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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레미야(76) 44:1-14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
    예레미야서 2024. 1. 12. 23:22

    44장은 예레미야서 전체의 결말이다.

    - 45장부터는 추신에 해당한다.

    - 과연 예레미야서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

     

    예레미야서 결말에서는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제시한다.

    - 2~6절은 과거, 7~10절은 현재, 11~14절은 미래이다.

    요약하면,

    - 과거에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여 멸망했다.

    [렘 44:2~3]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성읍에 내린 모든 재앙을 너희가 분명히 보았다. 보아라, 그 성읍들은 오늘날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되었다. (3)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도, 너희도, 너희 조상도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며 섬김으로써, 나를 노하게 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 그런데 현재에도 조상의 죄를 잊고 여전히 우상숭배로 자신을 해치고 있다.

    [렘 44:8~9] 너희는 왜 너희 손으로 만든 우상으로 나를 노하게 하며, 너희가 머물려고 들어간 이집트 땅에서까지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살라 바쳐서 너희 자신을 멸절시키며, 세상 만민에게 저주와 조롱의 대상이 되려고 하느냐? (9) 너희는 유다 땅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저지른 너희 조상의 죄를 벌써 잊어버렸느냐? ・・・・

    - 따라서 지금처럼 살다가는 미래에 또다시 멸망하게 될 것이다.

    [렘 44:14] 유다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집트 땅에 머물려고 들어간 자들 가운데는, 살아 남거나 죽음을 모면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돌아가서 살기를 갈망하는 유다 땅으로는, 돌아갈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몇 명의 피난민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우선 이러한 결말이 예레미야서에 적절한 것 같다.

    - 예레미야서는 처음부터 계속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 죄가 무엇인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 죄를 지으면 왜 멸망할 수밖에 없는지, 특히 죄가 자신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설명한 후,

    - 그 죄를 지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했고,

    - 예고대로 멸망한 이스라엘을 보여줬다.

    - 그래서 하나님의 예고가 얼마나 합당한지 증명했다.

    따라서 본문은 예레미야 전체를 요약한 것 같다.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

    그렇다면 본문을 비롯하여 예레미야서 전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 멸망한 과거 사건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이고,

    - 그 기록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결국 이것을 알아야 ‘성경을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 일부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 영적인 효험이 생기길 기대하는데, 어리석은 태도이다.

    - 읽는다는 것은 가장 먼저 쓴 사람의 의도를 알려는 시도이다.

     

    예레미야서를 잘못 읽은 대표적인 예는 ‘타산지석’이다.

    - 이스라엘의 죄와 멸망을 보며, 

    - 이스라엘처럼 죄를 짓지 않아서 멸망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 자신은 우상숭배도, 음행도 하지 않았으니, 

    - 이스라엘처럼 멸망하는 일은 없겠다고 안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보다 구분 짓는 태도이다.

    - 여기에 정도의 차이가 있다.

    - 누군가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공감은커녕, 이해조차 못 한다.

    -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이스라엘을 비난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이해한다.

    - 저런 상황에서 이런 판단을 했으면, 자기라도 충분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 이스라엘을 비난하기는커녕, 이해하고 공감한다.

    - 그렇지만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 자신은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결심한다.

     

    전자와 후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같다.

    - 전자는 이스라엘과의 거리가 멀고, 후자는 이스라엘과의 거리가 가까워 보인다.

    - 그래서 후자가 더 적절히 반응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자와 후자 모두 이스라엘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이스라엘과 자신을 구분 짓고 있다.

    - 이스라엘의 멸망을 ‘내 일’이 아니라 ‘남 일’로 보고 있다.

    - 자신은 결국 이스라엘과 달리 멸망에서 벗어나 구원받으리라 믿고 있다.

     

    많은 사람이 멸망에서 벗어나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이 왜 문제냐고 반문한다.

    - 우리가 신앙을 갖고 성경을 읽는 이유가 결국 구원받으려는 것 아니냐?

    - 우리가 이스라엘을 보고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목적 아니냐?

