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 특히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
- 즉, 사람의 관점에서 가장 낮고, 악하며, 어리석고, 추한 존재이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높이셨다.
- 그리스도의 높이는 바다 끝에서, 땅을 지나, 에베레스트 산을 넘어 천국까지 올라간다.
-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여주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고전 1: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 본문의 논리 전개에서 그리스도는 수단이다.
- 유한한 관점에서 높은 에베레스트 산과 낮은 바다 끝이 무한대의 관점에서 얼마나 무의미한지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 사람의 관점에서 지혜와 총명 그리고 거리낌과 어리석음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얼마나 무가치한지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무한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왜 하나님이 무한대라는 것을 증명하냐?
- 고린도 교회 안에 하나님을 엄청나게 크지만 유한한 수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하나님을 단지 큰 수로 찬양하고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자신을 에베레스트 산처럼 지혜롭다며 자랑했다.
- 동시에 다른 사람을 어리석다고 정죄했다.
특히 자신이 받은 침례만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이 받은 침례를 부정했다.
- 그와 함께 서로 자신에게 침례를 준 지도자만을 옳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교회는 분열했다.
그래서 바울은 연합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 왜냐하면 분열은 결국 하나님의 무한대임을 부정하는 착각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바울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중요한 것이고,
- 교회의 연합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 그 자체, 연합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무한대임에 초점을 둔 것이다.
결론 - 하나님을 무한대로 믿는 사람의 반응
그렇다면 하나님을 무한대로 믿었던 바울은 어땠을까?
- 먼저 땅에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 바울이야말로 누구보다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다.
- 가장 지혜롭고, 가장 의로우며, 가장 선하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 바다 끝에 있다고 생각했다.
-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이다.
[딤전 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 바울은 땅을 기준으로 자신의 위치를 측정하지 않았다.
- 또한 엄청나게 높지만 유한한 높이를 기준으로 자신을 측정하지 않았다.
- 그랬다면 자신의 선행과 지혜를 자랑했을 것이다.
- 자신을 ‘의인의 우두머리’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무한대에 계신 하나님을 기준으로 자신을 측정했다.
- 그래서 자신을 무한대 아래에 있는 존재,
- 죄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죄인으로 인식했다.
- 그랬기 때문에 평생 목숨 걸고 예수님 전하다가 예수님 때문에 죽었지만,
-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하며 회개할 수 있었다.
바로 이 회개 때문에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
- 많은 사람이 오해하길, 회개 자체에 엄청난 효력이 있어서,
- 구원을 이뤄주는 마법의 주문으로 생각한다.
- 단호하게 말하지만, 절대로 아니다.
- 회개 행위 역시 아무 가치가 없다.
- 복음에 종속된 회개만 가치가 있다.
진정한 가치는 회개 이면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있다.
-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며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한대로 믿는 것이고,
-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 때문에 바울은 구원을 받은 것이다.
바울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맹인거지 바디매오, 십자가 우편에 달린 죄인 등 자기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무한대임을 믿은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
-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죄인임을 인정한 행위 자체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 그 이면에 있는 올바른 믿음 때문이다.
회개는 올바른 믿음을 드러내 보여주는 수단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대단한 분, 최고의 존재, 상상할 수 없이 높으신 분으로 믿는 사람은 많다.
- 왜냐하면 그 믿음이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높이가 억, 조, 경, 해일지라도, 그래서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할지라도,
- 에베레스트 산 위에 있는 자기 위치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 자기가 평생 쌓아온 인생의 업적은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대로 믿는 사람은 적다.
- 왜냐하면 그 믿음이 자신의 위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바다 끝까지 추락시키기 때문이다.
- 평생 쌓아온 인생 전체를 죄인 중에 괴수며 오물 중에 절대 오물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 죄가 많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치를 가진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는가?
- 아니면 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절대 오물로 생각하는가?
자신을 절대 오물이라 믿는 사람만이 오직 하나님을 무한대이며 절대 가치로 믿는 사람이다.
- 그렇게 믿는 사람만 하나님께 구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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