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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레미야(83) 48:29~47 경제적 풍요가 부르는 우상 숭배
    예레미야서 2024. 4. 27. 22:53

    본문은 모압의 교만을 정죄한다.

    [렘 48:29~30] 우리는 모압이 교만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모압이 매우 교만하여 우쭐대고 뻐기며, 오만하고 거만을 떤다는 것을, 우리는 들었다. (30) 나 주의 말이다. 나는 모압의 교만함을 안다. 그의 자랑도 허풍뿐이며, 그가 이루었다는 일도 거짓말이다.

    그러나 교만은 죄의 결과일 뿐이다.

    - 죄의 본질은 따로 있다.

     

    죄의 기준을 교만으로 삼으면, 

    - 적어도 교만한 사람은 정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 교만이라는 기준으로 교만한 사람조차 정죄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자신을 과신하여 자신은 많은 것을 알기에 언제나 옳다는 생각 때문에,

    -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교만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 만약 그에게 교만하다고 정죄한다면,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 자신이 틀렸던 순간은 축소하고, 옳았던 순간은 확대하여,

    - 자신은 실제로 옳은 것이지, 교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교만이 죄라는 주장은 옳은 말이지만,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 누구도 이 말을 듣고 죄를 깨달아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게다가 내면은 교만하지만, 교만을 표출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게도 소용이 없다.

    - 교만을 표출하려면, 돈, 명예, 지위 같은 사회적 성취가 있어야 한다.

    - 그런데 사회 구조적 차별 때문이건, 개인적 불성실 때문이건, 사회적 성취를 갖지 못한 사람은,

    - 자신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어서 교만할 기회가 없다.

    특히 이는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하며 절망에 빠진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착각하도록 한다.

    - 자신을 자랑하며 과신하기는커녕 혐오하며 불신하기에 

    - 자신이 바른 신앙을 가졌다고 오해하도록 한다.

    그래서 신앙이 자기 혐오를 강화하고 절망과 우울에 빠지도록 한다.

     

    따라서 교만을 정죄하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교만하게 하는 원인까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 그래야 교만한 사람도 자신의 교만함을 인정할 수 있고,

    - 교만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도 내면에 있는 교만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야 교만하여 자신을 과신하는 사람은 자신을 불신하게 되고,

    - 반대로 자신을 불신하며 절망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믿고 소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과신하던 사람도, 자신을 불신하던 사람도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게 된다.

    - 자신을 있는 그대로 객관화할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 ‘자기 객관화 능력’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만 다른 사람도 과신하거나 불신하지 않는다.

    - 자신과 다른 사람을 과신하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결국 실망하여 돌아서고,

    - 자신과 다른 사람을 불신하면, 누구와도 관계 맺으려 하지 않는다.

    - 그래서 모든 관계가 파괴된다.

    게다가 이는 하나님과도 연결된다.

    - 자기 객관화 능력이 없으면, 하나님을 과신하여 ‘유아적 의존성’에 머문다.

    - 엄마의 젖만 기다리며 하염없이 누워있는 신생아 같이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다.

    -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는 상호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모든 욕구를 즉각적으로 해소하지 않는 하나님께 실망한다.

    - 하나님께 능력이 없다고 느끼며 과신에서 불신으로 넘어간다.

     

    하나님을 불신하면, ‘고아적 독단성’에 빠진다.

    - 결국 인생은 혼자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 부모 없는 아이처럼 세상 모든 짐을 혼자 진 것 같은 부담감 속에 괴롭게 살면서,

    - 자기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다는 독단성에 빠진다.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가 파괴되고 고립된다.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 ‘자기 객관화 능력’이다.

    - 자신을 과신하지도 불신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볼 때,

    - 다른 사람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 그래야 과신하여 실망하지도, 불신하여 도망가지도 않고, 안정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게다가 그럴 때 하나님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 하나님을 과신하여 무엇이든지 전부 다 해주시는 분도 아닌,

    - 그렇다고 불신하여 아무것도 안 해주시는 분도 아닌,

    - 사랑을 주기도 하시지만 받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래야 하나님과 상호 작용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모압의 죄 - 자기 객관화 능력 상실

    따라서 본문에서 모압의 죄는 교만 이면에 있는 자기 객관화 능력 상실이다.

    - 모압은 자신을 과신하거나 불신했다.

    - 과신은 자신의 경제 능력 의지를 통해 드러났고,

    - 불신은 우상 숭배를 통해 드러났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압의 경제 능력과 우상을 파괴하신다.

