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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50) 28:1-31 사도행전 결론 - 로마 도착 그 자체

사도행전은 이상하게 끝난다.

-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다.

- 특히 바울이 그 험난한 길을 돌아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러 왔는데, 정작 재판받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유대인 지도자와의 대화로 끝난다.

- 그것도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예고로 끝난다.

- 복음이 유대인을 떠나 이방인에게 옮겨졌음을 선포하며 끝난다.

[행 28:28]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소식이 이방 사람에게 전파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그것을 듣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 보통 마무리는 긍정적으로 화기애애하게 끝나는 것이 일반적인데 말이다.

- 그런데 유대인들과 각을 세우며 갑자기 끝난다.

그러면서 정작 로마에서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었는지는 또 생략되어 있다.

- 복음 전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가진 로마에 간신히 가서, 뭘 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알고 싶은 황제 재판은 나오지 않고, 관심 없는 유대인 지도자는 부각되며, 또 정말 궁금한 이방인 복음 전도는 생략되었다.

- 왜 그럴까?

- 도대체 뭘 말하려는 것일까?

얼마나 이상한지, 사도행전 결론에 대한 비판적 논쟁이 많다.

- 누가가 사도행전 이후의 상황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 알았다면,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인지 의도적이 아닌지,

- 의도적이 아니었다면, 그 이후의 기록은 왜 사라졌는지,

- 의도적이었다면, 왜 그랬는지 등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랬듯, 어색한 결론이 사도행전의 완벽히 의도된 결론이라는 전제에서 해석할 것이다.

- 그래서 어색함 속에서 부각되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사도행전이 결론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로마 도착 그 자체'이다.

- 왜냐하면 로마에 도착했다는 소식 하나면, 사도행전이 처음부터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는 데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도행전은 로마 도착 하나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생략한 것이다.

- 로마 도착 자체만을 더욱더 부각하기 위해서 말이다.

-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맥락 안에서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는 것이 복음 전파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이 말하는 복음 전파의 완성이 무엇인가?

예루살렘에서부터 땅끝까지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행 1: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 이것이 성취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의 핵심이다.

- 이를 드러내기 위해 사도행전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는 것을 통해 예수님의 명령이 완수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 육체적 장벽과 정신적 장벽이다.

 

육체적 장벽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앉아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할 수 없다.

- 그래서 직접 전 세계에 가야 한다.

- 그런데 로마가 전 세계로 가는 가장 효율적인 터미널이다.

- 그래서 사도행전은 복음이 로마에 가면 육체적 장벽이 무너지리라 판단하고, 바울이 로마에 가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한 것이다.

[행 19:21] 이런 일이 있은 뒤에,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마음에 작정하고 "나는 거기에 갔다가, 로마에도 꼭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행 23:11]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

[행 27: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반드시 황제 앞에 서야 한다.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정신적 장벽이 있기 때문에 전도한다고 온 인류가 단번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그중에 특히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들이 유대인이다.

- 그들에게 율법, 성전, 민족을 초월하는 복음에 대한 정신적 장벽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의 정신적 장벽을 허무는 것이 복음 전파를 완성하는데 결정적이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정신적 장벽을 허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 성경은 유대인의 정신적 장벽을 허물어서 온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는 최단 경로를 제시한다.

- 그것은 복음을 먼저 유대인에게 전한 후, 

- 그들이 거부한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해서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 그것에 질투를 느낀 유대인마저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과정을 제시한다.

[롬 11:8~11] 성경에 이렇게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혼미한 영을 주셨으니, 오늘까지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9)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덫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걸려 넘어지고, 보복을 받게 하여 주십시오. (10)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보지 못하게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들의 등이 언제나 굽어 있게 하여 주십시오." (1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의 허물 때문에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 이는 이미 로마서에서 배워서 알고 있다.

- 이것이 유일하며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일관된 패턴으로 복음을 전했다.

- 먼저 회당에 가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한 후,

- 그들이 거부하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 그것이 구약에서 제시한 방식이기도 했고, 복음을 온 인류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많은 이방인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로마였다.

