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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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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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이해하는 열쇠는 ‘요하난’이다.
- 요하난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인물인지, 거역하는 인물인지 구분하는 것이다.
- 요하난을 어떻게 구분하냐에 따라 본문의 해석이 바뀐다.
왜 하필이면 요하난이냐?
- 등장인물은 총독 그달리야, 그달리야를 죽이는 이스마엘, 이스마엘을 뒤쫓는 요하난이다.
- 그런데 왜 그달리야나 이스마엘이 아니냐?
그달리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섬기도록 한 인물이다.
- 그로 인해 이스라엘에 평화와 풍요가 임한다.
[렘 40:12] 그래서 흩어져 있는 유다 사람들도, 모두 자기들이 살던 곳에서 돌아와서, 유다 땅 미스바의 그달리야에게로 갔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아주 많이 모았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저항하도록 한 인물이다.
- 그것을 위해 바벨론이 세운 총독 그달리야를 죽이고,
-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간다.
[렘 41:3] 이스마엘은 또, 그달리야와 함께 식탁에 있는 모든 유다 사람들과, 그 곳에 와 있는 바빌로니아 군인들도 죽였다.
[렘 41:10] 그런 뒤에 이스마엘은 미스바에 남아 있는 모든 백성과 공주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그들은 모두,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에게 맡겨 놓은, 미스바에 남아 있는 백성이다. 그런데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은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서, 암몬 사람에게로 넘어가려고 하였다.
이렇게 그달리야와 이스마엘은 전형적인 인물이다.
- 그달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의인이고,
-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인이다.
- 그래서 그달리야는 이스라엘은 회복하는 반면,
- 이스마엘은 이스라엘을 또다시 혼란에 빠뜨린다.
이런 전형적인 인물이 전하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
-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얼마나 좋은지,
-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면 얼마나 나쁜지 알려준다.
- 그달리야 덕분에 이스라엘이 평화와 풍요를 회복했고,
- 이스마엘 때문에 이스라엘이 혼란에 빠졌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의인이 되도록 이끈다.
- 하나님의 뜻을 따라 혼란에서 벗어나 평화와 풍요를 누리도록 한다.
하지만 전형적인 인물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 현실에는 전형적인 의인과 악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 대부분은 의인과 악인 사이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공감하지 못한다.
- 누구도 의인처럼 의로울 수 없다고 자위하고,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악인처럼 악하지 않다고 자평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형적인 의인과 악인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이는 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복음서에서 전형적인 의인은 당연히 예수님이다.
- 반면에 전형적인 악인은 바리새인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보며 감동하지만, 예수님께 공감하지 못한다.
-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예수님처럼 살지 못했다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 예수님은 특별한 의인이라고 치부한다.
동시에 바리새인에게 분노하면서, 자신은 바리새인과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 자신이 의롭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 바리새인처럼 노골적으로 예수님께 대적하지 않는다고 자만한다.
물론 예수님과 바리새인을 통해 의로움과 악함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 예수님이 얻는 부활의 영광을 보며 감탄한다.
- 바리새인의 간악함을 보며 경악한다.
- 그러나 예수님과 바리새인은 우리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복음서에서 우리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인물은 누구인가?
- 제자들이다.
- 우리는 제자들을 쉽게 공감하고, 자신을 제자들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쉽게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제자들이 의인과 악인의 모습을 두루 가졌기 때문이다.
- 제자들은 담대하게 예수님을 따르기도 하지만,
-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칭찬받은 직후에,
- 예수님의 죽음을 저지하려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 사탄이라고 정죄 받는다.
- 때로는 의롭고 때로는 악한 우리의 모습과 같다.
- 의인과 악인 사이에서 고뇌하는 우리와 같다.
따라서 전형적인 의인이나 악인이 아닌 이중적인 제자들이
- 우리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서 우리 마음을 더 근원적으로 변화시킨다.
- 제자들에게서 우리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전형적인 그달리야와 이스마엘은 중요하지 않다.
- 그들은 전형적이고 단선적이어서 공감하기 어렵다.
- 게다가 해석의 여지가 없다.
- 고민할 필요 없이 명백하게 의롭고, 명백하게 악하다.
하지만 요하난은 해석이 필요하다.
- 의롭다고 하기에도, 악하다고 하기에도 어렵다.
