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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89) 51:34~64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멸망을 원하지 않았다.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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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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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멸망 예언도 이제 끝이다.

-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폭행한 죄를 범했다.

[렘 51:35] 내가 당한 폭행을 그대로 바빌로니아에게 갚아 주십시오.” 시온의 백성이 이렇게 호소할 것이다. 바빌로니아 백성이 나의 피를 흘렸으니 그들에게 그대로 갚아 주십시오. 예루살렘이 이렇게 호소할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어린 양처럼 도살장에 끌고 가서 죽이실 것이다.

[렘 51:40] 내가 그들을 어린 양처럼, 숫양이나 숫염소처럼, 도살장으로 끌고 가겠다.

- 특히 바벨론의 신상들과 도성이 파괴될 것이다.

[렘 51:47] 그러므로 보아라, 내가 바빌론의 신상들에게 벌을 내릴 날이 다가왔다. ・・・・

[렘 51:52] 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날에 내가 바빌론의 신상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며, 온 나라에서 칼에 찔린 자들이 신음할 것이다.

[렘 51:58]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바빌론 도성의 두꺼운 성벽도 완전히 허물어지고, 그 높은 성문들도 불에 타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뭇 민족의 수고가 헛된 일이 되고, 뭇 나라의 노고가 잿더미가 되어 모두 지칠 것이다.

이렇게 바벨론은 심판 받아 멸망하고, 결국 역사에서 사라진다.

 

하나님은 다른 대상을 폭행하는 이를 가만두시지 않는다.

- 행한 대로 받게 하신다.

- 그래서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를 폭행한 바벨론의 멸망은 마땅하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폭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 정서적, 사회적, 물질적, 금전적인 폭력을 전부 포괄한다.

- 암묵적으로 수직적인 위계 질서를 상정하여,

-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여 수탈하고,

- 약자는 강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든 의도와 행위가 전부 폭력이다.

- 그 과정에서 사람을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 있다고 평가하지 않고,

- 기능을 발휘하여 성과를 낸 결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고 방식이 폭력이다.

- 그 사람이 자신과 사회에 끼친 유익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 모든 사람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 그 압력은 각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강제하기에,

- 결국 폭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특히 본문은 바벨론의 신상과 도성 파괴를 강조한다.

- 이는 신상과 도성이 바벨론의 위세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사치스러운 우상 제사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더욱 초라해 보이게 했다.

-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강한 도성은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감옥처럼 보였다.

- 그래서 바벨론의 신상과 도성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은 좌절했다.

산성과 도성 역시 물리적인 위세만을 뜻하지 않는다.

- 정서적, 사회적, 물질적, 금전적인 위세 전체를 포괄한다.

- 수직적 위계 질서와 사람을 기능, 성과, 도구로 보는 사고 방식을 강화하는 모든 수단을 상징한다.

 

우리에게 신상과 도성은 ‘돈’이다.

- 신상과 같이 화려한 돈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초라해 보이게 한다.

- 도성과 같이 강력한 돈은 우리를 영원토록 가두는 감옥처럼 보인다. 

- 그래서 돈이 없으면, 약자로 전락하여 세상에서 쓸모없고 세상을 해롭게 하는 악인이 될 것 같아 두렵다.

- 게다가 돈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여, 돈 없이 악인의 오명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 같아 암담하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볼 때마다 좌절한다.

-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조차 우리를 돈의 영향력에서 건져내지 못할 것 같다.

- 마치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신상과 도성을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고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상과 도성의 파괴를 선포하신다.

- 강해 보이는 신상과 도성보다 하나님이 더 강하다는 뜻이다.

동일하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강해 보이는 돈보다 하나님이 더 강하시다고.

- 하나님은 돈도 파괴하실 것이라고.

- 그러니 돈의 위력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라고.

- 돈 많은 것 부러워하지 말고, 돈 적은 것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바벨론 멸망 예언의 목적은 하나이다.

- 절망한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려는 것이다.

- 바벨론 위세에 눌려 하나님조차 구원하실 수 없다며 절망한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주시려는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을 믿고 회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벨론 멸망 예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도 위로하신다.

-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 그래서 돈의 위세에 눌려 하나님조차 어찌할 수 없다며 절망하고 있지만,

- 그래도 돈보다 하나님이 더 강하다고 말씀하신다.

- 그러니 눈에 보이는 돈의 위력에 절망하지 말고,

-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진정한 힘을 가지신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라고 말씀하신다.

