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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81) 47:1-7 블레셋의 멸망 예언을 듣는 이스라엘의 심정 - 동질감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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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서 말하지만, 블레셋의 멸망 예언은 블레셋을 위한 것이 아니다.

-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이다.

- 따라서 본문을 읽을 때, 자신의 멸망 예언을 듣는 블레셋의 입장이 아니라,

- 이웃 나라 블레셋의 멸망 예고를 듣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블레셋의 멸망을 예고하셨을까?

- 블레셋의 멸망 예고를 들은 이스라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심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블레셋의 멸망을 예고하셨을까?

바로 이 심정, 즉 하나님이 불러일으키고, 이스라엘이 느낀 것을 아는 것이 본문 해석의 핵심이다.

 

이스라엘의 심정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는 예언이 선포된 시기이다.

- 예언은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선포되었다.

[렘 47:1] 이것은,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주님께서 블레셋 사람을 두고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이 있다. 

- 그것은 ‘갈그미스 전투’이다.

- 갈그미스 전투는 전통 강국 이집트가 신흥 강국 바벨론에 패한 전쟁으로,

- 세계 패권이 이집트에서 바벨론으로 넘어간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 이집트가 지배했던 갈그미스 지역에서 바벨론이 이집트를 몰아내는 것을 시작으로,

- 바벨론이 주도권을 잡는다.

- 그 이후 이집트는 쇠락의 길을, 바벨론은 번영의 길을 간다.

그때가 바로 46장의 배경이 되는 BC 605년이다.

- 그래서 46장은 갈그미스 전투가 일어난 해에 선포된 예언이라고 말하면서 시작했다.

[렘 46:2] 이것은 이집트에게 한 말씀으로서,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유다 왕이 되어 다스린 지 사 년째가 되던 해에, 유프라테스 강 근처의 갈그미스까지 원정을 갔다가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에게 격파된 이집트 왕 바로 느고의 군대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번 본문 47장은 갈그미스 전투 직후를 배경으로 한다.

- 그 다음 해 BC 604년에 바벨론은 블레셋 지역까지 내려온다.

- 블레셋 역시 이집트가 지배했던 지역이었지만,

- 바벨론이 이집트를 몰아낸다.

그러니 이집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 블레셋의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그리고 패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다.

- 그래서 이집트는 블레셋 지역의 가사를 치러 간다.

- 가사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사를 지배하는 바벨론을 내쫓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해석해야 본문을 이해할 수 있다.

-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을 이집트가 블레셋의 가사를 공격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나머지 본문을 해석할 수 없다.

- 이집트가 블레셋을 공격하기 전에 블레셋의 멸망을 선포한 예언이라면,

- 블레셋을 멸망시키는 주체는 당연히 이집트여야 했다.

그러나 본문에서 블레셋 멸망의 주체는 이집트가 아니라 바벨론이다.

[렘 47:2] 나 주가 말한다. 보아라, 북녘에서부터 물이 불어 올라서, 범람하는 강물이 되었다. 강물이 땅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며 흐르고, 성읍과 그 주민을 다 같이 휩쓸고 지나갈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으며, 그 땅의 모든 주민이 통곡할 것이다.

이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어려운 점이다.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이 상징하는 것

도대체 왜 바벨론이 공격하여 블레셋을 멸망시킨다는 예언을 이집트가 공격하기 전에 할까?

- 갑자기 바벨론이 왜 나오는 것일까?

답은 ‘바로(이집트)가 가사(블레셋)를 치기 전’에 이미 바벨론이 블레셋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갈그미스 전투 후 바벨론은 블레셋까지 장악했다.

- 그래서 이집트가 가사에 간 이유는 블레셋을 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 블레셋을 장악한 바벨론을 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가사’는 새로운 갈그미스이다.

- 즉, 이집트와 바벨론의 격돌을 상징한다.

이집트와 바벨론이 격돌하여 누가 우위를 점할지 결정되기 직전에

-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우위를 예언한 것이다.

