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레미야서

예레미야(88) 51:1~33 바벨론 때문에 추락한 하나님의 능력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본문은 바벨론‘의’ 멸망 예언이지만, 바벨론을 ‘위한’ 멸망 예언은 아니다.

- 이스라엘을 ‘위한’ 바벨론‘의’ 멸망 예언이다.

본문은 바벨론이 듣고 반응하도록 쓰이지 않았다.

- 이스라엘이 듣고 반응하도록 쓰였다.

 

그렇다면 왜 바벨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나?

- 바벨론을 아예 등장시키지 않고 이스라엘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 본문이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시대 혹은 포로에서 귀환한 시기였다.

-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대상은 바벨론이다.

- 그래서 바벨론을 주인공으로 메시지를 전할 때, 메시지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특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죄’이다.

- 그런데 이스라엘의 죄를 전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죄만 말하면 전달력이 떨어진다.

- 우상숭배를 했고, 음행을 했으며,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착취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고만 말하면,

- 수긍하면서도, ‘다 그런 거 아냐?’ 혹은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라며 합리화하고 회피한다.

오히려 바벨론의 죄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 더 마음 깊이 다가온다.

- 전형적인 예가, 밧세바를 범한 다윗을 정죄하는 나단 선지자이다.

 

나단은 다윗을 직접 정죄하지 않는다.

- 만약 그랬다면 다윗은 자기 죄를 납득하고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그러나 나단은 먼저 가난한 자의 유일한 양을 빼앗는 부자의 예를 든다.

- 그래서 다윗이 먼저 가난한 자와 동일시하여 공감하도록 한다.

- 부자의 죄가 얼마나 가혹하고 악독한지 이해하도록 한다.

그런 다음에 그 부자가 바로 다윗 당신이라고 말한다.

[삼하 12:7]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 

- 즉, 다윗이 부자와 같은 악독한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한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은 자기 죄를 즉시 깨닫고 회개할 수 있었다.

 

바벨론의 멸망 예고도 똑같은 방식이다.

- 이스라엘을 직접 정죄하지 않는다.

- 가혹하게 시온, 즉 이스라엘을 파괴하여 죄악을 범한 바벨론을 정죄한다.

[렘 51:24] 그러나 이제는 내가 바빌로니아 땅과 바빌로니아 백성에게 원수를 갚겠다. 그들이 시온에 와서 저지른 모든 죄악을,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그들에게 갚아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래서 예언을 듣는 이스라엘이 악독한 바벨론의 죄를 정죄하도록 한다.

- 바벨론의 죄악에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바벨론의 행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쉽게 이해했다.

- 본문은 바벨론이 얼마나 악행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설명하지도 않는다.

- 당시 이스라엘이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도 쉽게 공감했다.

- 저런 나쁜 바벨론은 멸망해야 마땅하다며 맞장구쳤을 것이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죄가 무엇인지,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 

- 그리고 죄로 인해 주변 사람과 하나님이 얼마나 고통받는지 깨닫는다.

- 이스라엘이 직접적인 피해자였기 때문에, 어떤 설명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런데 바벨론 정죄는 바벨론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나단이 부자를 정죄한 것이 정말 부자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 다윗을 정죄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말이다.

바벨론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이 고통당했듯이,

-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주변 나라가 고통당했고,

- 이스라엘 지배층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 피지배층이 고통당했다.

- 이스라엘 자신은 피해자인 줄만 알았는데,

- 알고 보니 자신이 당한 피해를 고스란히 행한 가해자였다.

이스라엘 자신도 주변 나라를 가혹하게 파괴했고,

-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착취했다.

- 특히 우상숭배를 했고, 우상숭배를 위해 주변 나라와 피지배층을 더욱 가혹하게 착취했다.

 

그래서 본문은 바벨론의 우상숭배를 정죄한다.

[렘 51:17~18] 사람은 누구나 어리석고 무식하다. 금속을 부어서 만든 신상들은 거짓이요, 그것들 속에 생명이 없으니, 은장이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상 때문에 모두 수치를 당하고야 만다. 금속을 부어서 만든 신상들은 속임수요, 그것들 속에는 생명이 없으니, (18) 그것들은 허황된 것이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아서, 벌 받을 때에는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다.

