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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레미야(77) 44:15-30 예레미야서 결론 - 끝까지 우상 숭배를 맹세하는 이스라엘
    예레미야서 2024. 1. 28. 00:44

    이스라엘은 끝까지 완강하게 하나님을 거부한다.

    [렘 44:16] 당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소.

    -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예언하든,

    - 즉,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무슨 말씀을 하시든,

    - 이스라엘은 결단코 순종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어쩌다가, 자신도 모르게,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 의도를 갖고, 철저한 계획을 세워서, 의식적으로 일으킨 행위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것에 부끄러움도 없다.

    -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낸다.

    - 자신은 반드시 우상 숭배를 해야 한다고 떠벌린다.

    - 그것을 감히 ‘맹세’까지 한다.

    [렘 44:17~18]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맹세한 대로 할 것이오. 우리와 우리 조상과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우리도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그에게 술 제물을 바치겠소. 하늘 여신을 섬길 때에는 우리에게 먹을 양식이 풍족하였고, 우리가 잘 살았으며, 재앙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18)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일을 그치고 그에게 술 제물 바치는 일을 그친 뒤부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고, 우리는 전쟁과 기근으로 죽게 되었소.

    우상 숭배를 하겠다는 이유도 가관이다.

    - 우상 숭배를 해야만 ‘먹을 양식이 풍족하고, 잘 살았으며, 재앙을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부족하고, 전쟁과 기근으로 죽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자기 생존과 하나님 중에 자기 생존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버렸다.

    - 게다가 그 선택에 부끄러움과 죄책감조차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당당하게 우상 숭배를 맹세한다.

    - 그들 입장에서 우상 숭배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며,

    - 하나님은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에서 하나님을 죽인다.

    - 그랬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미 별거하여 실질적 이혼 상태에 있지만, 

    - 아직 법적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부부와 같다.

    - 그런 상태에서 외도해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 오히려 이전에는 배우자 때문에 괴로웠는데,

    -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 행복해졌다고 당당하게 드러낸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체이다.

     

    예레미야서는 결론에서 이스라엘의 본모습을 가감 없이 들춰낸다.

    -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려는 시늉이라도 했다.

    [렘 42:3] 그러니 예언자님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우리가 가야 할 길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도록 해주십시오.

    - 물론 그렇다고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다짐하며,

    - 우상 숭배를 하겠다고 맹세한다.

     

    도대체 이스라엘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 긍정적 관점

    어쩌다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우상 숭배를 하겠다고 맹세하는 지경이 되었을까?

    - 물론 예레미야서는 시작부터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했다.

    - 예레미야라는 예언자가 등장한 것부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예언자는 필요 없는 존재이다.

    - 예언자의 역할은 사람들이 몰랐던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 이미 잘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반복해서 전하는 사람이다.

    - 그래서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하나님이 굳이 예언자를 선택하여,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에게 보낼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다.

    - 이미 잘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굳이 예언자를 통해 사람이 알아듣기 쉬운 목소리의 형태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위기였고,

    -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 표면적으로, 이전에는 그 마음을 숨기기 위해 치장이라도 했다면,

    - 이제는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낸다.

    우상을 섬겼을 때는 유익을 얻었었는데,

    - 하나님을 섬기니 오히려 손해만 봤다고 말하며,

    -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하겠다고 맹세한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 껍데기조차 집어던진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스라엘의 멸망’이다.

    -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폐허가 되었으며, 

    - 왕을 비롯하여 많은 고관과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조국의 상실을 넘어선다.

    - 이스라엘에게 조국은 단순한 땅과 민족이 아니라,

    - ‘하나님이 주신’ 땅과 민족이다.

    - 즉, 하나님 약속의 증표이며, 하나님 그 자체이다.

    따라서 조국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파괴를 상징한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은 조국의 파괴를 보며 하나님의 파괴, 하나님의 패배, 하나님의 죽음을 보았다.

