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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07) 4:1~13 세상의 쓰레기, 만물의 찌꺼기가 되어라!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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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울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정하길 원했다.

[고전 4:1]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언뜻 듣기에 대수롭지 않게 들리지만, 바울의 이 말은 굉장히 쓸쓸한 말이다. 

- 바울의 말을 뒤집으면, 당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게다가 바울뿐만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부정했다.

- 다른 교회도 아니고, 목숨 걸고 개척한 고린도 교회에게 배신당한 바울의 마음은 쓸쓸함을 넘어 허망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전서는 전반적으로 바울의 쓸쓸함, 허망함, 처량함이라는 정서가 깔려있다.

 

본문이 더욱 처량한 이유는 자신에게서 돌아선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이 또다시 손 내밀기 때문이다.

- 한때는 바울을 부모처럼 따랐지만, 지금은 등을 돌린 고린도 교회,

- 교회 내부에서 바울을 부정한 것도 모자라서, 세상 법정에까지 고소한 고린도 교회에게

- 처량함을 감수하고 비굴하게 또다시 돌아오라고 손 내밀고 있다.

- 바울의 어투는 당당하고 담대하지만, 이 글을 쓸 때의 심정은 참담했다.

[고전 4:3]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죄를 엄격하게 규정하고 지적한다.

-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죄에 방종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 그러나 고린도 교회가 죄를 깨닫고 돌아오면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한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다.

- 아무리 고린도 교회가 바울조차 부정하는 죄에 빠졌어도 말이다.

- 바울은 사랑을 위해 처량함과 비굴함을 능히 감수한다.

이것이 바울이 본문을 기록한 이유이다.

 

고린도 교회의 죄 - 나아지려는 욕망, 지혜 추구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죄가 무엇인가? 

- 무엇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부정하도록 했는가?

결론부터 말해서, ‘나아지려는 욕망’이다.

- 더 특별한 사람이 되고,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 했기 때문이다.

- 강하고, 풍요롭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정죄한다.

- 정죄 대상은 풍요, 지혜, 강함, 영광에 대한 욕망이다.

- 이 욕망은 세상의 가치 기준 전체를 포괄한다.

- 더 나은 세상의 가치를 얻으려 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부정했다.

[고전 4: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나 된 듯이 행세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노릇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으나,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의문을 품는다.

- 나아지려는 욕망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 고린도 교회의 죄는 단순히 나아지려는 욕망 때문이 아니라, 

-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앙에서도 나아짐과 성숙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육체적, 세속적 나아짐이 문제이지, 영적 나아짐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 나아짐은 무엇인가?

- 신앙의 성숙은 무엇인가?

- 논쟁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 영적 나아짐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세분화해서, 좋은 나아짐과 나쁜 나아짐을 구분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도 당연히 영적 나아짐을 추구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기 원했고, 더 잘 전할 수 있기를 원했다.

- 이렇게만 말하면, 좋은 나아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무엇을 했냐?

- 결과적으로, 바울보다 아볼로를 선호하게 되었다.

- 왜냐하면 아볼로가 더 친숙한 방식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리스 철학을 기반으로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지혜’라는 표현이다.

- 지혜는 그리스 철학에서 절대 선을 상징한다.

- 지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선을 설명했다.

여기까지도 아무 문제 없다.

- 낯설고 어려운 개념을 친숙하고 쉬운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은 일반적인 방식이다.

- 이런 방식으로 가르친 아볼로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르침을 들은 고린도 교회에 있다.

- 고린도 교회는 친숙한 지혜를 통해 낯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했다.

- 그로 인해 이전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

- 하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안에 그리스 철학의 지혜 개념에 침투했다.

쉽게 말해서, 아볼로의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 선인데,

- 절대 선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의 지혜 개념을 차용했던 것이다.

-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 지혜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본질과 수단을 혼동했다.

- 지혜는 절대 선이며 최고의 가치인데,

-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혜를 주신다고 이해했다.

- 즉, 예수 그리스도가 수단이 되어 본질인 지혜를 제공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이 때문에 나타난 결정적인 문제가 바로 ‘지혜 추구’이다.

- 이전에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잠깐 쓰인 수단이었다.

-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추구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 그러나 이제는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만큼 혹은 그보다 더 가치 있는 본질이 되었다.

- 고린도 교회는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하게 여겼고,

- 그 결과 낯선 예수 그리스도보다 친숙한 지혜를 더욱 추구하게 되었다.

- 그래서 지혜 추구가 본질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 추구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지혜가 필요했다.

- 그런데 지혜를 알기 위해서 그것의 바탕이 되는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이러한 왜곡된 인식이 자리 잡았다.

- 신앙의 성숙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지혜를 알아야 하는데,

- 지혜는 그리스 철학을 통해 배워야 했다.

- 따라서 지혜롭기 위해서는 그리스 철학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며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리스 철학인 인정한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 세상이 인정하는 지위와 풍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 그것이 그리스 철학에서 지혜를 증명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풍요, 능력, 영광, 지혜를 갖게 된 것이다.

 

처음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처음 복음을 듣고 진정한 진리, 참된 지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다.

