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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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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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서 말하지만, 고린도전서는 표면적인 내용과 내면적인 메시지가 다르다.
- 표면적인 내용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권면이다.
- 지금까지 교회에서 일어난 분열(1~4장), 음행(5~6장), 결혼(7장), 우상(8장) 문제를 다뤘다.
-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룬 이유는 문제 때문에 교회가 예수님을 부정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교회가 무너질 위기였다.
하지만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은 문제 해결이 아니다.
- 먼저는,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고린도 교회의 ‘가치 체계’를 지적하고,
- 근원적으로, 그러한 가치 체계를 갖도록 만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가치 체계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 그것만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이며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표면적인 문제에만 집중한다.
- 바울의 목적이 문제 해결이라고 착각한다.
- 그래서 고린도전서가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실천적 편지라고 오해한다.
- 이것이 고린도전서를 잘못 해석하는 핵심 원인이다.
물론 당면한 문제를 탐구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 고린도전서의 표면적인 내용이 그것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게다가 쉬운 일도 아니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 고린도전서가 기록되기 전에 바울과 고린도 교회는 문제에 대해 충분히 대화했고,
- 서로가 어떤 입장 차이를 가졌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편지에서 문제를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바울의 권면이다.
- 문제가 무엇인지 생략하고, 바울의 해결책만 제시한다.
- 따라서 바울의 해결책만 보고, 숨겨진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거꾸로 유추해야 한다.
- 마치 옆에서 전화 통화하는 사람의 말만 듣고, 전화기 너머 있는 사람의 말까지 유추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고,
- 바울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아는 것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 즉, 고린도전서의 표면적인 내용을 아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 고린도 교회가 이런 문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근원적인 원인까지 탐구해야 한다.
본문의 표면적인 내용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제시하는 후원을 거절한 사건이다.
- 그것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사도라는 것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입증하며,
- 후원을 받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 여기까지가 표면적인 내용이다.
많은 사람이 여기에서 멈추고 이렇게 결론짓는다.
- “바울은 진정한 사도이며,
- 복음을 위해 후원을 받지 않았다.
- 따라서 우리도 복음을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이다.
단호하게 말해서, 이러한 해석은 틀렸다.
- 물론 바울이 사도이며, 복음을 위해 후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 그것이 본문이 전하는 표면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려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 모두가 자신처럼 후원을 포기하고 희생하라고 본문을 기록하지 않았다.
- 이는 명백히 잘못된 해석이다.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다시 질문해야 한다.
- ‘도대체 고린도 교회는 무슨 이유 때문에 후원을 거절한 바울을 부정했을까?
-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사도라는 것까지 부정했다면, 후원을 거절한 것이 심각한 죄라고 인식했다는 뜻인데,
- 무엇을 근거로 바울을 정죄했을까?
- 고린도 교회가 죄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라고 더 깊게 질문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해서, 고린도 교회가 죄를 구분한 기준은 복음이 아니었다.
- 그래서 복음을 위해 후원을 거절한 바울을 정죄할 수 있었다.
- 바울은 오직 복음을 기준으로 판단했지만,
- 고린도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판단 기준, 가치 체계를 비판하고,
- 유일한 판단 기준은 복음이라는 것을 제시하려고 편지를 쓴 것이다.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다른 판단 기준을 가질 수 있을까?
- 바울과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을 다르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근거로 하나님을 인식했지만,
- 고린도 교회는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인식했다.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 보면,
- 그들은 헬라 철학의 풍조 안에서 평생을 살았다.
- 그래서 자신이 헬라 철학 안에서 생각한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만큼 그것에 익숙했다.
- 그러니 자신이 하나님을 헬라 철학에 기반해서 믿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 그 때문에 예수님에 근거한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 그 대신 자신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 궁극적으로, 믿는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이다.
- 더 정확히 말해서, 고린도 교회가 예수님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만 믿고 그 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바울을 틀렸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본문을 기록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 고린도 교회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 그래야 복음을 위해 후원을 거절한 바울의 행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 그래야 바울이 진정한 사도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며,
- 그래야 바울과 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 그래야 바울을 통해 올바른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전서는 단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실용적, 실천적 편지만이 아니라,
- 신앙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다루는 근원적, 철학적 편지이다.
