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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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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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한마디로, ‘자유를 절제하라는 권고’이다.
- 8장에서 고린도 교회는 자유를 빌미로 우상 제물 고기를 절제 없이 먹었다.
- 그로 인해 믿음이 약한 신도가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서 신앙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약한 신도를 위해 자유를 절제하라고 권고한다.
또한 바울은 9장에서 같은 이유로 고린도 교회의 후원을 거절한다.
- 다르게 말해서, 후원받을 자유를 포기한다.
- 후원을 받을 경우 고린도 교회의 간섭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고,
- 그러면 본문에서처럼 고린도 교회의 신앙을 비판해야 할 때 걸림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한 대가로 후원을 받을 권리와 자유가 있었지만,
- 간섭이나 걸림돌 없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후원 받을 권리와 자유를 포기한다.
이렇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권고를 일관성 있게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한다.
- 복음 전도의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 자기 자유를 절제한다.
- 물론, 이로 인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의해 부정당한다.
- 그러나 복음을 위해 자유를 포기할 때 복음에 참여할 자유가 주어진다고 믿는다.
[고전 9: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고전 9: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고전 9: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론만 요약하면, 바울의 논리가 지극히 당연하게 들린다.
- 복음을 위해 자신을 절제하라는 말을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 굳이 이 당연한 말을 편지까지 써서 전해야 했을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본문을 이렇게만 해석하면 문제가 생긴다.
- 본문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가 서로의 논리를 반박하는 상황이다.
- 그중에서 본문은 바울의 논리만을 담고 있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논리를 쉽게 간과할 수 있다.
- 그로 인해 바울의 논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만큼 고린도 교회의 논리를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하게 된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왜 바울과 논박하는지 살펴보지 않게 된다.
- 고린도 교회가 어리석기 때문으로 투박하게 결론짓기 쉽다.
따라서 바울의 논리를 찾는 것에 머물면 안 된다.
- 본문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논리까지 추론하고 이해해야 한다.
- 고린도 교회가 단순히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 그들은 합리적으로 판단했고 그들의 주장이 그들에게 타당한 논리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 그래야만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결국 바울이 옳고, 고린도 교회는 틀렸다.
- 바울의 논리에 결점이 있거나, 고린도 교회의 논리도 인정할 만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결론만 이해하면, 본문이 가진 풍성한 의미를 전부 잃어버린다.
- 바울은 단순히 결론 하나 전하려고 힘겹게 양피지를 구해서 편지를 쓴 것이 아니다.
게다가 바울의 논리를 정교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고린도 교회의 논리를 이해해야 한다.
- 바울의 논리가 고린도 교회의 논리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자유를 절제하라고 권고하기 위해 바울은 본문을 세 단락으로 나눠서 설명한다.
- 세 단락으로 말한 이유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고린도 교회를 논박하기 위해서이고,
- 이는 이전에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세 가지 방식으로 논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다음의 단계가 필요하다.
- 첫째 단계, 각 단락에서 말하는 바울의 논리를 이해해야 한다.
- 둘째 단계, 바울의 논리를 근거로 고린도 교회의 논리를 유추해야 한다.
- 셋째 단계, 고린도 교회가 왜 그런 논리를 갖게 되었는지 근원적인 가치관까지 추론해야 한다.
- 넷째 단계, 그렇게 추론한 고린도 교회에 비추어 다시 바울의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이렇게 바울의 논리와 바울이 비판하는 고린도 교회의 논리를 정교하게 해석해야
-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 고린도 교회의 문제까지 정교하게 이해할 수 있다.
- 그래야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단지 2000년 전 어리석었던 한 교회의 만행이 아니라,
- 현재 우리도 여전히 빠져있는 문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그래야 바울의 비판과 권고가 단지 2000년 전 어리석었던 교회를 향한 것만이 아니라,
- 지금 바로 우리를 향해 바울이 절박하게 울부짖는 호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고린도 교회까지 이해하고,
- 고린도 교회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고린도 교회를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할 때만
- 바울의 권고가 직접 나를 향한 권고라는 것까지 이해할 수 있다.
- 이럴 때만 성경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역동하게 하신다.
이것이 바른 성경 해석이다.
