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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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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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의 반대는 겸손이 아니다.
- 교만과 겸손은 모두 자기 객관화 실패를 뜻한다.
- 교만은 실제보다 자신을 크게 왜곡해서 실패한 것이고,
- 겸손은 작게 왜곡해서 실패한 것이다.
물론 겸손은 원래 자기 연약함을 알아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남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 즉, 자기를 바르게 인식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강점은 숨기고 약점을 드러내는 사람을 가르킨다.
-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표현하기보다,
- 다른 사람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기는 사람으로 쓰인다.
그런 점에서 교만과 겸손은 같다.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숨기고, 유익을 얻기 위해 자신을 변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만의 반대는 자기 객관화이다.
-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여,
- 강한 부분은 활용하고 약한 부분은 보완하는 동시에,
- 강함 뿐만 아니라 약함조차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교만하여 자신을 크게 왜곡하면,
- 현실에서 불만이 쌓인다.
- 뛰어난 능력으로 뛰어난 성과를 내어 세상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아야 마땅한데,
-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 부족인데,
-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의 문제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 그래서 세상에 대한 불만이 늘어간다.
반면에 만약 겸손하여 자신을 작게 왜곡하면,
- 현실에서 두려움이 쌓인다.
-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지 못하니,
- 가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도태된다.
- 할 수 있는 일조차 포기하여 실패의 경험이 반복되니,
-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물론 현실에서 완전히 교만하거나 완전히 겸손한 사람은 거의 없다.
- 대부분의 사람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교만과 겸손이 섞여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 모든 사람은 자기 객관화에 실패하여,
- 교만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 원망만 하거나,
- 겸손하여, 할 수 있는 것도 도전하지 못하고 미리 포기하는 상태에 있다.
대부분은 두 상태를 왔다 갔다 한다.
- 교만에 빠져 세상에 불만이 쌓이다가,
- 어느 순간 불만의 대상이 자신을 향하여 겸손과 자기 비하에 빠지고,
- 겸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다시 교만해진다.
그런데 왜 사람이 교만해지냐?
왜 사람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왜곡하냐?
-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은 세상에서 거부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을 직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직면해야 한다.
-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여 강점은 살리고 약점은 보완해야 한다.
그러나 두려움이 너무 크면, 직면하기보다 회피하게 된다.
- 두려움 때문에 약점이 부각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오는 반응이 교만이다.
-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 자신이 원한는 대로 혹은 세상이 원하는 대로 왜곡한다.
- 자신의 강점은 부풀리고 약점은 감춘다.
즉,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속인다.
- 그러면 자신을 직면하지 않아도, 두려워하는 자신을 속여서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는 타조가 적을 만나 두려울 때 도망가기보다 머리를 땅에 파묻는 것과 같다.
-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는 그대로 둔 채 문제를 보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것이다.
교만의 결정적인 문제 - 자기 상실
이러한 상태의 결정적인 문제는 결국 자기를 잃는다는 것이다.
- 교만과 겸손을 왔다 갔다 하면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헷갈리게 되고,
- 그래서 강점은 발휘하지 못하고, 약점만 부각되어 보완하려다가 그것조차 실패하게 된다.
- 사람은 자기답게 살 때 무엇을 하든지 충만해질 수 있는데,
- 자기를 잃으면 아무리 성취를 이뤄도 결핍을 느낀다.
본문에서 암몬과 에돔도 자기 객관화에 실패하여 자기를 잃었다.
- 암몬은 지형과 재물을 믿고 교만했다.
- 실제보다 이것의 능력을 강하다고 착각하여,
- ‘누가 나를 치러 올 수가 있느냐?’라며 지형과 재물 때문에 바벨론 군대조차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렘 49:4] 너 방종한 딸 암몬아, 네가 어찌하여 너의 비옥한 골짜기들을 자랑하느냐? 너의 골짜기들은 이미 고갈되었다. 네가 어찌하여 재물을 의지하며 ‘누가 나를 치러 올 수가 있느냐?’ 하고 뽐내었느냐?
에돔도 교만으로 자신을 속였다.