-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가서 전도한 것이다.

- 하지만 곧바로 이방인에게 가지 않고, 먼저 유대인에게 간 것이다.

[행 28:17] 사흘 뒤에 바울은 그 곳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모았다.

하지만 유대인의 반응은 어땠냐?

- 거부다.

- 정확하게 말하면, '반드시' 거부여야 한다.

- 그래야 복음이 이방인에게 갔다가 다시 유대인에게 돌아와, 온 인류에게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구약은 유대인의 복음 거부를 예고한 것이고, 바울은 그것을 인용한 것이다.

[행 28:25~27] 그들이 이렇게 견해가 서로 엇갈린 채로 흩어질 때에, 바울은 이런 말을 한 마디 하였다. "성령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여러분의 조상에게 하신 말씀은 적절합니다. (26) 곧 이런 말씀입니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27)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바울은 본격적으로 이방인 전도에 나설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이다.

- 이방인 전도에 나서야, 유대인의 질투를 일으킬 수 있고, 그래야 유대인도 복음을 믿을 수 있으며, 그래야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로마에 가서 유대인에게 복음이 거부된 것으로 끝맺는 것이다.

- 이는 드디어 복음이 육체적 장벽과 정신적 장벽을 넘어 온 인류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 이는 창세기부터 시작된 구약 예언의 성취이고,

-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며,

- 사도행전이 기록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색해 보이는 사도행전의 결말은 사도행전의 목적을 완벽하게 성취한다.

 

그래서 로마까지 오는 과정을 길고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로마라는 장소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 로마에서는 복음의 육체적, 정신적 장벽을 허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복음 전파의 완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몰타 섬에서 로마까지 가는 여정을 1-16절에서 자세히 기록했다.

- 핵심은 환대이다.

- 1-6절에서는 바울을 신으로 여겼고

[행 28:6] 그들은 생각을 바꾸어서, 그를 신이라고 하였다.

- 7-10절에서는 바울 일행들이 떠날 때 필요한 물건들을 줄 만큼 환대했으며,

[행 28:10] 그들은 극진한 예로 우리를 대하여 주었고, 우리가 떠날 때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배에다가 실어 주었다.

- 11-13절에서는 바람까지도 도와 여행 시간을 줄여주고,

[행 28:13] 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남풍이 불어왔으므로, 우리는 이틀만에 보디올에 이르렀다.

- 14-16절에서는 로마의 신도들에게까지 환대를 받는다.

[행 28:15] 거기 신도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서, 아피온 광장과 트레스 마을까지 우리를 맞으러 나왔다.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용기를 얻었다.

- 이를 통해 로마 도착이 바울에게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즉, 온 우주가 힘을 합쳐 바울의 로마 행을 도와준 것이다.

 

이렇게 로마 도착을 강조하는 것은 로마 도착 그 자체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다.

- 그것은 이전까지 있었던 죽음의 여행으로부터 구원이기도 하고,

- 앞으로 있을 복음 전파의 완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로마에 도착하고 유대인을 만난 것에서 어색하게 딱 끝내는 것이다.

- 그만큼 로마 도착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 로마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부터 땅끝까지 전해질 복음 전파의 완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그것이 로마에 도착해서 유대인을 만난 것으로 성취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도행전은 복음 전파의 완성을 선포하며 끝을 맺는다.

 

결론 -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

사도행전은 일관되게 복음 전파를 강조한다.

-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첫 오순절에 베드로의 전도로부터, 바울이 로마에 도착해서 유대인들에게 한 마지막 전도까지 말이다.

- 복음 전파를 통해 온 인류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어, 한 몸처럼 서로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

- 그리고 그 온 인류와 삼위 하나님이 한 몸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사도행전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목적이다.

- 그 사랑의 관계가 완성되는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일부분을 담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이다.

- 베드로와 바울,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

- 원론적으로 돌아가, 복음의 본질은 관계이다.

- 복음의 본질은 정보도 아니고, 일련의 행위도 아니며, 이념이나 사상도 아니다.

