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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72) 39:1-40:6 완벽한 예언 성취는 기쁨일까 슬픔일까?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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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렘 39:1~2] 유다 왕 시드기야 제 구년 열째 달에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였는데, (2) 시드기야 제 십일년 넷째 달 구일에 마침내 성벽이 뚫렸다.

- 예루살렘 도성이 바벨론 군대에 정복되었다.

그래서 바벨론 군대는 이스라엘의 영토을 파괴했다.

-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도 포로로 잡아갔다.

[렘 39:8~9] 바빌로니아 군인들은 왕궁과 민가에 불을 지르고, 예루살렘의 성벽들도 허물어 버렸다. (9) 그런 다음에,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아직도 성 안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투항한 사람과 그 밖에 남은 백성을 바빌로니아로 잡아갔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상 이상의 충격이었다.

- 단순히 재산과 주권을 잃어버린 상실감이 아니다.

- 가치관, 세계관과 같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기반이 무너진 충격이었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영원무궁할 것이라는 신념 위에 세워진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절대로 멸망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영원히 지키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죽음과 같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하나님이 죽은 것과 같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 이는 자신이 죽고, 가족과 민족이 죽고, 세상이 전부 죽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놀랍지 않다.

- 왜냐하면 이미 역사를 통해 멸망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 특히 예레미야서에서 예레미야가 셀 수 없이 반복해서 예언했기 때문이다.

- 예언 성취를 믿는 우리에게 이스라엘 멸망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본문도 이스라엘의 멸망을 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 간략하게 몇 가지 사실만 언급한다.

-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침투했고,

- 예루살렘 성 안을 파괴했으며,

-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잡아갔다고 짧게 말한다.

반대로 말해서, 예루살렘 성이 파괴될 때의 참혹함이나,

- 성 안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 참혹함과 비참함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 예레미야가 예언을 통해 이미 참혹함과 비참함을 예고했다.

그런데도 침묵한 이유는 본문이 부각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멸망 자체가 아니라,

-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 드러난 예언 성취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멸망을 예언할 때는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이 없었다.

- 대부분이 예레미야를 정죄하며 부정했다.

- 오히려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평안을 예언했다.

- 그래서 평안을 예언했던 거짓 예언자가 활개 쳤다.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이 전부 틀렸고,

- 예레미야 혼자만 옳았다.

-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본문의 목적이다.

 

그런데 본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 예레미야의 예언은, 엄밀하게 말해서, 멸망 예언이 아니었다.

- 멸망과 구원을 동시에 예언했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멸망을,

-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예언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바벨론에 항복하면 살아날 것이지만,

-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바벨론에 저항하면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렘 38:17~18] 그러자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말하였다. “주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임금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바빌로니아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여야 한다. 그러면 너는 너의 목숨을 구하고, 이 도성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와 너의 집안이 모두 살아 남게 될 것이다. (18) 그러나 네가 바빌로니아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이 도성이 바빌로니아 군대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그들은 이 도성에 불을 지를 것이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예언을 성취하셨다.

- 멸망 예언만이 아니라, 구원 예언까지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바벨론에 저항한 시드기야는 예언대로 멸망한다.

[렘 39:4~7]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모든 군인들은 쳐들어오는 적군을 보고서, 모두 도망하였다. 그들은 밤에 왕의 동산 길을 통과하여, 두 성벽을 잇는 통로를 지나, 아라바 쪽으로 도망하였다. (5)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대가 그들을 추격하여,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를 사로잡아, 하맛 땅의 리블라로 끌고 가서,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 앞에 세워 놓았다. 바빌로니아 왕이 시드기야를 신문하였다. (6) 바빌로니아 왕은 리블라에서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처형하였다. 바빌로니아 왕은 유다의 귀족들도 모두 처형하였다. (7) 그리고 왕은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다음에, 바빌론으로 끌고 가려고, 그를 쇠사슬로 묶었다.

- 시드기야는 바벨론 군대를 피해 남쪽 이집트를 향해 도망가다가, 여리고 평원에서 잡힌다.

- 시드기야는 그의 아들들이 눈 앞에서 죽는 것을 본 후,

-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벨론에 끌려간다.