 

바벨론 멸망 예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 - 거부

그런데 과연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멸망 예언을 듣고 기뻐했을까?

-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예언을 듣고 기뻐했을까?

더 근원적으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멸망을 원했을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과연 우리는 돈의 멸망 예언을 들으면 기뻐할까?

-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기고, 모두가 돈 없는 세상에 살아야 한다면 기뻐할까?

- 우리는 정말 돈의 멸망을 원할까?

 

아니다. 원하지 않는다.

- 물론 우리는 돈이 부족해서 언제나 괴로워한다.

- 돈의 위력에 눌려 자기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

- 돈이 다스리는 세상을 싫어한다.

- 그래서 돈이 멸망하면 기쁠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돈이 주는 안락함에 빠져있다.

- 돈만이 우리를 지켜주는 유일한 ‘요새이고 산성’이다.

- 돈만이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의 멸망은 곧 우리의 멸망이다.

- 그러니 아무도 돈의 멸망을 원하지 않는다.

- 돈이 우리 고통의 근원인데도 말이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 언뜻 생각하기에, 당연히 바벨론의 멸망 소식을 기뻐했을 것 같다.

- 누가 포로 생활을 좋아하겠는가.

- 누구나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 자신을 폭행한 바벨론의 멸망을 당연히 원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멸망을 원하지 않았다.

 

바벨론에 의해 강제 노역을 하며, 세금으로 수탈을 당했지만,

- 적어도 바벨론 포로로 살면, 안정된 삶이 보장되었다.

- 바벨론의 강력한 신상과 도성은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가두는 울타리였지만,

- 동시에 외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울타리였다.

- 그래서 바벨론 안에 있으면 죽을 걱정은 없었다.

- 이전 예루살렘에 살 때는 외적이 침략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따라서 바벨론 멸망 예언은 단지 포로에서 해방만을 뜻하지 않았다.

- 오히려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울타리의 파괴를 뜻했다.

그랬기 때문에 바벨론의 멸망은 곧 이스라엘의 멸망이었다.

- 그러니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멸망을 원하지 않았다.

-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착취를 당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멸망을 거부한다는 본문의 증거

그래서 본문은 바벨론 멸망에 대한 이스라엘의 미온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벨론에서 탈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렘 51:45] 나의 백성아, 너희는 바빌로니아에서 탈출하여, 목숨을 건져라. 주의 무서운 분노 앞에서 벗어나라.

바벨론 탈출 명령이 이스라엘에게 왜 필요하겠는가.

- 바벨론이 멸망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탈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 바벨론이 주는 안락함에 미련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멸망하는 바벨론에 머물면서 바벨론의 보호를 받는 것이 바벨론의 보호 없이 위험을 감수하고 예루살렘에 돌아가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썩어도 준치’라고, 멸망한 바벨론과 함께하는 것이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바벨론 주변에서 서성거린다.

[렘 51:50] 칼을 모면한 이스라엘 사람들아, 서성거리지 말고 어서 떠나거라. 너희는 먼 곳에서라도 주님을 생각하고, 예루살렘을 마음 속에 두어라.

- ‘칼’로 쑥대밭이 된 바벨론에서 나왔지만,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 바벨론 주변을 서성이며, 바벨론을 여전히 의지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신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벨론을 멸망시켜 달라고 호소할 것이라고 말이다.

[렘 51:35] 내가 당한 폭행을 그대로 바빌로니아에게 갚아 주십시오.” 시온의 백성이 이렇게 호소할 것이다. “바빌로니아 백성이 나의 피를 흘렸으니 그들에게 그대로 갚아 주십시오.” 예루살렘이 이렇게 호소할 것이다.

이 예언을 뒤집어서 말하면,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이런 호소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자신을 착취하고 있는 바벨론의 멸망을 구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바벨론의 착취를 당하며 보호를 받는 것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바벨론 멸망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은 이렇게 탄식한다.

[렘 51:41] 어쩌다가 세삭이 함락되었는가! 어쩌다가 온 세상의 자랑거리가 정복되었는가! 어쩌다가 바빌론이 세상 만민 앞에 참혹한 형상을 보이게 되었는가!

-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멸망을 용납할 수 없었다.

- 온 세상의 자랑거리였던 바벨론, 자신을 울타리로 보호해 주던 바벨론이 멸망하다니.

- 강력한 신상과 도성을 가진 바벨론, 하나님보다도 강했던 바벨론이 함락되다니.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멸망을 자신의 멸망과 동일시했다.