    이 반문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 그러나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성경의 목적은 죄에서 벗어나 구원받도록 하는 것이 맞다.

    - 그러나 그것은 최종 목적이고, 중간 목적이 따로 있다.

    -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이전에, 

    -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가 죄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는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 이 존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 쉬운 말로, ‘원죄’를 깨닫는 것이다.

    - 바울도 말년에조차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했다.

    [딤전 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은 예상하지 못한 역할을 한다.

    - 그것이 바로 자신이 ‘죄에서 벗어나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을 파괴하는 것이다.

    - 자신은 이스라엘처럼 과거에도 죄를 범했고,

    - 현재에도 이스라엘처럼 과거의 죄를 잊고 계속 죄를 범하고 있으며,

    - 그래서 결국 미래에도 이스라엘처럼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목적이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을 갖도록 한다는 말은 틀렸다.

    - 성경의 목적은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가 구제 불능의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롬 3:10~13]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이다.

    - 모든 인류가, 특히 자기 자신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이다.

    - 모든 인류가 죽어야 할 만큼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죽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 그래서 우리가 죽을 만큼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이 파괴되고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믿었다.

    - 그런데 그 믿음은 하나님이 십자가 죽음에서 자신을 구원하시리라는 믿음이 아니라,

    - 십자가 죽음에서 구원하지 않고 죽이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예레미야서가 전하는 것도 바로 이 믿음이다.

    - 이스라엘은 이전에도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 그런데 멸망한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다.

    -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이집트로 도망갔다.

    - 따라서 결국 이스라엘은 또다시 멸망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즉, 예레미야서가 전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다.

    - 이스라엘의 멸망이다.

    - 이스라엘이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을 파괴하고,

    -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믿음을 전한다.

     

    그래서 우리도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 자신과 이스라엘을 구분하여, 이스라엘과 달리 자신은 구원받으리라는 소망을 갖는 것은 착각이다.

    - 그것은 성경의 의도를 잘못 읽은 것이고,

    - 그것은 성경을 읽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읽는다고 영적인 효험이 생기지 않는다.

    - 오히려 또 다른 이스라엘 민족을 양산할 뿐이다.

    - 본문과 같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심판받아 멸망하는 이스라엘 말이다.

    - 자신이 어떤 길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멸망의 길로 갈 것이다.

     

    성경의 의도는 자신과 이스라엘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이다.

    - 자신이 이스라엘과 같이 과거에도 죄로 인해 멸망했는데,

    - 지금도 여전히 죄를 지으며 자신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에,

    - 미래에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 자신도 여지없이 이스라엘의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의도이다.

    -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멸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라고 믿도록 하는 것이다.

    - 성경을 읽어서 이것을 알아야 한다.

    - 그것만이 성경을 읽은 것이고,

    - 그렇게 읽을 때만 영적인 효험을 얻는다.

    그래서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라 멸망 예고로 끝나는 것이다.

    - 우리에게도 구원이 아니라 멸망을 예고하기 위해서이다.

     

    예레미야서 기록 배경

    이러한 예레미야서의 의도는 기록 배경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시기는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지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 계속된 내리막을 지나 결국 멸망한 후,

    - 멸망 후에도 회복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모습을 예언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시작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의 멸망만 예언했다.

    - 그리고 멸망 예언은 전부 성취된다.

    - 오히려 중간에 끼어있는 회복 예언은 아무것도 성취되지 않는다.

    이렇게 예레미야서는 멸망을 예언하는 책이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예언을 한 시기보다 더 중요한 시기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기록된 시기’이다.

    - 그 시기를 아주 넓게 잡으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시기부터,

    - 포로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하여 성벽과 성전을 쌓으며 민족 재건을 위해 노력하는 시기 중에 기록되었다.

    기록 시기를 이렇게 잡는 이유는 단순하다.

    - 대부분의 구약 성경이 이 시기에 기록,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 예언서와 같이 후기를 배경으로 한 책은 이 시기에 기록되었고,

    - 역사서와 같이 초기를 배경으로 한 책은 이전의 기록을 이 시기에 정리하였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어땠는가?