예레미야는 바로 전 38장에서도 시드기야에게 경고했다.

-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으면, 자긴뿐만 아니라 가족과 민족까지 멸망할 것이라고.

그리고 예언은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 시드기야와 그의 가족 그리고 민족은 멸망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바벨론에 항복한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은 구원받는다.

- 예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는 예언대로 바벨론 근위대장에게 보호받는다.

[렘 39:11~12]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은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의 처우를 두고, 이렇게 명령하였다. (12) “너는 그를 데려다가 잘 보살펴 주어라. 너는 그를 조금도 해치지 말고, 오직 그가 너에게 요구하는 대로 그에게 해주어라.”

- 예레미야를 구해주었던 에벳멜렉도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가운데 예언대로 생명을 얻는다.

[렘 39:15~18] 예레미야가 여전히 근위대 뜰 안에 갇혀 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6) “너는 저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멜렉에게 가서, 이와 같이 전하여라.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 (18) 오히려 내가 너를 반드시 구해서, 네가 칼에 죽지 않게 하겠다. 네가 나를 의지하였기 때문에, 내가 너의 생명을 너에게 상으로 준다. 나 주의 말이다.’”

 

우리에게 시드기야의 멸망과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의 구원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 그렇게 판단한 기준은 믿음이다.

-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거부했고,

-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죽음을 감수하며 따랐다.

- 단순 명료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 판단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파격 그 자체였다.

-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정이다.

- ‘하나님의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나님께 선택받은 거룩하고 거룩한 왕’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 반대로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예언을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해서 신성모독으로 감옥까지 간 예레미야는 구원받는 현실을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거룩함의 상징인 왕이 멸망하고, 부정함의 상징인 죄인이 구원받는 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뇌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 이는 마치 우리에게 가장 부자이며 사회에 최고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이재용 회장이 결국 모든 사람에게 조롱당하고, 

- 반대로 신문을 도배한 흉악범이 결국 모든 사람에게 칭송받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처럼 어렵다.

그런데 그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은 일어났고,

-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몸부림친 결과가 예레미야서이다.

 

예레미야서 기록 배경

따라서 예레미야서가 기록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까지 멸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파괴되도록 놔두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이 부정한 이방인에 의해 더럽혀지는 참상을 납득할 수 없었다.

- 그들에게 성전 파괴는 하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데,

-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방법이 없었다.

 

그로 인한 결과는, 말 그대로, 멘탈 붕괴이다.

- 자기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토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영원무궁하고,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도 영원무궁할 것이라는 믿음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 자기 존재의 근원을 잃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왜 포로가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로 인해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불안과 혼란의 극치였다.

- 바벨론에 정착해야 할지, 아니면 이스라엘의 독립과 재건을 준비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 만약 하나님이 정말 죽으셨다면, 미련 버리고 바벨론에 정착해야 하지만,

- 하나님이 여전히 하나님이시라면,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면, 이스라엘 재건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세 분류로 나뉜다.

- 첫째로, 하나님을 포기하고 자립 갱생을 시도하는 사람이다.

-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가정하고 신앙 정체성을 포기한 채, 바벨론에 타협하여 주어진 현실에 굴복한다.

- 둘째로, 포로된 현실을 부정하고 정체성만 고수한다.

- 그들은 멸망한 현실을 부정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하실 리 없다며, 바벨론을 배척하고 민족 독립만을 고수한다.

- 셋째로, 대부분은 포로된 현실을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다.

- 그들은 정체성을 포기하여 바벨론에 정착하지도 못하고, 정체성을 고수하여 바벨론을 배척하지도 못한다.

-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다.

그러니 세 부류 모두 괴롭다.

- 현실에 굴복하고 바벨론에 타협한 사람은 안정된 삶을 누리지만, 정체성을 잃어서 괴롭다.

- 현실을 부정하고 바벨론에 저항하는 사람은 정체성은 유지되지만, 바벨론에 탄압받아 목숨을 잃는다.

- 나머지 대부분은 바벨론에 타협하지 못해서 불안정한 삶을 살면서,

- 바벨론에 저항하지도 못해서 정체성도 잃는다.