- 왜냐하면 그만큼 바벨론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폭력적으로 착취하는 ‘압제자’이다.

- 특히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대적자’이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은 외적의 침략에서 지켜주는 ‘보호자’였다.

- 그랬기 때문에 바벨론의 멸망을 보면서도 이스라엘은 바벨론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에서 탈출하라고 명령까지 하셨다.

 

이스라엘처럼 어리석은 또 다른 예

압제자이며 대적자인 바벨론을 보호자로 착각하여 의지하는 이스라엘이 어리석어 보인다.

- 이스라엘은 압제자인 바벨론이 멸망하여 포로에서 해방된다는 소식을 기뻐해야 했다.

- 그러나 보호자가 사라지는 두려움에 빠져 바벨론 멸망을 예언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리석은 경우는 성경에 많다.

- 신약에 부자청년, 바리새인 그리고 구약에 욥이 있다.

 

첫째로, 부저청년에게 바벨론은 ‘재산’이었다.

-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길 원했다.

[마 19:16]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예수님은 부자청년의 영생을 막는 방해꾼이 재산이라고 알려주셨다.

- 그래서 방해꾼인 재산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셨다.

[마 19:2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 그러나 부자청년에게 재산은 방해꾼이 아니라 보호막이었다.

- 그래서 방해꾼인 재산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쁜 소식으로 들리지 않았다.

- 보호막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에 근심스러운 소식이었다.

[마 19: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자청년에게 재산은 방해꾼이었지만 보호막이라고 착각했다.

 

둘째로, 바리새인에게 바벨론은 ‘율법’이었다.

- 바리새인은 의로워지길 원했다.

- 따라서 의로움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던 율법을 따랐다.

- 하지만 율법의 행위에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니, 율법의 참뜻을 잊었다.

- 그래서 율법을 따르기 위해 율법을 범하였다.

- 바리새인은 율법을 의로움으로 가는 인도자로 믿었지만,

- 실제로 율법은 의로움을 방해하는 방해꾼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방해꾼인 율법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셨다.

- 이는 바리새인이 방해꾼에서 벗어나 참된 의로움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그러나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도자인 율법에서 벗어나라는 뜻으로 들었다.

- 그래서 예수님을 의로움으로 인도하는 율법을 부정하는 죄인으로 인식했다.

- 이것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이다.

바리새인에게 율법이 방해꾼이었지만, 인도자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욥에게 바벨론은 ‘소유’였다.

- 욥은 의인이었다.

-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소유를 넘치게 주었다.

- 그러나 사탄은 그가 가진 모든 것 때문에 의로워진 것이지,

- 만약 가진 모든 것을 잃으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했다.

[욥 1:9~11] 그러자 사탄이 주님께 아뢰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0)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11)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셔서 욥을 시험하신다.

- 사탄은 욥이 불의한데, 소유가 욥의 실체를 가려주는 가림막이라고 주장했다.

- 반면 하나님은 욥이 의롭기 때문에, 소유가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셨다.

그런데 욥은 결국 가진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을 저주한다.

[욥 32:2] 욥이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옆에 서서 듣기만 하던 엘리후라는 사람은, 듣다 못하여 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엘리후는 람 족속에 속하는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다.

- 사탄은 옳았다.

- 욥은 가진 모든 것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했고,

- 가진 모든 것을 잃자, 하나님을 저주했다.

따라서 욥에게 소유는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하는 방해꾼이었지만,

- 자기 의로움을 증명하는 도우미라고 착각했다.

 

어리석게 착각하는 이유 - 가치 판단 기준

이스라엘에 바벨론은 압제자이자 보호자였다.

- 이렇게 상반된 평가로 갈리는 이유는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바벨론은 포로인 이스라엘을 보호했다.

- 이스라엘이 풍요롭진 않아도 안락하게 살도록 했다.

- 이유는 명확하다.

-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을 보호해서 착취하기 위해서이다.

- 마치 돼지를 잡아먹기 위해 적절한 양식과 거처를 제공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억압했다.

-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억눌렀다.

- 이스라엘답게 살지 못하게 했다.

- 이유는 그것이 바벨론에게 유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 그런데 바벨론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신만을 섬기며, 바벨론의 노예로 살도록 했다.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이다.

- 율법은 바리새인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했다.

- 종교적 지위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보장했다.

- 바리새인에게 율법은 생존의 도구였다.

그러나 율법은 정체성을 위협했다.