15~18절: 현재 고린도 교회에서 행한 바울의 자유 절제
9장 1~14절까지 바울은 자신이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지 논증했다.
- 자신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 따라서 노동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고전 9:11~12]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것으로 씨를 뿌렸으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으로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12)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
[고전 9:14]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살아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15절에서 바울은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포기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 얼마나 강하게 말하냐면, 목숨까지 걸고 주장한다.
- 그만큼 바울은 자신이 권리를 포기하고 자유를 절제한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 바울은 자유 절제를 왜 이렇게 중요하게 여겼을까?
[고전 9:15]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행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고 이 말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해설서에서는 자유 절제가 곧 고린도 교회의 후원에 대한 거절이기에,
- 후원을 받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라고 해석한다.
- 15절 중간에 ‘또 나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고 이 말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라며 후원을 거절하는 구절이 이러한 해석을 강화한다.
그런데 과연 바울에게 후원 그 자체가 목숨과 바꿀 만큼 중요했을까?
- 단지 후원받지 않겠다는 결심이 목숨만큼 소중했을까?
바울에게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딱 하나이다.
- 복음뿐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소중한 것은 후원 그 자체가 아니다.
- 후원으로 인해 훼손될 복음이다.
- 풀어 말하면, 바울은 당시 상황에서 고린도 교회의 후원이 복음의 본질을 정면으로 부정한다고 믿었다.
- 물론 후원 때문에 바울이 복음을 부정하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 당연하게도, 후원 때문에 복음을 부정할 우려가 있는 대상은 고린도 교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고린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 후원을 거부했다.
-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의 자랑거리, 즉 후원 받을 권리 포기를 지키려했다.
- 이를 통해 고린도 교회가 후원을 계기로 복음을 부정하는 상황을 막으려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고린도 교회로 향할 수밖에 없다.
고린도 교회의 논리 유추 - 복음은 상품이다.
바울이 후원을 받으면 왜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부정하게 될까?
- 도대체 고린도 교회가 후원을 어떻게 생각했기에 후원 때문에 복음을 부정하게 될까?
결론적으로,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상품’으로 생각했다.
-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듯 복음을 얻었으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가 확장된다.
- 그래서 비싼 상품이 좋고 싼 상품은 나쁘듯 비싼 대가를 지불한 복음은 좋고 싼 대가를 지불한 복음은 나쁘다고 봤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논리 때문에 바울의 복음이 부정되었다.
- 바울은 후원을 거절했다.
- 이는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 바울의 복음은 공짜였다.
- 그런데 공짜는 싼 것이고, 싼 것은 하찮다고 판단했다.
- 따라서 바울의 복음은 하찮고, 하찮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사도라는 것을 의심했고,
-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다.
- 바로 후원을 거절했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고전 9:1]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따라서 이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후원을 오히려 거절한 것이다.
- 그들은 복음을 상품으로 생각했고, 바울에게 복음을 구입하려 했기 때문이다.
- 바울이 후원을 받으면, 결국 고린도 교회의 논리를 지지하는 꼴이 된다.
- 그래서 의도하지 않게 복음을 상품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 바울이 복음 장사꾼으로 전락한다.
물론 바울 자신은 아무리 후원을 받을지라도 복음을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바울은 후원을 받는다고 복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 그래서 실제로 빌립보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기도 했다.
[빌 4:15~16] 빌립보의 교우 여러분, 여러분도 아는 바와 같이, 내가 복음을 전파하던 초기에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로 나에게 협력한 교회는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16)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내가 쓸 것을 몇 번 보내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게 문제가 있었다.
-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후원을 받으면, 복음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인식이 강화된다.
- 그래서 복음을 상품이라고 더욱 믿게 된다.
이는 복음이 은혜라는 성경의 인식을 부정한는 것이고.
- 복음의 본질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후원을 거절했다.
그런데 여기까지의 해석은 대부분의 해설서에서 볼 수 있다.
- 하지만 이렇게만 해석하면 고린도 교회와 우리가 괴리된다.
- 우리 중 누구도 복음을 상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 이러한 해석은 여전히 바울의 권면을 2000년 전 어리석은 교회를 향한 지나간 말씀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 도대체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왜 상품으로 생각했을까?