 

그런 상태에 빠진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어서도록 기록한 책이 예레미야서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된 것은 하나님이 무능력하게 죽었기 때문이 아니다.

- 오히려 하나님이 완벽한 주도권을 갖고 일으키신 일이다.

- 그 뜻을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했고,

- 그 예언이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 특히 이스라엘 멸망은 이스라엘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 즉,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있고, 여전히 전능하며,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본문에서 완벽한 예언 성취를 보여준 것이다.

 

예언 성취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 - 기쁨과 슬픔

그렇다면 멸망이 하나님의 예언 성취라는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 바벨론 포로로 잡혀있는 사람들은 기뻤을까, 슬펐을까?

-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계셔서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성취해 가신다니, 과연 기뻤을까?

- 아니면 자신들에게 멸망할 만큼 큰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슬펐을까?

 

언뜻 생각하기에 예언이 성취되면 무조건 기쁠 것 같다.

-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의미이고,

-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고 기쁘니까.

당연히 일부는 기뻐했다.

- 대표적으로 에스겔이다.

- 그는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심각하게 좌절했다.

- 성전과 함께 하나님까지 파괴된 것 같아 괴로워했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 멸망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스라엘의 멸망이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그리고 성전 없이도 하나님은 어디든 계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마른뼈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겔 37:5~6]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6)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 이스라엘은 죄로 인해 멸망하여 마른뼈와 같이 되었지만,

- 하나님은 마른뼈로 살아있는 군대를 만드는 능력으로 멸망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을 깨달았다.

 

물론 현실은 포로 상태 그대로였다.

- 땅을 잃고, 민족이 와해하였으며, 하나님께 제사 드릴 성전도 없었다.

- 여전히 포로로서 삶은 고단했고, 의식주는 불편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

- 이스라엘 멸망과 함께 하나님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괴로웠는데,

- 이스라엘 멸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생각에 기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에스겔은 예언 성취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에스겔은 현실의 변화 없이 생각의 변화만으로 기뻐했을까?

- 에스겔이 괴로웠던 이유는 단지 몸이 불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 단지 나라 잃은 서러움 때문이 아니었다.

- 제사장의 지위를 잃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 포로로서 고단한 삶 때문도 아니었다.

에스겔이 괴로웠던 이유는 하나님이 사라졌다는 생각,

-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땅, 민족, 성전의 파괴는 그 자체로 아무 상관 없는데,

- 땅, 민족, 성전의 파괴를 통해 하나님이 떠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 땅, 민족,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며,

-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기만 하면,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소망이 생기자,

- 바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었다.

즉, 에스겔은 언제나 하나님과 관계를 절대 가치로 여겼다.

- 그랬기 때문에 현실의 변화 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의 변화만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

- 그랬기 때문에 예언 성취 소식만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실상 - 슬픔

그러나 바벨론 포로로 있는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쁘지 않았다.

- 예언 성취 소식을 통해 하나님이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것을 깨달아도 여전히 슬펐다.

- 현실의 변화 없이 생각의 변화만으로 기뻐할 수 없었다.

- 현실이 변해야만 기뻐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고국에서는 궁궐에서 호의호식했는데, 포로가 되어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슬펐다.

- 대부분 지배층이었던 포로는 안락한 삶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언에도 끝까지 바벨론에 저항한 이유도 궁궐에서 안락한 삶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들도 하나님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 그러나 안정된 삶이 없으면, 하나님과 관계만으로 기뻐할 수 없었다.

- 이들은 하나님 외에도 안정된 삶을 가치 있다고 여겼다.

그랬기 때문에 예언 성취 소식에도 여전히 슬펐다.

 

둘째로, 이스라엘 멸망이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이 슬펐다.

- 슬픈 이유가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죄송한 마음 때문이 아니다.

슬픈 이유는 이것이다.

- 이전의 삶이 죄였고,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했다.

- 따라서 이스라엘이 회복하려면, 이전의 삶을 부정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이전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절대 가치로 여기는 삶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 죄악되었던 안락한 삶을 절대 오물로 여겨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안락한 삶을 원했다.

