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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12) 7:1~16 이성 관계에서 구분 짓기의 죄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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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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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서 말하지만, 본문은 부부 사이에 성관계를 해야 하는지, 

- 결혼, 재혼, 이혼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분명히 바울은 성관계, 결혼, 재혼, 이혼에 대해 말한다.

- 그러나 바울이 다루는 것은 이성 관계 이면에 있는 고린도 교회의 사고 방식이다.

- 고린도 교회가 잘못된 사고 방식을 가졌고,

- 그 때문에 이성 관계에서도 잘못된 판단을 했다.

특히 잘못된 사고 방식 안에 예수님을 부정하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 고린도 교회는 좋은 의도로 이성 관계에 대한 기준을 만들었다.

- 자신이 만든 기준을 지키면 예수님과 관계가 좋아질 것으로 믿었다.

- 마치 율법처럼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정반대라고 경고한다.

- 좋아 보이는 율법이 실상은 예수님을 부정하고 있고,

- 율법을 지킬수록 예수님과 관계가 나빠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경고하는 것이 본문의 목적이다.

- 이성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본문이 제시하는 이성 관계의 규범에서 한 걸음 물러나야 한다.

- 이성 관계 규범에 몰입하면, 바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본문을 오해한다.

- 본문에서 새로운 율법을 찾으려 한다.

- 본문을 근거로 모든 사람이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고전 7:2] 그러나 음행에 빠질 유혹 때문에, 남자는 저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도 저마다 자기 남편을 두도록 하십시오.

[고전 7:7]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각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있어서,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합니다.

- 또 배우자를 잃은 사람이 재혼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고전 7:8~9]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과 과부들에게 말합니다.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 좋습니다. (9)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 또 배우자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이혼하지 말라고 말한다.

[고전 7:10~11]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11) 만일 헤어졌거든 재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남편과 화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 마지막으로 믿음 없는 배우자와 결혼해도 된다고 말한다.

[고전 7:16] 아내 된 이여, 그대가 혹시나 그대의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압니까? 남편 된 이여, 그대가 혹시나 그대의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압니까?

이런 해석은 최악이다.

- 바울이 가장 경계한 것이고, 바로 이러한 태도 때문에 본문을 기록한 것이다.

- 고린도 교회가 좋은 의도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정하고,

- 그것을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제시했다.

- 하지만 그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졌다.

- 마치 율법주의에 빠진 바리새인처럼 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것을 지적한 바울의 말을 새로운 율법 삼아 또다시 율법주의에 빠지려 한다.

- 바울의 말에서 새로운 율법 거리를 찾는다.

-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질 것이란 착각 속에서 말이다.

-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쓴 글에서 말이다.

 

본문은 새로운 율법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다.

- 율법의 해악을 경고하는 글이다.

- 율법을 핑계로 사랑하지 않는 죄를 정죄하는 글이다.

- 사랑을 위해 율법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본문은 다섯 단락이다.

- 첫째는 1~2절로, 미혼을 대상으로 한다.

- 둘째는 3~7절로, 결혼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 셋째는 8~9절로, 결혼 후 배우자를 잃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 넷째는 10~11절로, 배우자가 있지만 갈등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 다섯째는 12~16절로, 믿지 않는 배우자를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고린도 교회는 각 상황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러나 바울은 그 기준의 문제를 제기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틀린 기준과 옳은 기준을 아는 것에 머물면 안 된다.

- 더 나아가서 틀린 기준 이면에 있는 고린도 교회의 사고 방식과

- 옳은 기준 이면에 있는 바울의 사고 방식까지 들어가야 한다.

- 그래서 본문이 단지 이성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넘어서 신앙과 삶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른 본문 해석이다.

 

1~2절: ‘결혼하지 말아라.’에 대한 반박

고린도 교회는 결혼이 부정하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 특히 모든 성관계를 전부 나쁘다고 판단했다.

- 하물며 결혼한 관계 안에서도 말이다.

- 결혼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말을 인용하며 본문을 시작한다.

[고전 7:1] 여러분이 적어 보낸 문제를 두고 말하겠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 이런 기준을 가졌을까?

- 지난 본문과 같이 의와 불의를 구분 짓는 이원론 때문이다.