- 실제 문제부터 하나님의 본질까지 전부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고린도전서를 표면적인 내용만으로 해석하면,
- 그래서 ‘바울은 진정한 사도로서 복음을 위해 후원을 거절할 만큼 희생했다.’라고만 해석하면,
- 적용에 문제가 생긴다.
- ‘우리도 바울처럼 유익을 포기하고 희생하면, 의로워질 수 있다.’라는 피상적인 적용밖에 할 수 없다.
- 그래서 희생을 의로움의 척도라고 착각하게 된다.
이렇게 표면적으로 해석하면, 피상적으로 적용할 수밖에 없고,
- 피상적인 적용은 적용 그 자체에 몰입하게 만들며,
- 그래서 본질을 잃은 율법주의에 빠진다.
율법주의는 나쁜 의도를 가진 특정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 성경을 표면적인 내용만으로 해석하는 성의 없는 사람 모두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 만약 우리도 고린도전서의 내면적인 메시지까지 끈기 있게 나아가지 않고, 표면적, 피상적 해석에서 멈춘다면,
- 율법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죽이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1~2절: 바울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두 가지 비판 - 자유인, 사도
바울의 첫 두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 자신이 ‘자유인’이며 ‘사도’라고 강력하게 호소한다.
- 이를 뒤집어 말하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자유인’, ‘사도’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고전 9:1]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바울은 왜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항변해야만 했을까?
- 왜 자신이 세운 교회에 사도임을 부정당하는 지경에 빠졌을까?
문제의 발단은 지난 본문에 있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우상 제물 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다.
- 우상 제물 고기를 먹는 행위가 믿음이 연약한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바울은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 따라서 바울의 다짐은 복음에 따라 형제를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전 8:9~10]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0)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고전 8: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평가는 달랐다.
- 바울이 우상 제물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가 연약한 믿음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 약한 믿음 때문에 우상의 영향력을 여전히 두려워했고,
- 이는 하나님의 독보적 지위와 능력을 의심하는 태도라고 정죄했다.
- 만약 믿음이 확고하다면, 그래서 우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 자유롭게 우상 제물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 고린도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자유가 없는 바울은 믿음이 연약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사도라는 것도 의심했다.
-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복음을 전할 수 없으며,
-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도일 수 없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바울이 자유인과 사도가 아니라는 고린도 교회의 두 가지 비판은 사실상 하나이다.
- 바울은 우상 제물 고기조차 먹지 못하는 것에 근거하여 자유인이 아니고,
- 자유가 없으면 믿음이 연약한 것이기 때문에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이렇게 고린도 교회는 자유인과 사도를 연결한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논점 - 신앙에서 자유의 비중
그런데 과연 그럴까?
- 사도는 반드시 자유인이어야 할까?
- 사도라면 자유롭게 우상 제물 고기를 먹어야 할까?
- 만약 우상 제물 고기를 자유롭게 먹지 못한다면, 사도의 자격이 없는 것일까?
- 과연 사도의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이 자유일까?
바로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논쟁하는 논점이다.
- 신앙에서 자유가 차지하는 비중을 두고 논쟁한다.
결론부터 말해서, 바울은 신앙에서 자유는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 신앙에서 결정적인 유일한 요소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는 자유가 신앙에서 결정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 당연히 사랑도 중요하지만, 자유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논쟁이 첨예했다.
- 굳이 편지를 쓰는 데까지 이르도록 논쟁이 해소되지 않았다.
- 고린도 교회는 자유를 숭배했고, 바울은 자유 숭배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자유 숭배를 부정하는 바울을 부정하는 것이고,
- 바울은 자유를 숭배하는 고린도 교회를 정죄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자유를 명확하게 규정한다.
- 신앙에서 자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설명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의 한계도 제시한다.
- 자유는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며,
- 자유와 사랑이 충돌하여 자유가 사랑을 제한하려 할 때,
- 자유는 엄격하게 절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도 자유를 가졌지만, 복음을 위해 자유를 포기했다.
