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알아가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사랑(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모두가 사랑을 원하지만 스스로가 사랑을 원하는지 알기란 쉽지가 않은 듯 하다. 내가 진짜로 뭘 원하는지는 여러 가지 것들에 가려져 꼭꼭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돈과 성공을 원한다고 하지만 결국 돈과 성공을 원하는 이유도 사랑받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결국엔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해보려 노력해보았지만, 나의 이기심이나 한계 때문에 또는 상황이나 어떠한 오해로 사랑이 잘 전달이 안 되어 절망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많은 노래나 영화나 이야기가 ‘진짜 사랑’이 뭔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랑’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고, ‘사랑’이란 말 자체는 세상에선 때론 유치한, 진부한 이야기로 생각되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반면에 그렇게 다양한 사랑의 정의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매체들에서 때로는 사랑에 대해 동일하게 그려지는 부분이 있음도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랑에 감동하는 것 같다. 동일하게 여겨지는 사랑의 그 부분은 결국, 정말로 상대방을 위하며, 상대방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사랑이 세상에 실재하냐? 가만 생각해보면 실재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사랑이란 것이 TV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 등 내가 아닌 먼 곳에는 있지만, 나에게는 없는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나에게도 어느 한 상황, 순간에는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지속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많은 곳에서 사랑의 이야기들을 듣는다. 인간극장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아내의 병 간호를 수년 동안 해온 할아버지의 이야기, 재난이 일어났을 때 사람을 구하느라 목숨을 잃은 청년의 이야기 등. 그런 이야기들에 감동하지만, 신기하게도 내 바로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또, 살면서 소소하게 받은 사랑들이 있다. 출산을 하러가는 나에게 딸같다며 택시비를 받지 않는 택시아저씨. 힘들 때 정말 마음을 담은 편지를 받았을 때 등 때때로 누군가의 따뜻함을 받고, 감동이 되고 사랑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순간순간이고 계속 지속되긴 쉽지가 않다. 특히 가까운 사람, 매일매일 보는 사람에게 매번 그런 감동을 느끼며 살기란 어렵다. 가깝지 않은 사람에겐 기대가 없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조금의 따뜻함을 받아도 감동이 되지만, 매일매일 보는 사람에겐 기대가 크기 때문에 그런 소소한 일로 감동이 되지 않을뿐더러, 삶에는 항상 좋은 순간만 있을 수도 없고, 또 상대방의 속속들이까지 알면 상대에게 실망하게 되는 일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순간순간 사랑의 감동이 있을 때가 있지만 지속적으로 그런 사랑받는 감정을 느끼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멀리는 사랑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나에게는 없는 것 같은, 그래서 진짜 사랑은 결국 영화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의 무의식은 이런 현실 속에서 항상 사랑을 구하며, 실망하고 절망하며를 반복하며 살아왔지 않았나 싶다. 나의 무의식은 사랑을 받기 위해 나에게 그나마 사람들이 사랑해줄만한 요소들을 찾고, 그 부분만 집중해 발전시키기도 하고, 반대로 나에게 있는, 사람들이 사랑해주지 못할 만한 요소들은 감추는 일들을 했다. 그래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닌, 꾸며진 나로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나이기 때문에 감추어도 감추어진 내가 존재하고, 감추는 부분에 대한 불안이 있었고, 인정받는 부분도 그것이 도태되었을 때 사랑받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에 진짜 나로서가 아닌 불안으로 인해 더욱 그것에 집착하는 일이 생겼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너무 추상적이라 더 구체적으로 예를들어보겠다.
나는 나의 내성적인 성격을 사랑받지 못할 요소라 생각해 부끄러워했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이 없고, 고치고 싶어도 성격을 고칠 수 없는 현실에 위축된 마음이 있었다. 반면, 나에게 있어 자신이 있는 영역은 ‘만드는 일’이었다. 손재주가 있어 그 부분에 있어서는 항상 칭찬을 받아왔고, 스스로도 자신이 있어, 그 부분에만 더 집중하고 강화시키지 않았나 싶다. 잘하는 부분을 더 강화하는 것은 좋은 것일 수 있지만, 단순히 정말 나로서 잘하는 부분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도태될 것에 대한 불안으로, 더 무리해서 일을 하거나, 내가 하고 싶지 않지만 사람들이 좋아할 일을 하는 등의 부정적인 부분이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체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나는 사람들에게 진실되게 사랑받지도 못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는 다른 사람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었다. 이게 나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님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았다. 성경을 배우며 나의 죄됨을, 사람들의 죄됨을 세상의 죄됨을 알게 되었고,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받으려 평생을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살아왔는데, 세상에는 예수님이 없이는 사랑이 정말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먼저는 ‘내가 정말 죄인이구나. 그래서 나는 정말 1만큼도 사랑을 할 수가 없는 존재구나’를 알게 되었고, 그 다음은 ‘아! 나만 이런게 아니구나. 세상에 한사람도 예외없이 모두가 그렇구나!’를 알게 되었고, 그 다음으로 ‘정말로 예수님이 없이는 사랑이 원래 불가능한거였구나!’를 다시금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그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는데,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진짜 사랑’.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사랑하고 사랑받는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그 사랑을 이미 받았고, 그 사랑을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뤄가는 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다.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내가 그토록 바라던 그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니, 이전에 살던 삶에서 돌아 발벗고 예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여전히 나도 내 주변사람도 하나도 사랑하지 못한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럼 나는 예수님을 믿고 변한게 없나? 한가지 있다. 이전에는 이만큼 내게 사랑이 하나도 없음을 몰랐다. 한톨은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사랑인줄도 몰랐고, 그래서 예수님을 이만큼 간절히 원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그걸 알았고, 그래서 정말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예수님만이 진짜 사랑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니면 세상에서는 사랑이 있을 수도 없고, 사랑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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