- 그래서 계속 이집트를 의지하는 블레셋이 쇠락하는 이집트와 함께 멸망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

 

따라서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 상황이 상징하는 것은,

- 이집트와 바벨론이라는 두 강국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이다.

- 당시를 기준으로 미래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바벨론의 승리를 알고 있지만,

- 당시 사람들은 이집트가 패할 것이라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 수백 년이 넘도록 주도권을 가졌던 이집트가 패한다는 것은 미국이 세계 주도권을 잃는 것보다 상상하기 더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바로가 가사를 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 곧 바벨론이 물러가고 다시 이집트가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이집트가 패하고 바벨론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결국 이집트는 바벨론에 패하여 주도권을 완전히 잃는다.

[왕하 24:7] 바빌로니아 왕이 이집트의 강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집트 왕에게 속한 땅을 모두 점령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은 다시는 더 국경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블레셋도 당연히 이집트 편에 선다.

- 당시 이집트의 지배를 받던 블레셋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당연히 이집트가 바벨론을 제압하리라 믿었다.

- 잠깐은 바벨론이 지배력을 갖지만,

- 결국 이집트가 돌아와서 바벨론을 몰아내고 지배권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 그렇기 때문에 눈 앞에서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바벨론이 아니라,

- 패하여 돌아간 이집트 편에 서는 것을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 그래야만 블레셋도 이스라엘도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러한 판단을 부정한다.

- 이집트를 의지하는 블레셋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 이집트가 블레셋에 주둔하고 있는 바벨론 군대를 몰아낼 것으로 믿었는데,

- 그래서 바벨론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도 이집트를 의지했는데,

- 오히려 바벨론이 이집트를 몰아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블레셋은 어떻게 되겠는가.

- 괘씸죄로 바벨론에게 더 가혹하게 파괴된다.

[렘 47:4] 블레셋 사람들을 모두 파멸시키고, 두로와 시돈에서 올 수 있는 최후의 지원군들을 모두 멸절시킬 그 날이 왔다. 크레타 섬에서 살아 남은 블레셋 사람들을 나 주가 멸망시키겠다.

처음에 바벨론은 블레셋을 파괴할 의도가 없었다.

- 해안가에 위치한 블레셋을 지배하여 무역로와 군대 이동 경로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 바벨론에 적절하게 협조하면, 블레셋은 국가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블레셋은 바벨론에 협조하지 않았다.

- 바벨론에 끝까지 저항하며, 이집트를 의지했다.

- 그래서 오히려 바벨론에 저항한 죄로 더 가혹하게 파괴당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왜 블레셋은 잘못 판단했을까?

- 왜 블레셋은 이집트가 바벨론을 몰아낼 것으로 믿었을까?

- 왜 블레셋은 이집트보다 바벨론이 더 강하다는 현실을 알지 못했을까?

어쩌면 이러한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

- 2500년 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당시 상황을 손바닥 보듯 자세하게 알고 있지만,

- 당시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조차 알지 못했다.

- 이는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 10년 후에 미국과 중국 중에 누가 세계를 지배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 오히려 10년 후에도 당연히 미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 당시 블레셋도 당연히 이집트가 더 강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 지난 수백 년 동안 이집트가 가장 강했으니까.

- 앞으로도 당연히 바벨론보다 이집트가 강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니까 블레셋은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다.

- 과거 경험을 근거로 적절하게 판단한 것이다.

- 당장은 바벨론이 이겼지만, 일시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 이전에도 수많은 국가가 이집트를 위협했지만, 일시적이었을 뿐 결국 이집트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인류의 속성

그렇다면 블레셋이 이집트가 아닌 바벨론을 의지할 방법은 무엇일까?

- 이것을 알아야, 우리도 현실에서 멸망하지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 뜻에 따를 수 있다.

그러나 방법은 없다.

- 이집트가 패권을 잃고 바벨론이 주도권을 잡을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따라서 멸망하는 수밖에 없다.

