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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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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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두 가지인 ‘왕과 성전’이 참혹한 굴욕을 당한다.
- 이를 통해 이스라엘 전체가 얼마나 가혹하게 짓밟혔는지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왕 시드기야는 죽음보더 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 첫째로, 비굴하게 도망친다.
-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부터 굴욕의 시작이다.
[렘 52:7] 드디어 성벽이 뚫리니, 이것을 본 왕은, 바빌로니아 군대가 도성을 포위하고 있는데도, 밤을 틈타서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정원 근처, 두 성벽을 잇는 통로를 지나 도성 바깥으로 빠져 나와 아라바 쪽으로 도망하였다.
- 둘째로, 도망치다가 바벨론 군대에 잡힌다.
[렘 52:8]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대가 시드기야 왕을 추격하여, 여리고 평원에서 그를 사로잡으니, 시드기야의 군사들은 모두 그를 버리고 흩어졌다.
- 셋째로, 참혹한 고문을 당한다.
- 눈앞에서 처형당하는 아들들을 보며 정신적으로 고통당하고,
- 눈이 빠진 채로 평생 감옥에 갇혀 죽는 육체적인 고통을 당한다.
[렘 52:10~11] 또 바빌로니아 왕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가 보는 앞에서 처형하고, 역시 리블라에서 유다의 고관들도 모두 처형하였다. (11) 그리고 바빌로니아 왕은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다음에, 쇠사슬로 묶어서,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시드기야의 비극적인 최후는 단순히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 가장 보호받아야 할 왕조차 이런 취급을 당했다.
- 그렇다면 나머지 백성이 당한 고통은 얼마나 더했겠는가.
- 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당한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가혹하게 멸망했고,
- 이는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었던 이스라엘의 죄가 그만큼 극심했다는 뜻이다.
[렘 52:3] 예루살렘과 유다가 주님을 그토록 진노하시게 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을 주님 앞에서 쫓아내셨다. 시드기야가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므로,
거룩했던 성전 역시 무참히 짓밟힌다.
- 성전이 이스라엘에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이스라엘의 본질을 담고 있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 그 성전은 이방인이 성전 기물을 만지는 것은커녕, 성전 출입 자체가 부정한 것이다.
- 원칙대로라면, 성전에 들어와 기물을 만진 사람은 전부 죽어야 했다.
- 그런데 이방인에 의해 성전 기물이 전부 부서지고 빼앗겼다.
[렘 52:17~20] 바빌로니아 군대는 주님의 성전에 있는 놋쇠 기둥과 받침대, 또 주님의 성전에 있는 놋바다를 부수어서, 모든 놋쇠를 바빌론으로 가져 갔다. (18) 또 솥과 부삽과 부집게와, 대야와 향 접시와 제사를 드릴 때에 쓰는 놋쇠 기구를 모두 가져 갔다. (19) 근위대장은 잔과 화로와 대야와 솥과 등잔대와 향 접시와 부어 드리는 제사 때 쓰는 잔을 모두 가져 갔다. 금으로 만든 것은 금이라고 하여 가져 갔고, 은으로 만든 것은 은이라고 하여 가져 갔다. (20) 솔로몬 왕이 주님의 성전에 만들어 놓은 놋쇠로 만든 두 기둥과, 놋바다 하나와, 놋받침대 밑에 있는 놋쇠로 만든 소 모형 열둘을 모두 가져 갔다. 그가 가져 간 이 모든 기구의 놋쇠는, 그 무게를 달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만큼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 성전의 본질인 거룩함을 완전히 잃었다.
그렇다면 성전을 부정하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일까?
- 당연히 바벨론 군대로 보인다.
- 바벨론 군대가 성전을 파괴했으니까.
하지만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 만약 바벨론 군대가 거룩한 성전을 부정하게 했다면,
- 성전의 거룩한 율법에 따라 즉시 심판받아야 했다.
- 그러나 성전을 파괴한 바벨론 군대는 누구도 심판받지 않았다.