- 단선적이지 않고, 복잡 미묘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세밀하게 봐야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하난은 어떤 인물인가?
요하난이 등장하는 장면은 두 가지이다.
첫째 장면은, 요하난은 이스마엘의 암살 계획을 그달리야에게 전달한다.
- 그리고 이스마엘이 암살 계획을 수행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이스마엘을 암살하겠다고 말한다.
[렘 40:13~15] 그런데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을 비롯하여 들판에 있는 군지휘관들이, 모두 미스바의 그달리야에게 와서, (14)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암몬 사람의 왕 바알리스가 총독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계십니까?” 그러나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15) 그 뒤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은 미스바의 그달리야에게 은밀히 이렇게까지 말하였다. “제가 아무도 모르게 가서,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을 죽이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가 총독님을 살해하면, 지금 총독님께 모여 있는 모든 유다 사람이 다시 흩어지고, 이렇게 살아 남은 유다 사람들마저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요하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의인으로 보인다.
- 하나님의 뜻은 바벨론에 있고, 바벨론은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삼았기에,
- 그달리야를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스마엘의 암살 계획은 의로워 보인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 요하난의 암살 계획을 그달리야가 거절한 점이다.
[렘 40:16] 그러나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는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오. 그대가 이스마엘에 대하여 한 말은 사실일 리가 없소.”
전형적인 의인이 거절한 행위를 과연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거절 이유는 둘 중 하나이다.
첫째로, 그달리야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 그달리야는 위험을 전달받았고, 위험을 인지했으며, 위험에 대처할 수 있었다.
- 그러나 경솔하게 요하난을 신뢰하지 않았고, 대처하지 않았다.
- 결국 그달리야는 경솔함 때문에 죽었고,
- 이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 그러니까 그달리야 때문에 이스라엘이 혼란에 빠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로, 요하난이 간사했기 때문이다.
- 애초에 요하난에게 그달리야가 신뢰할 수 없는 심각한 결점이 있었다.
- 요하난의 의도는 이스마엘의 암살 계획을 저지하여 그달리야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 오히려 이스마엘의 암살 계획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지배력을 높이려고 했다.
- 그달리야는 현명하게 요하난의 저의를 깨닫고, 요하난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볼 수 있다.
본문 안에서는 둘 중에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요하난이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는 의인인지, 거역하려는 악인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43장에 요하난의 실체가 드러난다.
- 요하난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한다.
[렘 43:1~4] 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지시하신 모든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보내셔서 그들에게 이르게 하신 이 모든 말씀을, 예레미야가 온 백성에게 다 일러주었을 때에, (2)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고집이 센 모든 사람이, 예레미야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우리가 이집트로 가서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을 리가 없소. (3) 이것은 틀림없이,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우리를 바빌로니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주어서 그들이 우리를 죽이거나 바빌로니아로 잡아가도록 하려고, 당신을 꾄 것이오.” (4)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지휘관과 온 백성은, 유다 땅에 머물러 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집트에 가지 말고, 이스라엘에 머물며, 바벨론을 의지하라고 말한다.
- 그러나 요하난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버린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달리야가 옳았다.
- 그달리야가 요하난을 신뢰하지 않은 것은 그달리야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요하난이 간사했기 때문이다.
- 요하난이 이스마엘이 죽어서 그달리야가 이스마엘의 위협에서 벗어났어도,
- 그달리야는 또다시 요하난에게 위협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달리야가 죽어서 이스라엘이 혼란에 빠진 것은,
- 그달리야가 바르게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 이스마엘과 요하난이 나쁜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둘째 장면은, 요하난이 도망가는 이스마엘을 쫓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다.
[렘 41:11~12]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대장관은,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저지른 범죄 소식을 모두 전하여 듣고, (12) 부하를 다 거느리고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을 치러 뒤쫓아갔다. 그들은 기브온에 있는 큰 못 근처에서 그를 만났다.
[렘 41:14] 그리고 미스바에서부터 이스마엘에게 포로로 끌려가던 사람들이 모두 뒤돌아서,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로 넘어갔다.
요하난이 그달리야를 죽이고 도망가는 이스마엘을 잡으러 간다는 점에서 의로워 보인다.
- 그달리야는 의인이고, 의인을 죽인 이스마엘은 악인이기에,
- 악인을 잡으러 가는 것은 의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 요하난이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려 한다는 점이다.