- 아마도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시기에 바벨론 우상숭배의 피해자였을 것이다.

- 우상 신전 건축에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 우상 제사에 제물을 강요당했다.

- 낯선 땅에 끌려와 자신 하나 돌볼 형편도 안 되는 처지에 노동력과 제물을 착취당했을 때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 이를 통해 우상숭배가 주변 사람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똑같은 짓을 바로 자신이 행했었다.

- 예루살렘 성전에서 우상숭배를 위해 백성을 착취했었다.

- 착취할 당시에는 자기 권력으로 누릴 수 있는 마땅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 그 정도 착취한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나겠냐며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당해보니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 넉넉한 지배층 입장에서 양 한 마리가 대수롭지 않지만,

- 양 한 마리가 전 재산인 피지배층 입장에서 양 한 마리는 가족 전체의 목숨과 같다.

- 지배층 입장에서 전혀 몰랐던 사실을 피지배층이 되어보니 알게 되었다.

- 양 한 마리 착취가 얼마나 가혹한 것임을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은 깨달았다.

- 자신이 얼마나 악독한 죄인이었는지를.

- 자신이 바벨론에게 악독하게 착취당해 본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주변 사람을 얼마나 가혹하게 착취했는지 깨달았다.

- 바벨론의 우상숭배 때문에 끔찍한 피해를 당해본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우상숭배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게 했는지 깨달았다.

이것이 본문에서 바벨론을 정죄하며 멸망을 예언한 이유이다.

- 이스라엘이 자기 죄를 깨달아 자신의 멸망이 얼마나 타당했는지 납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죄를 깨달은 이후 공허함

여기까지는 바람직하다.

- 드디어 이스라엘의 멸망 이유를 깨달았다.

- 자신 때문에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가, 특히 하나님이 고통당하셨다.

- 자기 죄가 얼마나 악독했는지 알았다.

- 죄를 멈추기 위해서 멸망은 필연적이었다.

-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은 피해자가 생겼을 테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시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 죄는 알았는데, 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 멸망 원인은 알았는데, 멸망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무능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 하나님도 바벨론 신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국가라고 믿었다.

-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한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했다.

- 이는 이스라엘에게 단지 한 국가의 멸망이 아니라,

- 하나님의 멸망이었다.

- 바벨론의 신이 하나님을 이긴 사건이었다.

-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어떤 신보다 강하다고 믿었는데,

- 하나님에게도 약점이 있고 전능하지 않기에, 이스라엘을 지킬 수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특히 하나님의 무력함을 느낄수록 상대적으로 바벨론의 강력함에 압도된다.

- 바벨론은 자신을 지배하는 자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이긴 자이다.

- 이전에도 이스라엘은 많은 국가에 공격당하고 지배당했다.

-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소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구원해 줄 하나님도 없다.

- 바벨론의 포로에서 구해 줄 존재가 아무도 없다.

- 이스라엘에게 남은 것은 ‘전능한’ 바벨론의 억압에 눌려 연명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힘겹게 죄를 깨달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 죄에서 구원해 줄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 멸망에서 회복시켜 줄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 너무 절망하여 낙심한 채로 죽지 못해 삶을 이어가던지,

- 아니면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고 전능한 신 바벨론을 믿어, 이스라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고 바벨론에 굴복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것이 죄를 깨달았어도 하나님이 없어 공허했던 이스라엘의 삶이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 - 전능하신 하나님

그래서 본문이 필요했다.

- 하나님이 무능하지 않고 여전히 전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 그래야 죄에서 벗어나 민족과 국가가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절망하여 죽지 못해 살거나 바벨론에 굴복한 삶이 아니라, 

- 이스라엘답게 살아갈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 a: 1~5절 - 바벨론 멸망의 시작

② b: 6~10절 - 하나님의 금잔이었던 바벨론

③ c: 11~14절 - 성전을 무너뜨린 바벨론에게 복수하시는 하나님

④ d: 15~19절 - 만군의 주인 전능하신 하나님

⑤ b': 20~23절 - 하나님의 무기였던 바벨론

⑥ c': 24~26절 - 시온에서 저지른 죄악을 갚아주시는 하나님

⑦ a': 27~33절 - 바벨론 멸망의 임박함

본문의 핵심은 a와 d이다.