 

사람은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 블레셋이 과거에 이집트의 승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과거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 과거의 경험을 부정하는 새로운 경험을 지속하여,

- 과거의 경험을 잊는 것뿐이다.

- 그래서 새로운 경험이 과거의 경험을 대체하는 것뿐이다.

- 그러니까 블레셋이 이집트가 패배하는 경험을 반복해서, 이집트가 언제나 승리했던 과거 경험을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집트가 패할 때, 블레셋도 함께 패한다는 것이다.

- 이집트가 패배하는 경험을 반복한다는 것은 이집트를 의지하는 블레셋 자신이 파괴되는 경험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몰린다.

- 하던 대로, 안전하게, 과거의 경험에 근거하여 이집트를 의지하여 완전히 멸망하거나,

- 과거의 경험을 부정하고 위험을 감수하여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선택인 바벨론을 의지하여 살아남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 과거의 경험을 가진 자신을 지지하고 보호하면, 현재의 자신이 죽고,

- 과거의 자신을 포기하고 죽이면, 현재의 자신이 산다.

 

과거의 자신 vs 현재의 자신

이것이 정말 골치 아픈 문제이다.

- 자신이 자신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중 하나를 선택해서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 당연히 지나간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니, 

-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현재의 자신을 살려야 한다고 쉽게 말한다.

- 이는 블레셋이 이집트를 포기하고 바벨론을 의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는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

- 문제의 핵심은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

-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과거의 자신을 죽이면, 죽음으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 죽음의 고통이 현재의 자신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 현재의 자신을 살리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죽이면, 모든 고통이 현재의 자신에게 밀려온다.

- 그래서 반대로 과거의 자신을 지키면, 오히려 현재의 자신이 죽는다.

- 즉,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현재의 자신을 지켜도 고통스럽고,

- 반대로 과거의 자신을 지키고 현재의 자신을 죽여도 고통스럽다.

그래서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고, 어떤 것도 죽이지 못하여, 사면초가에 빠진다.

 

그런데 사면초가에 빠지면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냐?

- 하던 대로 한다.

- 그래서 과거에 하던 대로, 과거 경험을 근거로 판단한다.

- 즉, 과거의 자신을 살린다.

그 결과 현재의 자신은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블레셋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다.

- 블레셋도 사면초가에 빠졌다.

-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이집트를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자니,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두려웠다.

- 그러나 과거의 자신을 지키고 이집트를 계속 의지하자니, 바벨론의 공세가 두려웠다.

그래서 블레셋이 무엇을 했냐?

-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하던 대로 했다.

- 자기도 모르게 과거의 자신을 살렸다.

-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판단하여, 하던 대로 이집트를 의지했다.

그런데 그 결과 자기도 모르게 현재의 자신을 죽였다.

- 과거 경험에 근거하여 계속 이집트를 의지했고, 그 때문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

- 그래서 블레셋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 그것을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예고하신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여기서도 ‘자기 목숨’과 그냥 ‘목숨’이 구분된다.

- 자기 목숨은 과거의 자신, 목숨은 현재의 자신이다.

- 따라서 과거의 자신을 얻으려는 사람은 현재의 자신을 잃을 것이고,

- 예수님을 위해 과거의 자신을 잃는 사람은 현재의 자신을 얻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도 블레셋처럼 멸망한다.

- 과거의 자신을 얻기 위해 과거의 율법과 성전에 집착한다.

- 그래서 결국 현재의 자신을 잃고, 예수님을 죽이는 저주에 빠진다.

 

그렇다면 사면초가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하던 대로 하지 않을 수 있나?

-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현재의 자신을 살릴 수 있나?

 

문제를 되짚어보자.

- 사면초가에 빠지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중 반드시 하나를 죽여야 다른 하나가 사는데,

- 그래서 현재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를 죽여야 하는데,

-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 그래서 하던 대로 과거를 근거로 판단하여 과거의 자신을 살리니,

- 그 결과 현재의 자신이 죽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핵심은 ‘죽음의 두려움’이다.