[렘 41:17] 그들은 다 같이 이집트로 들어갈 작정으로 도망치다가,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서 쉬었다.
물론 요하난이 그달리야가 죽은 사건 때문에 바벨론을 두려워할 수 있다.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집트로 도망간 것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다.
[렘 41:18] 바빌로니아 왕이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를 그 땅의 총독으로 세워 놓았는데,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를 죽였기 때문에, 그들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두려웠던 것이다.
- 바벨론은 자신이 세운 총독을 거역한 것을 두고 이스라엘 전체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
- 그러면 그 불똥이 요하난에게 튈 수 있다.
- 그런 점에서 요하난이 이집트로 도망가는 것이 이해된다.
하지만 이집트로 도망가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다.
- 바벨론에 직접 사정을 설명하고 용서를 구할 수도 있다.
- 관련자 이스마엘을 처벌하여 바벨론의 분노를 해소할 수도 있다.
- 그렇게 재빨리 이스라엘을 바벨론 치하로 회복시키면, 이스라엘도 빨리 회복되고 요하난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요하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그런 점에서 요하난이 이집트로 도망가려는 계획 안에는 바벨론에 대한 두려움 외에 다른 것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부터 요하난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는 것이었다.
- 이스라엘에 머물며 바벨론의 지배를 받을 때보다,
-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야만 요하난에게 유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요하난의 의도가 43장에서 밝혀진다.
정리하면, 본문은 요하난을 모호하게 표현한다.
-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게 행하는 인물로 보이지만,
- 의롭다고만 볼 수 없는 걸림돌이 있다.
이스마엘을 암살하여 이스라엘을 구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 자기 유익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 끌고 간다.
-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가 바벨론에 또다시 파괴되는 위험에 빠뜨린다.
- 하나님이 간신히 이루신 평화와 풍요를 또다시 박살 낸다.
그렇다면 왜 요하난은 모호한 모습을 보였을까?
요하난은 그달리야를 보호하려 하여 바벨론을 섬기는 모습도 보여주고,
- 이집트로 들어가려 하여 바벨론에 저항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렇게 요하난이 갈팡질팡한 것은,
- 내면의 의도부터 갈팡질팡했기 때문일까,
- 아니면 내면의 의도는 하나였는데, 의도가 표현되는 방식이 상황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일까?
도대체 요하난이 그달리야를 보호하려는 의도는 뭐였으며,
- 이집트로 들어가려는 의도는 뭐였을까?
결론부터 말해서, 요하난은 두 가지 의도를 다 가졌다.
- 이스라엘의 평화와 풍요를 지키기 위해 바벨론을 섬기려는 의도와
- 자기 유익을 위해 바벨론에 저항하고 이집트를 섬기려는 의도 모두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요하난은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싶었다.
- 자기 뿌리인 이스라엘 민족을 지키는 동시에,
- 자기 유익도 잃고 싶지 않았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이다.
- 대부분은 자기만 망하고 주변 사람이 전부 흥하는 것도 원하지 않지만,
- 반대로 자기만 흥하고 주변 사람이 전부 망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 자기가 아무리 흥해도 주변이 다 망하면,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없어 불편하다.
그래서 대부분은 자기가 흥하는 것만큼 주변 사람도 흥하길 바란다.
- 그래야 모두 함께 눈치 안 보고 편하게 풍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묘하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 자신과 주변 사람 모두 흥하길 바라지만,
- 터럭만큼이라도 주변 사람보다 자기가 더 흥하길 원한다.
- 반대로 터럭만큼이라도 자기보다 주변 사람이 더 흥하면, 배 아프다.
이 지점에서 사람의 본심이 나온다.
- 자기보다 주변 사람이 더 흥하여, 배가 아프고 기분이 나쁘고 질투심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 이 감정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이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 오히려 이 감정을 부정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이 감정을 표현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
- 첫째로, 배가 아프고 자신이 조금 손해봐도, 모두가 평화롭고 풍요롭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고,
- 둘째로, 모두가 불편해지고 손해를 봐도, 자기는 유익을 얻으려는 사람이 있다.
이 본심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만 드러난다.
일반적인 상황에는 모두의 유익을 선택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
- 그래서 대부분은 모두의 유익을 선택한다.