    - 그들에게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 하나님이 주신 조국이 파괴되는 것을 보며, 그들 마음에 있던 하나님도 함께 죽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 하나님이 무능력하게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생각해 보니, 이스라엘은 무능력한 하나님을 의지했던 과거가 전부 후회된다.

    -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애초부터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지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 즉, 이스라엘의 멸망은 무능력한 하나님 때문이었다.

    오히려 ‘하늘 여신’을 의지했다면, 멸망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 그러니 ‘하늘 여신’을 섬겼을 때 누렸던 풍요로운 삶이 떠오른다.

    [렘 44:17~18] ・・・・ 우리와 우리 조상과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우리도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그에게 술 제물을 바치겠소. 하늘 여신을 섬길 때에는 우리에게 먹을 양식이 풍족하였고, 우리가 잘 살았으며, 재앙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18)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일을 그치고 그에게 술 제물 바치는 일을 그친 뒤부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고, 우리는 전쟁과 기근으로 죽게 되었소.

    그런데 지나간 일 후회하면 뭐 하겠는가.

    - 이제부터라도 바르게 선택해야지.

    - 과거 무능력한 하나님을 의지하여 멸망했으니,

    - 이제는 유능한 하늘 여신 의지하여 조국도 되찾고, 풍요로운 삶도 회복하겠다고 결심한다.

    - 결코 무능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고,

    - 유능한 우상을 섬기겠다고 맹세한다.

     

    이것이 현재 이스라엘의 감정이다.

    - 그냥 보면 우상 숭배를 맹세하는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 하나님만 섬기던 백성이 하루 아침에 돌변한 것 같다.

    - 하지만 이스라엘의 정서를 거슬러 따라가 보면, 이러한 태도를 갖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어도 공감할 수는 없다.

    - 이스라엘의 태도는 틀렸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실망할 수 있다.

    - 감정 자체는 존중할 수 있다.

    -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실망했다고 하나님을 거부하면 안 된다.

    - 거부하면서도 아무런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면 안 된다.

    - 마음으로 하나님을 죽이면 안 된다.

    - 죽인다고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이 지경이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 부정적 관점

    이스라엘의 멸망 시점으로 되돌아가 보자.

    - 모든 것은 파괴되었다.

    - 단순히 삶의 기반만 무너진 것을 넘어, 존재의 기반까지 무너졌다.

    - 하나님은 전능하며, 그 능력이 이스라엘을 지키고 있기에, 

    - 이스라엘의 존재는 언제나 안전하다는 믿음에 기반하여 살았는데,

    - 이스라엘과 함께 그 믿음이 파괴되었다.

    - 존재의 본질이 뿌리째 뽑힌 심정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몸보다 마음이 더 괴로웠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뉜다.

    본문에 나온 이스라엘은 이 사태의 원인을 ‘하나님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셨지만,

    -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약속을 지킬 능력조차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 하나님은 무능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판단했다.

    그랬기 때문에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했다고 말한 것이다.

    [렘 44:18]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일을 그치고 그에게 술 제물 바치는 일을 그친 뒤부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고, 우리는 전쟁과 기근으로 죽게 되었소.

    그러니 하나님에서 우상 숭배로 넘어가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문제는 단순히 우상 숭배가 아니다.

    - 문제의 본질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해석은 무조건 맞고,

    - 그 외의 다른 해석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잘못된 믿음이다.

    - 그랬기 때문에 우상 숭배를 하겠다고 당당하게 맹세한 것이다.

    -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우상 숭배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결과이다.

    - 문제의 본질은 우상 숭배를 하게 만든 내면에 있다.

    그것은 자기 해석이 맞다는 믿음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심각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죽었다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

    -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분노와 원망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 하나님이 죽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 ‘감정’을 곧바로 ‘판단’으로 연결하면 안 된다.