- 복음을 상품으로 간주한 고린도 교회의 근원적인 가치관까지 추론해야 한다.
- 그럴 때만 바울의 절박한 호소가 이미 지나간 말씀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복음을 상품으로 인식한 고린도 교회의 실태 - 우상 제물 고기
상품은 본질적으로 수단이다.
- 본질을 강화하기 위해 일정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다.
- 대가를 지불하면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상품이 수단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본질은 거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생명은 아무리 큰 대가를 지불해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하지만 옷은 생명을 돋보이게 하고,
-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며,
- 집은 생명을 보호하도록 한다.
- 그래서 의식주를 상품으로 구입한다.
- 본질인 생명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상품으로 여겼다.
- 이는 고린도 교회가 복음을 본질이 아닌 수단으로 여겼다는 것을 뜻한다.
- 복음을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그런 인식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구입’하고자 했고,
- 그것을 위해 바울에게 후원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자 한 것이다.
-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복음을 부정한다고 판단했고,
- 후원을 거절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에게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 ‘지식’과 지식에서 파생된 ‘자유’였다.
- 지식과 자유의 숭배는 헬라 철학이 지배했던 당시 문화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전에 고린도 교회의 지식 숭배와 자유 숭배를 비판했다.
[고전 8:1]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게 복음은 지식과 자유를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 그것을 입증하는 예가 8장의 우상 제물 고기 문제이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에 근거한 자유를 원했다.
- 그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본질이었다.
- 그런데 복음이 우상에 대해 적절한 지식을 제공했다.
- 복음이 ‘하나님 한 분 밖에 신이 없기 때문에,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줬다.
- 이 지식에 근거하여 고린도 교회는 우상 제사 고기를 먹을 ‘자유’를 얻었다.
[고전 8:4]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복음을 믿은 이유였다.
- 복음이 원하는 지식과 자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 복음이라는 수단을 구입한 이유는 지식과 자유라는 본질을 얻기 위해서였다.
- 그래서 복음을 빌미로 우상 제물 고기를 절제 없이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 복음으로 인한 자유를 얻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문제가 생긴다.
- 자유와 복음이 충돌한다.
- 자유 때문에 일부 신도가 복음에서 멀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 그래서 자유와 복음 중 하나를 희생해야하는 상황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유를 제한하라고 권고한다.
-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상 제물 고기를 먹는 행위 역시 문제 없지만,
- 만약 그 행위로 인해 누군가가 복음에서 멀어진다면,
- 그래서 자유가 복음을 훼손한다면.
- 복음을 위해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 즉, 자유가 중요하지만, 언제나 자유보다 복음이 우선한다는 뜻이다.
- 이는 복음을 믿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마땅한 태도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권면을 거부한다.
- 자신의 자유 때문에 일부 신도가 복음에서 멀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 그렇다고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비난한다.
- 바울이 우상 제물 고기를 먹지 말라고 권면한 것은 바울에게 자유가 없기 때문이고,
- 이는 바울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합당하지 않다며 사도라는 것까지 부정한다.
이로써 고린도 교회의 실상이 드러난다.
- 그들은 자유와 복음이 충돌하여 자유 때문에 복음이 훼손될 때조차 자유를 선택했다.
- 그리고 자유 대신 복음을 선택하라고 권고하는 바울까지 비난했다.
- 이는 그들이 복음을 믿지만, 복음보다 자유를 우선시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들이 복음을 믿은 이유는 복음을 본질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라,
- 자유라는 본질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에게 자유가 본질이고 복음은 자유를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 복음을 위해 자유를 제한하라는 바울의 말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복음이 본질이고 자유는 복음을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 자유를 위해 복음을 훼손하려는 고린도 교회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논쟁이 쉽게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상품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상품을 얻은 대가로 바울에게 후원을 제공하려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후원을 제공하려는 저의를 알았기 때문에,
- 목숨을 걸면서까지 후원을 거부했던 것이다.
- 후원을 받는 것은 고린도 교회와 함께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이해해야 목숨 걸고 후원을 거절했단 바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복음을 상품으로 인식한 고린도 교회의 깊은 내면에 들어갔지만, 아직 부족하다.
-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 분명히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을 때 복음을 본질로 전했을 것이다.