- 그렇게 모두가 유익한 선택을 하면, 자신도 좋은 평판을 얻기 때문이다.
-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의 본심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흔하지 않게 절체절명의 상황이 생긴다.
- 모두의 유익을 취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상황이다.
- 그래서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 모두의 유익을 선택하거나,
- 반대로 모두의 손해를 감수하고 자기 유익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바로 이 상황에만 본심이 드러난다.
- 요하난이 딱 이런 상황에 처한다.
요하난이 처한 상황
바벨론이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삼았고,
- 그달리야는 바벨론을 섬겨서 이스라엘 전체가 평화와 풍요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이 평화가 애초부터 싫었다.
- 이스라엘 전체에 유익이 있더라도 자신에게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평화로우면, 자신이 이스라엘을 통제할 여지가 적어지고,
- 그러면 결국 자신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 이스마엘은 보통 사람과 다르게 오직 자신의 유익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이스라엘의 통제권을 얻기 위해 그달리야를 죽이기까지 한다.
- 그는 이 선택이 이스라엘 전체에 심각한 피해를 준다는 것을 알았다.
-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 그달리야를 죽여야지 그달리야 대신 자신이 이스라엘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하난은 그렇지 않았다.
- 그는 이스라엘의 평화와 풍요가 좋았다.
- 자기 민족이 안정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 요하난은 이스마엘과 달리 평범한 사람이었다.
- 자기 유익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 전체가 흥하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스마엘의 암살 계획을 저지하려는 생각까지 했다.
- 그달리야가 죽으면 이스라엘의 평화가 또다시 파괴되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파괴되면, 이스라엘에 속한 자신에게도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렘 40:15] 그 뒤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은 미스바의 그달리야에게 은밀히 이렇게까지 말하였다. “제가 아무도 모르게 가서,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을 죽이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가 총독님을 살해하면, 지금 총독님께 모여 있는 모든 유다 사람이 다시 흩어지고, 이렇게 살아 남은 유다 사람들마저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요하난이 자기 유익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 그는 이집트의 지원을 받았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바벨론 치하에 있으면, 유익을 얻지 못한다.
- 이스라엘이 이집트 치하에 있어야만 유익을 얻는다.
그래서 그의 계획은 바벨론 치하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킨 후,
- 다시 이스라엘을 이집트 치하로 넘기는 것이었다.
- 그래야만 이스라엘의 평화도 지키는 동시에 자기도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유익과 주변 사람의 유익 모두를 원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려하던 사건이 터졌다.
- 결국 이스마엘은 그달리야를 죽였다.
- 그래서 그달리야의 죽음이 바벨론에 알려졌고,
-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반역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올 것이 자명하다.
그러면 요하난 역시 위험을 피할 수 없다.
- 그는 고관들 중 하나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할 때 도망갔었다.
- 왜냐하면 바벨론이 포로로 끌고 갈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바벨론이 다시 온다면, 바벨론의 처벌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혼자 도망갈 수도 없다.
-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소중한 자기 민족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이다.
- 그달리야는 죽고 이스마엘은 도망간 상황에서 요하난이 실질적인 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하난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한다.
- 이스라엘 전체 유익과 자기 유익이 상충한다.
-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 요하난은 둘 다 갖길 바랐지만,
- 둘 중의 하나를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만약 이스라엘 전체 유익을 생각하면,
-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땅에 남겨두고 홀로 도망가야 한다.
- 그래야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치하에서 다시 평화를 회복할 수 있다.
- 바벨론이 새로운 총독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다시 안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대신에 요하난은 이스라엘의 왕 지위를 잃는다.
- 이집트에 숨어서 목숨만 건질 뿐, 명예와 재산, 지지 세력 모두 잃는다.
하지만 만약 자기 유익을 생각하면,
-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가야 한다.
- 그래야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 그러면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 땅의 바벨론을 몰아내고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은 평화와 풍요를 잃는다.
- 이스라엘 땅에서 이집트 땅으로 옮겨 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지속해야 한다.
게다가 바벨론의 공격 위협에 계속 노출된다.
- 바벨론은 자신을 반역한 이스라엘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고,
- 완전히 제압할 때까지 계속 공격할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런 유익 없이 계속 전쟁에 착취당해야 한다.
요하난은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 전체 유익을 포기하고 자기 유익을 선택했다.
- 자기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희생시켰다.