- 모두 멀쩡히 성전 안을 돌아다녔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벨론 군대가 들어가기 전부터 성전은 거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 이미 성전은 훼손되어 부정한 상태였다.
[대하 36:14] 지도급 인사들인 제사장들과 일반 백성도 크게 죄를 지어, 이방의 모든 역겨운 일을 따라 하였으며, 마침내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거룩하게 하신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말았다.
- 그랬기 때문에 바벨론 군대가 마구 들어가도 아무 문제 없었다.
따라서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어 내적으로 파괴한 장본인은 이스라엘 자신이다.
- 이전부터 성전 제사의 참된 뜻을 부정하였다.
- 죄를 인식하여 고백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성전을
- 죄를 숨기고 끊어진 하나님과 관계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 그래서 이미 하나님은 성전을 떠나셨다.
성전 파괴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즉, 참혹한 성전 파괴는 참혹한 이스라엘의 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사람들의 오해 - 이스라엘을 향한 동정?
그런데 많은 사람이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동정한다.
- 이스라엘 왕과 성전이 함부로 취급받는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한다.
-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자기 일처럼 생각한다.
그런 사람 중 일부는 무너지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 아무리 이스라엘의 죄가 크더라도, 저렇게 참혹한 고통에서는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한다고 말한다.
- 하나님이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경고할 수 있지만,
- 정말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면, 그래도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게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멸망하도록 하신 하나님께 사랑이 있는지 의심한다.
이는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했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 어떻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가?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한 죽음에 빠뜨리실 수 있는가?
- 사람을 지옥에서 건지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보내셨다면서, 어떻게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 만약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이던가, 아니면 하나님은 사랑하시지만 구원 능력은 없는 분이 아닌가?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의 관계에서 혼란을 느낀다.
- 사랑한다면 심판하지 말아야 하고, 심판하여 멸망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사랑하면서 동시에 심판하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을 뒤로하고,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동정하며,
-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멸망하신 하나님을 원망한다.
해법 - 하나님과 동일시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무자비하셨을까?
-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용서하지 않고 멸망하셨을까?
- 이제는 이스라엘이 아닌 하나님과 동일시해 보자.
- 하나님 입장이 되어 하나님을 이해해 보자.
이스라엘 왕 시드기야는 왜 참혹한 고통을 당했는가?
- 이스라엘은 이렇게 말한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을 버리셨고, 바벨론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다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저항하면 멸망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예레미야를 통해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대하 36:13] 느부갓네살은 강제로,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였다. 시드기야는 억지로 충성을 맹세하였지만, 마침내 느부갓네살 왕에게 반항하기까지 하였다. 다른 한 편으로, 시드기야는 고집을 부리며,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하 36:15]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그 성전을 구원하실 뜻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시고 또 보내셔서, 경고에 경고를 거듭하셨지만, (16) 그들은 하나님의 특사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분노가 치솟으시니, 백성을 바로 잡을 길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
- 또다시 바벨론에 저항한다.
[렘 52:3] 예루살렘과 유다가 주님을 그토록 진노하시게 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을 주님 앞에서 쫓아내셨다. 시드기야가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므로,
물론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쫓아내셨다고 표현한다.
- 당연히 이 표현은 맞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쫓아내시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
-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대하 36:16] 그들은 하나님의 특사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분노가 치솟으시니, 백성을 바로 잡을 길이 전혀 없었다.
이는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한 것과 같다.
- 탕자가 유산을 요구한 행위 자체가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 먼저 그런 마음과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배은망덕하게 유산을 요구할 수 있었고,
- 그런 태도에서 아버지를 부정하고 집을 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러한 탕자를 아버지가 쫓아내는 것은 마땅하다.
- 그러나 누구도 아버지가 탕자를 쫓아낸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지.
그랬기 때문에 탕자는 모든 것을 잃고 멸망한다.
- 자기 선택 때문에 일어난 마땅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왕 시드기야도 멸망하는 것이다.
