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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74) 42:1-22 이집트로 도망가는 이스라엘 - 문제 해결이 아닌 문제 도피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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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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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렘 42:20] ・・・・ 그러나 여러분은 이 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 우선, 치명적인 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 특히 더 악질적인 것은 바로 직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실천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렘 42:5~6] 그들도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였다. “진실하고 신실한 증인이신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맹세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예언자님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예언자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시는 말씀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6) 우리가 예언자님을 주 우리의 하나님께 보내는 것은, 그분의 응답이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렘 42:20] 여러분은 나를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보내면서, 나에게 간구하였습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드려 주십시오. 그리고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알려 주십시오.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간구하였습니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렘 42:21]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을 다 알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나에게 청해서, 여러분의 하나님 주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렘 43:2~4]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고집이 센 모든 사람이, 예레미야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우리가 이집트로 가서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을 리가 없소. (3) 이것은 틀림없이,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우리를 바빌로니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주어서 그들이 우리를 죽이거나 바빌로니아로 잡아가도록 하려고, 당신을 꾄 것이오.” (4)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지휘관과 온 백성은, 유다 땅에 머물러 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땅을 떠나 이집트로 간다.

[렘 43:5~7] 마침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지휘관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다가 유다 땅에서 살려고 돌아온 유다의 살아 남은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6) 남자와 여자와 어린 아이들과 공주들과,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요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리야에게 맡겨 놓은 모든 사람과, 예언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까지 데리고서, (7) 이집트 땅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그들은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다. ・・・・

이렇게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이집트로 간 것을 치명적인 실수라고 말한다.

 

왜 치명적인 실수냐?

- 이집트에서 전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렘 42:17] 마침내 이집트 땅에서 머물려고 그 곳에 내려가기로 작정한 모든 사람은, 거기에서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에서 아무도 벗어나거나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렘 42:22]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 가서 정착하기를 바라는 그 곳에서,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이렇게 이스라엘은 이집트로 가는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죽는다.

 

본문 해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했지만, 따르지는 않았다. 거부했다.

- 그래서 멸망해 죽는다.

- 앞의 두 문장은 해석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을까?

-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면 이해할 수 있다.

-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니까.

- 그러나 그들은 애써서 예레미야를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달라고 간구했다.

- 그래 놓고 무슨 이유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을까?

이 질문까지 답해야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시 샛길로 빠져서, 많은 사람이 본문 해석을 착각한다.

- 그래서 이렇게 해석한다.

-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으나, 이스라엘이 거부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심판받아 모두 죽었다.”

-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심판받으니, 모두 순종하자.”

- 여기서 해석을 끝낸다.

이 해석은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

- 본문에 나온 몇 구절을 적당히 이어 붙인 것뿐이다.

- 본문을 요약한 것뿐이다.

만약 이것이 해석이라면,

-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여 심판받는 이야기 다수와,

- 아주 드물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 받는 이야기 소수가 반복하는 것뿐이다.

- 이렇게 성경을 반복이라고 하면, 성경 전체가 부정된다.

-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성경을 자세히 읽을 필요가 없다.

- 그냥 순종하고 착하게 살면 된다.

 

그러나 성경은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책이 아니다.

- 모든 구절이 전부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

-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

물론 같은 메시지처럼 보이는 구절이 있다.

- 그러나 맥락이 다르고, 기록 배경이 다르다.

- 같은 말도 맥락과 배경이 다르면, 다른 메시지가 된다.

- 마치 사랑한다는 말이 안전한 가정에서 했을 때와 위험한 전쟁터에서 했을 때 전혀 다른 뜻을 갖듯이 말이다.

 

따라서 해석은 다른 어떤 구절도 갖지 않은, 이 구절만이 전하는 특별한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 그것을 위해 맥락과 기록 배경을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 문장의 순서와 배치, 반복하는 단어, 문장의 길이 등을 세밀하게 읽어서,

- 미묘하게 강조하려 하는 것과 미묘하게 숨기려 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 강조와 숨김을 통해 드러내려는 미묘한 메시지를 가려내야 한다.

그렇게 본문만이 가진 정체성, 독립성, 고유성, 능동성, 주체성을 밝혀내는 것이 해석이다.