    - 자기 ‘감정’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 특히 ‘감정’이 하나님과 성경을 부정할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자기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 오히려 자기 감정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억눌렀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믿었다.

    - 즉,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 하나님이 절대 가치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절대 오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하지만 같은 사태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을 ‘하나님의 무능력’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서로 사랑하기로 약속했다.

    - 그 사랑의 증거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셨고,

    - 이스라엘 역시 율법 준수와 성전 제사를 약속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 율법 준수와 성전 제사 약속은 지키는 시늉만 했을 뿐,

    - 언제나 다른 것을 사랑했다.

    -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발정난 짐승’에 비유했다.

    [렘 2:24] 너는 사막에 익숙한 야생 암나귀와 같았다. 암내만 나면 헐떡이는 그 짐승, 그 짐승이 발정하면 누가 그것을 가라앉힐 수 있겠느냐? 그런 암컷을 찾아 다니는 수컷은 어느 것이나 힘들이지 않고서도 발정기가 된 암컷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시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셀 수 없이 기회를 주셨다.

    -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모든 기회를 걷어차 버렸다.

    - 따라서 이스라엘의 약속 파기로 인한 결과로, ‘이스라엘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한다.

    [렘 44:23] 여러분이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살라 바쳐서, 주님께 죄를 짓고,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주님의 율법과 율례와 규정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여러분에게 이런 재앙이 닥쳐 온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상황을 두고 이스라엘과 예레미야는 다르게 해석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해석했고,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무능력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기로 선택했고,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다.

    같은 상황을 두고 다른 판단을 했기 때문에, 정반대의 결론을 맺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이스라엘과 예레미야의 해석 중에 어떤 것이 옳을까?

    - 물론 우리는 고민의 여지도 없이 명확하게 안다.

    - 이스라엘이 틀리고 예레미야가 옳았다는 것을.

    - 그래서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라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것을.

    - 우상 숭배가 오히려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그러나 당시에는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 이스라엘은 눈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 하나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무능하게 가만히 계셨던 초라한 하나님과,

    - 다른 하나는, 이집트를 번성하게 한 풍요의 하늘 여신이 있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하나님 신앙에 기반한 민족이라 할지라도,

    - 평생토록 하나님만 의지했더라도, 

    - 이왕 멸망하여 이집트까지 도망 온 김에,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신을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 하나님 의지해서 별 볼 일 없었으니, 한번 바꿔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 게다가 겉보기에도 화려하고 풍요로운 신이라면, 무능하고 초라한 하나님보다 더 낫겠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 새로운 신에게 새로운 길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않았겠는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는 우리는 진실이 당연히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고,

    -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소망을 찾는 이스라엘이 한심해 보인다.

    - 하지만 역사 한복판에서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진실은 완전히 감추어져 있었다.

    - 그러니 초라한 하나님보다 화려한 하늘 여신이 훨씬 매력 있어 보였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돈과 하나님 중에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고르겠는가?

    - 구체적으로, 만약 앞으로 교회 가지 않으면 1000억 원을 주겠다고 제안받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 설상가상으로, 때마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심각한 난치병에 걸려, 1억짜리 주사를 매일 맞지 않으면 바로 죽을 수밖에 없다면, 1000억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 1000억을 거절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교회에 가서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 신앙을 지켰다는 기쁨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애통함을 감수하며 여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러한 예가 너무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다.

    - 현실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이 딱 이랬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과 몇 달 전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을 대부분 잃었다.

    - 사람뿐만 아니라 삶의 터전, 정신적 기반, 하나님에 대한 믿음까지 잃었다.

    - 게다가 낯선 땅 이집트까지 도망 와서, 얼마 남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을 위기에 처했다.

    - 모든 것을 잃어서, 당장 입을 옷, 잘 집, 먹을 음식조차 없고, 추구해야 할 가치, 사랑하는 사람, 의지할 신앙까지 없다.

    - 몸과 마음을 지켜줄 대상이 절박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 한 가지 제안을 받았다.