- 산꼭대기 지형 때문에 누구나 자신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하나님께조차 맞설 수 있다고 착각했다.
[렘 49:16] 네가 바위 틈 속에 자리잡고 살며, 산꼭대기를 차지하고 산다고, 누구나 너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러한 너의 교만은 너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네가 아무리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 네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아도, 내가 너를 거기에서 끌어내리겠다. 나 주의 말이다.
[렘 49:19] 보아라, 사자가 요단 강 가의 깊은 숲 속에서 뛰어나와서, 푸른 목장으로 달려들듯이, 나도 갑자기 에돔으로 달려들어서, 그 주민을 몰아내고, 내가 택한 지도자를 그 곳에 세우겠다. 누가 나와 같다는 말이냐? 감히 나에게 따지며 대들 수 있는 자가 누구이며, 나에게 맞설 수 있는 목자가 누구냐?
이유는 하나이다.
-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자신을 속이지 않고는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 두려워하는 자신을 버린다.
- 자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강한 존재라고 속이고,
- 두렵게 만드는 약함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속인다.
-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버린다.
하나님이 교만을 정죄하시는 이유
많은 사람이 교만의 문제를 하나님과 관계로 연결한다.
-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착각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다고 말한다.
- 겸손하게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굴복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말한다.
- 그래서 하나님이 교만을 정죄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이 옳지만, 충분하지 않다.
- 하나님이 교만을 정죄하시는 이유는 사람의 연약함을 부각하여,
- 자신의 권위 아래 굴복시키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 이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관점이며, 바리새인의 태도이다.
이러한 신앙은 ‘유아적 의존성’에 머물게 한다.
- 그래서 성장하지 못하고 무능력해지는데, 무능력을 합리화할 구실까지 제공한다.
교만의 치명적인 문제는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다.
- 자신조차 속아서 참된 자신이 누구인지 잊게 만든다.
- 그로 인한 결과가 전쟁 패배와 멸망이다.
-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지 못하니,
- 강점을 활용하지도, 약점을 보완하지도 못하고, 결국 무능해진다.
이것이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 전쟁과 같이 총력을 동원해야 하는 시기에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 그래서 교만 때문에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으면서 항복하지도 않고,
- 교만 때문에 끝까지 무모하게 저항하다가 몰살당한다.
이렇게 교만은 내면에서 참된 자신을 잃게 만들고,
- 그 결과 자기만의 능력을 잃어서 세상에서 도태되고 멸망하게 만든다.
- 암몬과 에돔이 멸망한 것도,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교만을 정죄하신다.
- 단지 자신의 권위 아래 인류를 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잃고 인생을 잃어서 정신적, 육체적, 영적으로 멸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을 되살리기 위해 교만을 정죄하여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신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 그리고 멸망하지 않고 성장하고 성숙하길 바라시기 때문에,
- 교만으로 왜곡된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만 정죄는 우리를 굴복시켜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고치려는 시도가 아니라,
- 우리의 교만을 제거하여 우리답게 회복되고 자유롭게 팽창하도록 하는 시도이다.
나다움과 세상 인정의 대립
내가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 계기도 하나님의 정죄에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다.
- 진로를 고민할 때 어려웠던 점은 ‘나다움’과 ‘세상의 압력’이 상충할 때이다.
- 평생 해야 할 일이기에 가장 나다워질 수 있어야 하지만,
- 동시에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현실은 나다운 일을 선택하면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 세상에서 인정받기도 어려웠다.
- 그래서 세상에서 인정받는 일을 하자니, 잠깐은 가능해도 평생 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하나님이 세상을 섬기지 말라는 정죄의 뜻을 깨달았다.
[마 6: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재물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 이를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 대신 ‘자신’과 재물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자기다움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다움을 지키면서 세상의 인정도 받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 그것은 교만이었다.
- 나에게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능력이 없고,
-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집중해도 얻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세상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정죄는 나의 무능력을 지적했지만,
- 그 결과 나다움과 세상 인정을 모두 얻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 그리고 나다울 수 있다면, 세상 인정을 받지 못해도 무능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기에,
- 용감하게 세상의 인정을 포기하고 나다움을 선택할 용기를 얻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정죄는 나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었다.