- 이전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 하나님만 절대 가치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 모든 것을 절대 오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 예언 성취 소식은 이전의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자기 생전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 예레미야도 에스겔도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믿었다.

- 그런데 그 회복이 70년이 지난 후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 예언을 듣고 있는 모든 성인이 늙어 죽은 이후에야 회복된다는 것이다.

- 즉,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기뻤다.

- 현실의 변화는 없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 자신은 현실의 변화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 자신은 평생 바벨론에서 포로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 슬펐다.

-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못한 채 포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함께하셔도 여전히 슬펐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전히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누릴 안락한 삶을 원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 외에도 안락한 삶을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이다.

- 하나님만 절대 가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 성취 소식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슬픈 소식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예언 성취 소식을 전하는 예레미야서는 누군가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슬픈 소식이었다.

- 예레미야서는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했고,

-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면, 70년이 지난 후에 회복된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포로 상태에서도 하나님과 관계만을 바라며, 안락한 삶은 관심 없는 사람은 기뻐한다.

-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 하나님만 절대 가치로 여기며,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절대 오물로 여기면 되기 때문이다.

- 그러면 비록 안락한 삶은 없어도,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랬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레미야서는 기쁜 소식, 즉 ‘복음’으로 들렸다.

그러나 포로 상태에서도 안락한 삶을 바라며, 하나님과 관계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슬퍼한다.

- 안락한 삶을 얻을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 소중히 여겼던 안락한 삶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랬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레미야서는 슬픈 소식, 즉 ‘저주’로 들렸다.

 

예수님의 죽음 부활 소식 - 복음인가 저주인가?

이는 남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 일이다.

- 예레미야서가 포로로 있던 누군가에게는 복음, 누군가에게는 저주로 들렸듯,

- 예수님의 죽음 부활 소식도 우리 중 누군가에게는 복음, 누군가에게는 저주로 들린다.

- 예수님 소식이 복음으로 들리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

- 반면에 예수님 소식이 저주로 들리는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심판받는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들은 사람은 소수였다.

- 하나님만 절대 가치이고, 나머지 모든 것을 절대 오물로 여긴 사람들뿐이다.

대부분은 예수님 말씀을 신성모독이라며 거부했다.

-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과 성전조차 하나님 앞에서 절대 오물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율법으로 먹고사는 바리새인과 성전으로 먹고사는 대제사장, 사두개인은 예수님을 고발하여 죽인다.

- 그들은 율법과 성전을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중에도 예수님 죽음 부활 소식을 기쁜 소식으로 듣는 사람은 소수이다.

- 예수님 죽음 부활 소식은 회복을 선포한다.

-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듯 우리도 어려움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소망을 준다.

- 이 부분만 생각하면, 누구나 예수님 죽음 부활 소식을 기쁘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 죽음 부활 소식은 파괴를 선포한다.

- 예수님이 죽으시듯 우리도 지난 인생 전체가 파괴되어야 한다는 절망을 준다.

- 이는 누구에게나 슬픈 소식이다.

 

그런데 인생이 파괴된다고 해도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은 기쁘다.

- 그들에게 인생은 예수님이라는 절대 가치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예수님과 함께라면, 인생이 파괴되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 예수님 외의 모든 것은, 인생조차 절대 오물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 소식이 기쁘게 들린다.

그러나 예수님을 잃어도 인생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은 슬프다.

- 그들에게 인생은 예수님이라는 절대 가치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과 함께라도, 인생이 파괴되면 아무 소용 없다.

- 예수님 외의 모든 것 중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 소식이 슬프게 들린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똑같다.

- 하나님 말씀만 진리이며 절대 가치이고,

- 나머지 전부는 아무 소용 없고 절대 오물이라고 말씀하신다.

- 그것이 민족, 성전, 율법, 전통, 생명, 인생, 돈이라도 말이다.

그래서 반응은 언제나 둘로 나뉜다.

- 멸망 이전 예레미야 시대에는 하나님 말씀 따라 민족을 포기하고 바벨론에 항복하는 사람과,

- 민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포기하고 바벨론에 저항하는 사람이 있었다.