복음이 그런 것이었다면, 전도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 일타 강사 같은 사람이 귀에 쏙쏙 박히게 설명해서 이해하도록 하면 되고,

- 당근과 채찍으로 군대처럼 일련의 행위를 반복 훈련해서 몸에 익도록 하면 되고,

- 불안을 조장하여 이념과 사상을 세뇌한 후, 외부 접촉 없이 그것만 생각하도록 하면 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런 일들을 이단 사이비 종교에서 많이 하는 것이다.

- 가장 효율적인 전도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의 가장 큰 문제는 개인의 인격이 제약되고 훼손된다는 점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이런 시스템에서는 개인의 인격이 필요 없다.

- 그래서 개인의 인격을 없앤다.

- 원활히 작동하는 시스템만 필요하다.

- 좀비처럼 죽은 채로 시스템에 종속될 개인만 필요하다.

- 이는 리더라고 해서, 교주라고 해서, 목사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 그들 역시 개인의 인격은 억제되고, 시스템에서 강압하는 자신의 역할을 꼭두각시처럼 하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나게 효율적으로 큰 성과를 낸다.

 

하지만 관계가 본질인 신앙은 다르다.

개인의 인격이 철저히 보장된다.

- 왜냐하면 관계라는 것이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관계가 강조되면, 공동체가 부각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관계를 맺는 개인의 인격이 더 강조된다.

- 신앙에서 관계는 개인의 인격을 훼손해서 억지로 하나로 묶어 놓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격이 완전히 보장된 상태에서 인격 간의 완전한 하나 됨을 추구한다.

그래서 전도도 정보 전달, 행위 훈련, 이념 세뇌와는 완전히 다르다.

-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다.

- 그런데 만나서 내 인격을 상대방의 인격에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다.

- 오히려 내 인격은 감추고 상대방의 인격이 본래 모습대로 회복하여 만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 그래서 그렇게 만개한 두 인격이 서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상호 교류하는 것이다.

- 그럴 때만 바른 전도가 가능하다.

- 이렇게 인격 간의 만남이 아니고서는 복음의 본질인 관계는 절대로 전해질 수 없다.

- 그래서 전도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신이시지만, 인격을 입고 세상 속에 오셔서 우리를 만나신 것이다.

- 바울도 마찬가지로 곳곳마다 찾아가서 함께 교류한 것이다.

- 상대방을 굴복하고 제압하여 세뇌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켜서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재창조시키려는 것이다.

- 그것만이 바른 전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전도를 하려면, 우선 우리의 인격이 회복되어야 한다.

- 우리가 우선 사람 다워야 하고, 나 다워야 한다.

- 또 그렇게 되려면, 나를 이해해야 한다.

- 특히 내가 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아야 한다.

- 내가 나다움을 얼마나 잃었는지 알아야 한다.

- 지금의 나는 세상에서 들은 정보로, 세상이 훈련시킨 행위로, 세상이 세뇌한 이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그러한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알아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단번에 인격이 회복되지는 않는다.

- 하지만 그럴 때만 회복이 시작될 수 있다.

- 그리고 그렇게 회복될 때에만 바른 전도가 시작될 수 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하여 온 인류로 뻗어가고 있다.

- 우리의 시선도 당연히 온 인류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온 인류로 향하는 여정의 시작은,

- 오순절 베드로의 자각이었다.

- 예수님에 대한 배신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 깨달았다.

- 또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자각이었다.

-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 깨달았다.

- 그 비극이 온 인류의 구원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 비극이 필요하다.

- 내 인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얼마나 나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얼마나 인간다움으로부터 벗어났는지 깨닫고, 비극 속에서 파묻혀야 한다.

- 그래서 그 비극이 너무 끔찍해서 평생토록 기억될 트라우마가 되어야 한다.

- 그래서 그 트라우마로 인해 평생 그 비극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각인되어야 한다.

- 즉,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절대로 저지르지 못하게 되어야 한다.

-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나를 회복할 수 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온 인류를 향하여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 인류 역사에서 영원토록 남을 발자취를 남길 수 있다.

- 천국에서도 기억될 그런 발자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