- 몸과 물질 세계는 부정하며 가치 없고, 영과 정신 세계만을 거룩하고 가치 있다고 믿었다.

- 그래서 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결혼과 성관계를 금하는 금욕주의가 퍼졌다.

게다가 동시에 금욕주의로 생기는 욕구 불만은 매춘으로 해결했다.

- 매춘으로 몸에 죄를 짓는 것은 상관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이 역시 몸과 영을 구분 짓는 이원론 때문이다.

- 그래서 지난 본문에서 바울은 몸에 죄를 짓는 매춘 역시 죄라고 경고했다.

- 이렇게 정반대로 보이는 금욕주의와 쾌락주의는 모두 이원론의 결과이다.

[고전 6:18]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금욕주의와 쾌락주의를 모두 부정한다.

- 금욕주의에 빠져 결혼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 그러면 ‘음행에 빠질 유혹’ 때문에 매춘을 일삼기 때문이다.

- 동시에 쾌락주의에 빠져 매춘을 일삼는 것도 문제이다.

- 그보다 결혼해서 배우자와 성관계를 갖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 그러면 ‘음행에 빠질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신앙을 위해 금욕을 하다가 음행에 빠졌다.

- 그렇게라도 금욕하는 것이 더 거룩한 삶이라고 판단했다.

- 여기에는 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결혼과 성관계는 무조건 나쁘다는 전제가 있다.

하지만 바울은 결혼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다.

- 금욕하다가 음행을 범하는 것보다 결혼하여 욕망을 충족하고 음행하지 않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사고 방식 차이

그렇다면 이러한 바울의 판단 이면에는 어떤 전제가 있는가?

- 먼저 고린도 교회부터 보자.

- 고린도 교회는 모든 성행위를 나쁘다고 판단했다.

- 그래서 배우자와 갖는 성행위와 매춘으로 갖는 성행위를 구분하지 않았다.

- 그러니 비록 매춘을 통해서라도 성행위 횟수를 줄이는 것이 낫다고 믿었다.

- 그래서 결혼하지 않고 매춘한 것이다.

- 그것이 신앙을 위해 더 좋기 때문이다.

이렇게 판단한 전제에는 이원론이 있다.

- 몸과 마음을 구분하여, 몸은 전부 악하고 마음은 전부 선하다고 봤다.

- 그래서 몸으로 하는 성행위는 전부 나쁘고, 절대선인 지혜를 담는 마음만이 선하다고 판단했다.

- 그렇기 때문에 몸으로 하는 성행위는 대상이 배우자건 매춘부건 전부 나쁘다고 믿었다.

 

하지만 바울은 몸과 마음을 구분하지 않았다.

- 지난 본문에서 몸 역시 거룩한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했다.

- 그래서 몸의 영역에서 일어난다고 전부 나쁜 것이 아니라,

- 행위의 동기에 따라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매춘은 사람을 성욕의 도구 삼는 나쁜 동기이기 때문에 나쁘고,

-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인 부부 간의 성관계는 좋은 동기이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한 기준은 사랑이다.

-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다.

- 그래서 사랑하기 위한 성관계는 좋은 것이고,

- 사랑하지 않는 성관계인 매춘은 나쁜 것이다.

- 이를 확장하면, 부부 간의 성관계도 전부 좋은 것은 아니다.

- 배우자를 성욕의 도구 삼으면 나쁘다.

- 오직 사랑의 표현이 될 때만 좋다.

 

정리하면, 바울이 비판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음행, 매춘, 성관계가 아니다.

- 그 이면에 있는 판단 기준이다.

- 몸과 마음을 구분 짓는 이원론이다.

왜 이원론이 나쁜가?

- 구분 기준을 소유한 사람에게 권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몸과 마음을 구분하여 몸을 낮추고 마음을 높인 기준을 세운 사람은 특권층이다.

- 그들은 몸으로 노동하지 않고 마음에 지식을 쌓았다.

- 그들에게 마음이 몸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졌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에게 노동을 착취했다.

- 그들의 노동을 통해 얻은 소출을 먹으며 지식을 쌓고 지혜를 찾으며 살았다.