    - 초강대국 이집트를 지탱할 만큼 강하고 유능한 하늘 여신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 하늘 여신을 섬기면, 풍요로운 하늘 여신이니만큼 풍요로운 의식주를 제공받을 수 있고,

    - 이집트와 같은 강력한 국가로 회복할 수 있다는 소망을 얻었다.

     

    아마 같은 제안을 이스라엘 멸망 이전에 받았다면,

    - 그래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면,

    -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동요가 일어날지언정, 과감하게 하늘 여신을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 겉으로나마, 하늘 여신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것이다.

    - 하늘 여신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하나님만으로 나름 괜찮았기 때문이다.

    - 그 정도 욕심은 포기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안정된 직장, 소박하지만 안락한 집, 종종 다투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면,

    - 그래서 나름대로 소소하게 만족스럽게 살 때는, 물론 마음 안에서 동요가 있겠지만,

    - 1000억을 포기하고 신앙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 돈을 포기하고 신앙을 선택할 믿음은 있었다.

     

    그러나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면,

    - 당장 문제를 해결해 줄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 아무리 신앙이 옳고 중요하다고 한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배부를 때나 하는 소리이다.

    - 당장 1000억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과감하게, 부끄러움 없이 하늘 여신을 선택한 것이다.

    - 불과 몇 달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 당장 눈 앞에서 남아있는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을 위기이기 때문이다.

    - 당장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지 못하면, 신앙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 일단 살리고 봐야지.

    그러니 하늘 여신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 평생 하늘 여신만 섬기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 맹세에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 하나님의 무능력 때문인지, 이스라엘의 죄 때문인지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 일단 살고 봐야 했다.

    - 생존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 그것을 위해 하나님보다 하늘 여신이 더 유용했을 뿐이다.

    과연 이러한 이스라엘의 선택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 진실보다 생존을 선택한 것을 누가 정죄할 수 있겠는가.

    - 돈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신앙 대신 돈을 선택한 사람을 누가 정죄할 수 있겠는가.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잃더라도 돈 대신 신앙을 선택하라고 요구한다면,

    - 그 신앙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하나님은 결코 그런 요구를 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신앙 대신 돈을 선택하는 우리를 이해하고 용납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본문은 어떻게 말할까?

     

    본문이 말하는 진실 - 생존을 포기한 신앙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돈을 선택하는 우리를 정죄하신다.

    - 그런데도 돈 대신 신앙을 선택해야 한다고 요구하신다.

    -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신다.

    - 죽음 앞에서조차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하며 찬양해야 한다고 말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버렸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사랑 대신에 잔인한 죽음을 내보이신다.

    - 그래서 복의 하나님이 아닌 재앙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맹세하신다.

    [렘 44:27] 이제는 내가, 그들을 지켜 보겠다. 복을 내리려고 지켜 보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려고 지켜 보겠다. 그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유다 사람이 멸종될 때까지, 전쟁과 기근으로 그들을 죽이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진실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 이스라엘의 멸망이 하나님 때문인지, 이스라엘 때문인지 확인하자고 하신다.

    - 이스라엘의 멸망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에게 진실 게임을 청하신다.

    -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고 하신다.

    - 하나님이 옳은지, 이스라엘이 옳은지 겨뤄보자고 하신다.

    그래서 만약 이스라엘이 옳다면, 우상 숭배를 한 이스라엘은 흥할 테지만,

    - 하나님이 옳다면, 이스라엘을 멸망할 것이니,

    - 누구 말대로 되었는지 따져보자고 하신다.

    [렘 44:28~29] 전쟁을 피하여 이집트 땅을 벗어나 유다 땅으로 돌아갈 사람의 수는, 매우 적을 것이다. 이집트 땅에 머물려고 내려간 유다의 살아 남은 모든 사람이, 나의 말과 저희들의 말 가운데서 누구의 말대로 되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29) 나 주가 하는 말이다. 내가 이 곳에서 너희를 벌하고,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겠다고 한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은 이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장 죽음의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에게까지 생존이 아닌 진실을 제시하신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잔인한 하나님을 용납하지 못한다.