자기 객관화 능력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객관화를 하도록 하신다.
-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며,
- 또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 즉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 자신이 가장 인정하고 용납하기 싫은 영역인 죄를 용납할 때 자기 전체를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세상이 연약함을 지적하며 우리를 두렵게 할 때,
- 두려움을 회피하고 연약함을 숨기려 하지 않고,
- 연약함을 인정하고 두려움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의 연약함조차 사랑할 수 있고,
- 그럴 때만 연약함을 보완하는 용기도 생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자기 객관화를 하도록 하시는 근원적인 이유는,
-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우리의 강점과 약점을 구분하지 않으신다.
- 우리가 크건 작건, 똑똑하건 아니건, 강하건 약하건 차이를 인식조차 못 하신다.
- 하나님은 우리가 크고, 똑똑하며, 강해지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은 작고, 어리석고, 약한 우리 그 자체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그 자체를 용납하지 못한다.
- 어떻게든 작고, 어리석고, 약한 우리를 부정하거나 개선해서 없애려고 한다.
누군가는 강해지고 똑똑해지려는 노력이 왜 문제냐고 물을 수 있다.
- 약한 우리 자신을 개선해서 강해지면 좋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약한 우리를 부정하면,
- 약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다.
- 하나님이 “연약한 너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며 다가오실 때,
- 우리는 “하나님, 왜 강하게 해주시지 않나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군요.”라고 반응한다.
- 약함조차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까지 부정한다.
- 그렇기 때문에 자기 객관화가 중요하다.
-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의 오해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다움을 포기하길 바라신다고 생각한다.
- 특히 ‘자기 부인’이 그런 오해를 가중한다.
-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마 16:24]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이 때문에 신앙을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따라서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 부인할 ‘자기’를 정의해야 한다.
- 부인할 자기는 교만하거나 겸손하여 왜곡된 자기이다.
-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여 세상에 의해 주입된 자기이다.
- 예수님은 ‘세상에 안주하여 십자가 죽음을 피하고, 그리스도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기’를 부인하셨다.
예수님조차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인했다.
- 예수님도 교만하게,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뛰어난 지혜와 훌륭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셨다.
- 그러니 굳이 고생해서 십자가에 죽지 않아도 된다고 자위하셨다.
- 동시에 예수님도 겸손하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될 능력이 없다고 착각하셨다.
- 자기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데, 굳이 참혹하게 죽을 필요가 있을까 의심하셨다.
그래서 예수님도 근심하셨다.
[막 14:34]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 교만과 겸손을 오가며 죽음에서 피할 변명거리를 찾으셨다.
- 세상에 저항하다가 세상에서 거부당해 죽는 것을 누가 바라겠는가.
당연히 죽지 않고 살고 싶으셨다.
-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막 14: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 굳이 죽지 않고 살아서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교만과
- 자신은 죽어서 그리스도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겸손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굴복하여 안락한 삶을 원했던 자기를 부인하셨다.
- 거짓 자기를 부인하고, 부인했던 참 자기를 인정하셨다.
- 이것이 십자가에 죽어 그리스도로 확증된 사건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에는 ‘자기 부인’과 ‘자기 인정’이 동시에 일어난다.
- 세상과 타협하여 안락하게 살기 원하는 ‘거짓 자기’를 부인하는 동시에,
- 세상에 저항하여 자기답게 살기 원하는 ‘참 자기’를 인정하는 사건이다.
우리도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 자기가 사라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 자기 되기 위해서 말이다.
- 십자가의 길은 거짓 자기를 부인하여 참 자기 되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부인은 자기 회복이다.
그런데 거짓 자기를 부인하는 길은 죽음의 길이다.
- 거짓 자기는 세상의 압력에 굴복한 모습이다.
- 세상에 타협하여 참 자기를 억누른 상태이다.
따라서 거짓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저항해야 한다.
- 그래야만 참 자기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 저항하면, 세상에서 도태되어 사회적 죽임을 당한다.
예수님이 죽임당하신 이유도 정확히 이와 같다.
- 세상이 규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벗어나셨기 때문이다.