-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의 관계를 방해했다.

- 안식일이라는 핑계로 아픈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게 했다.

이렇게 율법은 바리새인의 생명을 파괴했다.

 

욥도 소유를 생존의 도구로 삼았다.

- 단지 물질적인 삶을 유지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 영적인 의로움을 증명하여 삶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삼았다.

그러나 소유는 욥의 생명을 위협했다.

- 욥의 내면에 있는 죄를 숨겨서 영생으로 가는 길을 방해했다.

- 그래서 소유를 빼앗아서 감추어진 욥의 죄를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왜 같은 것을 보고 반대되는 판단이 나올까?

- 대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은 생존의 관점에서 바벨론을 봤다.

- 생명의 관점에서는 보지 못했다.

왜 그랬냐?

- 이스라엘이 생존만을 가치 있다고 생각했고,

- 생명의 가치는 몰랐기 때문이다.

- 살아있기만 한다면, 자기다움을 잃고 금수와 같이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 그런 가치 판단 기준이 무의식에 깔려 있었다는 뜻이다.

 

본문은 이 가치 판단 기준을 비판한다.

- 생존만을 가치 있게 여기는 이스라엘을 비판한다.

- 생존하기 위해 멸망한 바벨론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스라엘을 비판한다.

- 그래서 멸망한 바벨론에서 탈출하지 않고, 바벨론과 함께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비판한다.

-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과 관계도 끊어지고,

-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자기 정체성도 잃어서 자신과 관계도 끊어진 이스라엘을 비판한다.

- 생존을 위해 생명을 포기한 이스라엘을 비판한다.

그것이 바벨론 멸망 예언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전하길 원하셨던 메시지이다.

 

결론 - 생존을 위한 돈을 믿는가, 생명을 위한 하나님을 믿는가?

신앙을 배제하고 생각하면, 생존과 생명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

- 둘 다 중요하다.

-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생존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 아무리 원하는 것을 얻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도 죽으면 아무 소용 없다.

- 자기를 포기해서라도 살아있어야 자기를 찾을 기회도 생긴다.

그러나 생명도 중요하다.

-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 아무리 안락해도 자기를 잃은 채 사는 것보다,

- 생존이 위협받아도 자기답게 사는 것이 낫다.

이렇게 사람에게 생존과 생명은 모두 꼭 필요하다.

 

그런데 신앙의 관점에서는 다르다.

- 신앙에서 생존은 중요하지 않다.

-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 무조건 죽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 살아 있을 때는 삶에 필요한 것을 책임지시고,

- 삶에 필요한 것이 부족하여 생존이 위협될 때는 

- 마음의 평안과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시며,

- 죽은 이후에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도록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이 죽음을 감수하고 제자들을 사랑하실 수 있었던 것도 

- 하나님이 생존을 책임지신다는 믿음 때문이다.

- 그래서 오직 생명에만 집중하실 수 있었다.

- 자신을 사랑하여 자기다울 수 있었고,

- 이웃을 사랑하여 이웃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수 있었으며,

-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실 수 있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만이 진정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삶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 생존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실패자이다.

-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셨다.

- 제자의 배신으로 인해 무의미하게 죽으셨다.

그러나 생명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성취자이다.

- 다 이루셨다.

- 성육신하셔서 삶을 시작하신 것부터 십자가 죽음으로 삶을 끝내신 것까지 오직 사랑하셨다.

 

신앙은 바로 이것이다.

- 생존의 관점을 버리고 생명의 관점을 갖는 것이다.

- 그래서 생존의 관점에서 실패하지만, 생명의 관점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 그래서 무의미하게 모든 것을 잃고 죽지만, 삶의 모든 순간을 사랑으로만 채우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생존하기 위해 멸망하는 바벨론 주변을 서성거렸다.

- 그로 인해 생명, 즉 자기답게 진정으로 사랑할 기회를 잃었다.

- 생존을 포기하지 못하여 생명을 잃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 바벨론에서 탈출하라고.

- 생존의 도구를 버리라고.

- 하나님께서 생존을 책임져주실 것을 믿으라고.

그래서 오직 생명을 위해 살라고.

- 모든 것 포기하고 사랑만을 위해 살라고.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게 될 것이다.

-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죽을 것이다.

- 세상에서 실패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러나 삶이 오직 사랑으로 채워질 것이다.

- 진정한 자신을 찾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 죽은 후에도 영생하며 사랑만 하며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을 갖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