    - 한마디로, 모든 순간이 ‘절망’이었다.

    - 이스라엘은 어떤 소망도 품을 수 없는 절박한 상태였다.

    - 이스라엘의 회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가능한 목표였다.

    - 마치 일제강점기 말에 많은 조선 사람이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으로 친일에 가담했던 것처럼 말이다.

    풀어 말하면, 이 시기를 둘로 나눌 수 있다.

    - 포로 귀환 이전과 포로 귀환 이후이다.

     

    포로 귀환 이전에 이스라엘은 어땠을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은 대부분 집권층, 귀족, 부자였다.

    -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서 호의호식하던 사람이 바벨론에서 궁핍한 삶에 적응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 부드러운 고기만 먹던 사람들이 억센 풀을 먹어야 했다.

    - 앉아서 떠드는 것이 일상이었던 사람들이 나가서 몸을 움직여 일해야 했다.

    그런데 궁핍한 일상은 곧 적응했다.

    - 자기만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 함께 고생하니 견딜만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 육체적으로 불편했을 때는 정서적인 불편을 느끼지 못했는데,

    - 육체적으로 안정되니, 수면 아래에 있던 정서적인 불편이 드러났다.

    이때부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 자기 정체성이 부정된 현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 자신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인데,

    - 이방 땅에 와서 우상에 둘러싸인 채 제사조차 드리지 못하는 현실이 보기 시작한다.

    이는 한마디로, ‘절망감’이다.

    -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답게, 자기답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절망감이다.

    - 바벨론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자신들이 저항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자괴감이다.

     

    이 절망감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세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로, ‘보수파’이다.

    - 주어진 환경에 지나치게 안주하는 태도이다.

    - 이들은 이스라엘답게 살 수 없는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스라엘답게 살기를 포기한다.

    - 대신 바벨론 안에서 정착하여 안정되길 기대한다.

    어차피 바벨론에 저항할 수 없으니, 바벨론에 편승한다.

    - 이스라엘‘인’이 되길 포기하고 바벨론‘인’이 되기로 한다.

    - 그래서 이스라엘로 돌아갈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 바벨론에서 승승장구하려고 애쓴다.

    - 마치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와 같은 태도이다.

     

    둘째로, ‘진보파’이다.

    - 주어진 환경을 지나치게 거부하는 태도이다.

    - 이들은 이스라엘답게 살 수 없는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해, 바벨론에서의 삶을 거부한다.

    - 이스라엘답게 살기 위해 비현실적인 방법을 마구 시도한다.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 그래서 세계 최강 바벨론 군대에 무모한 무력 투쟁을 한다든지,

    - 지나치게 이스라엘 전통을 고수하다가 자멸하기도 한다.

    - 이스라엘로 돌아갈 기대에 매몰되어, 일상과 인생을 무너뜨린다.

     

    셋째로, ‘중도파’이다.

    -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태도이다.

    - 이들은 이스라엘답게 살 수 없는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해, 절망감 자체를 외면한다.

    - 당장은 이스라엘답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상에 열중한다.

    - 그러나 이스라엘다울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보수파와 진보파의 장점만 취한 태도로 보이지만,

    - 현실에서는 보수파와 진보파의 단점만 취한 태도로 나타난다.

    - 그래서 일상에 열중하는 듯 보이지만,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 반대로 이스라엘다울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친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태도 모두 적절하지 않다.

    - 아무도 이스라엘다울 수도 없고, 일상에서 만족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포로 귀환 이후에 이스라엘은 어땠을까?

    언뜻 생각하기에, 포로에서 귀환하여 이스라엘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행복했을 것 같다.

    -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의 해방감과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고국 땅에 도착했을 때의 안정감에 감격했을 것 같다.

    하지만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의 심정 역시 한마디로, 절망이었다.

    - 우선, 이스라엘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스라엘 재건을 위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 만약 포로 귀환이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독립 의지로 일어난 것이었다면,

    - 독립 이후 계획까지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포로 귀환은 갑작스러웠고 타율적이었다.

