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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47) 25:1-27 바울의 항소 - 바울은 전략가인가, 아니면 충동가인가?

본문에서 바울은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전략을 짜서 유대 사람들과 베스도에게 대항하는가?

- 아니면 계획과 전략 없이 그때그때 충동적으로 상황을 모면하는가?

-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본문은 바울의 전략가적인 면모를 부각하는가, 아니면 충동가적인 면모를 부각하는가?

더 구체적으로 물으면, 바울이 가이사에 항소한 근원적인 동기는 무엇일까?

-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한 전략적인 선택일까?

- 아니면 단순히 예루살렘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충동적인 선택일까?

-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즉시 살해당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해설서에서는 바울의 항소를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말한다.

-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후반부에서부터 로마행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행 19:21] 이런 일이 있은 뒤에,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마음에 작정하고 "나는 거기에 갔다가, 로마에도 꼭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로마로 갈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전략적으로 가이사에게 항소를 한 것이다.

- 그러면 비록 자유는 제약되지만, 로마행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로마행이라는 명확한 동기를 가지고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 바울의 항소는 전략적이 아니라 충동적이라고 생각한다.

- 로마행이 항소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이 목적이고 항소를 통한 로마행은 수단이라는 것이다.

- 즉, 바울은 단순히 살기 위해 충동적으로 항소를 선택한 것이다.

- 실제로 바울이 어땠느냐와는 상관없이, 적어도 본문은 그런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 본문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비중 때문이다.

- 본문이 바울보다는 바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주변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 25장 전체에서 바울은 8, 10, 11절에서만 나온다.

- 나머지는 계속해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달라며 바울을 죽일 전략을 꾸미는 유대 사람들, 그들의 요청에 우왕좌왕하는 베스도, 바울의 항소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 살길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베스도를 본문이 강조해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전체 맥락을 한마디로 하면,

- 살해 의지가 너무 커서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일으킬 것 같은 유대 사람들 사이에서,

- 베스도는 그들의 성화에 휘둘려서 어쩔 수 없이 바울을 내주려고 하기 때문에,

- 바울은 살기 위해 항소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다.

- 항소 이후에도 베스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휘둘린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아그립바 왕까지 끌어들인다.

이렇게 본문은 바울이 아닌 바울 주변에 조명을 비추고 있다.

- 물론 바울의 항소가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하지만 본문은 바울의 항소 결정보다는 그 결정을 하게 만든 주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그러냐?

- 왜 본문은 바울의 지혜와 전략 그리고 사명감을 숨길까?

- 왜 바울을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계획하여 자신의 목적과 사명을 이루는 전략가가 아닌, 상황에 맞춰 판단하고 혹은 상황에 수동적으로 이끌려가는 충동가의 모습을 부각할까?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 신앙은 인생을 주체적으로 설계하여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인생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바울의 선교 여행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철저히 계획하고 계획대로 실행했던 여행이 아니라, 상황에 의해 내몰려 갔던 여행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언제나 상황에 안주하고 적응하라는 뜻은 아니다.

- 폭력 남편에게도 순종하고, 일제 식민지에도 적응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체념하라는 것이 아니다.

- 폭력 남편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일제 식민지에는 저항해야 하며, 죄는 철저하게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체성조차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오는 기계적인 반응이 아니다.

-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경험에 의해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즉, 주체적으로 보이는 선택조차 환경과 경험에 의해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그리고 그 환경과 경험은 결국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주체적인 하나님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다.

- 신앙은 그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는 그 하나님께 지배받는 피조물임을 믿는 것이다.

그런 점을 부각하기 위해 본문은 바울의 충동성을 부각한 것이다.

- 하나님의 주인되심과 사람의 종됨을 부각하기 위해서 말이다.

- 그것이 사도행전 전반에서 강조하는 점이다.

 

이 점이 본문에서 두 가지로 드러난다.

첫째로, 1-12절에서 나오는 베스도의 내적 갈등이다.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뀐다.

-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또다시 같은 전략을 세운다.

- 바울의 재판을 예루살렘에서 해달라고 간청한다.

- 그래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도록 만들어서 살해하려는 것이다.

처음에 베스도의 반응은 냉담했다.

[행 25:4~5]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무사하게 감금되어 있다는 말과 자기도 곧 그리로 가겠다는 말을 한 다음에, (5) "그러니 만일 그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거든, 여러분 가운데서 유력한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를 고발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 '시끄럽고, 할 말 있으면 가이사랴로 와서 해!'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 별것도 아닌 일에 굳이 총독인 자신이 예루살렘까지 가서 재판을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 절차대로 하라고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베스도는 달라진다.