- 그러면서 지혜만이 숭고한 가치를 갖고, 노동은 하찮은 것으로 치부했다.

- 그런 구분을 합리화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나누고 마음을 높였다.

- 동시에 노동자가 노동을 착취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특권층에 복종하도록 몸을 낮췄다.

이것이 이원론의 본질이다.

 

선악과가 상징하는 이원론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이원론을 부정한다.

-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의 시작이 ‘선과 악의 구분 기준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다.

- 그것을 선악과 따먹는 사건으로 형상화했다.

[창 2:16~17]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이 왜 문제인가?

-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 첫째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을 특정한 사람이 독점하면, 권력과 폭력이 생긴다.

- 구분 기준을 소유한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준을 바꾼다.

- 그것을 통해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상대방의 권력을 약화한다.

- 그 결과 계층이 구분되고, 합법적으로 상층은 하층을 지배하고 폭력적으로 착취한다.

- 그렇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위험하다.

둘째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은 사람을 배제한다.

- 사람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하지 않고, 구분 기준에 맞게 억압한다.

- 모든 사람이 기준에 부합하려고 노력하게 하여, 자기다움을 잃도록 한다.

- 그것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의 폐해이다.

 

그렇다고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 여기에서도 동기가 중요하다.

- 마치 율법의 존재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 어떤 동기로 율법을 지키는지가 중요한 것과 같다.

-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셨던 예수님은 의로웠고,

- 자기 유익을 위해 율법을 지켰던 바리새인은 불의했다.

아담도 마찬가지이다.

-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동기는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였다.

[창 3: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이 역시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 하나님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희생한다는 뜻과 하나님이 되어 자기 유익을 위해 세상을 지배한다는 뜻이 있다.

 

실제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전자이다.

-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이 확증되었다.

- 그래서 하나님의 목표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 하나님과 인류가 함께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 그것이 종말에 성취될 창조의 완성이다.

그러나 아담의 동기는 후자였다.

- 하나님처럼 되어서 자기 유익을 위해 세상을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해서였다.

- 그 동기가 하나님을 통해 드러난다.

- 하나님이 선악과 먹은 것을 정죄하시자 아담은 자기 유익을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버린다.

이렇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폭력과 착취를 일으킨다.

 

성관계를 금한 고린도 교회의 동기

이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정죄한 것이다.

- 결혼과 성관계가 좋은가 나쁜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성관계를 금기시하는 고린도 교회의 기준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 마치 아담이 선과 악을 아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 바울도 독신의 은사를 받아 평생 성관계를 금하며 살았다.

문제는 구분하려는 동기이다.

- 바울은 사랑을 위해 성관계를 금했다.

- 하나님과 이웃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려고 독신을 유지했다.

- 결혼하면 어쩔 수 없이 세상 일에 마음이 나뉘기 때문이다.

[고전 7:32~34] ・・・・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33)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쓰게 되므로, (34) 마음이 나뉘어 있습니다. ・・・・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자기 유익을 위해 성관계를 금했다.

- 성관계를 금한 자신은 거룩하다는 명예를 얻어서 그로 인한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착취하려 했다.

그러한 착취 행위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음행이다.

- 그들은 사랑하는 배우자와 성관계를 금한 결과로 매춘부와 성관계를 맺는다.

- 사랑을 포기하고 착취를 선택한 결과이다.

- 그래서 착취하는 성관계를 맺는다.

- 이는 고린도 교회의 동기가 처음부터 지배와 착취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고전 7:2] 그러나 음행에 빠질 유혹 때문에, 남자는 저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도 저마다 자기 남편을 두도록 하십시오.

 

3~7절: ‘부부 간에 성관계를 맺지 말아라.’에 대한 반박

고린도 교회는 결혼 자체를 금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했더라도 부부 간에 성관계를 금했다.

- 그것을 거룩하고 의로운 것으로 판단했다.

- 특히 기도와 같은 영적 행위를 위해 장기간 부부가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 아마도 이들은 성관계가 영적인 능력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한 것 같다.

[고전 7:5] 서로 물리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얼마 동안 떨어져 있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다시 합하십시오. 여러분이 절제하는 힘이 없는 틈을 타서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관계가 사람의 신앙과 영혼에 도움을 줄까, 방해할까?