-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결국 죽게 된다.

- 죽어야 사는데, 죽지 않아서 죽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관건은 ‘죽음의 두려움’이다.

-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만 사면초가에 빠지지 않는다.

- 하던 대로 하지 않고, 새로운 선택을 한다.

-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현재의 자신을 살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냐?

 

결국 믿음이다.

-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 예수님을 죽음에서 건지신 것처럼 우리도 죽음에서 건지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 믿음만이 죽음의 두려움을 감당하게 하여,

- 현재의 자신을 살리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죽여야 할 때,

- 사면초가에 빠지지 않고, 하던 대로 하지 않고,

- 과거의 경험에 근거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 현재 상황에 맞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만약 블레셋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 바벨론이 이집트를 몰아내고 블레셋을 장악했을 때,

- 무작정 이집트를 의지하여 군사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당연히 이집트에 마음이 기운다.

- 아무리 바벨론이 이집트를 물리쳤다고 해서, 갑자기 바벨론으로 마음이 기울지 않는다.

- 그러나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이 승리하고,

- 또 블레셋에서 이집트 군대가 도망가는 것을 목격했다면,

- 심사숙고해야 했다.

- 세계 정세에 커다란 지각변동이 있다는 것을 직감해야 했다.

그래서 단번에 이집트를 버리고 바벨론을 의지하지는 못해도,

- 전략적 모호성을 가지고 이집트와 바벨론 양쪽 모두와 접촉해야 했다.

- 그래서 세계 패권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예민하게 탐색해야 했다.

- 왜냐하면 잘못 선택해서 망하는 쪽을 의지하면, 함께 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블레셋이 그런 선택을 하려면, 

- 수백 년 동안 이집트의 강력함을 경험했던 과거의 자신을 죽여야 했다.

- 그래야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판단하지 않고,

-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집트와 바벨론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 그래야 세계 패권이 이집트에서 바벨론으로 넘어가는 지각변동의 시기에도 이집트와 함께 쇠락하지 않고, 바벨론과 함께 번영할 수 있다.

 

경험과 선입견의 이중성

이렇게 말한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 언제나 과거의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 어떤 선입견도 가지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 패권이 이동하는 지각변동의 상황에, 

- 하던 대로,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선입견에 따라서 판단했더니, 실패를 반복할 때,

- 또다시 하던 대로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경험과 선입견은 꼭 필요하다.

- 과거의 경험 없이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 경험과 선입견 없는 판단은 연필 굴려서 찍는 것과 같다.

- 경험과 선입견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마치 아무 경험도 없는 갓 태어난 아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두렵다.

- 땅이 무너질까 봐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고,

- 독이 들어있을까 봐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없다.

- 경험과 선입견을 부정하면,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사람의 경험은 제한적이다.

- 삶에는 경험에서 벗어나는 상황이 반드시 온다.

- 그래서 경험대로만 판단하면 문제가 생기는 상황이 온다.

-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반복해서 경험대로 판단하고, 반복해서 문제를 일으킨다.

- 그래서 현재 인생을 망친다.

여기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 평안할 때는 경험대로 판단하는 것이 좋다.

- 굳이 경험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경험대로 판단해서 생긴 위기에는 경험을 부정해야 한다.

- 그래야 반복되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블레셋도 멸망한 것이다.

- 단순히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 과거의 경험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말이다.

하던 대로, 과거의 경험에 따라 내린 판단이 문제를 일으켰으면, 바꿔야 했다.

- 과거의 경험에 따른 판단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 그래서 선입견 없이 이집트와 바벨론을 객관적으로 비교했어야 했다.

그러나 블레셋은 문제가 일어나는데도 이집트에 집착했다.

- 그래서 결국 이집트와 함께 멸망했다.

 

결론 - 블레셋의 멸망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의 심정은?

블레셋의 멸망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의 처음 반응은 ‘조롱’이었을 것이다.