- 복음을 위해 권리를 쓰지 않고 참았다.
[고전 9:12]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을 참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러지 않았다.
- 자유를 숭배했다.
- 그래서 자유와 사랑이 충돌하여 자유가 사랑을 제한하려 할 때조차 자유를 고수했다.
- 자기도 모르게 복음이 훼손되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 자신의 자유로 인해 다른 신도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 그래서 그 신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가 부정되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고전 8:9~12]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0) ・・・・ (11)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12)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 차이 - 정적 vs 역동적
고린도 교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 예수님을 믿는다는 교회가 왜 예수님을 부정하게 되었을까?
- 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자유를 숭배하게 되었을까?
- 왜 하나님과 자유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게 되었을까?
바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 하나님을 무한히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했다.
- 전지전능하며 영원불변한 하나님이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은 합당하다.
- 지금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한다.
- 이는 인간의 경험과 상식에 근거한 판단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자유를 동일시했다.
- 하나님과 함께 자유를 숭배할 수 있었다.
- 그래서 자유가 없는 바울을 비난하며,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 경험과 상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았다.
- 오직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판단했다.
그 하나님은 자유롭지 않다.
- 전지전능하며 영원불변하지 않다.
- 그랬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렸으며,
- 전지전능하지 않고 무능력했으며,
- 불변하지 않고 죽었다.
대신 예수님은 오직 사랑하기만 하셨다.
- 사랑하기 위해 일평생을 사셨고,
- 사랑하기 때문에 죽으셨으며,
- 또 다시 사랑하기 위해 부활하셨다.
- 사랑이 언제나 우선이고, 나머지 모든 것을 수단 삼으셨다.
-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자유까지도.
이것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 논쟁의 핵심이다.
- ‘하나님은 누구냐?’를 두고 서로 싸우고 있다.
- 자유라는 고정된 가치로 영원불변하신 정적인 분이냐,
- 아니면 사랑을 위해 역동하신 분이냐?
고린도 교회는 정적인 하나님을 믿었다.
- 그래서 영원불변한 존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자유를 하나님과 동일시했고,
- 자유를 지키고자 사랑을 훼손했다.
- 그러면서 사랑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까지 훼손했다.
반면에 바울은 역동적인 하나님을 믿었다.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의 모든 것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유라는 고정된 가치는 역동적인 사랑을 위한 수단으로 치부했다.
- 우상 제물 고기 먹을 자유, 교회의 후원을 받을 자유를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이런 차이가 왜 일어났을까?
- 왜 바울은 십자가에 근거한 역동적인 하나님을 믿고,
- 고린도 교회는 경험과 상식에 근거한 정적인 하나님을 믿었을까?
하나님을 역동적인 존재로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존재의 기원인 하나님을 역동적이라고 믿는 것은 언제나 변하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인생이라는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
- 다르게 말하면, 그곳에서는 아무 건물도 지을 수 없다.
- 땅이 흔들리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너진다.
그래서 자신을 지켜줄 보호막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비가 오면 몸이 젖고, 눈이 오면 춥고, 해가 비치면 더운 곳이다.
- 마치 광야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이곳에서 머물기 싫어한다.
- 언제나 외부 위협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 게다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 그래서 마음 내부의 성취감, 효능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역동적인 하나님에서 벗어나 정적인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 누가 그런 불안정한 곳에서 머물길 원하겠는가.
- 역동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안정한 곳에 머무는 것이다.
- 누구도 그런 고린도 교회를 탓할 수 없다.
그러나 정적인 하나님을 믿으면 안정된다.
-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원칙이 있다.
- 전지전능, 그로 인한 불변과 자유가 최고의 가치이다.
- 그 가치 체계의 최정점에 하나님이 계시고,
- 능력에 따라 모든 사람이 수직 배열된다.
- 능력이 적으면 낮고, 능력이 많으면 높다.
물론 이곳에도 바람, 비, 눈, 해가 있다.
- 외부의 위협이 있다.
- 그러나 이곳은 토대가 흔들리지 않고 안정되기 때문에,
- 인생이라는 건물을 지을 수 있다.