그래서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원했다.

- 신앙이 성숙하고 나아지길 원했다.

- 그러던 중 아볼로를 통해 지혜를 배웠다.

-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 철학의 지혜와 같은 절대 선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해가 깊어졌다.

-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 없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와 지혜를 혼동하게 되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 철학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왜곡된 인식이 생겼다.

- 본질과 수단이 전복되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 철학이 인정하는 지혜를 추구했다.

- 그것을 위해 세상이 인정하는 지위, 풍요, 능력을 가치 있게 여겼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지혜 추구의 결과 - 바울 배척

이것의 반작용으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배척한다.

- 과정은 단순하다.

- 고린도 교회는 세상이 인정하는 지위, 풍요, 능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 그것이 지혜로운 것이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울은 지위, 풍요, 능력이 없다.

- 세상에서 보잘것없으며, 여전히 세상에서 구경거리이다.

- 또한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는다. 풍요롭지 않다.

-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 지위가 없다.

- 자기 손으로 고된 노동을 할 만큼 능력이 없다.

- 당시에 노동은 능력 없는 하층민이 하는 것이었다.

- 바울은 세상의 쓰레기였고, 만물의 찌꺼기였다.

[고전 4:9]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고전 4:11~12] 우리는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12)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

[고전 4:13] ・・・・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아볼로가 알려준 그리스 철학의 지혜가 없다.

- 그것은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 신앙의 미성숙을 의미한다.

[고전 2: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바울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

-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는 미숙한 바울의 가르침이 도움을 주었지만,

- 복음을 알고 성숙하여 지혜롭게 된 이후에는 바울의 미숙한 가르침은 필요 없다는 논리이다.

- 이제는 성숙하고 지혜로운 아볼로의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지 않았다.

- 그래서 교회 법정에서, 세상 법정에서 바울을 정죄하고 심판했다.

[고전 4:1]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전 4:3]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어색하지만, 고린도 교회에게는 얼마나 합당한 것이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 그래야 바울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1~5절: 아무것도 심판하지 말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부정했다.

-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지 않았다.

- 바울을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 그래서 하나님께 불의한 자로 보았다.

[고전 4:1]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판단한 근거는 무엇인가?

- 바울의 가르침에 지혜가 없었기 때문이다.

- 여기서 지혜는 진정한 지혜,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 당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그리스 철학의 지혜, 즉 세상의 지혜이다.

[고전 2: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교회 안에서도 심판하고, 교회 밖 세상 법정에까지 고소했다.

[고전 4:3]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 어떻게 교회가 자기 존재의 기원이 되는 바울을 고소할 수 있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을 떠올리게 한다.

- 유대인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도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신성모독으로 정죄당하셨고,

- 공동체 밖의 로마 법정에서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정죄당하셨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냐?

- 예수님이 자신을 왕,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 동시에 자신 외의 모든 것, 예를 들어 율법과 성전을 자기 존재 가치에 종속되는 것, 

- 그래서 개별적, 독립적으로는 아무 가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율법과 성전을 최고의 가치로 삼던 바리새인은 분노한 것이다.

 

바울도 똑같다.

- 예수 그리스도만 전했기 때문이다.

- 동시에 당시 최고의 가치를 갖던 지혜를 가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지혜를 중요하게 여긴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반발한 것이다.

[고전 2: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고전 2: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도 똑같이 말한다.

- 바울이 유일하게 중시한 것은 ‘신실성’이다.

- 신실성은 바울이 예수님께만 집중할 것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아무 가치 없다는 뜻이다.

- 이 신실성을 근거로 바울은 자신이 합당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주장했다.

[고전 4:2]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도 똑같이 이 신실성을 근거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 신실성만 가지고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신실성 외에 지혜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것이 바울을 심판한 이유이다.

이는 마치 구원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제, 봉사, 전도의 성과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 의도하지 않게 예수님의 절대 가치를 부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심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고린도 교회의 주장이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바르게 믿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지혜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주장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 게다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심판하는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 없음이 아니라 지혜 없음이라는 점도 그렇다.

- 이런 이유로 바울은 당당할 수 있었다.

- 양심에 거리낌을 전혀 갖지 않았다.

[고전 4:3~4]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바울이 정말 어떤 것에도 양심에 거리낌이 전혀 없었냐?

- 그것은 아니다.

- 바울은 스스로 정말 예수님께 신실한지 의심했다.

- 겉으로는 예수님만이 최고의 가치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아무 가치 없다고 말하지만,

- 실제 삶에서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양심에 거리낌을 느꼈다.

- 그래서 죽기 얼마 전에도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다.

[딤전 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쳤던 말,

-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최고 가치이고, 지혜는 아무 가치 없다는 가르침에는 어떤 오류도 없다.

- 이 점이 바울을 당당하게 했다.

 

물론 바울은 알았다.

- 자신이 완전무결하지 않으며, 여전히 의로움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이런 일’, 즉 바른 가르침을 했다는 이유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전 4:4]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가르침 이면에 있는 자기 마음 속의 생각까지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그래서 사람은 자기 마음 속 생각까지 절대로 알 수 없고,

-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심판하지 않은 것이고, 혹은 심판할 자격이 없는 것이고,

- 오직 하나님만이 심판하신다고 말한다.