- 지식과 자유는 본질이 아니고 복음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도 당연히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고린도 교회는 변질되었을까?
- 어디서부터 미끌어져서 복음과 자유의 관계가 역전되었을까?
- 왜 본질이 복음에서 자유가 되었을까?
이런 일은 지금도 여전히 반복해서 일어난다.
- 이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면, 이와 같은 변질이 또 일어날 수밖에 없다.
- 그러면서도 고린도 교회처럼 자신의 변질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밖에 없다.
고린도 교회가 변질한 이유 - 이성과 경험
먼저 명확하게 짚어야 할 것은 변질한 고린도 교회가 처음에는 복음을 바르게 믿었다는 것이다.
- 바울에게 복음의 본질을 배웠고,
-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우상 소굴인 고린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애초부터 고린도 교회가 바른 복음을 믿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이후에 변질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바른 믿음이 없었다고 가정하면,
- 복음을 상품으로 여기는 문제를 분석할 필요가 없다.
- 원래 믿음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을 상품으로 여긴다.
- 모든 대상을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는 본문에서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 애초부터 믿음이 없는 사람이 왜 복음을 거부하는지도 중요한 논의지만,
- 본문은 이것을 다루지 않는다.
- 논의의 초점은 처음에는 바르게 믿었던 교회가 왜 변질되었는지 탐구하는 것에 있다.
- 복음을 본질 삼아 세워진 교회에서 어떻게 복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결론적으로, 고린도 교회는 복음의 기반을 사람의 이성과 경험에 두었다.
- 자신이 생각하고 경험한 것을 기반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
- 복음을 자신이 생각한 것 중에 가장 옳고,
- 자신이 경험한 것 중에 가장 유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복음을 믿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변질된 원인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비판이 낯설게 들릴 것이다.
-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인데,
- 이성과 경험에 따라 좋다는 판단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냐는 것이다.
-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좋다고 판단하니까 복음을 믿는 것이지,
- 나쁘다고 판단되는 복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 실제로 이러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물론 복음을 이성과 경험에 기반해서도 좋다고 판단할 수 있다.
- 복음을 듣고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다.’고 믿으면,
- 당시 고린도 지역에 들끓는 우상의 위협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 이렇게 복음은 이성과 경험으로도 옳고 유익하다.
하지만 복음은 그 이상이다.
- 이성과 경험 안에서도 옳지만, 밖에서도 옳다.
- 복음에는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좋은 부분도 있지만, 좋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이점이 올바른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을 가르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 누구나 복음을 처음 듣고 믿을 때, 이성과 경험 안에서 복음을 판단한다.
- 평생 삶에서 가장 원했던 것을 복음에서 발견할 때, 복음을 믿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복음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복음을 발견한다.
그 복음은 이성과 경험을 초월한다.
- 이성과 경험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나쁘다고 판단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
-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포한다.
- 그래서 우리는 용서를 통해 회복과 자유를 얻는다.
- 회복과 자유는 우리가 평생 원했던 것이기에 복음을 복된 소식이라 믿고 따르게 된다.
- 이는 이성과 경험에 기반해서 판단해도 복된 소식이다.
그런데 복음을 더 깊이 알면, 회복과 자유가 내가 원했던 것과 살짝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 내가 원했던 것은 상처가 치유되고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고 계획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 그리고 실제로 그런 회복과 자유가 생긴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그 상태에 머물도록 하지 않는다.
- 더 나아가게 한다.
- 부활 이전에 죽음을 통과하신 예수님처럼 복음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 그래서 회복된 자유를 마음껏 발휘하여 오히려 자기를 부정하도록 한다.
-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불의하고 손해 보는 길로 이끈다.
-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부정한 모습으로 모든 것을 잃고 죽는 것처럼 말이다.
- 이는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복된 소식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은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불의와 손해였다.
- 옳음과 유익은 전혀 없었다.
- 얼마나 없었냐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말이다.
-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부인했다.
- 이는 예수님의 모습이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얼마나 나빴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이성과 경험은 복음을 처음 듣고 믿을 때 일부 도움을 주지만,
- 이성과 경험만으로는 복음 안에 머물 수 없다.
