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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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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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다마스쿠스, 게달과 하솔 왕국, 엘람의 멸망을 예고한다.
[렘 49:26]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 도성의 젊은이들이 광장에서 쓰러져 죽고, 모든 군인이 전멸을 당할 것이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렘 49:33] 하솔은 영영 황폐한 곳이 되어 이리 떼의 소굴로 변할 것이며, 그 곳에 다시는 정착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그 곳에 머무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렘 49:35~36]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엘람의 주력 무기인 활을 꺾어 버리겠다. (36) 하늘의 네 끝에서 나온 사방의 바람을 엘람으로 몰아다가,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 버리겠다. 그러면 엘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여러 나라로 유배되어 갈 것이다.
그런데 이전과 차이는 멸망의 근거인 죄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전에 나온 멸망 예고는 멸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 멸망 예언을 통해 멸망 원인인 죄를 지적하여 죄에서 돌이켜 회복하는 것이었다.
- 그런 점에서 멸망 예고는 멸망하지 말라는 호소였다.
하지만 이번 본문은 멸망 그 자체가 목적이다.
- 멸망 원인인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
- 이는 회복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 마지막 39절에 나온 회복은 멸망 이후의 회복이다.
멸망을 피할 방법은 없다.
일반적인 멸망 예언의 역할 - 회복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예언하셨을까?
- 많은 사람이 예언의 역할을 말 그대로 예고라고 오해한다.
-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기에,
- 예언한 대로 무조건 사건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 예언은 예고가 아니다.
- 단순히 미래를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예언이 예고라면, 그래서 변경의 가능성이 없다면,
- 예언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 단지 남들보다 조금 먼저 알았다는 것 외에 아무 유익이 없다.
- 그 사건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예언하시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예언대로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미래에 영향을 주기 위해 예언하시는 것이다.
- 지금처럼 변화 없이 살아가면 예언대로 멸망할 테니까,
- 멸망의 원인인 죄를 깨닫고 돌이켜서 멸망하지 말라는 것이 멸망 예고의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 예언을 셀 수 없이 반복하셨다.
- 이스라엘이 예언대로 멸망하길 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 예언과 달리 멸망하지 않고, 죄에서 돌이켜서 회복하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 따라서 멸망 예언은 정죄와 저주가 아니라, 사랑과 회복의 메시지이다.
이것이 예언의 가치이다.
하지만 이번 멸망 예고는 다르다.
- 하나님은 멸망하길 원하셨다.
- 회복의 여지 없이 예언대로 성취되길 원하셨다.
- 사랑과 회복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메시지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아무런 역할이 없다.
- 어차피 멸망한 이들에게 멸망한다고 말해주는 것은 아무 소용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역할 -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지
그렇다면 본문은 왜 기록되었을까?
- 아무런 역할도 영향력도 없는데 말이다.
예언은 예언의 대상인 다마스쿠스, 게달과 하솔 왕국, 엘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 예언을 들으나 마나 어차피 멸망할 것이고,
- 애초부터 하나님은 이들에게 죄를 알려줘서 돌이켜 회개하기를 계획하지도 않으셨다.
하지만 예언을 듣는 이스라엘에게는 예언이 영향력을 갖는다.
- 주변 나라의 멸망 예언을 듣고 이스라엘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는다.
- 세계를 다스리는 참 주인은 이집트도 바벨론도 아닌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풀어 말하면, 본문의 예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되었을 때 기록되었다.
-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영토와 주권을 잃고 절망했다.
- 특히 절망적인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잃었다는 것이다.
-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기에,
-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기에,
- 하나님이 살아계신 한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 그러나 멸망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했다.
- 하나님의 죽음 외에는 민족과 영토의 상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소망이 없었다.
- 하나님이 죽었기에 포로에서 구원해줄 구원자를 기대할 수 없었다.
- 만약 우연히 포로에서 해방된다 하더라도, 돌아갈 약속의 땅이 없었다.
- 게다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지켜줄 하나님이 없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로 있던 이스라엘은 두 가지 극단에 빠졌다.
- 이미 죽은 하나님을 잊지 못하여 계속 절망에 빠진 사람이 있었다.
- 일상을 포기하고 방황했다.
반면에 하나님을 포기하고 바벨론에서 살아남을 새로운 기회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 바벨론에서 성공하기 위해 일상에 집착했다.
이 두 가지 극단은 반대로 보이지만,
- 실상은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에 일어난 공통적인 반응이다.
- 소망을 찾지 못하고 절망하거나,
- 하나님 외에서 소망을 찾기 위해 세상에 휩쓸린다.
그런 이들을 위해 하나님은 주변 나라들의 멸망을 예언하셨다.
- 예언의 중심 메시지는 ‘나 살아있다.’이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어떻게 증명하냐?
- 하나님이 멸망을 예언했던 나라가 실제로 멸망하는 모습을 통해서이다.
- 하나님의 뜻대로 세계가 운행되고 있음을 통해서이다.
이스라엘은 멸망으로 약속의 땅을 잃고,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을 잃었다.
- 그래서 약속을 파기하고 선택한 민족조차 지키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다.
그런데 주변 나라의 멸망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 여전히 능력이 있음을 발견했다.
- 특히 이집트부터 바벨론까지가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은
-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멸망하는 예언을 듣고 소망을 얻었다.