[고전 4:3~4] ・・・・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알았다.

- 고린도 교회 사람들의 마음 속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혜를 숭배하고 있다는 것을.

- 그 지혜를 기준으로 바울과 자신을 심판하고 있다는 것을.

그 결과 고린도 교회는 이렇게 되었다.

- 지혜가 없는 바울은 불의하고, 지혜를 가진 자신은 의롭다고 판단했다.

- 그래서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바울을 정죄할 수 있었다.

- 그 정죄 이면에는 자기가 의롭다는 확신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아무것도 심판하지 말라고 말한다.

- 다르게 말하면,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지혜를 근거로 자신과 바울을 심판하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고전 4:5]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6~9절: 고린도 교회 정죄 1 - 여러분은 왕이나 된 듯 행세한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는 지혜를 근거로 자신을 의롭다고 판단했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상태는 이렇게 되었다.

- 자신을 특별하게 지혜롭다고 생각했고,

- 가지고 있는 것, 특히 지혜를 자랑했다.

[고전 4:7] 누가 그대를 별다르게 보아줍니까?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받아서 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또한 자신을 부자 그리고 왕인 것처럼 행세했다.

- 여기서 부자와 왕은 지혜의 풍성함과 강력함을 상징한다.

- 고린도 교회가 자기 지혜에 도취하여 살았다. 

[고전 4: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나 된 듯이 행세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노릇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 자기가 가진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왜 그렇게 나쁜 것인가?

- 없는 것을 자랑했다면, 허풍이고 거짓이라 나쁘지만,

- 실제로 가진 것을 자랑한 것인데, 그렇게 정죄당할 것인가?

단순히 자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 자랑 이면에 있는 사고 방식이 문제이다.

- 자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어떤 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 그런데 어떤 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예수님 외에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 그것은 예수님의 절대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 따라서 자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부정하는 태도이다.

그래서 바울이 신랄하게 정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예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고, 나머지 모든 가치를 부정하면,

- 그래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 사형수,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다.

[고전 4:9]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가?

- 예수님을 절대 가치로 믿고, 예수님만 가치 있게 여기며, 예수님만 자랑하기 때문이다.

[고전 1: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머지 모든 것에 아무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러니 돈이 없는 거지가 되고,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며, 성과가 없는 실패자가 된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으셨던 것처럼 말이다.

- 옷 한 벌 갖지 못한 채 벌거벗겨져 십자가에 죽으셨고,

- 마지막 남은 제자들조차 모두 잃고 아무런 성과 없이 죽으셨다.

 

10~13절: 고린도 교회 정죄 2 -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달랐다.

- 지혜 있고, 강하며, 영광을 누렸다.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으나,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하다.

- 그들이 지혜, 능력, 영광을 가치 있게 여겼고,

- 그것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최선을 다해 살며 성과를 얻은 것이 왜 잘못이냐고 물을 것이다.

- 그러나 지혜, 능력, 영광에 가치를 두며 성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삶 이면에는 예수님의 절대 가치를 부정한 태도가 있다.

- 예수님 외에도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

즉,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을 부정했다.

 

반면에 바울은 어리석었고, 약했으며, 천대를 받았다.

- 이렇게 된 이유 역시 명확하다.

- 그들이 지혜, 능력, 영광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고,

- 그것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게으르게 아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 맞다. 바울은 그것을 얻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

- 바울은 그것을 얻는 데 게을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만 부지런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전하는 데만 최선을 다했다.

-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 능력이 없으니,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

- 지혜가 없으니, 머리로 일하지 않고 손으로 고된 노동을 한다.

- 영광이 없으니, 욕을 먹고 박해받으며 비방받는다.

- 세상의 쓰레기가 되고, 만물의 찌꺼기가 된다.

[고전 4:11~13] 우리는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12)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13)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겠는가?

- 정말 아무것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정말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다.

대신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가치 있게 여겼다.

- 그래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만 알고자 했다.

- 그래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만 전했다.

 

결론 -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간단명료하다.

-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절대 가치이고,

- 나머지 모든 것은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 그래서 세상의 쓰레기, 만물의 찌꺼기가 되었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많은 것을 가졌다.

- 그래서 부자가 되었고, 왕처럼 되었다.

성경은 그런 고린도 교회를 정죄한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다른 것과 함께 믿는 믿음을 정죄한다.

-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기준으로 우리를 돌아보자.

- ‘내가 예수님을 믿는가?’라는 질문으로는 우리 믿음을 평가할 수 없다.

-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도 분명히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 정확한 답을 준다.

-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고,

- 그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 만큼 예수님의 절대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 그만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얻었고, 나머지 모든 것을 잃었다.

- 그래서 세상의 쓰레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까지 잃을 수 있을까?

- 가진 것 중에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없는 것은 무엇일까?

-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우리 신앙의 실체이다.

그런 우리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 세상의 쓰레기가 되고, 만물의 찌꺼기가 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