- 그 노력으로만 글자가 생명이 된다.

- 그 생명을 통해 성령이 소환된다.

 

사람도 어떤 면에서 다 똑같이 생겼다.

- 눈 둘, 코 하나, 입 하나, 귀 둘이라는 것은 전부 같다.

- 그러나 사람마다 고유한 특징이 있다.

- 장점과 단점이 다 다르고, 각자의 매력이 다 다르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눈, 코, 입, 귀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 그 사람 고유의 매력, 정체성, 취향, 목표를 아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눈, 코, 입, 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 그 사람의 내면, 정체성,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더욱더 선명하게 인식하고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성경 해석을 통해 본문 고유의 정체성과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표현하도록 하는 것처럼 말이다.

 

본문 메시지도 큰 틀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심판받는 식상한 내용이다.

- 이는 너무 당연해서 본문이 과연 필요한지 의심될 지경이다.

하지만 본문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한다는 사실만 전달하지 않는다.

- 이 맥락에서 불순종이 갖는 새로운 의미가 있다.

- 불순종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이 있다.

이것을 밝혀내어, 본문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을 발산하도록 하는 것이 해석이다.

 

그렇다면 본문만이 가진 고유한 특징은?

결론부터 말해서,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지만, 

- 정작 드러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본심’이다.

-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담는 그릇일 뿐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의 본심을 드러내는 특별한 방식을 사용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본심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 9~1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① 9~12절: 회복 예언 선포 -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 땅에 머물면, 회복시키겠다.

② 13~14절: 질문 - 전쟁, 비상 나팔 소리,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가겠다는 것이냐?

③ 15~18절: 멸망 예언 선포 - 이집트로 가면, 전쟁, 기근, 염병으로 죽을 것이다.

- 하나님은 순종했을 때의 회복과 순종하지 않았을 때의 멸망을 예언하시며,

- 그 사이에, 그런데도 왜 이집트로 가냐고 이스라엘에게 반문하신다.

이러한 구조가 전하는 바가 있다.

- 본문의 핵심은 예언 선포가 아니다.

- 예언 선포 사이에 있는 질문이다.

- 멸망 예언을 듣고도 이집트로 가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강력한 의지’이다.

[렘 42:13~14] 그런데도 너희가 나 주 너희 하나님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이 땅에 머물러 살지 않겠다는 것이냐? (14) 그것만은 안 되겠다는 것이냐? 오직 이집트 땅으로 들어가야만 전쟁도 겪지 않고, 비상 나팔 소리도 듣지 않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지 않아도 되니, 그리로 가서 거기에서 살겠다는 것이냐?

 

이스라엘의 본심은 애초부터 이집트로 가는 것이었다.

- 그것을 13~14절에서 명확히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가려는 강력한 의지를 갖는 이유가 무엇이냐?

- 그것을 하나님의 예언 선포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하나님 말씀의 해석

먼저 9~12절 회복 예언 선포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고 하신다.

-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땅에서 머무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뭐냐?

- 직접적으로는 바벨론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렘 42:11] 너희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그 바빌로니아 왕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너희를 구원하여 주고,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려고 하니, 너희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 주의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왜 두려웠냐?

- 불과 몇 달 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이다.

- 게다가 바벨론의 총독 그달리야까지 죽였기 때문이다.

- 그래서 바벨론 군대가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기 일보 직전이다.

따라서 바벨론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땅에 머물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유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 먼저 11절에서 하나님이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렘 42:11] 너희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그 바빌로니아 왕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너희를 구원하여 주고,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려고 하니, 너희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 주의 말이다.

- 이것이 드러내는 것은, 이스라엘이 현재 하나님께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다.

- 이스라엘은 바벨론이 공격할 때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즉,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두려워한 것은 바벨론이 두려웠기 때문이기보다, 

- 바벨론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 하나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이스라엘 땅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했고,

- 그래서 이스라엘 땅을 떠나 이집트로 가려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부터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 그러니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는 것이다.

 

게다가 10절은 이스라엘의 선입견을 증명한다.