- 이스라엘의 평화를 포기하고 자기 왕권을 선택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간다.
[렘 41:17] 그들은 다 같이 이집트로 들어갈 작정으로 도망치다가,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서 쉬었다.
[렘 43:4~7]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지휘관과 온 백성은, 유다 땅에 머물러 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5) 마침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지휘관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다가 유다 땅에서 살려고 돌아온 유다의 살아 남은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6) 남자와 여자와 어린 아이들과 공주들과,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요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리야에게 맡겨 놓은 모든 사람과, 예언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까지 데리고서, (7) 이집트 땅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그들은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다. …
하지만 요하난의 이야기는 이렇게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 요하난의 계획은 이집트로 들어가서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정식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 군대를 정비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바벨론을 몰아낸 후,
- 백성과 함께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안정된 국가를 이루는 것이었다.
- 그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히 이집트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요하난이 백성 전체를 희생하고 이집트에 가서 유익을 얻을 수 있었는가?
- 그것도 아니다.
- 성경에서 이집트로 도망간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 어떻게 됐는지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44장에서 또다시 멸망을 예고한다.
- 이집트로 들어간 사람은 전부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렘 44:26~30] 그러나 이집트 땅에 사는 유다 사람들아, 너희는 모두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나의 큰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집트 온 땅에 있는 어떤 유다 사람이든지, 이제는,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 하면서 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겠다. (27) 이제는 내가, 그들을 지켜 보겠다. 복을 내리려고 지켜 보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려고 지켜 보겠다. 그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유다 사람이 멸종될 때까지, 전쟁과 기근으로 그들을 죽이겠다. (28) 전쟁을 피하여 이집트 땅을 벗어나 유다 땅으로 돌아갈 사람의 수는, 매우 적을 것이다. ... (30)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를,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던 그의 원수인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 주었던 것과 같이 이집트 왕 바로호브라를,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그의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주겠다.
결과적으로 요하난의 바람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선량한 이스라엘 백성만 죽게 했을 뿐이다.
- 백성 없는 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요하난은 자기 유익을 위해 전체 유익을 포기했는데,
- 결국 전체 유익도 잃고, 자기 유익도 잃게 되었다.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은, 요하난이 전형적인 악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 언제나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 자기 유익만 선택하는 이스마엘 같은 사람이 아니다.
-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 자기 유익과 주변 사람의 유익을 모두 생각한다.
- 자기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전체 유익을 위해 선택한다.
- 이스라엘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스마엘의 암살 계획 저지하려 했다.
- 우리와 똑같은 선량한 사람이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상황이 오자,
- 그래서 자기 유익과 전체 유익이 상충하는 상황이 오자,
- 그래서 자기 유익과 전체 유익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 전체 유익을 포기하고 자기 유익을 선택했다.
왕권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
-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지배를 받으면 평화와 풍요를 얻을 수 있는데,
- 이집트로 끌고 가서 전쟁과 위협을 받게 했다.
전형적인 악인이 실패하고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 그런데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와 같은 선량한 사람도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전체 유익을 포기하고 자기 유익을 선택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러니 자기 유익을 위해 전체 유익에 해를 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하난을 통해 본문이 말하는 것이다.
지나친 확대 해석 금물
하지만 이를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무조건 언제나 희생하고 손해만 보라는 뜻이 아니다.
- 주변 사람도 유익을 얻고, 자신도 유익을 얻을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
더 적극적으로, 모두가 유익을 얻는 방법을 최선을 다해 찾아야 한다.
-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 자신이라고 해서 배제되는 것을 쉽게 용납하면 안 된다.
- 자신을 배제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것에도 익숙해진다.
- 모두가 유익을 얻을 방법을 찾아보지도 않고, 굳이 자기만 손해 보는 선택을 하는 것은 그냥 어리석은 것이다.
- 그것은 사랑과 희생이 아니다.
때로는 이런 어리석음을 사랑으로 포장하려는 사람이 있다.
- 특히 자기 신앙을 자부하는 사람 중에 많다.
- 무조건 희생으로 일관하며, 게으르고 나태하게 고민하지 않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사람이 있다.
- 그러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포장한다.
자신을 무작정 해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 정말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을 희생하는 것만이 신앙이다.
-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구분하는 것도 신앙의 일부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무모하게 죽지 않으셨다.