     

    이를 자세히 보면,

    - 모압은 포도주를 수출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다.

    - 그래서 본문에서 ‘포도 덩굴이 사해를 건너 야스엘까지 뻗어 나갔다’고 표현한다.

    [렘 48:32] 십마의 포도나무야, 나는 야스엘을 생각하여 우는 것보다 너를 생각하여 더 많이 울고 있다. 너의 덩굴은 사해를 건너 야스엘에까지 뻗어 나갔다. 그런데 파멸시키는 자가 너의 여름 과일과 포도송이에 밀어닥쳤다.

    이렇게 모압은 포도주를 수출하여 얻은 경제적 부를 통해 자기 능력을 과신했다.

    - 그래서 자신은 강한 능력으로 어떤 군대도 대적할 수 있다고 믿었다.

    - 이렇게 교만에 빠졌다.

    그 결과 군사력을 강화하지 않았다.

    - 전투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벨론이 침략할 때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모압은 자기 객관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불신했다.

    -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켜줄 줄 우상이 필요했다.

    이러한 모압의 태도는 바벨론의 공격에 대한 반응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 어떻게든 싸워 이기려하기보다 우상 제사를 드린다.

    -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자르고, 손마다 상처를 내고, 허리에 굵은 베를 걸친다.

    [렘 48:37] 과연 모압 사람들이 모두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자르고, 손마다 상처를 내고, 허리에 굵은 베를 걸치고 있다.

    자신의 군사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보다 우상을 믿기 때문에 보이는 반응이다.

     

    그런데 만약 모압이 자기 객관화 능력을 가졌다면?

    그래서 자신을 과신하지도 불신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볼 수 있었다면?

    - 경제적 풍요에 취하여 사치에 빠지지 않고, 

    - 경제적 풍요를 이용하여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웠을 것이다.

    - 군사력을 강화하여 전투에 대비했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을 불신하여 막연한 두려움에 빠지지 않았기에,

    - 헛된 우상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 우상을 숭배하는 데 쓸 돈을 백성에게 분배하여 내부의 힘을 키웠을 것이다.

    - 백성의 힘을 근거로 우상이 아닌 자신을 신뢰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모압은 강해졌을 것이다.

    - 경제적인 풍요를 낭비하지 않고, 연약함을 보충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 군사력을 강화하고 백성을 돌보니, 

    - 바벨론이 침략해도 대항하여 국가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자기 객관화 능력의 힘이다.

     

    그러나 모압은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 담대하게 자신 내부의 힘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 그래서 경제적 풍요는 교만하게 사치에 탕진했고,

    - 그로 인해 국가 내부의 힘이 약해지자, 

    - 헛된 우상에 의지하여 국가를 지키려고 했다.

    - 게다가 그렇게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사치를 포기하지 않아, 더 큰 위험을 자초했다.

    그러니 바벨론의 침략에 대항할 수 없었다.

    - 기껏 한다는 일이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자르고, 손마다 상처를 내고, 허리에 굵은 베를 걸치는 자기 파괴 행위뿐이다.

     

    따라서 모압의 멸망은 자명하다.

    - 모압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공격을 당하고,

    [렘 48:40~41] 나 주가 말한다. 보아라, 적이 독수리처럼 날아와서, 모압 위에 두 날개를 펼칠 것이니, (41) 성읍들이 점령당하고, 산성들이 함락당할 것이다. 그 날에는, 모압 용사들의 마음이 해산하는 여인의 마음과 같이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공격을 당한다.

    [렘 48:43~44] 모압 백성아, 무서운 일과 함정과 올가미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44) 무서운 일을 피하여 달아난 사람은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기어 나온 사람은 올가미에 걸릴 것이다. 내가 모압 백성에게 징벌을 내리는 해가 오면, 내가 이런 징벌을 그들에게 내릴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이렇게 모압은 하늘과 땅에서 전방위적인 공격을 당해 멸망한다.

     

    모압의 자기 객관화 능력 회복 방법 - 경제적 풍요와 우상 파괴

    그래서 하나님은 모압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게 하신다.

    - 우선 자신을 과신하도록 만든 경제적 풍요를 파괴하신다.

    - 더 이상 포도주를 생산할 수 없게 하신다.

    [렘 48:33] 모압의 과수원과 옥토에는 이제, 기쁨도 사라지고 즐거움도 사라졌다. 술틀에서 포도주가 사라졌다. 환호성을 지르며 포도를 밟던 사람도 없고, 그들의 외침은 더 이상 즐거운 환호가 아니다.