- a와 a'에서 바벨론 멸망의 시작과 임박함을 강조하고,

- d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함을 강조한다.

- 이를 통해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소망을 준다.

 

이스라엘은 죄는 깨달았지만, 하나님이 없어서 소망을 되찾지 못하고,

- 오히려 바벨론의 위세에 짓눌려 있었다.

그런데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위로한다.

- 바벨론은 죄로 인해 멸망할 것이고, 멸망이 임박했다고 말한다.

[렘 51:33]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딸 바빌로니아는 타작 마당이다. 농부가 타작 마당의 곡식을 밟듯이, 군대가 들어가서 그들을 짓밟을 것이다. 이제 곧 그 마당에서 타작을 할 때가 온다.

- 그러니 곧 바벨론의 억압에서 풀려나 자유를 되찾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을 이긴 존재, 그래서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해지라는 뜻이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의 전능함을 강조한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무능하다고 믿었기에 더욱 절실한 말씀이다.

[렘 51:19] 그러나 야곱의 분깃이신 주님은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다르시다. 그분은 만물의 조성자이시요,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분이시다.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주’이시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포로에서 벗어날 능력도 없고,

- 그렇다고 이전처럼 보호해 주실 하나님도 없어서 절망했기에,

-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여전히 전능하신 만군의 주라는 선포를 듣고 이스라엘은 소망을 회복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들어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의문이 있다.

- 하나님이 그렇게 전능하시다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왜 보호하지 않으셨을까?

- 하나님은 왜 무능력하게 가만히 계셨을까?

 

여기에 답하는 구절이 b와 c이다.

- b와 b‘는 이전에 바벨론이 ’하나님의 금잔‘, ’하나님의 무기‘였다고 말한다.

- 즉, 하나님이 바벨론을 선택했다는 것을 뜻한다.

- 이는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c와 c'에서 하나님은 선택받은 바벨론을 심판하신다.

- 이유는 죄 때문이다.

- 바벨론이 성전과 시온에서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도 죄가 있으면 심판받고 멸망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해서 영원한 구원이 무조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 죄를 지으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심판을 받는다.

- 그것이 바벨론이 되었든 이스라엘이 되었든 말이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의 멸망을 이해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택받았으니, 하나님이 살아계신 한 멸망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하나님도 죽었다고 믿었다.

- 그런데 하나님은 선택받은 바벨론도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하신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멸망도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하나님이 바벨론에 패하여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서 돌이키면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을 얻는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 초-강대국인 바벨론을 멸망하실 만큼 여전히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믿음을 갖기 어려운 이유

지금까지 본문 메시지를 통해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를 역추적해 보았다.

- 본문이 바벨론의 멸망과 하나님의 전능함을 강조하는 것을 근거로,

- 이스라엘은 바벨론을 두려워하여 바벨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 하나님은 바벨론에 패하여 이미 죽었다고 믿었다.

- 게다가 이스라엘의 멸망은 바벨론의 강함과 하나님의 약함 때문이지,

-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본문은 바벨론의 멸망과 하나님의 전능함을 강조한다.

- 이는 바벨론이 멸망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날 것이며,

-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회복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이것을 믿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소망을 갖도록 한다.

-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이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태도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 아무리 큰 고난을 겪었다고 해도, 어떻게 하나님이 무능력하게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 일반적으로, 고난이 오면 ‘나에게 죄가 있나 보다.’ 혹은 ‘고난 이후에 더 큰 복이 오나보다.’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 자부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 어떻게 하나님이 무능하다고 생각했고,

- 어떻게 하나님보다 바벨론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을까?

 

우리 중에 누군가는 한 번도 하나님이 무능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 한 번도 하나님보다 더 강한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마냥 믿음이 좋기 때문일까?

- 의심 없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일까?