    -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집권한 후,

    - 포로 정책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 포로를 잡아두기보다 본국으로 귀환시켜서 실질적 이득을 얻으려고 하였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접경 지역에 있었다.

    - 그래서 페르시아는 이스라엘을 강화하여,

    - 이집트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다.

     

    게다가 아무 준비 없이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이스라엘 땅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 바벨론 포로의 삶은 제약되었지만 풍요로웠다.

    - 바벨론은 당시 최강대국이었기 때문에, 포로조차 풍요로웠다.

    - 그러나 이스라엘 땅은 파괴되어 황량했다.

    - 안락한 바벨론에서 살던 이들이 살기에 가혹했다.

    가혹한 환경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고리대금이 횡횡했던 현실이다.

    -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땅을 저당 잡혀야 했다.

    [느 5:2~4] 더러는 이렇게 울부짖는다. “우리 아들딸들, 거기에다 우리까지, 이렇게 식구가 많으니,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아가려면, 곡식이라도 가져 오자!” (3)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울부짖는다. “배가 고파서 곡식을 얻느라고, 우리는 밭도 포도원도 집도 다 잡혔다!” (4)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왕에게 세금을 낼 돈이 없어서, 밭과 포도원을 잡히고 돈을 꾸어야만 했다!”

    - 땅뿐만 아니라 자녀까지 팔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느 5:5] 또 더러는 이렇게 탄식한다. “우리의 몸이라고 해서, 유다인 동포들의 몸과 무엇이 다르냐? 우리의 자식이라고 해서 그들의 자식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그런데도 우리가 아들딸을 종으로 팔아야 하다니! 우리의 딸 가운데는 벌써 노예가 된 아이들도 있는데, 밭과 포도원이 다 남의 것이 되어서, 우리는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다.”

     

    다음으로, 성전 재건을 반대하는 세력까지 있었다.

    -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동안 종교 권력을 획득하여 누렸던 지방 성소 세력이다.

    -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면, 자신들의 세력이 위협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페르시아에 대한 반역 행위라고 모함하며,

    - 성전 재건을 반대했다.

    [느 6:6] ・・・・ 당신과 유다 사람들이 반역을 모의하고 있고, 당신이 성벽을 쌓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소문이 여러 민족 사이에 퍼져 있소. 가스무도 이 사실을 확인하였소. 더구나 이 보고에 따르면, 당신은 그들의 왕이 되려고 하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성전 재건은 BC 539년에 시작하여 BC 515년까지 26년이나 걸린다.

    - 그중에 BC 539년부터 BC 519년까지 처음 18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그만큼 성전 재건이 어려웠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 기대했던 고국에 돌아왔지만,

    - 고국에서의 삶은 포로일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참혹했다.

    - 자식을 팔아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토록 간절했던 성전 재건조차 한없이 지연되었다.

    - 바벨론에서 풍족하게 살았던 삶을 포기하고 고생하면서 고국까지 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 장장 18년 동안 말이다.

    - 18년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자식까지 팔 정도로 고달픈 삶을 이어갔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포로 시기에도, 포로 귀환 후에도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 이런 절망감 속에서 기록된 것이 예레미야서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서는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결론부터 말해서, 예레미야서는 역설적으로 ‘멸망’을 말한다.

    -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앞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 앞으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할까?

     

    우선 이스라엘이 절망에 빠진 이유를 생각해 보자.

    - 단순하게 말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연히 얻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 포로 시기에는 곧 독립할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며,

    - 포로 귀한 후에는 곧 성전을 재건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 그 믿음이 현실에서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절망했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이 ‘구원받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절망했다.

     

    이스라엘은 왜 이런 믿음을 가졌을까?

    - 왜 포로에서 독립할 수 있다고 믿었고,

    - 왜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자신을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이다.

    - 자신은 구원받고 회복될 만한 가치를 이미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자신에게 구원과 회복은 마땅한 것이기에 구원과 회복이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런데 이런 믿음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부정한다.