- 그래서 바람, 비, 눈, 해를 자기 힘으로 피할 수 있고,
- 자기가 이뤘다는 성취감, 효능감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 능력을 있어서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은 강한 건물을 짓고 안전하게 살 수 있지만,
- 능력이 없어서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은 그럴 수 없다.
- 그래서 모두가 조금 더 높이 올라가려고 애쓴다.
- 특히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려고 서로 싸운다.
그래서 이곳은 전쟁터가 된다.
- 능력이라는 일관된 기준에 따라서 만인이 만인을 대항하여 싸운다.
- 그러니 서로는 언제나 적이고 경쟁자이다.
게다가 성경이 말하길, 종말이 오면 이곳의 땅도 역시 흔들릴 것이다.
- 모든 건물이 무너질 것이다.
- 그래서 보호해 줄 대상이 전부 사라질 것이다.
- 마치 지옥처럼 말이다.
이것이 정적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사는 세계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세계에 살았는가?
- 역동적인 하나님을 믿어서 역동적이지만 불안정한 세계에 살았다.
- 인생에서 어떤 건물도 지을 수 없고,
- 스스로 성취감, 효능감을 얻을 수 없는 세계이다.
- 언제나 외부 위협과 내부 불안에 노출된 세계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있다.
- 그것은 꿈틀대며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 마치 땅이 마구 흔들리다 못해 스스로 움직여서 안식처가 된다.
- 바울은 아무 건물도 지을 수 없지만,
- 땅이 저절로 움직여서 바울을 지켜준다.
- 바람이 불면 벽을 만들고,
- 비나 눈이 오면 천정을 만들며,
- 해가 뜨면 그늘을 만든다.
- 마치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낮의 해와 밤의 달로부터 지켜주신 것처럼 말이다.
[시 121:5~6]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네 오른쪽에 서서, 너를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6) 낮의 햇빛도 너를 해치지 못하며, 밤의 달빛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불안정한 세계에 머물 수 있었다.
- 불안정해서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곳이지만,
- 불안함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 역동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자기 건물을 지어 얻는 만족감과 안정감보다 역동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주는 만족감과 안정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 자기 스스로 지은 건물과 하나님이 지으신 건물 중 어떤 것이 더 믿을 만하겠는가.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다.
- 아직도 자기 건물을 지어 얻는 만족감과 안정감이 전부인 줄 알았다.
- 그래서 자유를 숭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바울과 고린도 교회가 갈등한 것이다.
-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교회가 되었지만,
- 그래서 고린도 교회야말로 바울이 사도라는 것을 보증하는 결정적인 표이지만,
- 자유를 훼손하려는 바울을 의심하며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고전 9: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나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표입니다.
3~10절: 바울의 항변 1 - 바울이 자유인이라는 증거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기 자유를 제한했다.
- 7장에서 결혼할 자유를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 독신으로 살았다.
- 결혼하면 배우자와 하나님께 마음이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고전 7:33~34]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쓰게 되므로, (34) 마음이 나뉘어 있습니다. ・・・・
- 8장에서 우상 제물 고기 먹을 자유를 포기했다.
- 약한 신도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 8: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 또 9장에서 복음을 전한 교회의 후원을 받을 자유를 포기하고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 복음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말이다.
[고전 9:12] ・・・・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을 참습니다.
이것을 두고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자유인이 아니라고 비난했다.
- 그래서 바울에게 우상 제물을 먹고 마실 권리가 없고,
- 결혼할 권리가 없으며,
- 노동하지 않고 후원을 받을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 사도라면 마땅히 권리를 누릴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바울은 사도라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고 주장하기 위해 먼저 자신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 그래서 자신에게 노동하지 않고 교회의 후원을 받을 권리와 자유가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고전 9:4~6] 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습니까? (5) 우리에게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동생들이나 게바처럼,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6) 나와 바나바에게만은 노동하지 않을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먼저 7절에서 일상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 군인, 농부, 양치기도 노동하면 대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고전 9:7] 자기 비용으로 군에 복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따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양 떼를 치고 그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음 8~10절에서 율법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 ‘타작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율법은 소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인데,
- 타작하는 소가 노동하면서 알곡을 먹을 권리를 갖듯, 복음 전하는 자신도 노동의 대가로 교회의 후원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는 뜻이다.