- 하나님이 실제로 이전까지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렘 42:10] 너희가 이 땅에 그대로 머물러 살면, 내가 너희를 허물지 않고 세울 것이며, 내가 너희를 뽑지 않고 심겠다.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렸으나, 이제 내가 뜻을 돌이켰다.

- 하나님은 이전까지 이스라엘을 허물었고, 뽑아버렸으며, 재앙을 내렸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다.

- 그러니까 하나님을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고 멸망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

- 이제부터 세울 것이며, 심을 것이다.

- 그리고 자비를 베풀 것이다.

[렘 42:12] 내가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바빌로니아 왕이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고향 땅으로 되돌려 보내게 하겠다.

- 그러니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고 호소하신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선입견은 옳았다.

- 이전에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원하실 마음이 없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호소하신다.

- 이제는 뜻을 돌이켜서,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 바벨론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 그러니 선입견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 그래서 바벨론을 피해 이집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고 말이다.

 

하지만 13~14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호소를 무시한다.

- 이집트로 갈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다.

-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까?

- 하나님의 호소보다 이스라엘에게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이 멸망 예언 선포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15~18절 멸망 예언 선포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전쟁, 기근, 염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 그런데 전쟁, 기근, 염병이 상징하는 바가 있다.

- 그것은 이스라엘이 정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며,

- 반대로 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보다 더 욕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쟁, 기근, 염병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했다.

[렘 42:16] 너희가 두려워하는 전쟁이 거기 이집트 땅으로 너희를 쫓아갈 것이며, 너희가 무서워하는 기근이 거기 이집트에서 너희에게 붙어 다닐 것이다. 너희는 거기에서 죽을 것이다.

-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집트로 가면서까지 전쟁, 기근, 염병을 피하려고 했다.

- 이집트로 가야만, 전쟁, 기근, 염병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렘 42:14] 그것만은 안 되겠다는 것이냐? 오직 이집트 땅으로 들어가야만 전쟁도 겪지 않고, 비상 나팔 소리도 듣지 않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지 않아도 되니, 그리로 가서 거기에서 살겠다는 것이냐?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전쟁, 기근, 염병에서 피하길 원했다.

- 이스라엘은 전쟁, 기근, 염병에서 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커서,

- 하나님조차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렘 42:11] 너희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그 바빌로니아 왕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너희를 구원하여 주고,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려고 하니, 너희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 주의 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어떻게 하나님보다 전쟁, 기근, 염병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 어떻게 전쟁, 기근, 염병에서 피하고자 하는 욕망에 짓눌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었을까?

 

이스라엘의 욕망은 단순하다.

-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그런데 문제를 직면하고 극복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 문제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도피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에서 도피하면, 결국 문제는 다시 생긴다.

- 인생에서 문제는 언제나 있는 것이고,

-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같은 문제를 피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문제가 또 온다.

따라서 문제에서 도피하기만 하는 선택은 악수 중의 악수이다.

-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문제를 키우기 때문이다.

- 그래서 문제로 인한 피해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번 모든 문제를 전부 직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 문제에 파묻혀서 내면의 힘이 고갈되었을 때는 도피할 수 있다.

- 그러나 도피하는 이유가 내면의 힘을 모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될 때만 좋다.

- 도피 자체가 목적이 되면 나쁘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문제 도피 욕망을 최우선으로 두었다.

- 그런데 이 욕망 때문에 하나님과 충돌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문제에서 도피하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인생의 방해꾼으로 여겼다.

- 이스라엘이 문제에서 도피하여 전쟁, 기근, 염병을 피하려면, 이집트로 도망가야 하는데,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땅에서 떠나지 말라고 하셨다.

- 전쟁, 기근, 염병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 이는 이스라엘에게 문제에 파묻혀 죽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 이스라엘 땅은 바벨론에 의해 죽임당하는 문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죽음으로 내던지는 살인마처럼 보였다.

-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 이러한 판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 살인마인가? - 문제 도피가 아닌 문제 해결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땅에 머무르라고 하셨을까?

- 하나님은 정말 이스라엘을 죽이시려고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고 하셨을까?

- 그곳에 있으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죽임당할 수 있는데 말이다.

- 그러면 하나님이 살인마가 되는 것인데 말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러한 간극이 생긴 이유는 하나이다.