- 많은 사람이 성관계가 영혼에 방해된다고 생각한다.

- 맑은 정신을 갖기 위해 성적 행위를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금욕을 하려 한다.

- 하지만 왜 좋은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물론 바울은 금욕했다.

- 평생 독신으로 성관계를 멀리했다.

- 모든 열정을 오직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쏟아부었다.

- 바울 역시 그것이 좋다고까지 말한다.

-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금욕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 이는 고린도 교회의 주장과 일치한다.

[고전 7:7]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각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있어서,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금욕만이 옳다는 생각을 철저하게 부정한다.

- 자신과 같이 평생 독신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한다.

- 독신을 은사라고 말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 첫째로, 원한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둘째로, 독신의 은사 말고 다른 좋은 은사도 많다는 뜻이다.

- 그러니 성욕에 끌려다니며 사랑에 소홀한 것보다 성욕에서 벗어나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데,

- 성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결혼하고 배우자와 성욕을 충족하더라도 자기만의 은사로 사랑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사랑을 기준으로 판단했다.

- 성욕 없는 독신이 무조건 옳고, 결혼해서 성욕을 채우는 것은 무조건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 독신으로 사는 것이 사랑 때문이라면 좋고,

- 결혼하더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살면 그것도 좋다.

-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유익 때문에 독신으로 사는 것은 나쁘고,

- 결혼했다면 자기 유익 때문에 금욕하는 것 역시 나쁘다.

- 오히려 사랑으로 배우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서 바울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성관계를 가지라고 권면한다.

-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의무를 다해야 하는데,

- 그 의무는 서로의 성욕을 채워주는 것이다.

- 그래서 자기 몸을 배우자에게 제공하라고 말한다.

[고전 7:3~4]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십시오. (4) 아내가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이 주장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도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주장합니다.

이는 단지 자기 몸을 배우자 성욕의 도구 삼으라는 뜻이 아니다.

- 그만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 금욕을 통해 자기 유익을 얻을 기회를 포기하고 사랑으로 성관계를 맺어서 배우자를 기쁘게 하라는 뜻이다.

-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 자기 유익을 위해 배우자의 기쁨을 포기하고 금욕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욕하는 사람이 음행까지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 자기 유익을 위해 금욕하는 사람은 자기 유익을 위해 음행도 저지른다.

- 금욕으로 인한 욕구 불만을 음행으로 해소했다.

- 그러면서 음행의 동기가 금욕이었고 실제로 긴 시간 동안 금욕했기 때문에, 욕구 해소를 위한 순간의 음행은 괜찮다고 합리화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금욕하지 말라고 바울은 말한다.

- 기도를 위해 짧은 시간 동안은 괜찮지만, 기도가 끝나면 속히 다시 합하라고 말이다.

[고전 7:5] 서로 물리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얼마 동안 떨어져 있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다시 합하십시오. 여러분이 절제하는 힘이 없는 틈을 타서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8~9절: ‘다시 결혼하지 말아라.’에 대한 반박

고린도 교회는 결혼 후 배우자를 잃은 사람에게도 같은 원칙을 제시한다.

- 그들 역시 다시 결혼하지 말라고 말한다.

- 그것이 거룩하고 옳다는 것이다.

- 고린도 교회는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원칙의 기준은 몸과 마음을 나누는 이원론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권면도 일관적이다.

- 기준은 사랑이다.

- “결혼하지 않고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충만할 수 있다면, 결혼하지 말아라.

- 그러나 성욕 때문에 매춘이라도 해야 한다면, 차라리 결혼하라.

- 결혼하지 않고 사람을 착취하여 매춘하는 것보다 진정으로 사랑하여 결혼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 아무리 결혼이 부정하더라도, 매춘보다는 낫다.”

[고전 7:8~9]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과 과부들에게 말합니다.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 좋습니다. (9)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우리에게 당연하게 들리는 바울의 말이 고린도 교회에게는 낯설게 들렸다.

- 우리는 결혼을 매춘보다 당연히 좋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매춘이 결혼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바울은 굳이 결혼이 낫다고 한 것이다.