즉, 바울 자신에게 후원받을 권리, 노동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11~14절: 바울의 항변 2 - 바울이 자유를 포기한 이유
바울은 같은 말을 반복한다.
- 11~12절에서 비유가 아닌 실제 예를 든다.
- 영적인 것, 즉 복음을 전하고 나서, 그보다 가치가 적은 물질적인 것으로 돌려받는 것이 당연한 만큼 자신은 교회의 후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 게다가 고린도 교회는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후원을 하고 있었다.
- 추정하건대, ‘다른 사람들’은 베드로와 아볼로이다.
[고전 9:12]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
계속 예를 반복한다.
- 13절에서는 성전 율법을 근거로 말한다.
- 성전 제단에서 일하는 사람조차 그곳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산다.
- 마지막으로 14절에서는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말한다.
- 누가복음 10장 7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후원으로 먹고 마시라고 하시며,
-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말씀하신다.
-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후원받아 살아갈 자유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전 9:14]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살아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에게 권리를 누릴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방법으로 증명한다.
- 이를 통해 바울은 자유인이고,
- 이는 바울에게 자유를 누릴 만큼의 강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며,
- 따라서 강한 믿음을 가진 사도가 되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 이렇게 바울은 1절에서 제시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 아직 해결해야 할 의문이 남아있다.
- 그렇다면 도대체 왜 자유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 왜 우상 제물 고기 먹을 자유, 후원을 받을 자유를 제한했는가?
- 왜 후원을 거절하고 노동을 했는가?
이번 단락에서는 한 구절로 간단하게 대답하고,
- 다음 단락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 교회의 후원이 어떻게 지장을 주었는지 바울은 말하지 않는다.
- 일반적으로, 교회의 후원을 받으면 교회에 매이게 되고,
- 그러면 교회가 복음에서 벗어났을 때 바르게 지적할 수 없기 때문에 후원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우려되는 점은 교회가 후원을 빌미로 신앙에 게을러질 수 있다.
- 자신은 물질적 지원을 했기 때문에 충분한 헌신을 했고,
- 삶의 태도와 방향, 가치 체계 등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바울이 가치 체계의 변화를 요구할 때,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처럼 거부감을 갖는다.
- 이렇게 되면 복음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갖게 되고,
- 복음 전도가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바울은 교회의 후원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론 - 자유 숭배는 남 일이 아니다.
자유를 숭배하며 바울과 복음을 거부하는 고린도 교회를 보면 이해가 안 된다.
- 교회라는 곳이, 특히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어떻게 바울까지 부정하며 저 지경에 빠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데 그 의문 이면에는 이런 전제가 있다.
- 나라면 안 그랬을 텐데.
- 만약 내가 바울에게 복음을 직접 들었고,
- 고린도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증언을 듣고, 수많은 기적을 경험했다면,
- 나는 자유 따위에 휩쓸리지 않고 바울이 전한 복음 따라 살았을 텐데.
이러한 전제에는 또 전제가 있다.
- 고린도 교회는 어리석었구나.
- 바울에게 직접 복음을 들었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구나.
- 나는 아닌데.
- 나였다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여 흔들리지 않고 복음 따라 살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 그렇게 지혜롭고 그렇게 확고하게 믿는다면,
- 그래서 고린도 교회와 달리 이미 예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있다면,
-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어리석음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 도대체 고린도 교회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성경을 왜 읽냐고 묻고 싶다.
어차피 성경을 읽어도 자신과 상관없는 어리석은 사람 이야기뿐이라면,
- 읽을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성경은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다.
- 믿음이 약하건 강하건 상관없이 모두에게 성경이다.
- 특히 고린도 교회의 어리석음과 어리석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 역시 우리를 위한 말씀이다.