- 하나님의 소망과 이스라엘의 욕망이 달랐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의 욕망은 ‘문제 도피’였지만,

- 하나님의 소망은 ‘문제 해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 문제 상황에 머물면서 문제를 경험해야 한다.

- 그래서 하나님은 문제의 중심이 되는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 문제 상황에 머무는 것 자체를 견딜 수 없었다.

 

하나님의 소망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 그런 점에서 문제 해결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 어차피 내면의 힘이 생기면, 문제는 해결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면의 힘을 키우는 과정에는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악화하기도 한다.

- 마치 운동 선수가 시합할 때보다 훈련할 때 실수를 많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 다양한 실수를 경험하는 것 자체가 훈련의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실수하고 문제가 악화하는 과정을 통해 문제 해결 능력을 훈련하고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다.

- 그렇게 내면의 힘을 키울 때 다양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 모든 문제를 전부 해결할 수 없더라도,

- 문제 상황에서 자신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다.

- 문제가 생겨도 당황하여 도피하지 않고,

-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든 해결하지 못하든, 상황을 주도할 수 있다.

- 그렇게 해결하면 해결한 데서, 해결하지 못하면 해결하지 못한 데서 새로운 경험을 쌓고,

-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망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죽이시려고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살아가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땅은 문제 해결 능력을 배우는 최적의 훈련소이다.

- 왜냐하면 훈련소가 가져야 할 두 가지 특징 때문이다.

- 첫째로, 훈련소에는 실제와 똑같은 문제가 있어야 한다.

- 그래야 실제와 같은 훈련을 할 수 있다.

- 둘째로, 그러나 아무리 실제와 똑같아도 완전히 똑같으면 안 된다.

- 훈련소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실제로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

- 그래야 안심하고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다.

반대로, 만약 훈련소가 실제와 달라도, 혹은 훈련소가 실제와 너무 똑같아도, 훈련이 안 된다.

- 실제와 다른 훈련은 소용이 없고,

- 너무 똑같으면,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 땅이 딱 그렇다.

- 이스라엘 땅은 바벨론의 위협이 실재하는 곳이기 때문에 첫째 조건을 만족한다.

- 게다가 하나님이 구원을 보장하신 곳이기 때문에 둘째 조건도 만족한다.

- 실제처럼 훈련할 수 있는 곳이지만,

- 훈련하다가 실수하고 실패해도 안전한 곳이다.

하나님은 이런 장소를 통해 이스라엘이 문제 해결 능력을 배우기를 원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소망을 가지셨을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문제 해결 능력을 배우길 원하셨을까?

-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원하지 않는, 하나님만 원하시는 문제 해결 능력을 소망하셨을까?

- 하나님이 정말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면, 이스라엘이 변화되길 소망하지 않고, 

-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셔야 하는 것 아닐까?

- 문제에서 도피하기만 하는 이스라엘을 용납하고 사랑하셔야 하는 것 아닐까?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문제에서 도피하여 이집트로 도망간다.

- 그러나 문제가 이스라엘을 따라 이집트까지 쫓아간다.

- 그래서 문제에 빠져버린다.

[렘 42:15~16] ・・・・ 너희가 이집트로 들어가려고 하고, 그 곳에서 살려고 내려가면, (16) 너희가 두려워하는 전쟁이 거기 이집트 땅으로 너희를 쫓아갈 것이며, 너희가 무서워하는 기근이 거기 이집트에서 너희에게 붙어 다닐 것이다. 너희는 거기에서 죽을 것이다.

즉, 문제에서 도피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 문제에서 도피할수록 더욱 문제에 종속된다.

 

풀어 말하면,

- 이스라엘은 바벨론이라는 문제를 주체적, 능동적으로 해결했어야 한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바벨론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간다.

- 이집트가 바벨론을 막아줄 것을 기대하여, 주체성을 버리고 이집트에 종속된다.

이 종속이 문제의 핵심이다.

- 본문에서는 이집트가 바벨론을 막아주지 못한다.

- 그래서 이집트에 종속된 이스라엘도 멸망한다.

그러나 만약 이집트가 바벨론을 막아준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공격을 피하더라도,

- 이집트의 종속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생명같이 귀한 것을 요구할 것이다.