- 멸망 이후 포로 시대에는 하나님 말씀 따라 안락함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택하는 사람과,

- 안락함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과 관계를 포기하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었다.

- 예수님 시대에는 하나님 말씀 따라 율법, 성전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 율법, 성전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이 있었다.

- 지금은 하나님 말씀 따라 돈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려는 사람과,

- 돈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사랑하길 포기하고 거래로만 사는 사람이 있다.

성경은 명확하게 말한다.

- 전자는 구원받고, 후자는 심판받는다고 말이다.

 

결론 - 구원받는 길은?

구원받는 길은 딱 하나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말씀 따라 행하는 것이다.

- 그래서 예레미야처럼 이스라엘의 멸망을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다.

- 물론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안락한 삶은 사라진다.

-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기쁨 하나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구원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하나님 한 분에 만족하려면?

- 단순하게, 불편함이 주는 ‘손해’와 하나님이 주는 ‘만족’ 두 가지를 비교해서,

- 손해보다 만족이 크면 된다.

-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손해를 감수하고 만족을 선택한다.

- 예레미야처럼 위험을 감수하며 이스라엘 멸망 예언을 선포하고,

- 불편함을 감수하고 바벨론에 항복한다.

예레미야가 특별히 용기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 특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 단지, 위험을 감수하는 불편함이 조금 덜 불편했고,

-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이 조금 더 만족스러웠을 뿐이다.

 

그러면 불편함의 크기와 만족의 크기는 어떻게 결정될까?

-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따를 때 생기는 불편함보다 만족의 크기를 크게 할 수 있을까?

- 그렇게만 되면 쉽게 하나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결혼을 생각해 보자.

- A라는 사람이 B와 C 중에 B를 포기하고 C와 결혼했다고 해보자.

- 이유는 B를 포기하는 불편함보다 C를 선택하는 만족이 컸기 때문이다.

- 반대로 C를 포기하는 불편함이 B를 선택하는 만족보다 컸기 때문이다.

- 단순하게 말하면, B보다 C가 더 좋았던 것이다.

그러면 왜 B보다 C가 더 좋았냐? 왜 B가 아닌 C와 결혼했냐?

- 이런 어리석은 질문이 어디 있는가.

- 사람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딨는가.

- 좋으니까 좋은 것이다.

- 엄밀하게 말해서, 이유는 없다.

그런 점에서 C와 결혼한 이유는 없다.

- 있어도 알 수 없다.

-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너무 복잡해서 알 수 없다.

 

따라서 세상을 포기해서 생기는 불편함과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 중에 만족을 높여서,

- 하나님을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다.

- 있어도 알 수 없다.

- 너무 복잡해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비법은 없다.

-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비법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 전적으로 우연의 영역이다.

 

그렇지만 결혼이 우연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되냐?

- 그것도 아니다. 노력이 필요하다.

- 결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 사람을 만나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래야 결혼할 수 있으니까.

-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우연조차 일어날 수 없다.

믿음도 전적으로 우연히 생긴다.

- 그렇지만 가만히 있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노력해야 한다.

- 믿음을 갖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은 하나님과 접촉 기회를 늘리는 것이다.

- 말씀 보고, 기도하고, 믿는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과 접촉 기회를 늘린다고 무조건 믿음이 생기냐?

- 사람을 많이 만난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무조건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다.

-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갈 때, 

-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알아갈 때,

- 게다가 하나님과 세상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갈 때,

- 하나님이 절대 가치이고, 그 외 모든 것은 절대 오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 그래야 세상을 포기하는 불편함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이 커질 수 있으며,

- 그래야 하나님을 선택하고 세상을 포기해도 미련이 남지 않을 것이고,

-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미련과 아쉬움이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고,

- 미련과 아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져서,

- 결국 하나님을 포기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주는데,

-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과 접촉 기회가 많으면, 기쁨이 점점 커지지만,

- 반대로 세상과 접촉 기회가 많으면, 슬픔이 점점 커질 것이다.

그래서 기쁨이 커지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계속 머무를 것이고,

- 슬픔이 커지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머무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 중에 어떤 것과 접촉 기회를 늘리는지에 따라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