-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거듭해서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 바벨론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 바벨론에 저항하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당시 국제 정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는가?
-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동안 하나님은 뭐 하셨냐?
- 멸망하지 않도록 끝까지 막으셨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또 나온다.
-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강압적으로 이끌지 않았는가?
-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저항하면 멸망할 것이 자명한데,
- 왜 하나님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도록 굴복시키지 않았는가?
- 사랑한다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 따라서 이스라엘의 불순종 역시 하나님의 잘못 아닌가?
이 질문은 탕자 아버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왜 아버지는 탕자를 강압적으로 이끌지 않았는가?
- 탕자가 유산을 들고 집을 나가면 모든 것을 잃고 멸망할 것이 분명한데,
- 왜 아버지는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탕자가 유산을 들고 집을 나가지 않도록 굴복시키지 않았는가?
- 사랑한다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 따라서 탕자의 불순종 역시 아버지의 잘못 아닌가?
아니다.
- 강압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다.
- 오히려 사랑했기 때문에 강압하지 않은 것이다.
진정한 사랑 1 - 결과가 아닌 관계
많은 사람이 사랑을 오해한다.
-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좋은 ‘결과’를 이끌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 그래서 아버지는 사랑으로 탕자가 외지로 나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지 않고,
- 아버지 곁에서 재산을 잘 간수하며 안락한 인생이라는 ‘결과’를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사랑한다면, 그 결과를 위해 어느 정도 강압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탕자도 아버지에게 강압을 당하는 시점에는 괴로울 수 있어도,
- 시간이 지나면 강압으로 좋은 ‘결과’를 이끌어 준 아버지께 감사할 것으로 생각한다.
- 이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최근 예로, 부모의 역할이 자녀가 좋은 학벌을 갖도록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녀가 공부에 몰두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많은 돈과 시간을 쓰고, 때로는 협박하고 강압하기도 한다.
- 과정은 힘들지만, 좋은 결과를 얻으면 자녀도 부모에게 고마워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결과’는 사랑이 아니다.
- 사랑은 ‘관계’이다.
- 대표적인 반례가 탕자의 형이다.
탕자 형은 안락한 인생이라는 결과를 가졌다.
-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안전한 삶을 살았다.
- 따라서 결과가 사랑이라면, 탕자 형은 아버지를 사랑해야 했다.
그러나 탕자 형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 탕자 형은 탕자를 위해 잔치를 여는 아버지께 분노했다.
- 아버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 즉,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좋은 ‘결과’가 좋은 ‘관계’를 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를 사랑했다.
- 탕자는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강압하지 않고, 또한 빈털터리로 돌아온 자신을 맨발로 나와서 맞아주시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 아버지는 강압하지 않았고, 탕자는 아버지께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 오히려 탕자는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다.
‘결과’는 나빴지만, 그 과정에서 좋은 ‘관계’가 생겼다.
사랑은 상대방을 좋은 ‘결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다.
- 이는 결과 중심의 사고이다.
- 사람을 ‘존재 자체’가 아니라 ‘결과 성취의 도구’로 본다.
- 사람을 도구로 보면, 상처받아 관계가 파괴된다.
- 따라서 결과 중심의 사고는 관계를 파괴한다.
사랑은 나쁜 결과가 나와도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 이는 관계 중심의 사고이다.
- 사람을 결과 성취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결과와 상관없는 ‘존재 자체’로 본다.
- 사람이 성취한 결과가 아니라, 사람 자체에 관심 갖는 것이다.
-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의 관계가 깊어진다.
진정한 사랑 2 - 무조건 지지가 아닌 대화
그렇다고 아버지는 자녀에게 아무것도 훈육하면 안 되는 것이냐?
- 탕자 아버지가 집 나가는 탕자에게 하듯 아무런 기준도 제시하지 말고,
- 자녀가 무엇을 원하든 인정하고 지지하기만 해야 하냐?
그것도 아니다.