- 이것이 공감되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우리가 성경을 성경이라 부를 때,
- 이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 성경이 고린도 교회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이유는 우리가 같은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 성경이 어리석은 교회를 향해 권면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바로 그 권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이것이 성경을 믿는다는 고백에 포함된 뜻이다.
물론 고린도 교회의 어리석음이 내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을 수 있다.
- 공감되지 않을 수 있다.
- 그런데 그 이유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성경이 잘못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 내가 아직 성경을 이해할 만큼 신앙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자신의 죄를 그만큼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성경과 자신이 상충할 때 성경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바른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태도에 머물면 안 된다.
- ‘도대체 고린도 교회는 자유 따위에 빠져서 바울까지 부정하는 어리석음에 빠졌을까? 이해가 안 되네.’라며
- 성경과 자신을 분리하면 안 된다.
오히려 성경과 자신을 동일시 해야 한다.
- ‘성경이 고린도 교회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는구나.
- 처음에는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이해되지 않았는데,
-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저런 어리석음이 있구나.
- 나도 하찮은 것을 숭배하며 바울과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구나.
-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절제하는 태도를 가져야겠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 성경은 남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믿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도 고린도 교회처럼 복음 외에 무엇인가를 숭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숭배하는 것 - 성취
그렇다면 현대의 교회는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 고린도 교회는 지혜를 숭배했다.
- 지혜는 당시 헬라 철학 풍조에서 최고의 가치였다.
- 그래서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탐내는 가치였다.
- 그랬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지혜를 숭배했다.
그러면 현대의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는 무엇일까?
- 돈, 명예, 안정, 인정 등 많지만, 더 근원적으로, ‘성취’이다.
- 세상에서도 성취를 칭송하지만,
- 교회에서조차 전도, 선교, 봉사, 경건 등을 성취했을 때 칭찬과 보상을 준다.
그런데 성취는 정적인 세계에서만 가치를 갖는다.
- 안정된 토대에서만 건물을 짓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 게다가 일관된 목표가 전제할 때 목표를 이룬 성취가 가치를 갖는다.
- 따라서 성취가 가치를 갖는 곳은 정적인 하나님이 다스리는 안정되고 일관된 세계이다.
그러나 역동적인 세계에서는 성취가 가치를 갖지 못한다.
- 토대가 흔들리기에 건물을 지어도 무너진다.
- 게다가 일관된 목표도 없다. 언제나 역동한다.
- 그래서 힘겹게 성취를 이뤘다고 해도 변화된 목표로 인해 의미 없는 성취가 된다.
- 그렇기 때문에 성취를 이루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 따라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세계에서 성취는 가치가 없다.
그런데 많은 교회는 여전히 성취를 추구한다.
- 세속적인 가치인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교회도 많지만,
- 신실한 교회라고 해도 변화와 성숙을 추구한다.
- 더 경건하고, 더 부지런하며, 더 헌신적이길 요구한다.
- 그것이 신앙의 기준이 된다.
특히 산업화 사회가 이를 가속했다.
- 효율과 성과를 중요시하는 풍조가 교회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효과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전도 방식을 찾는다.
이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기반한 역동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 경험과 상식에 기반한 정적인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성취를 이루지 못하셨다.
- 건물이나 책을 남기지도 못하셨고,
- 제자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셨다.
-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모든 제자는 떠났다.
- 예수님이 이루신 유일한 성취는 평생 이루신 모든 성취를 십자가에서 파괴하신 것뿐이다.
- 성취를 부정하신 성취가 예수님의 진정한 성취이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 전도, 선교, 예배, 봉사, 성숙, 변화 전부 중요하지 않다.
- 역동적인 하나님을 믿고, 역동적인 가치 체계 안에서, 성취를 부정하는 성취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길이다.
어차피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이룬 성취는 하나님의 불시험 앞에서 다 사라질 것이다.
- 하나님이 세우신 것만 남는다.
[고전 3:13~15]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14)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15)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성취가 아니라, 역동하는 하나님과 함께 역동하는 것뿐이다.
-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만 인정하는 것뿐이다.
- 자기 성취를 태우며, 하나님의 성취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런 사람만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 여전히 자기 성취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율법을 붙잡고 있던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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