- 이성과 경험에만 기반한 사람이 이성과 경험을 초월한 복음을 발견하게 되면,
- 복음이 나쁘다고 판단하고, 결국 복음을 거부하고 떠나게 된다.
-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고린도 교회가 변질된 원인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 고린도 지역 사람들은 바울에게 처음 복음을 듣고 기뻐했다.
- 그들의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복음을 좋다고 판단했다.
- 특히 복음이 주는 지식과 자유의 매력에 빠졌다.
- ‘하나님 한 분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지식과
- 그 지식으로 인해 다른 모든 우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자유는 고린도 사람들이 평생 원했던 것이었다.
- 우상 숭배가 극심했던 고린도 지역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 그랬기 때문에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었고,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다.
- 이렇게 이성과 경험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바로 이성과 경험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변질된다.
- 복음의 매력을 느끼도록 한 지식과 자유가 복음과 충돌하는 상황이 일어난다.
- 복음이 준 자유로 우상 제물 고기를 마음껏 먹은 행위가 복음을 훼손한다.
- 그래서 바울은 자유를 제한하고 복음을 지키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이를 거부한다.
-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나쁜 선택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쁜 선택을 하도록 한 복음은 ‘복된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이라고 판단하고,
- 나쁜 소식을 전한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까지 판단한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는 복음과 바울을 부정하는데 이른다.
- 이는 결국 이성과 경험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는 이성과 경험에 갇혀 있었다.
- 이성과 경험을 벗어나는 세계를 상상하지 못했다.
- 그래서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그래서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복음을 전한 바울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 충돌했고,
- 그 충돌을 해결하고자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도 고린도 교회의 실태를 완전히 해석하지 못한다.
- 이성과 경험은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 즉, 이성과 경험은 사람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이성과 경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고,
-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 사람은 누구도 자기 이성과 경험 밖을 상상하지 못한다.
- 이성과 경험 밖을 상상한다고 하더라도 이성과 경험에 근거하여 상상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으로 고린도 교회를 비난할 수 없다.
- 이성과 경험을 벗어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 사람이 새처럼 날 수 없다고 비난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 고린도 교회를 비롯하여 인류가 이성과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근원적 원인은 무엇일까?
- 이것을 알게 될 때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태를 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복음 - 십자가 죽음 부활에 기반
고린도 교회는 이성과 경험에 기반했기 때문에 복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렇다면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무엇에 기반해야 할까?
당연하게도,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기반할 때만 이성과 경험을 초월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다.
- 그래서 죽음과 부활 중에 하나만 빠져도 온전한 복음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이 때문에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
- 누구나 처음 복음을 믿는 이유는 부활의 회복 때문이다.
- 죽은 자가 살아나는 정도의 완전한 회복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 그 회복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면,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는 소망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복음을 믿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의도하지 않게 부활과 함께 죽음도 받아들인다.
- 물론 처음에는 죽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부활을 위해 중요한 과정 정도로 이해한다.
- 부활 사건을 부각하기 위한 부수적인 사건으로 이해한다.
-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죽음과 친숙해진다.
그런데 복음을 알아갈수록, 부활을 소망할수록 죽음의 역할이 부각된다.
- 예수님과 함께 부활에 동참하려면, 죽음에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 죽음이 부활을 위한 부수적인 사건이 아니라,
- 부활만큼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고후 4:10~11]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복음으로 인해 이성과 경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 처음에는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부활 때문에 복음을 믿는다.
- 그런데 그 복음 안에서 나쁜 소식인 죽음을 발견한다.
- 부활만이 복된 소식인 줄 알았는데,
- 복된 소식 안에서 나쁜 소식인 죽음을 발견하고,
- ‘나쁜’ 소식조차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나쁜 소식과 복된 소식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질 때, 사람은 이성과 경험의 한계에서 벗어난다.
- 아무리 복음을 믿어도 이성과 경험은 부활을 복된 소식, 죽음을 나쁜 소식으로 판단한다.
- 사람이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가진 몸을 입고 있는한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 하지만 동시에 복음은 죽음이라는 나쁜 소식까지 복된 소식이라고 믿도록 한다.
- 그래서 죽음을 두렵고 괴로운 대상으로 느끼면서 동시에 기쁘고 복된 대상으로 믿는다.