    - 하나님만이 절대 가치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절대 오물로 여겨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신을 마땅히 구원하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 이것이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 자신이 구원과 회복 가능성이 없는 죄인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 구원과 회복이 없는 현실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 그래서 절망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고,

    - 그 현실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레미야서가 구원이 아니라 멸망을 전하는 이유이다.

     

    예레미야서가 멸망을 전하는 진짜 이유

    여기까지가 성경의 중간 목적지다.

    - 중간 목적지는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할 지점이다.

    하지만 성경은 중간 목적지를 지나는 사람에게는 최종 목적지를 제시한다.

     

    성경의 최종 목적지는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이다.

    -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을 파괴하여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이유가,

    - 역설적으로,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전의 믿음과 이후의 믿음이 똑같이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이지만,

    - 전혀 다른 믿음이다.

     

    전자의 믿음은 자기 자신의 가치에 근거한다.

    - 자신은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구원받으리라고 믿는다.

    - 그래서 필연적으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부정한다.

    -그래서 절망적인 현실에서 구원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원망한다.

    그러나 후자의 믿음은 하나님의 절대 가치에 근거한다.

    -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믿음’을 통해 자기 가치가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인정한다.

    - 그래서 가치 없는 자신에게 절망적인 현실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가치이신데,

    - 그 하나님께서 구원과 회복을 약속하셨기에,

    -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을 갖는다.

     

    이것이 예레미야서가 멸망을 전하는 최종 목적이다.

    -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고, 자기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절대 오물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이 소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소망의 근거가 자신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정했지만,

    - 이제는 소망의 근거가 하나님이기에 영원히 확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 메시지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 부활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와 정화하게 일치한다.

    -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딱 하나이다.

    -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행하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 베드로를 절망에 빠지게 하셨다.

    -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 자신에게는 구원받을 가치가 전혀 없고, 멸망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파괴하셨다.

    왜 이렇게 하셨는가?

    - 참된 가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님만 믿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죽음 이후에만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죽이셨다.

    -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멸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 멸망이 필요하냐?

    - 구원받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서가 말하는 메시지다.

     

    결론 -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본문이 전하는 멸망은 두 가지 반대 의미가 있다.

    - 멸망 선포를 들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멸망 선포는, 말 그대로 ‘멸망’을 전한다.

    - 당신은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절대 아니다.

    - 당신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 멸망할 것이다.

    - 그래서 당신이 얼마나 참혹한 절대 오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신에게 구원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착각을 버리고,

    -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할 것이다.

     

    반면에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멸망 선포는, ‘소망’을 전한다.

    - 당신은 구원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절대 아니다.

    - 당신은 구원받을 것이다.

    - 회복될 것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당신은 참혹한 절대 오물이지만,

    - 하나님이 얼마나 절대 가치이신지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기 가치에 근거하여 빠졌던 절망에서 벗어나서,

    - 하나님 가치에 근거한 소망을 갖도록 할 것이다.

    그래서 소망을 가진 사람도, 절망에 빠진 사람도 모두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 두 가지 모두에 속해 있다.

    - 어떤 부분에는 잘못된 소망을 가지고 있고,

    - 또 다른 부분에는 잘못된 절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절망과 소망을 모두 줄 것이다.

    - 죽음과 부활을 모두 줄 것이다.

    - 절망과 죽음을 통해 그리고 소망과 부활을 통해,

    - 결국 우리는 절대 오물이고, 하나님만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깨닫게 할 것이다.

    그것이 예레미야서 전체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선택은 우리 몫이다.

    - 멸망을 선포하는 성경에 잘못된 소망을 앞세워 자기 가치를 주장할지,

    - 혹은 소망을 선포하는 성경에 잘못된 절망을 앞세워 하나님의 가치를 부정할지,

    - 아니면, 멸망을 선포하는 성경에 자기 가치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할지,

    - 혹은 소망을 선포하는 성경에 절망스러운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할지.

    가치가 있어 보이는 자신과, 가치가 없어 보이는 자신을 모두 부정하고,

    - 오직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만이 

    - 진정한 소망을 갖고,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으로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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