반대일 수 있다.

 

첫째로,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진 이유가 실제로는 믿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 애초부터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 기대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말 전능하신지 확인할 필요가 없고,

- 그랬기 때문에 의심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편의점 주인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 편의점 주인이 나의 안부까지 관심 갖는 선한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 편의점 주인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 원하는 물건만 사서 나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와 같이 신앙 생활을 통해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는다.

 

둘째로,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진 이유가 믿음대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해도 믿음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려 하지 않으면,

- 그래서 때로는 믿음대로 살기도 하지만, 때로는 믿음대로 살기에 실패하여,

- 믿음대로 살려고 몸부림쳐보지 않으면, 

-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

믿음대로 살려고 몸부림쳐서 자기 믿음이 한계에 부딪힌 사람은

- ‘믿음대로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의심 속에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 현실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믿음을 이어간 사람만이

- 현실을 이기는 믿음을 경험할 수 있다.

- 그것이 죽음으로 불가능한 현실에서 부활로 현실을 이긴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와 같이 믿음대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심한 것 역시 무조건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 그렇다고 이스라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 이스라엘의 믿음은 연약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진지했다.

-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하나님께 많은 것을 실제로 기대했기 때문에,

- 기대와 다른 멸망이 주어졌을 때 더 크게 실망하고 절망했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은 이제부터이다.

-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절망했을 때가 진정한 신앙이 시작하는 출발선이다.

- 절망해서 신앙을 포기하면 신앙은 끝이다.

- 절망해서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난 이후에도 신앙을 지킬 때만 진정한 신앙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도 죽음의 절망에서도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 부활하여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믿음을 갖기 어려운 점이며,

- 동시에 믿음이 갖는 진정한 가치이다.

- 절망을 통과한 믿음만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절망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방법

먼저 오답을 보겠다.

- 많은 사람이 절망에서 두 가지 반대 극단에 빠진다.

 

첫째로, 절망에서 자기만 바라보는 사람이다.

- 절망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 죄를 지었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가 언뜻 보기에 의로운 것 같다.

-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태도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지나치게 자기 죄에 집중하여 하나님을 놓친다.

- 자기 죄가 너무 심각해서 하나님조차 절망에서 건지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의도하지 않게 하나님을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둘째로, 절망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다.

- 절망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만 마음을 바꾸시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 태도 역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는 것 같다.

-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이뤄진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지나치게 하나님께 집중하여 자기 죄를 놓친다.

- 하나님 앞에 자기 죄는 하찮기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의도하지 않게 자기 죄를 가볍게 여겨 방종하게 된다.

결국 이런 사람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한다.

-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해결될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다.

 

이 두 가지 반대 극단이 어리석어 보인다.

- 하나님을 무능하다고 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 모든 문제를 지나치게 자기 탓으로 돌려 절망하거나,

- 지나치게 하나님 탓으로 돌려 원망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님 탓이냐 사람의 죄 탓이냐는 질문은 ‘신정론’이라는 화두로 기독교 2000년 동안 계속 회자된 것이다.

- 그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뜻이고,

- 또한 그만큼 많은 사람이 그 문제로 고민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당시 상태가 언뜻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 신앙에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한 것이다.

- 향후 2000년 동안 인류가 고민한 문제가 처음 제기된 시점이다

 

인간에게 문제는 왜 생기는가?

- 인간은 왜 죄를 짓는가?

-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는가?

-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하나님을 과연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과연 전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신정론의 질문을 이스라엘은 하고 있었다.

- 자신이 죄 때문에 멸망했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 죄를 막지 못하셨는가?

- 하나님은 죄를 막지 못하실 만큼 무능하신가?

반대로, 하나님 때문에 멸망했다면, 하나님은 왜 멸망을 선택하셨는가?

- 하나님은 멸망으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보며 기뻐하실 만큼 악하신가?

이스라엘은 어리석었기 때문에 고민하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

- 신앙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 이스라엘은 왜 멸망했는가?

답은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의 유일한 바람은 사랑의 관계이다.