    - 어떻게 죽어가는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져 물으실 수 있냐고 말한다.

    - 이는 마치 선교지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당장 먹을 빵은 주지 않고 길고 지루한 설교를 하는 꼴이라고 비난한다.

    - 죽어가는 이유가 죄 때문이라고 정죄하기만 하며,

    -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원론적인 말만 반복하는 꼴이라고 비난한다.

    - 배가 고파서 눈이 뒤집어진 사람 앞에서 말이다.

    하나님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고 말한다.

    -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견 맞지만, 반만 맞다.

    - 하나님은 사랑이 맞다.

    -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 그래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많은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 그런 점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전도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빵만 주는 것도 옳지 않다.

    - 때로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빵이 아니라 진실을 줘야 한다.

    -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사람에게 배고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알려줘야 한다.

    - 생명은 빵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진실을 알려줘야 한다.

    [눅 4:4]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신 8:3]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어가는 누군가는 하나님께 빵을 받아 생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 그러나 굶어 죽어가는 누군가는 하나님께 빵이 아닌 진실을 받아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 생존뿐만 아니라 죽음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 생존과 죽음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또 이렇게 반문한다.

    - 왜 하나님은 누구는 살리시고 누구는 죽이시는가?

    - 더 사랑하기 때문에 살리시고, 덜 사랑하기 때문에 죽이시는가?

    - 어떻게 하면 사랑을 더 받아 살리심을 받을 수 있는가?

    묻는 이유는 살고 싶기 때문이다.

    - 누가 죽고 싶겠는가.

    - 누가 죽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겠는가.

    - 당연히 살아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살 수 있는 방법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는 이들에게 다시 반문한다.

    - 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가?

    - 왜 살리는 사랑이 죽이는 사랑보다 더 큰다고 생각하나?

    - 빨리 죽어서 하나님 곁으로 가는 것과 조금 더 살아서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살고 죽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살건 죽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셀 수 없이 살리셨다.

    - 수많은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주셨다.

    - 끊임없이 빵을 제공하셨다.

    - 진실보다 생존을 제공하셨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딱 한 번 생존이 아닌 진실을 제시하셨다.

    - 그것이 이스라엘 멸망이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빵을 주지 않고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 계속 빵을 주고 주고 또 줬는데도 신앙의 변화가 전혀 없으니까,

    -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 딱 한 번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사람에게 빵 대신 진실을 제시한 것이다.

    - 배고픈 것을 조금만 참고 하나님 말씀을 들어보라고 권유하신 것이다.

     

    과연 그런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 그런 하나님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 빵이 아닌 설교를 제시하는 것, 생존이 아닌 진실을 제시하는 것을 무조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빵과 생존으로‘도’ 표현된다.

    -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진실과 죽음으로‘도’ 표현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죽음을 주시는 것이다.

    - 살고자 발버둥치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늘 여신을 섬기겠다는 이스라엘에게

    - 완전한 멸망을 예고하신다.

    하나님은 생존이 아닌 진실을 제시하신다.

    - 생명은 빵이 아닌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신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진실은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 당시에는 이스라엘과 예레미야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멸망이 하나님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했고,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고대로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하나님의 무능함이 반박된다.

    - 동시에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는 진실이 입증된다.

    [렘 44:22~23]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악한 소행을 보시다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으셨고, 여러분이 한 역겨운 일을 보시다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나라가 오늘날과 같이 주민이 없는 폐허로 바뀌고, 놀라움과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23) 여러분이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살라 바쳐서, 주님께 죄를 짓고,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주님의 율법과 율례와 규정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여러분에게 이런 재앙이 닥쳐 온 것입니다.