-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기준을 제시하고 기준을 따르도록 돕는다.
-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기준을 따르도록 하는 방법이다.
- 기준을 따르도록 ‘강압’하면 안 된다.
- 강압하여 굴복시키면, 관계는 끊어진다.
- 기준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대화하는 것이다.
- 단순히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이 정말 필요한지 아닌지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는 것이다.
대화 과정 자체가 사랑이다.
- 부모와 자녀가 자신의 입장을 서로에게 설명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귀 기울여 듣는 과정에서
- 완벽한 합의와 공감 그리고 결론이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다.
결론이 나오면 좋겠지만, 결론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 대화 과정에서 서로의 마음을 경청했다면,
- 그래서 서로가 왜 기준이 필요한지 그리고 기준이 필요하지 않은지 공감했다면,
- 기준이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공감하는 과정에서 이미 서로에게 사랑과 신뢰를 느끼기 때문이다.
- 이 사람은 내 말을 들어주는구나.
- 이 사람은 나를 강압하지 않는구나.
- 이 사람은 나를 믿고 나를 존중해 주는구나. 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 신뢰하면, 양보하고 희생하게 된다.
- 그러면 서로 합의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는 단순히 부모 자식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그렇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 강압이 아닌 대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강압하지 않으신 것이다.
-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도록 굴복시키지 않으신 것이다.
-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저항하여 멸망하도록 놔두신 것이다.
사랑하지 않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 사랑하기 때문이다.
- 좋은 결과를 내기보다 좋은 관계를 맺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살아남기만 하는 것보다, 멸망하더라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 탕자 아버지가 집을 나가도록 탕자를 놔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셨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지도 않으셨다.
- 대신에 이스라엘과 끊임없이 대화하셨다.
그 증거가 바로 성경이다.
-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방치하셨다면, 굳이 구구절절 긴 말을 성경으로 할 필요 없다.
- 그냥 놔두면 된다.
- 또한 만약 하나님이 무조건 지지하셨다면, 언제나 지켜줄 것이라는 한 마디면 충분하다.
- 게다가 만약 하나님이 강압하셨다면, 성경은 아예 필요가 없다.
- 말씀 대신 행동만 하시면 된다.
-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길 원하셨다면,
- 항복하라고 말씀하는 대신 항복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정말 많이 말씀하셨다.
- 셀 수 없이 많은 예언자를 보내셨다.
-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말씀하셨다.
단순히 통보하신 것이 아니다.
-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자세히 설명하셨다.
- 그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항복했다가 완전히 멸망할까 봐 두려워하니,
- 어떤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대화하셨다.
- 통보하지 않고, 설명하고, 경청하며 공감하여, 설득하셨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끊임없이 대화하셨다.
-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서로 공감하여 율법이라는 기준에 합의했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합의를 파기하고 하나님을 거부했다.
- 하지만 하나님은 또다시 다가와 대화하셨다.
- 그래서 다시 이스라엘은 율법에 합의하지만, 또 파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 그럼에도 하나님은 반복해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다가가신다.
본문에서도 시드기야 왕은 합의를 파기한다.
- 하나님은 시드기야 왕이 다시 돌아와 대화할 것을 요청하시지만,
- 거부한 시드기야 왕은 결국 바벨론 군대에 참혹한 고통을 당하고,
- 예루살렘과 성전은 완전히 파괴된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인가?
- 더 이상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나?
아니다.
- 하나님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이스라엘에게 다가가 대화하신다.
- 그러셨기 때문에 예레미야서가 기록된 것이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멸망 이유를 설명하고 회복될 방법을 말씀하신다.
-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이스라엘은 그제야 예레미야의 외침을 이해한다.
- 멸망 이전에 했던 예레미야의 말을 멸망 이후에 받아들인다.
- 멸망 이후에도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에,
- 예레미야서도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대화를 중심에 둔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이 지속된다.
그래서 예레미야서는 소망으로 끝난다.