왜 고린도 교회는 매춘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가?

- 추정하건대, 매춘은 몸에 범하는 죄인데,

- 몸은 결국 사라질 것이기에 영향력이 작다.

- 반면에 결혼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연결되는 것이기에 더욱 부정하다고 믿었다.

- 그래서 결혼하지 않고 매춘으로 성욕을 채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기준이 달랐기 때문에 판단도 달랐다.

- 사랑을 기준으로 한 바울은 결혼하라고 했고,

- 이원론을 기준으로 한 고린도 교회는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사랑과 이원론의 차이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과 이원론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 이원론은 사람을 구분 짓는다.

- 그래서 상하로 나눈다.

- 이 때문에 이원론은 언제나 폭력과 착취를 일으킨다.

대표적인 예로, 히틀러는 유대인을 일반 국민과 구분했다.

- 그런 후 일반 국민에게 국가를 위해 유대인은 사라져야 한다고 설득했다.

- 그래서 결국 국민의 동의 하에 유대인은 무참히 학살된다.

- 이것이 이원론의 숨겨진 실체이다.

 

그러나 사랑은 구분을 허문다.

-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한다.

- 그러면서도 동시에 각자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권력이 사라지고,

- 권력이 있어도 착취하지 않는다.

- 상대방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 그러니 상대방의 고통을 줄이고 기쁨을 늘리기 위해 노력한다.

- 이것이 사랑의 힘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하라는 것이다.

- 매춘부의 고통에도 공감하라는 것이다.

- 그러면 절대 매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감하면,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

- 그중에 성관계 없이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바울처럼 독신으로 사는 것이고,

- 성관계가 필요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의 원칙이다.

 

마지막으로, 8절에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의 번역에 논쟁이 있다.

- 미혼 남자인지 결혼 후 배우자를 잃은 남자인지 말이다.

결론적으로, 과부와 대응하는 남자는 홀아비이다.

- 결혼 후 배우자를 잃은 남자이다.

- 미혼 남자는 이미 1~2절에서 다루었다.

-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다.

- 영어 번역본 NIV에서 각주로 이를 언급한다.

[고전 7:8, NIV2011] Now to the unmarried① and the widows I say: It is good for them to stay unmarried, as I do. ▷ ①Or widowers

 

10~11절: ‘이혼하라.’에 대한 반박

추정하건대, 고린도 교회에서 결혼의 부정함을 주장하는 여성이 많았다.

- 그래서 남성보다 여성 중에 이혼하는 사람이 많았다.

- 단순히 배우자와 관계가 나빠서 이혼하는 것이 아니라,

- 거룩함을 얻기 위해 이혼했다.

- 여성의 순결을 강조하는 사회적 압박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가 생겼다.

- 이 역시 몸과 마음을 구분하여 몸을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원론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혼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 특히 다른 권면과 다르게 ‘주님의 명령’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 그만큼 강한 어조이다.

- 사랑의 관점에서 배우자와 이혼하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필요도 없다.

[고전 7:10]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바울은 이혼을 무조건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 새로운 율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 이원론이 아니라 사랑의 관점을 가지라는 것이다.

- 사랑의 관점에서 결혼, 이혼, 재혼, 성관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주변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혼 금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 이혼 가능성을 열어둔다.

- 단지 조건을 제시한다.

- 성욕 때문에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 않거나, 

- 성욕을 주체할 수 없거든 남편과 화해하라고 말이다.

[고전 7:11] -만일 헤어졌거든 재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남편과 화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혼 후에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데, 남편과 화해할 수 없다면?

- 그래서 다른 사람과 재혼할 수밖에 없다면, 

- 그래서 바울의 제안을 따를 수 없다면, 바울은 뭐라고 답할까?

- 아마도 다른 사람과 재혼하라고 말할 것이다.

- 단, 이제는 절대 한눈팔지 말고 배우자를 평생 사랑하라고 권면하면서 말이다.

- 그러면서 다음 구절을 인용할 것이다.

[고전 7:9]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의 말을 새로운 율법으로 인식한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은 새로운 율법을 ‘원한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율법을 부정하는 바울의 말에서 새로운 율법을 발굴한다.