- 율법도 엄격하게 지키지 않고, 금식도 하지 않으며, 성전에서 바리새인과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의 압력에 저항하여 자기답게 하나님을 섬겼다.
- 안식일에 치유 노동을 하셨고, 부정한 사람과 부정한 식사를 하셨다.
-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통해 밝히신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회에서 배척되었고,
- 사회적 배척의 결과로 육체적 죽음을 당하셨다.
- 예수님의 죽음을 육체적 고통이나 영적 고통에 한정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 예수님 죽음의 핵심은 사회적 죽음이다.
- 바리새인 같은 사회 엘리트에 저항하여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 자기다움을 억누르려는 세상의 압박에 저항하는 일이다.
- 저항하다가 거부되어 배척당하는 일이다.
- 배척당해서 사회적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 사회적 죽음 때문에 육체적 죽음까지 이르는 길이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의 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에 이르신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 그런데 부활은 육체적 부활뿐만 아니라 사회적 부활을 의미한다.
- 사회적 부활이 오히려 더 큰 비중을 갖는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로 확증되셨다는 것도 사회적 부활을 의미한다.
- 예수님은 바리새인에 의해 신성모독이라는 오명을 쓰고 죽으셨다.
- 이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흉악범에게 붙이는 죄명이며,
- 그랬기 때문에 최악의 형벌인 십자가 죽음이 내려졌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라는 정죄를 파괴한다.
-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 가장 칭송받는 그리스도가 되신다.
이것이 사회적 부활이다.
따라서 우리가 받게 될 부활의 영광도 이와 같다.
- 부활은 우리의 사회적, 육체적 죽음의 회복이다.
- 참 자기를 찾는 과정에서 어리석고, 무능하며,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배려가 없고, 재수 없다는 평가를 받아 사회적 죽음을 당한 후,
- 부활을 통해 현명하고, 유능하며, 정직하고, 이타적이며, 배려가 깊고, 다정하다는 평가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누릴 부활의 은혜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모든 비난을 십자가의 길 때문이라고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 당연히 어리석음과 교만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십자가의 길을 가면 사회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극단적으로 말해서, 사회의 부정적 평가를 받지 않은 것은 십자가의 길이 아니다.
- 마치 죽지 않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론 - 자기를 속인 죄
암몬과 에돔은 결국 비극적으로 멸망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렘 49:5] 보아라, 내가 너의 사방에서 무서운 적들을 데려다가, 너를 치겠다! 나 만군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면 너의 백성이 제각기 흩어져 도망할 것이고, 아무도 도주하는 사람들을 모을 수 없을 것이다.
[렘 49:17~18] 에돔이 참혹하게 파괴되어, 그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그 곳에 내린 모든 재앙을 보고 놀라며, 비웃을 것이다. (1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이 멸망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그 땅에 자리잡고 사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그 땅에 머무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 주가 말한다.
본문은 멸망 이유를 교만이라고 말하지만,
- 더 정확하게는 ‘자기를 속인 죄’ 때문이다.
- 또 다르게 말하면, 참 자기를 버리고 거짓 자기로 살아간 죄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자기를 속인 죄는 교만이다.
- 자신은 자신을 속일 수 있고,
- 거짓 자기로 세상을 속일 수 있으며,
- 거짓 인생으로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교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도 속일 수 없다.
- 세상은 세상에 저항하며 자기다운 사람도 거부하지만,
- 세상은 거짓 자기로 사는 사람도 거부한다.
-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은 돈이 많으면 부러워서 거부하고,
- 돈이 적으면 무시해서 거부하며,
- 돈이 보통이면 평범하다고 거부한다.
세상은 성공하면 질투하며 거부하고,
- 실패하면 깔보며 거부하며,
- 실패도 성공도 없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세상에서 인정받을 방법은 없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겠는가?
-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기를 속이며 거짓 자기로 살아가야 할까,
- 세상에 저항하며 정직하게 참 자기로 살아가야 할까?
어떤 선택을 해도 세상에 인정받지 못한다면,
- 적어도 자신에게는 인정받을 수 있고,
-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참 자기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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