- 하나님은 단지 살아계셔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것뿐만 아니라,
- 온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 비록 지금은 멸망했고, 멸망 과정에서 무능력하게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실망했으며,
- 유일하게 의지했던 하나님마저 사라져 의지할 데 없는 이스라엘에게
- 하나님을 의지할 새로운 동기를 주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이 무능해서 생긴 일인 줄 알았는데,
- 알고 보니 온 세상의 멸망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 그 뜻에 따라 이스라엘도 멸망한 것이었다.
따라서 온 세상을 멸망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셨으니,
- 아하무적 같이 보이는 이집트와 바벨론도 멸망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믿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멸망 예언의 절정은 다음 본문에 나오는 바벨론의 멸망 예언이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바벨론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바벨론이 침략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할 때, 이스라엘은 신들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벨론 멸망을 예언하고 성취하신다.
- 이는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의미한다.
- 이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하나님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증명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이스라엘 주변 나라에 대한 예언이지만,
- 주변 나라를 위한 예언은 아니다.
- 오직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이다.
- 이스라엘에게 위로와 회복을 주기 위한 예언이다.
결론 - 하나님의 예언이 주는 소망과 절망
당연히 본문은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이지만, 그 또한 아니다.
- 이미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사라졌다.
- 만약 본문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예언이라면, 이스라엘과 함께 성경은 사라졌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여전히 우리 손에 있다.
- 그런 점에서 본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이 아니다.
- 우리를 위한 예언이다.
하나님은 온 세계의 멸망 예언을 통해, 그리고 이스라엘의 멸망 예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본문을 통해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었듯,
-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다.
거꾸로 말하면, 본문을 통해 소망을 얻는 사람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 당시에도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본문의 예언을 들었지만,
- 실제로 소망을 얻은 사람은 일부였다.
하나님보다 민족과 영토에 가치를 두었던 사람은 예언을 들어도 소망을 얻을 수 없었다.
- 아무리 하나님께 능력이 있다고 해도, 당장 민족과 영토를 되찾을 수 없으면 아무 소용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은 약속의 주이신 하나님보다 약속의 도구인 민족과 영토를 원했다.
- 그런 사람은 절망에 빠져 일상을 포기한 채로 죽었다.
또한 하나님보다 생존에 가치를 두었던 사람도 예언에서 소망을 얻을 수 없었다.
- 아무리 하나님께 바벨론까지 멸망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
- 당장 바벨론에서 성과를 쌓아 권력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들은 생존과 권력의 주이신 하나님보다 생존과 권력 그 자체를 원했다.
- 그런 사람은 욕망에 빠져 일상을 집착한 채로 죽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예언은 소망이 아니라 원망을 갖게 한다.
- 하나님이 살아있었는데도 왜 민족과 영토, 생존과 권력을 빼앗아 갔냐고 원망한다.
- 또한 괜히 이제 와서 멸망해서 자신이 간신히 쌓은 성과를 파괴하지 말라고 원망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언 때문에 이들은 오히려 관계가 멀어진다.
오직 민족과 영토보다, 생존과 권력보다 약속의 주이며 생존과 권력의 주이신 하나님을 원했던 사람만 예언을 통해 소망을 얻는다.
- 하나님이 죽었다는 절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소망을 얻는다.
- 비록 민족과 영토, 생존과 권력이 없어도, 온 세계의 주이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만으로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예언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진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 하나님은 온 세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멸망을 예고하셨고 성취되었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계시고, 진정한 주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민족과 영토를 잃었듯,
-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생존과 권력을 위해 발버둥 치듯,
-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안다고, 원하는 것이 즉각적으로 사라지지도 않고, 원하는 것이 곧바로 주어지지도 않는다.
- 우리도 일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다.
나도 좋은 목사,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 여전히 그렇지 못한 것이 불만족스럽다.
- 상대방의 마음을 수용하고 공감하기보다 내 마음을 주장하고 주입하려 한다.
- 그래서 내 마음이 거절되고 무시되면 화가 난다.
-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 그럴 때면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 그러면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이스라엘처럼 일상을 포기하거나 집착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온 세계를 다스리신다고.
- 이를 성경의 예언과 예언이 성취된 역사를 통해 증명하신다.
-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다.
성경은 이것까지만 말한다.
- 그래서 어떤 면에서 성경은 보잘 것 없다.
- 신앙의 매력을 강하게 호소하지 않는다.
-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이 보기에 성경은 시시하다.
- 얼마나 시시하냐면, 성경이 기록된 당시에 성경의 예언을 직접 귀로 들은 사람조차 감화되지 못할 만큼 영향력이 없다.
- 성경은 그런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이 우리에게 돌아간다.
- 하나님이 살아서 온 세계를 다스린다는 사실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 그것을 우리 일상에 녹여내야 한다.
- 성경은 절대로 이것을 대신 해주지 않는다.
-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이 정말 말 그대로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삶 전부를 다시 봐야 한다.
- 하나님보다 영토와 민족, 생존과 권력을 원했던 이스라엘이 예언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았다.
- 그들은 하나님만 원하지 않았고, 이는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며,
- 이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온 세계를 다스린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전히 불만족스럽고, 일상에서 절망하거나 일상에 집착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여기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일상에 녹여내는 것이다.
- 하나님만이 유일한 절대 가치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일상을 포기하지 않고 충실하되,
-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 일상의 가치 없음을 느끼며 절망하면서도, 일상 안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통해 소망을 갖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 성경을 통해 소망을 얻는다.
- 성경의 예언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 하나님의 예언이 지금도 성취되어, 온 세계가 멸망하고, 나를 비롯하여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멸망하는 것을 볼 것이다.
- 그 멸망을 보면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소망을 볼 것이다.
그 멸망에서 희망을 보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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