    이를 통해 경제적 풍요는 우연히 생긴 지형적 이점 때문이지,

    - 내면은 여전히 연약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 모압의 연약한 실체를 보게 하신다.

     

    그리고 자신을 불신하게 한 우상도 파괴하신다.

    - 우상 제사장을 없애시고,

    [렘 48:35] 나는 모압의 산당에 올라가서 신들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는 자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나 주의 말이다.

    - 아무리 우상 숭배를 해도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렘 48:37] 과연 모압 사람들이 모두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자르고, 손마다 상처를 내고, 허리에 굵은 베를 걸치고 있다.

    이를 통해 자기 불신은 우상 숭배가 아니라 내면 강화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알려주신다.

    - 바벨론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라 군사력 강화이다.

    - 따라서 모압이 우상을 의지하지 않아도 강한 경제력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면, 자기 객관화 능력이 회복될까?

    - 모압에게 경제력과 우상을 파괴하면, 자기 과신과 자기 불신에서 벗어나,

    -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모압은 자신의 실체를 보았지만, 끝까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지 못했다.

    - 그렇게 자신을 부정한 결과 모압은 멸망 후 회복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다르게 말해서, 모압은 진정한 자신을 마주한 결과 자신을 없애버렸다.

    - 왜냐하면 진정한 자신을 용납하고 인정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 경제력과 우상이 없다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 자신의 실체를 숨기고 자신을 과신하거나 불신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목숨 걸고 거부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부정하는 모압의 태도를 어리석다고 비난한다.

    - 진정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자기답게 사는 것은 마땅한데,

    - 자기다움을 거부한 모압을 이해하지 못한다.

    - 자기답게 살 바에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모압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실제로 진정한 자신을 용납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 모든 사람은 자신을 숨기며 산다.

    - 진정한 자신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 그래서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과신하거나 불신하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 모압은,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자신의 실체, 즉 연약함을 알았다.

    - 군사력이 강하지 못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 지금까지 침략당하지 않은 것은 자기 능력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고,

    - 강한 군대가 오면 언제라도 침략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대한 증거는 명확하다.

    -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했다.

    - 자신의 연약함을 우상이 채워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모압은 자신의 군사적 연약함을 감추고 싶었다.

    - 직면하여 용납할 용기가 없었다.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거부하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 경제적 풍요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했다.

    - 자신은 경제적 풍요를 이룰 만큼 뛰어나고 강한 존재라고 과신했다.

    - 이를 통해 군사적 연약함을 직면하기보다 거부하고 숨겼다.

    게다가 연약함을 숨기고 강함을 내세우기 위해 경제적 풍요를 과시했다.

    - 그래서 풍부한 돈으로 내실을 다지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 외형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만 사용했다.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 그래야 내면의 연약함은 가려지고, 외면의 강함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 이는 다른 사람에게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중요했지만,

    - 특히 자신이 강하다고 세뇌하는 데도 중요했다.

    이렇게 두려움을 극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 안에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 화려한 외형을 내세우며 자신의 강함에 일시적으로 도취할 때는 괜찮다.

    - 그러나 외형을 내려놓고 도취에서 깨어나 홀로 침대에 누워있을 때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 언제든 자신이 침략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의식을 뚫고 올라온다.

    그때라도 두려움을 직면하여 연약함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용납하면,

    -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 외형을 치장하는 대신 군사력을 강화하여 내면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모압은 두려움을 해결할 대상이 아닌 도피할 대상을 찾는다.

    - 그것이 우상이다.

     

    따라서 우상 숭배의 핵심은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있다.

    - 그래서 우상 숭배에는 도취할 만한 화려한 의식이 있고,

    - 그와 함께 마음 안에 두려움을 잊게 할 자해가 포함된다.

    - 육체적 고통을 통해 정신적 두려움을 회피하도록 하는 것이다.

    [렘 48:37] 과연 모압 사람들이 모두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자르고, 손마다 상처를 내고, 허리에 굵은 베를 걸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교회가 지나친 금욕과 봉사를 강요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 금욕과 봉사를 통한 육체적 고통을 가하여 당면한 정신적 두려움을 잊도록 하는 것이다.

    - 마치 마약이 모든 두려움을 잊게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 그런 점에서 종교가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비판을 옳다.