- 이를 통해 사람은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인식하는 동시에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게 된다.
이것이 바른 복음이다.
이 복음을 믿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유를 절제할 수 있었다.
- 자유를 제한하고 권리를 포기하는 일은 힘들고 나쁘다.
-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 바울조차도 이성과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힘들어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성과 경험을 초월할 수 있었다.
- 그래서 자유 제한이 반드시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 더 나아가, 부활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복음이듯, 자유 확장뿐만 아니라 자유 제한까지 복음으로 받아들였다.
- 그리고 죽음과 부활 중 하나만 빠져도 복음이 아니듯, 자유 확장과 자유 제한이 모두 중요하다고 믿었다.
- 그래서 자유와 복음이 충돌할 때, 자유를 제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반대로 선택했다.
- 자유와 복음이 충돌할 때, 자유를 선택했다.
- 이유는 명확하다.
- 이성과 경험에 갇힌 그들에게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악이기 때문이다.
- 그들은 복음을 십자가 죽음 부활이 아닌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이해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죽음이 빠진 부활의 복음만 믿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의 근원적인 가치관 - 논리적 일관성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 부활이 아니라 이성과 경험에 기반한 믿음의 전형적인 특징이 있다.
- 바로 ‘논리적 일관성’이다.
- 이성과 경험은 일관성 있는 논리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관성 있는 논리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
- 하나님을 논리적 일관성을 가진 분으로 인식한다.
- 그래서 하나님을 모든 능력을 가진 절대적 존재로 인식한다.
- 그로 인해 하나님을 전지전능하고, 영원불변하며, 완전한 형태를 지속하는 절대적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신앙 생활을 할까?
- 하나님은 완전한 능력과 자유를 가지신 분이라는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신도 완전한 능력과 자유가 주어진다고 믿는다.
- 그래서 자신의 자유를 일관성 있게 고수하며,
- 자유가 훼손될 때 신앙도 훼손된다고 판단한다.
이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자유를 중요하게 여겼다.
- 우상 제물 고기를 자유롭게 먹었고,
- 바울이 자유를 제한하라는 권고를 격렬하게 거부했다.
- 또한 후원받을 권리를 포기하고 노동하는 바울에게 자유가 없다고 비난하며,
- 바울의 신앙까지도 의심했다.
본문에서 언급한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을 논리적 일관성에 따른 절대적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에서는 십자가 죽음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다.
- 이성과 경험에 기반할 때 죽음과 부활은 절대 한자리에 있을 수 없다.
- 사람의 인식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없고,
- 살아 있는 사람이 죽어서도 안 된다.
- 죽음과 부활은 논리적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는 더욱 일어날 수 없다.
- 하나님은 영원불변한 절대적 존재이다.
- 그런데 그가 죽거나 다시 살아서 형태와 성질이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처음에는 받아들였어도,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상태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 어느새 다시 논리적 일관성이 있는 상태로 미끄러져 내려온다.
그래서 바울에게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는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인식한 상태,
- 즉 논리적 일관성 없는 역동적인 상태에 머물 힘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러나 바울이 떠나고 역동적 상태를 유지할 동력을 잃었을 때,
- 고린도 교회는 서서히 논리적 일관성을 가진 정적 상태로 내려갔다.
- 그래서 죽음과 부활 중에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런데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여 부활은 복음으로 보기 합당하지만,
- 죽음은 복음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 죽음을 배제한 부활의 복음으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자유를 고수하며 바울을 거부한 이유이다.
바울의 믿음 - 자유 확장과 자유 제한
하지만 바울은 달랐다.
- 부활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복음의 본질 삼았다.
- 그에 따라 자유 확장뿐만 아니라 자유 제한까지 믿음의 본질 삼았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에게 자유가 없다는 것을 부각하며 자랑까지 한다.
- 먼저 바울은 자신에게 복음 전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고 말한다.
- ‘어쩔 수 없이’, ‘화가 미칠까 봐’, ‘마지못해서’, ‘직무를 따라’ 복음을 전한다고 말한다.
[고전 9:16~17]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17) 내가 자진해서 이 일을 하면 삯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못해서 하면, 직무를 따라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자유 없음, 다른 말로 권리 없음이 ‘삯’이라며 자랑한다.