- 너무 원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자신의 힘으로 거룩함을 이뤄내기 위해서이다.

- 율법이 있으면, 자신이 율법을 지킬 수 있고, 

- 그러면 자신의 거룩함을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자신이 거룩함을 수여하는 주체가 되려는 것이고,

- 또 다르게 말하면, 거룩함을 판단하는 왕이 되려는 것이며,

- 선악과를 먹어서 선과 악을 아는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인류가 가진 죄의 본질이다.

 

바울이 정죄하는 것이 이것이다.

- 단지 결혼하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다.

- 왜 결혼하려 하고, 왜 이혼하려 하냐의 문제이다.

- 스스로 왕이 되어 자신이 자신에게 거룩함을 수여하기 위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은 나쁘다.

- 하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정말로 사랑하기 위해서 바울처럼 결혼하지 않는 것은 좋다.

- 또한 하나님과 이웃을 정말로 사랑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은 좋다.

-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 거룩함을 획득하기 위해 결혼하는 것은 나쁘다.

따라서 바울의 말을 새로운 율법 삼으면 안 된다.

- “바울이 결혼하라고 했으니, 거룩함을 위해 결혼해야지.

- 혹은 바울이 결혼하지 말라고 했으니, 거룩함을 위해 결혼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바울의 말에서 이성 관계 문제 이면에 있는 사랑의 권면을 들어야 한다.

- 고린도 교회는 독신으로 사는 바울을 근거로 결혼을 부정하다고 판단했다.

- 그래서 결혼하지 않으면 거룩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 그 결과 결혼하지 않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거룩함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부정했다.

- 하나님 없이도 자신은 거룩할 수 있다고 믿었다.

- 물론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그 거짓된 확신이 있었기에, 매춘을 했던 것이다.

- 매춘해도 자신의 거룩함은 훼손될 수 없다는 자기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방식으로 바울의 말을 들으면 안 된다.

- 바울이 하라는 행위를 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 사고 방식, 가치관, 판단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

- 사랑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12~16절: ‘믿음 없는 배우자와 이혼하라.’에 대한 반박

역시 고린도 교회는 이원론의 관점으로, 바울은 사랑의 관점으로 본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믿음 없는 배우자와 이혼하라고 말한다.

- 믿음 있는 배우자와 이혼을 권하는데,

- 그보다 더 부정한 믿음 없는 배우자와 이혼은 더욱 당연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혼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 믿음 없는 배우자와 결혼이 부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 근거는 자녀이다.

- 믿음 없는 배우자 사이에서 생긴 자녀라도 거룩해질 수 있다면,

- 믿음 없는 배우자도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물론 결혼한다고 믿음 없는 배우자가 바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결혼 생활을 통해 신앙이 전해지면, 믿음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고전 7:14] 믿지 않는 남편은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믿지 않는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자녀도 깨끗하지 못할 것인데, 이제 그들은 거룩합니다.

그렇다면 믿음 없는 배우자에게 신앙이 어떻게 전해질까?

- 당연히 사랑이다.

- 믿음 있는 배우자에게 사랑을 받는데, 그 근원이 하나님이라면,

- 믿음 없는 배우자도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 이는 단지 부부 관계만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믿음 없는 배우자가 사랑을 거부하면?

- 그래서 사랑도 좋지만, 돈과 명예를 요구한다면?

- 돈과 명예 없이 사랑만 주는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구한다면?

어쩔 수 없다. 헤어질 수밖에.

[고전 7:15]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져도 됩니다. 믿는 형제나 자매가 이런 일에 얽매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평화롭게 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유일한 기준은 사랑이다.

- 사랑할 수 있으면 이혼하지 않고,

- 사랑할 수 없으면 이혼하라고 한다.

본문은 다양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 결혼 이전 사람, 결혼 이후 사람, 결혼 후 배우지를 잃은 사람, 결혼 후 이혼하고 싶은 사람, 결혼한 배우자가 믿음 없는 사람을 다룬다.

- 권면도 가지각색이다.

- 결혼하라, 결혼 하지 말아라, 이혼하지 말아라, 이혼하라, 재혼하지 말아라, 재혼해라, 성관계를 맺어라, 맺지 말아라 등이다.