- 포로로 잡혀있던 이스라엘 왕 여호야긴의 처우가 개선된다.
[렘 52:31~32] 유다 왕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 간 지 서른일곱 해가 되는 해 곧 바빌로니아 왕 에윌므로닥이 왕위에 오른 그 해 열두째 달 이십오일에, 그가 유다 왕 여호야긴에게 특사를 베풀어서, 그를 옥에서 석방하였다. (32) 그는 여호야긴에게 친절하게 대접하여 주면서, 그와 함께 바빌로니아에 있는 다른 왕들의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를 그에게 주었다.
여호야긴은 한 개인이 아니라 이전 왕으로서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다.
- 여호야긴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견한다.
- 하나님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계시며,
- 결국 포로에서 해방되어 이스라엘이 자기 본 모습을 되찾을 것을 상징한다.
결론 - 멸망 이후 회복
이렇게 예레미야서는 완성된다.
- 이스라엘의 가혹하고 완전한 멸망 이후 회복을 소망하게 한다.
- 예수님이 참혹하게 죽으신 이후 부활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여전히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 우리가 참혹하게 멸망한 이후,
- 그래서 우리가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겼던 모든 것을 잃고 빼앗긴 이후,
- 그래서 자신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절망과 상실에 빠진 이후,
- 그래서 자신에게 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 그래서 자신은 절대 오물이고 유일한 가치와 소망은 절대 가치이신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몸에 새기듯 경험하고 체득한 이후,
- 그런데도 자기 혐오와 절망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소망을 거는 사람은 부활하여 회복할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옳으신지 깨닫고,
-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고,
-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깨닫고,
- 가치 있는 자신이 있는 그대로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 역시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고,
-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타인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깨닫고,
- 가치 있는 타인이 있는 그대로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 타인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 서로를 결과나 성과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보고,
- 서로의 내면에 있는 숨겨진 보석을 발굴해 줄 것이다.
- 그로 인해 자신의 숨겨진 가치를 발견하고,
- 타인의 숨겨진 매력에 더욱 빠질 것이다.
- 그렇게 서로가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 그리고 그 사랑은 두 사람에서 인류 전체로 확장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빠진 인류는 사랑하도록 하신 하나님께 시선을 돌릴 것이다.
- 사랑의 기쁨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 모든 인류가 하나님 역시 결과나 성과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볼 것이다.
- 그로 인해 하나님 안에 숨겨진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 하나님의 숨겨진 매력에 더욱 빠질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또다시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 타인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 인류 전체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 결국 또다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서의 결론
이것이 예레미야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다.
- 현실은 어렵다.
- 죄가 난무한다.
- 사랑은 드물다.
겉으로는 서로 웃지만, 속으로는 어떻게든 속여서 빼앗으려 한다.
- 물질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서로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 이렇게 세상은 점점 죽어가고 있다.
세상의 죽음을 막고 사랑으로 회복하려고 소수의 의인이 목숨 걸고 달려들지만,
- 의인의 헛된 죽음뿐이다.
-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랑하려는 우리의 시도가 하찮아 보인다.
-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다.
- 보호 장구 없이 화염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수 같다.
- 무의미하고 무모해 보인다.
그러니 믿음과 사랑에 회의가 든다.
-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의심이 든다.
- 하나님이 정말 세상을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정말 구원의 능력을 가지셨는지 질문하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예레미야서는 대답한다.
-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의 능력을 가지셨다고.
- 이스라엘의 멸망도 결국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켰다고.
- 예수님의 죽음도 부활도 하나님의 사랑이었다고.
-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듯이 우리의 무모한 죽음이 절대로 헛되지 않다고.
- 무의미해보였던 예수님의 죽음이 온 인류에게 구원이 되었듯이 우리의 죽음도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할 것이라고.
그래서 예레미야서는 이렇게 말한다.
- 사랑을 위해 무모하게 죽으라고.
- 그것만이 신앙 생활이고, 그것만이 인생이라고.
이것이 예레미야서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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