- 그것을 위해 창조하셨고, 그것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그것을 위해 종말을 일으키실 것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인류에게 유일하게 필요한 것도 사랑의 관계이다.

- 사랑의 관계 앞에서 멸망도, 고통도, 죽음도 감수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람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한 착취 대상으로 봤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 때문이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하셨다.

- 왜냐하면 포로 생활을 통해 사랑의 관계를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막지 않으셨다.

- 즉,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놔두셨다.

이는 하나님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 사랑하면 상대방을 굴복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억지로 사랑하도록 억압하지 않으셨다.

- 사랑과 억압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하셨다.

-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는 것을 놔두셨다.

이는 하나님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 이스라엘의 고통에 눈감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 누구도 착취할 수 없는 무력한 포로 상태에서 사랑으로만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경험하게 하셨다.

 

결국 신정론은 가치의 문제이다.

- 인간에게 멸망, 고통, 죽음을 주신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

- 이 질문에는 멸망, 고통, 죽음은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 이것이 가치 있다고 전제하는 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 하나님은 올바르고 의로운 분이 될 수 없다.

- 하나님은 악하게 인류를 멸망하고, 냉혹하게 인류의 고통에 무감각하시며, 잔인하게 인류를 죽이시는 분일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멸망, 고통, 죽음을 통해 사랑을 깨닫게 하셨다고 한다면?

- 여기에는 멸망, 고통, 죽음보다 사랑이 더 가치 있다는 전제가 있다.

- 사랑만이 가치 있다고 전제할 때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 그때만 하나님은 올바르고 의로운 분이 된다.

-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을 이용해서, 멸망, 고통, 죽음까지 이용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류에게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죽음이다.

-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의 죽음보다 사랑을 더 가치 있게 여기셨다.

-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는 대신 인류가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이 죽으셨다.

- 책을 기록하지도 않았고, 부와 명예를 얻지도 못했고,

- 제자들도 전부 떠나고, 목숨마저 빼앗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에게 사랑의 경험을 남기셨다.

- 그 경험이 2000년 동안 인류에게 회자된 것이다.

 

결론 - 유일한 가치는 사랑이다.

따라서 신앙은 가치의 문제이다.

- 어떤 가치를 유일한 가치로 삼느냐이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 계속해서 무고한 사람이 죽어가고, 지배층에 의해 피지배층이 고통받고, 강한 자에 의해 약한 자가 억압받는다.

본문에서도 바벨론의 폭압을 고발한다.

- 이스라엘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의해 고통당한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동족이 죽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이 고통받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이다.

- 멸망, 고통, 죽음 등 세상의 가치를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치 있는 것을 지켜주지 못하셨다.

-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최고의 가치로 숭배할 수 있겠는가.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혼란스러웠다.

- 하나님을 여전히 숭배할 수 없었고,

- 그렇다고 하나님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본문이 필요했다.

-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한다.

- 여기서 바벨론은 세상의 가치 전체를 상징한다.

- 당연히 멸망, 고통, 죽음이 포함된다.

- 이런 것에 멸망을 선포한다.

- 세상의 가치가 정말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 그만큼 하찮고 가치 없다는 뜻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한다.

- 이는 하나님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랑이 전능하다는 뜻이다.

- 사랑이 있으면, 바벨론이 가진 힘, 능력, 풍요, 권력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 반대로 바벨론의 모든 것을 가져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만족이 없다는 뜻이다.

 

멸망, 고통, 죽음, 그리고 힘, 능력, 풍요, 권력이 정말로 하찮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니다.

- 그것이 없어도 전혀 상관없기 때문이 아니다.

- 오히려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 매력적이고, 너무 갖고 싶고, 너무 가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안다.

- 세상의 가치보다 사랑이 훨씬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 우리는 세상의 가치를 욕망하고, 세상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지만,

-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도록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세상의 가치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했던 우리를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그렇게 만드실 것이다.

-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사랑만 선택하도록.

-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하셔서 세상의 가치가 가치 없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유일한 가치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던 것처럼.

-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이셔서 사랑만이 유일한 가치라는 것을 확증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 우리를 멸망하시고, 우리를 죽이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