     

    결론 - 삶이 아닌 죽음을 통해서만 입증되는 사랑

    이스라엘의 죄는 우상 숭배라는 표면적인 행위로 나타났지만,

    -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생존을 통해서만 입증된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 멸망으로 인한 참담한 ‘감정’ 때문에 하나님이 무능력하다는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평화만 예언하는 거짓 예언자가 난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죽음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죽음을 통해서만 입증되는 영역이 있고,

    - 그 영역은 전체 사랑 중에 가장 고귀하고 지순한 영역이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공생애 끝에 예수님을 죽이셨다.

    - 죽음만이 사랑의 극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죽음이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것이다.

    [롬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덜 사랑하셨기 때문에 죽이셨겠는가?

    - 하나님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셨다면,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셨겠는가?

    아니다.

    -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셨다.

    - 죽이고 부활케 하셔서 완전한 사랑을 이루셨다.

     

    따라서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도 죽게 하실 것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하듯, 우리도 삶의 기반, 정신적 토대, 사랑하는 사람, 의지하는 사상을 전부 잃을 것이다.

    - 그래서 실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죽을듯한 ‘감정’을 갖도록 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음의 ‘감정’ 때문에 우리는 즉각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할 것이다. 

    - 하나님은 무능하다고 정죄할 것이다.

    -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조차 도와주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아무 가치 없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 그 결과 하나님보다 돈이 더 강하다고 확신할 것이고, 

    - 평생을 오직 돈 버는 일에 투신하겠다고 다짐하여,

    - 반드시 부자가 될 것이라고 맹세할 것이다.

    -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를 맹세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잘못된 확신이 쌓일 때, 우리는 자신을 의심해야 한다.

    - 죽을 듯 고통스러운 ‘감정’은 인정하되,

    - 이 감정의 원인이 하나님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판단’은 유보해야 한다.

    -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 동시에 하나님이 무능하다며 성경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면 안 된다.

    - 자기 감정과 성경의 진실 모두를 양립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지점이 바로 죽을듯한 ‘감정’ 상태에서만 배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믿음이다.

    - 예수님도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이심이 확증되었다.

    [막 15:39]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특별한 한 가지를 배운다.

    - 생명이 빵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 생존이 아니라 죽음 안에 지극한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생명을 경험한다.

    - 생존에 중독된 우리가 생존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경험한다.

    - 생존의 노예, 죽음의 노예가 아닌 자신의 주인이 되어, 

    - 진정으로 자기다운 첫걸음을 걷는다.

    [롬 5:17]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합니다.

     

    즉, 죽음의 덫에서 벗어나 죽음을 이기는 것이 죽음에서 배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 죽음에서 벗어난 사람만 자유와 사랑을 누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존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무능하다고 정죄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다.

    - 죽음의 그림자에 갇혀 있는 사람은 ‘감정’과 ‘판단’을 구분하지 못한다.

    - 그래서 감정에 휩쓸려 오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억할 것은, 

    -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생존이 아닌 죽음을 주신다는 것이다.

    - 죽음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알려주신다.

    당연하겠지만, 죽음은 고통스럽다.

    - 반대로, 기쁜 것은 죽음이 아니다.

    - 예수님조차 죽음이 고통스러우셨다.

    그렇지만 견디자.

    -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로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다.

    - 그 하나님을 믿으면, 새로운 관점이 생길 것이다.

    - 죽음의 고통스러운 감정에 휩쓸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 죽음의 고통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그 사랑이 고통을 제거하지는 않지만,

    - 고통을 인내할 힘을 줄 것이다.

    - 그렇게 견디는 사람만이 고통의 끝에 이를 것이고,

    - 그 끝에 예수님이 두 팔 벌려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그렇게 견디어 예수님을 만날 때, 세상 전부를 얻은 듯한 성취감을 느낄 것이다.

    - 그것이 예수님이 준비해 두신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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