하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 어떤 상황에 있든 사랑하라는 것이다.

-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할 수 없으면, 사랑하기 위해 상황을 바꾸라는 것이다.

- 결혼, 이혼, 재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 오직 사랑하라는 것이 바울의 유일한 권면이다.

 

결론 - 여전히 활개 치는 이원론 율법주의

많은 사람은 율법 지키는 것이 왜 문제냐고 반박한다.

- 성경에 나온 말 잘 듣고 잘 지키는 것이 신앙 생활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기 쉽지 않다.

- 특히 교회 안에 성경을 읽어보려는 마음조차 없는 사람이 수두룩한 현실에서 더욱 그렇다.

- 율법주의라도 성경에 관심을 갖고 신앙에 열정인 사람이 고마울 따름이다.

- 이런 점에 현대 교회를 더욱 율법주의에 빠지도록 한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심각한 문제이다.

- 율법주의는 예수님을 죽인다.

- 바리새인을 통해 이미 확인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냐?

- 이원론은 율법주의의 기반이고,

- 율법주의를 통해 이원론이 교회 안에 들어온다.

- 이원론은 선악과이다.

- 하나님처럼 되어 세상을 착취하려는 욕망이다.

- 그러니 폭력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폭력을 교회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제지당한다.

- 자기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 아무도 그냥 보고만 있지 않는다.

- 그래서 포장지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이다.

먼저 자신에게 유리한 율법을 성경에서 찾는다.

- 자신이 지키기 쉽거나, 자신은 범할 가능성이 없는 규범을 정한다.

- 이것에 가치를 부여하여 이것을 지켜야 거룩해질 수 있다고 설득한다.

- 이때 성경 일부를 인용하여 권위를 부여한다.

이를 통해 자신은 율법을 언제나 지키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자랑한다.

- 이렇게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한다.

이렇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이다.

- 신적 권위를 가진 자신은 언제나 옳고,

- 그렇기에 모두가 자기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도록 모든 사람을 조정한다.

- 헌금과 헌신을 강요하여 돈과 힘을 얻는다.

 

이것이 현재 교회의 현실이다.

- 많은 목사가 하는 짓이다.

- 특히 동성애 문제를 권력 획득 수단으로 이용한다.

동성애가 성경의 관점에서 옳으냐 아니냐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 많은 교회가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동기도 중요하다.

- 동성애 문제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꺼낸다면,

- 그래서 사랑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꺼낸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원론의 관점에서 자신과 그들을 구분 짓고, 

- 그들을 악마화하여 상대적으로 자신의 거룩함을 내세우려는 동기라면, 틀렸다.

- 이는 고린도 교회의 태도와 완전히 일치한다.

 

고린도 교회도 믿지 않는 배우자를 악마화하고, 이혼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 이원론에 따라서 율법주의를 세우고,

- 자신의 거룩함을 자랑했다.

그래서 바울에게 정죄당한다.

- 바울은 이혼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 그들도 사랑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들과 자신을 구분 짓고, 상대적 우월함에 도취하지 말고,

- 그들과 자신의 구분을 허물고, 동등한 관계에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바울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왜 신앙생활 하는가?

- 스스로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거룩함을 쌓아서, 사람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칭찬받으려는가?

- 예수님을 보라.

- 예수님은 안식일 율법을 어기고 사랑으로 환자를 치유하셨다.

- 그 결과 거룩함을 쌓기는커녕, 사람과 하나님께 칭찬받기는커녕, 

- 사람들에 의해 죽임당하고, 하나님께 저주받아 십자가에 걸리셨다.

- 예수님은 칭찬받기 위해 신앙생활 하지 않으셨다.

오직 사랑하셨다.

- 환자와 자신의 구분을 폐하시고,

-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을 폐하시며,

- 죽음과 삶의 구분도 폐하셨다.

- 그리고 모두를 사랑하셨다.

-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사람과 하나님께 버려졌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부활을 주신다.

- 사람을 구분 짓고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 거룩함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 사랑으로 구분을 없애고 자기 거룩함을 포기하는 사람 말이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 이것을 전하기 위해 본문에서 바울은 이성 관계 문제를 다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