     

    따라서 모압은 자기 과신과 자기 불신을 반복하며 진정한 자신으로부터 멀어졌다.

    - 왜냐하면 진정한 자신을 용납하여 연약함을 실제로 보충하는 것보다,

    - 경제력과 우상에 도취하여 연약함을 잊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압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 내부의 연약함을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 그리고 자신조차 진정한 자신을 거부하기 때문에,

    - 모압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부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 외면의 치장 없이 내면의 성숙을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외면의 치장을 조금 더 하냐 덜 하냐의 차이만 있을 뿐,

    - 모든 사람은 자신을 숨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둘째 치고,

    - 진정한 자신조차 거부하기 때문이다.

    -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을 죽이며 살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신을 용납하는 방법

    그렇다면 진정한 자신을 용납할 용기는 어떻게 생기는가?

    - 이 물음을 뒤집어서, 진정한 자신을 용납하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 왜 모압은 진정한 자신을 거부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냐는 것이다.

     

    원인은 세상에 있다.

    - 세상이 약해 보이는 대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 진정한 자신을 용납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면,

    - 세상은 그의 연약함을 공감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 연약함을 파고들어 공격하고 비난하여 세상에서 퇴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운동은 못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 공부 잘한다고 떠받들지만, 반면에 운동 못한다고 놀린다.

    - 그래서 그런 사람은 운동에는 더 소극적으로 되어, 항상 앉아서 공부만 하게 된다.

    반대로 공부는 못하지만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 운동 잘한다고 떠받들지만, 공부 못한다고 놀린다.

    - 그래서 쉬는 시간이나 체육 시간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 대부분의 수업 시간에는 소외되어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둘 다 못한다면?

    - 따돌림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를 확장하여, 성적이 낮아서 좋은 대학을 못 가면?

    - 일을 못 해서 좋은 직장에 못 가면?

    - 돈이 없어서 좋은 차, 좋은 집이 없으면?

    - 건강이 좋지 않다면?

    세상은 그들의 결핍을 공감하고 보호하여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곳인가?

    - 아니다. 세상은 그들의 결핍을 비난하여 배제하는 곳이다.

     

    이를 증명하는 명확한 증거는 우리 안에 있다.

    - 우리는 성적이 낮아서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할까 봐,

    - 좋은 직장에 가지 못할까 봐,

    - 좋은 차, 좋은 집을 갖지 못할까 봐,

    - 좋은 건강을 갖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갖지 못할 때 당할 세상의 배척을 두려워한다.

    - 우리는 성적이 낮아도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라거나,

    - 건강을 잃어 휠체어를 타도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휠체어를 타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래서 우리는 목숨 걸고 노력한다.

    -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건강을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 그래야만 세상에서 퇴출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렇게 외형을 화려하게 꾸며야 세상에서 거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용납하여 연약함 그대로 노출하면,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이다.

    - 한마디로, 사회적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기 위해 목숨 걸고 노력하는 것이다.

     

    모압이 군사력을 포기하면서까지 경제적 풍요를 과시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 세상에서 약한 자는 사회적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 모압은 사회적 죽음을 피하고자 경제적 풍요를 과시했고,

    - 그것을 위해 군사력을 포기했기 때문에 바벨론에 점령당해서 멸망한 것이다.

    즉, 모압의 의도는 사회적 죽음을 피하는 것이었는데,

    - 의도하지 않게 육체적 죽음을 당했다.

     

    정리하면, 약한 자를 거부하는 세상을 용납하는 한 절대로 사람은 진정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

    -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연약함을 숨기고 강함을 과시해야 한다.

    - 반대로 진정한 자신을 용납하고 자기 연약함을 내세우면, 세상에 적응할 수 없다.

    - 세상은 연약한 사람을 비난하고 배제한다.

    따라서 ‘세상’ 안에 존재하는 ‘사람’은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진정한 자신을 포기하던지,

    - 진정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포기하던지.

    - 진정한 자신을 용납하면서 세상에 인정받는 길은 없다.

     

    이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 세상 측의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연약함을 용납할 수 없었다.

    - 그래서 비난하고 공격하여 퇴출하려 한다.

    -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신다.

    - 자신은 그리스도이지만, 연약한 사람이고 죽임당하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시고 세상에 노출하신다.

    - 화려한 외형으로 치장하지 않고, 진정한 자신을 고수하신다.

    그 결과 예수님은 죽임당하신다.

    - 예수님의 죽음을 육체적 죽음이지만, 육체적 죽음으로만 해석하면 안 된다.