- 복음 전도에 대해 바울이 받을 보상인 삯은 ‘값없이’ 후원받을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말한다.
- 즉, 삯 없이 복음을 전한 것이 바울의 삯이었다.
[고전 9:18] 그리하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유 없음을 자랑할 수 있을까?
- 이는 이성과 경험에 기반하면 이해할 수 없다.
- 이성과 경험에서 자유 없음은 나쁜 것이고, 복된 소식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여 십자가 죽음 부활에 기반하면, 자유 없음은 자랑거리이다.
- 마치 예수님의 부활뿐만 아니라 죽음도 복된 소식인 것처럼 말이다.
-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과 함께 모든 죄가 죽었음을 상징하고,
- 죄의 죽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기 때문이다.
자유 없음도 마찬가지이다.
- 복음 전도를 거부할 자유가 없다는 것은 복음에 깊이 속해있다는 것이고,
- 복음에 속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기 때문이다.
- 다르게 말해서, 아무런 삯과 보상이 없어도 복음을 전할 동기와 열정이 있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증명되는 것이고,
- 그것은 바울의 믿음이 옳다는 증거이기에 바울에게 복된 소식이라는 뜻이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그 증거를 진정한 삯이며 보상이라고 한다.
- 자신에게 자유가 없다는 사실이 자기 믿음의 증거가 되고,
- 그 증거로 인해 자신에게 기쁨이 생기니,
- 그 증거가 진정으로 자신이 받을 삯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고전 9:18] 그리하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
19~23절: 과거에 행한 바울의 자유 절제
바울은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반복한다.
- 중심 메시지는 과거에 바울이 전도 과정에서 행한 자유 절제이다.
- 복음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바울은 자기 자유를 포기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상황을 제시한다.
- 율법 아래 있는 유대 사람, 율법 없이 사는 이방인, 약한 사람들이다.
- 바울은 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자기 자유를 제한한다.
-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율법에서 해방되어 율법을 지키지 않을 자유를 가졌지만,
- 율법 아래 있는 유다 사람을 위해 자기 자유를 제한하고 율법을 지킨다.
- 또한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율법에 따를 자유를 얻었지만,
- 율법 없이 사는 이방인을 위해 자기 자유를 제한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 마지막으로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약함에서 벗어나 강한 존재가 되었지만,
- 약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능력을 제한하고 약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바울은 자기 자유를 제한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
[고전 9: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삯이고, 자랑거리이며, 보상이고, 대가였다.
- 이 말 자체는 논리적이지 않다.
- 이성과 경험에 합당하지 않다.
- 왜냐하면 논리적 일관성, 이성과 경험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 종 됨이 어떻게 자랑거리겠는가.
하지만 복음은 부활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포함된다.
- 죽음이 복된 소식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성과 경험을 벗어난다.
따라서 바울의 비-논리적인 말은 오직 복음에 기반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 죽음을 복된 소식으로 들리는 사람만 종 됨이 자랑거리라는 바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 즉 죽음에 대한 태도가 신앙을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 죽음을 나쁜 소식으로 여기는 신앙은 명확히 틀렸다.
- 게다가 죽음을 부활이라는 복된 소식을 가져다주는 과정 혹은 수단으로 여기는 신앙도 틀렸다.
- 오직 죽음을 복된 소식으로 여기는 신앙만이 옳다.
- 자신의 죽음을, 자유 포기를, 종 됨을 복된 소식으로 여기고,
- 그것을 자신의 자랑거리이며, 삯이고 보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만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명확하게 밝힌다.
- 죽음, 자유 포기, 종 됨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 방법만이 복음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 반대로 말하면, 부활, 자유, 주인 됨만으로는 절대로 복음에 동참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고전 9: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과거의 자유 포기를 말하는 이유 - 고린도 교회의 비판 때문
그런데 바울이 과거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고린도 교회의 비판 때문이다.
-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부정하면서 바울의 과거를 거론했다.
- 바울의 과거 행위를 근거로 바울을 비난했다.
시점은 다시 우상 제물 고기 문제로 돌아간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우상 제물 고기를 먹지 말라고 권고한다.