- 공생애의 목적 자체가 십자가의 죽음이었지만,
- 죽어야 할 정확한 시점을 치열하게 고민하셨다.
- 그래야만 예수님의 생명으로 진리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황은 최선을 다하면 모두가 유익을 얻는 방법을 찾는다.
- 그런데 정말 드물게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 전체 유익과 자기 유익이 상충할 때가 있다.
-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상황이 있다.
이럴 때도 무작정 자기 유익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 그것 역시 가치 없는 희생이고, 예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낭비하는 것이다.
전체 유익을 지키면서도 자기 희생을 최소화할 방법을 또 찾아야 한다.
- 그래서 모두가 최대로 유익을 얻고, 최소의 손해를 보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자신이 전부 희생해야 할 때가 있다.
- 전체가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 그때 만약 그 희생을 감당할 수 있고, 기쁨으로 포기할 수 있다면,
- 포기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 성경은 그것을 영예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포기를 감당할 수 없다면?
- 희생하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다면?
- 그래도 믿음으로 희생해야 할까?
- 희생을 감당할 믿음이 없어도 억지로 희생해야 할까?
절대로 안 된다.
- 믿음을 넘어선 희생은 반드시 생긴다.
- 원망이 생기면, 신앙에서 멀어진다.
자발적, 주체적, 능동적으로 기쁨에서 나온 희생만 해야 한다.
- 미묘하고 은근한 압박으로 희생을 강요하면 안 된다.
-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 자기 자신에게도 하면 안 된다.
자신에게 강요한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이다.
- 원하지도 않는 율법을 자신에게 강요했기에,
- 희생에 대한 원망이 생겼고,
- 원망이 다른 사람에게 율법을 강요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그렇다면 아무런 희생도 할 필요 없다는 것인가?
-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그러면 어쩌라는 것인가?
- 희생하라는 것도 아니고, 희생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가장 먼저 희생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 전체 유익과 자기 유익이 상충할 때, 전체에 해를 가하면서까지 자기 유익을 포기할 수 없는 속물이고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하자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내면을 변화시켜서, 자발적, 주체적, 능동적으로 전체를 위한 자기 희생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의 돈, 명예, 인정, 안정을 박탈당해도, 전체가 유익을 얻고 회복되는 모습만으로 충만함을 얻는 믿음이 생기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 그러나 아직 자신은 여전히 믿음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죄짓는 행위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 희생하지 않았다고 정죄하지 않는다.
자신이 죄지었다는 것을 거부하는 죄를 정죄한다.
- 희생하지 않았으면서도, 혹은 희생하면서 원망만 가득 품었으면서도,
- 자신을 희생한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을 정죄한다.
죄를 지었어도, 자기 죄를 직시하고, 죄에서 벗어나길 기도하고 노력하는 사람을 성경은 칭찬한다.
- 그에게 성령이 임하여 진정한 희생을 할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우편 죄인이 구원받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희생하려고 노력하면 안 된다.
- 오히려 먼저 희생할 마음이 없는 자신의 죄를 직시해야 한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이다.
결론 - 요하난처럼 되지 않으려면?
엄밀하게 말해서, 요하난의 문제는 자기 유익을 위해 전체 유익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 문제는 자신이 자기를 위해 전체를 포기하는 속물이고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왕을 자처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 이끌지 않았을 것이다.
-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며 바벨론에 항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하난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 그래서 자기 판단을 신뢰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 그런 태도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멸망으로 내몰았다.
따라서 죄 인식이 중요하다.
- 자신은 전체 유익을 위해 자기 유익을 포기할 수 있는 의인이 아니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 자신은 자기 유익을 위해 전체 유익을 포기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죄 인식 속에서만 자기 판단을 의심할 수 있고,
- 자기 판단을 의심할 때만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며,
-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만 하나님 말씀에도 귀 기울일 수 있고,
- 그런 사람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만,
- 하나님 말씀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 그런 사람만 역설적이고 과격해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
- 그런 사람만 전체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포기할 수 있다.
- 희생하고 포기하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포기 명령이 겉으로는 상실과 멸망으로 보이지만,
- 실상은 사랑과 회복이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과 회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포기 명령에서 사랑과 회복을 보는 사람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 그리고 그 신앙은 죄 인식에서 시작한다.
그래야 요하난처럼 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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