- 그러면 결국 이스라엘은 살아있기만 할 뿐, 생명을 잃은 처지가 될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 주체성과 능동성을 잃고 종속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잃는다.

- 물론 그것이 즉시 드러나지 않는다.

-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의지한다고 즉시 멸망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 그러나 종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멸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그토록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 이집트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 의지하면 종속되고, 종속되면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 특히 주체성, 능동성, 자기다움을 잃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가면 ‘죽는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 실제로 죽기도 하지만, 자기다움을 잃는 것은 죽음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집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다움을 지키길 원하셨다.

- 주체적, 능동적으로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길 바라셨다.

- 그래서 이스라엘 땅이라는 최적의 훈련장도 마련하셨다.

- 그곳에 있으면, 어떤 위험에서도 지키고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셨다.

-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문제 해결 능력을 소망하신 이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당장 문제가 사라지는 것만을 바랐다.

-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도피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이스라엘은 자기다움을 내던졌다.

- 이집트에 종속되었다.

- 주체적,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포기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자멸할 수밖에 없다.

- 마치 세균에 저항하는 면역력을 잃은 환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 환자를 죽도록 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세균이지만,

- 근원적인 원인은 면역력을 잃은 환자 자신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가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이다.

[렘 42:17] 마침내 이집트 땅에서 머물려고 그 곳에 내려가기로 작정한 모든 사람은, 거기에서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에서 아무도 벗어나거나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 주체성을 포기하고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하면, 죽는 것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의 진정성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변화하길 바라셨다.

- 이스라엘이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길 소망하셨다.

- 이스라엘이 주체성, 능동성, 자기다움을 갖추길 원하셨다.

- 게다가 변화하지 않을 경우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 그리고 그 경고대로 변화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조건을 제시하셨고,

- 조건을 충족할 때만 구원받고, 그렇지 못할 경우 멸망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조건 제시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이러한 조건적인 사랑을 진정성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은 조건적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 무조건적인 사랑만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 왜냐하면 사랑은 반드시 대상의 존재 전체를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조건적인 사랑은 조건에 부합해야만 사랑한다는 것이다.

- 이는 조건에 부합하는 일부는 사랑하지만, 

-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나머지 일부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그래서 조건적인 사랑은 나머지 일부까지 조건에 부합하라는 강압이 수반된다.

따라서 조건적인 사랑은 반쪽짜리 사랑이고, 반쪽짜리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당연히 옳은 말이다.

- 무엇인가를 해야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조건적인 사랑을 세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건을 제시한다고 전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육아의 예를 들어,

-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조건이 있을 수 있다.

- 가령 자녀가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랄 수 있다.

- 그래서 구체적으로 양치질을 잘하길 바랄 수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양치질을 잘하는 조건을 충족하길 바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 양치질 잘하길 바란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양치질 잘해서 건강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양치질하지 않았을 때 일어난다.

- 사랑하냐 사랑하지 않냐는 여기서 갈린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가 양치질 하지 않았다고 사랑을 거두지 않는다.

- 여전히 사랑한다.

- 동시에 양치질 잘할 수 있도록 돕는다.

- 조건을 만족하여 건강해질 수 있도록 이끈다.

- 왜냐하면 그 조건을 충족할 때 자녀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녀가 계속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 끝까지 인내와 절제로 돕는다.

-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하지만,

- 동시에 조건을 충족하도록 친절하게 돕는다.

이는 조건을 제시하지만, 완벽한 사랑이다.

-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조건을 제시하는 사랑’이다.

 

반면에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가 양치질하지 않을 때 사랑을 거둔다.

- 자녀가 양치질을 잘하게 되어 건강해지는 것에 관심이 없다.

- 양치질하지 않은 것에 관심을 집중한다.

-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에 집중한다.

- 왜냐하면 자녀의 건강보다 조건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가 조건을 충족할 때만 사랑하고, 충족하지 못할 때는 사랑하지 않는다.

- 인내와 절제로 조건을 충족하도록 돕지 않고, 조건을 충족하라고 강요한다.

- 조건을 충족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위협한다.

이는 사랑이 아니다.