- ‘그러면 그렇지. 금수 같은 이방인은 멸망해야 마땅하지. 어리석은 족속들.’이라며 혀를 찼을 것이다.

- 선민사상에 도취된 이스라엘 입장에서 더러운 이방 민족의 멸망 소식은 마냥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 게다가 블레셋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민족이다.

이러한 정황 때문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멸망 원인을 살펴보지도 않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런데 블레셋의 멸망을 곱씹을수록 찝찝했다.

- 멸망의 주체가 바벨론이기 때문이다.

- 바벨론이 이집트를 몰아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집트가 가장 강하다고 믿으며 이집트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블레셋이 멸망한 상황과 자신의 상황이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블레셋의 멸망을 비웃으며 기뻐했지만,

- 점차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온다.

- 남 일이라 생각했던 블레셋의 멸망이 자기 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는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했을 때 예언자 나단의 경고 방식과 같다.

- 나단은 다윗의 간음을 바로 지적하지 않는다.

- 먼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유일한 어린 양을 빼앗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 그에 다윗은 분개하며 정죄한다.

[삼하 12:5] 다윗은 그 부자가 못마땅하여, 몹시 분개하면서, 나단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서 맹세하지만,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때 나단은 그 부자가 바로 다윗이라고 지적한다.

[삼하 12:7]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 

- 다윗이 모든 것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충신의 아내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나단은 다윗이 자신을 정죄하도록 만든다.

- 그래서 다윗이 자기 죄를 정확하게 깨닫고 회개하도록 한다.

 

하나님이 블레셋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이유도 이와 같다.

- 이스라엘이 자기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 블레셋의 멸망을 마땅하다고 자백하도록 하여,

- 같은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 자신의 멸망도 자명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신도 블레셋처럼 과거의 경험에 집착했다.

-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어리석게도 한물간 이집트를 계속 의지했다.

- 그래서 블레셋처럼 이집트와 함께 멸망하기 일보 직전이다.

이스라엘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 죄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블레셋의 멸망 예언을 하신 목적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조롱과 비난, 후에는 동질감과 죄책감을 느끼도록 블레셋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집착하지 않고 객관적, 합리적으로 판단하기를 바라셨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살아남길 바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내 죄를 회개하지 않았고, 블레셋과 함께 멸망한다.

- 끝까지 이집트를 의지하고 바벨론에 저항하다가, 

-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

여기까지가 성경의 결론이다.

 

이스라엘의 멸망 예언을 들은 우리의 심정은?

그렇다면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온다.

- 우리는 이스라엘의 멸망 예언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가?

- 이스라엘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죄책감을 느꼈는가?

- 아니면 끝까지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보며 조롱과 비난을 했는가?

백번 양보해서, 조롱과 비난은 하지 않았더라도, 

-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안타까워하며,

- 어떻게 저렇게까지 죄를 깨닫지 못하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는가!

- 남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이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경고한다.

- 이스라엘과 똑같이 우리가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 하던 대로, 경험대로 판단해서, 계속 문제가 생기지만,

- 계속해서 과거의 경험에 집착하고 있다고.

그래서 자신이 자신을 죽여가고 있다고.

 

성경은 블레셋의 멸망 예언을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경을 깨닫지 못했다.

똑같이 성경은 이스라엘의 멸망 예고를 통해 우리의 멸망을 예언한다.

- 그러나 우리도 성경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기회를 버렸다.

- 그래서 하나님의 예고대로 멸망했다.

우리도 수많은 기회를 버렸다.

- 그래서 하나님의 예고대로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적은 기회가 남아있다.

- 아직 이스라엘과 동질감과 죄책감을 느낄 기회가 있다.

- 우리가 블레셋처럼, 이스라엘처럼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을 기회가 있다.

 

이 기회를 잡고 과거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사람은 예레미야처럼 구원받을 것이다.

-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과 자신을 구분하고,

- 계속해서 죽음의 두려움에 짓눌려서,

- 과거의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 블레셋처럼, 이스라엘처럼 멸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