-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권고를 단순히 율법을 지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 바울의 말을 복음과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랑의 권고가 아니라,
- 바울의 혈통에 따른 관습과 율법을 강요하는 것으로 들었다.
- 즉, 바울을 율법에 매인 자로 취급했다.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이렇게 비난했다.
- “바울 당신조차 이방인들 사이에서 우상 고기를 먹으며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 왜 우리에게는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가?
- 바울 당신도 일관성 없이 율법을 지켰다 말았다 하는 것을 보니,
-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데 말이다.”
- 이는 논리학에서 ‘피장파장의 오류’이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을 통해 해명한 것이다.
- “나는 아무렇게나 편한 대로 율법을 지켰다 말았다 한 것이 아니다.
-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상황에 맞게 행동했을 뿐이다.
- 나는 복음을 위해 언제나 자유를 포기했다.”라고 말이다.
이를 통해 바울은 고린도 교회도 자유를 포기하길 원했다.
- 그래서 바울 자신과 함께 복음에 동참하길 원했다.
24~27절: 미래에 행할 바울의 자유 절제
이 단락도 마찬가지로 바울은 앞으로 자유를 포기할 것을 다짐하며,
- 고린도 교회도 자유를 포기하라고 권고한다.
[고전 9: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바울은 신앙을 달리기, 권투에 비유한다.
- 달리기와 권투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 명확한 목표가 있다는 것과 목표에 이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 그래서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 없을 만큼 목표에 이르기 어렵다.
- 그리고 달리기에는 목표가 있고, 권투에도 허공이 아닌 명확한 대상을 향하듯 신앙에도 명확한 목표가 있다.
[고전 9: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고전 9:26]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목표는 무엇인가?
- 당연히 복음이다.
- 바울은 복음에 동참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고,
- 복음에 동참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고전 9:27]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목표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자유를 절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전 9:25]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점은 달리기, 권투와 다른 신앙만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
- 달리기와 권투에서 절제는 월계관을 얻기 위한 과정이고 수단이다.
- 절제하고 훈련하여 월계관을 얻는 순간만이 복된 시간이다.
- 하지만 신앙에서 자유 절제는 과정과 수단을 넘어서 본질이다.
- 절제 자체를 복된 소식으로 여기는 것 그리고 권리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이 바로 목표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표에 이르기 어려운 것이다.
- 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작은 욕망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는 것도 어렵다.
- 우리가 올림픽 챔피언에 환호하는 이유도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에 절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은 우리에게 그보다 더 어려운 목표를 제시한다.
- 일시적으로 하기도 어려운 절제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며,
- 그것도 모자라 절제 그 자체를 복된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라고 요구한다.
이 얼마나 어려운 목표인가.
- 그래서 바울조차 목표에 이르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결론 - 죽음을 복되다고 여기는 삶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단지 부활을 위한 일시적인 절제가 아니었다.
- 예수님의 삶 전체의 목표가 죽음이었다.
-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것도 신으로서의 사형 선고였고,
- 신이신 예수님이 인간에게 다가가 가르침을 주시는 것도 자기 부정이었다.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극적인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 그만큼 예수님은 죽음 자체를 목표 삼으셨고, 죽음을 복된 소식이라 여기셨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도 죽음을 권고하는 것이다.
- 그것만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 바울은 그 길을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 그 길을 가면서도 그 길을 복되다고 인정하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것조차 틀렸다고 말한다.
- 죽음의 길을 복되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목표까지 갈 수 있고,
- 목표에 이른 사람만 상을 받기 때문이다.
- 아무리 그 길을 가더라도 죽음의 길이 복되다고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권고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 누가 죽으라는 권고를 복되다고 여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고린도 교회도 이렇게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 고린도 교회가 특별하게 어리석고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 우리와 같은 이성과 경험을 가지고 죽음을 싫어하고 부활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요구한다.
- 평범해서는 목표에 이를 수 없다고.
- 목표에 이르러 월계관을 쓰는 사람은 적다고.
- 그만큼 힘들다고.
- 오직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이를 수 있다고.
- 그래서 평범한 이성과 경험에서 벗어나 특별히 죽음까지 복된 소식으로 여기는 사람만 이를 수 있다고 말이다.
그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권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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