- 말 그대로 ‘조건적인 사랑’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조건을 제시하는 사랑’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조건을 제시하시고, 조건을 충족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위협 때문에 이스라엘 땅에 머물기를 두려워할 때,

-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는 조건을 제시하시며, 

- 이스라엘 땅에 머물러 조건을 충족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셨다.

- 이렇게 하나님은 조건 자체보다 이스라엘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게다가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조건을 충족하지 않았어도,

- 하나님은 끝까지 인내와 절제로 이스라엘을 도우셨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안전장치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땅을 떠나 멸망했을 때,

- 멸망해서 사라지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고,

- 인내와 절제로 다시 회복하여 이스라엘 땅에 돌아오도록 하셨다.

- 그래서 무너진 성문과 성전을 재건하여 이스라엘답게 살도록 도우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조건을 제시하시지만,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만약 무조건적인 사랑은 무조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면,

-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양치질하라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 그것은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

무조건적인 사랑 역시 구분해야 한다.

-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관심한 사랑’은 다르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조건을 제시하지만,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도 무조건 사랑한다.

- 반면에 무관심한 사랑은 대상이 행복해지는 것조차 관심이 없다.

- 그래서 자녀가 양치질하지 않아서, 이가 썩어 치통에 시달려도, 아무렇지도 않다.

- 자녀의 고통에 함께 고통스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지만,

- 이스라엘을 정말 사랑하시기 때문에 조건을 제시하신다.

- 이스라엘이 고통당할 때 하나님도 함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고통당하지 않도록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는 조건을 제시하신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결론 -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조건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듯 우리도 진정으로 사랑하신다.

- 그래서 ‘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조건을 제시하는 사랑’으로,

- ‘무관심한 사랑’이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 조건을 제시하시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도 무조건 사랑하시지만,

- 동시에 조건을 충족하도록 인내와 절제로 도우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는 조건을 제시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조건은 무엇일까?

-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딱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이것이다.

- ‘자기다움’이다.

- 인생을 자기답게, 주체적, 능동적, 적극적, 주도적으로 사는 것이다.

- 상황에 휩쓸리기만 하지 않고, 그렇다고 반대로 상황을 주도하기만 하지 않고,

- 상황에 적응하려고만 하지 않고, 그렇다고 반대로 상황을 바꾸려고만 하지 않고,

-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

때로는 상황에 자신을 맞추고, 또 때로는 상황을 자신에 맞게 바꾸는데,

- 그것을 자기 스스로 선택하기를 바라신다.

그럴 때만 자기다울 수 있고, 

- 자기다울 때만 사랑할 수 있고,

- 사랑할 때만 충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다움이란 조건을 제시하신다.

 

그런데 자기답기 위한 중요한 능력이 ‘문제 해결 능력’이다.

- 문제 해결 능력은 자기다운 선택 능력의 한 종류로, 

- 문제 상황에서 자기답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이 능력이 왜 중요하냐면,

- 문제가 없는 평화로운 상황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답게 선택할 수 있다.

- 자기다움을 제약하는 방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겨서 자기다움이 제약될 때 많은 사람이 자기다움을 포기한다.

- 자신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하고,

- 지나치게 상황에 휩쓸리거나, 지나치게 상황을 주도하려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냐면, 문제가 그 자체로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 그래서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고 도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 상황을 주신다.

- 문제에서 도피하지 말고 직면하라는 조건을 주신다.

- 그래서 우리가 문제 상황에서도 자기답게 선택할 수 있도록 훈련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나 자기다울 수 있고,

- 그래서 자기답게 사랑할 수 있으며,

- 그래서 사랑으로 충만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바람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오해한다.

-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한다.

- 하나님을 문제 도피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어도 문제가 사라지지 않으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정한다.

- 문제 상황을 주시하는 하나님에게 사랑이 없다고 불평한다.

-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하나님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 이 불신 때문에 본문에서 이스라엘도 이스라엘 땅을 떠난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언제나 자기다울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물론 누구도 문제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 문제는 언제나 괴롭고 아프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 약간 괴롭고 아플 수 있지만, 

- 내가 언제나 함께하며, 우리를 지키고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 이 과정을 통해 자기다움이 굳건하게 세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답도록 이끄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며, 

-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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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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