    - 사회적 죽음이 더 큰 비중을 갖는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세상에게 버려진 것이다.

    - 십자가에서 당하신 육체적 고통 이면에 있는 정서적, 사회적 고통이 나체로 벌거벗겨진 모습에서 부각된다.

    이것이 세상과 진정한 자신 중에 자신을 선택한 모든 사람이 겪을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진정한 자신을 선택하면 죽는다.

    - 따라서 진정한 자신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진정한 자신을 선택할 수 있는 원동력이 발생한다.

    - 하나님은 진정한 자신을 선택한 사람을 가만히 죽게 놔두시지 않는다.

    - 그를 다시 살리신다.

    -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로 온 세상에 공표하신 것처럼 말이다.

    진정한 자신을 용납한 사람은 사회적 죽음을 당하지만,

    - 하나님은 그를 사회적으로 부활시키신다.

     

    이 원리를 믿을 때만 세상과 자신의 선택에서 세상을 선택할 힘이 생긴다.

    - 그리고 그 선택을 평생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원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선택할 수 있지만,

    - 세상의 거부를 견디지 못한다.

    - 그래서 결국 자신을 포기하고 세상을 선택한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 본질 그 자체, 진정한 우리다움 뿐이다.

    - 그래서 우리가 우리다워질 때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 그래서 우리가 우리다울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다.

    -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다워질 수 있도록 말이다.

    - 죽더라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없다.

    -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없고,

    - 하나님이 정말 우리다움을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없다.

    -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거부하실 것이라는 불신이 있다.

    이 불신이 우리다움을 포기하게 만든다.

    - 세상에 용납받기 위해 외형을 화려하게 치장하게 만든다.

     

    본문이 정죄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 본문을 겉으로만 보면, 모압의 죄가 교만으로 보인다.

    - 교만하지만 않으면, 구원받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문이 정죄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불신이다.

    -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 부활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이다.

    - 그래서 결국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화려한 외형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즉 화려한 외형을 치장하느라 진정한 자기 내면을 포기했기 때문에,

    - 모압은 멸망한다.

    따라서 우리도 모압처럼 멸망할 것이다.

     

    단락 구분

    ① 29~39절: 멸망 원인인 모압의 교만

    - 29~34절: 멸망 원인 1 - 경제적 풍요

    - 35~39절: 멸망 원인 2 - 우상 숭배

    ③ 40~44절: 모압의 총체적 멸망 선포

    - 40~41절: 교만의 결과 1 - 하늘에서 독수리의 점령

    - 42절: 멸망 원인 - 교만

    - 43~44절: 교만의 결과 2 - 땅에서 함정과 올가미에 빠짐

    ④ 45~47절: 결론 - 멸망 이후 회복 예언

     

    결론 - 자기 객관화 능력 회복의 핵심은 믿음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수 없다.

    - 바르게 보고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는 순간 세상에 거부당할 두려움에 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는 세상이 용납해 줄 수 있는 한계까지이다.

    - 그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은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서 우리의 인격을 왜곡한다.

     

    따라서 세상의 두려움을 극복할 때, 

    - 그것을 위해 사회적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 때,

    - 그것을 위해 부활의 능력을 믿을 때,

    -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만,

    -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확장된다.

    그제야 우리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 생긴다.

     

    그런데 자기 객관화 능력은 타인 객관화 능력으로 확장된다.

    - 다른 사람도 있는 그대로 보고 용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칭찬하고 단점을 사랑하게 된다.

    게다가 이는 하나님 객관화 능력까지 이어진다.

    - 하나님을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한정 짓지 않고,

    - 자신의 필요와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되면, 

    - 그래서 하나님의 찬란한 능력과 영광스러운 지위뿐만 아니라,

    -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하신 갖은 모욕과 수모를 알게 된다.

    - 그러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 하나님을 불쌍히 여기며 마음 아파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시점이다.

    - 하나님의 강함 뿐만 아니라 약함을 보게 될 때,

    - 약함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괴로워할 때,

    - 그 괴로움을 덜어드리기 위해 그 괴로움에 동참할 때,

    - 그때 비로소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끝으로,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경험할 때,

    -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받기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 그럴 때 자신의 연약함까지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며,

    - 그럴 때 진정한 자신을 용납하고 직면하게 되고,

    - 그럴 때 자기 객관화 능력이 회복된다.

    이것만이 인생이고 신앙 생활이다.

    -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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