[행 25:9] 그러나 베스도는 유대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여, 바울에게 묻기를 "그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재판을 받고 싶지 않소?" 하였다.”

-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려 한다.

- 본문으로 정확한 베스도의 말투를 알 수 없지만,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을 것이다.

- 상당한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바울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상소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왜 베스도의 마음이 변했을까?

- 4절과 9절 사이는 약 여드레, 8일 정도인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 아마도 그 시간 동안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이 얼마나 심각한 골칫덩어리인지 제대로 알았을 것이다.

- 유대인은 로마 식민지 중에 문제를 일으키기로 유명했다.

- 너무 반란을 자주 일으켜서, 식민지의 종교를 절대 간섭하지 않은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해버릴 정도였다.

- 유대인들은 베스도에게 반란을 일으킬 듯 강력하게 요구했을 것이다.

- 베스도에게 반란은 총독 지위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베스도는 로마 법과 행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 그렇게 되면 마찬가지로 로마에 반역했다는 이유로 총독 지위가 위협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적 갈등 속에서 베스도는 바울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 바울이 유대인보다 만만하기 때문이다.

- 바울만 잘 꼬드이면, 로마 법도 지키고 유대인의 환심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자신의 총독 자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베스도의 내적 갈등으로 인해 베드로는 계획에 없던 항소를 하게 된다.

 

둘째로, 13-27절에서 반복되는 상황 설명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 너무 의미 없는 구절 같았다.

- 이유는 두 가지이다.

- 첫째는, 1-12절에 이미 자세히 나온 내용을 반복해서 설명한다는 점이고, 둘째로, 이미 반복된 내용을 13-33절과 23-27절에서 또 반복한다는 점이다.

- 그러니까 같은 내용이 연속으로 세 번 반복되는 셈이다.

- 새롭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내용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게 정말 이상했다.

- 물론 아그립바 왕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것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베스도가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에 관한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고 말하고 넘어가도 충분하다.

 

그런데 이 역시 바울이 항소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바울이 항소를 한 것은 바울의 계획과 주체적인 의지 때문이 아니라, 상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문은 바울 개인의 선택과 헌신보다는 그러한 헌신을 하게 만든 상황을 강조한다.

- 그리고 그 상황 이면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심을 강조한다.

- 그래서 인간 바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결론 -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아니다.

만약 정말로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바뀔까?

- 정말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실제로 느낀다면?

 

이 질문을 현실에서 구체적인 예로 이렇게 바꿔보자.

- 고3 때는 대학이 인생 전체를 결정할 것이라고 믿었다.

- 대학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믿었다.

- 그래서 대학 못 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언제나 압박감 속에서 있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과연 그런가?

- 전혀 아니다.

- 대학이 결정하는 인생은 없다.

- 대학은 인생의 주인이 아니다.

- 대학 못 갈 두려움은 헛된 것이다.

- 이를 우리는 전적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이 믿음을 가지고 다시 고3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게 될까?

- 그때처럼 두려움과 압박감 속에서 열심히 공부할까? 아니다.

- 아니면 대학 필요 없다고 공부를 아예 포기할까? 그것도 아니다.

- 두려움 속에서 공부하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학생으로서 공부를 하긴 할 것이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공부를 하냐, 하지 않냐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인생의 한 번뿐인 19세의 시간을 어떻게 가치 있고 즐겁게 보낼 것인가이다.

- 친구가 중요한 사람에게는 친구와의 우정에 올인할 수도 있다.

- 성공이 중요한 사람에게는 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다.

- 돈이 중요한 사람에게는 사업 구상을 할 수도 있다.

- 훨씬 폭넓은 질문을 하며, 인생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 그 시간을 의미 없는 공부하는데 매몰되어 허비하지도 않을 것이고, 게으르게 아무것도 안 하며 허비하지는 더욱 않을 것이다.

이것이 대학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고3의 인생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 인생을 내가 원하는 것 얻으려고 매몰되어 의미 없이 허비하지도 않을 것이고, 반대로 게으르게 아무것도 안 하며 허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 돈, 명예, 성공, 안정 등보다 훨씬 폭넓은 질문을 하며, 인생의 본질을 고민할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 우리가 돈, 명예, 성공, 안정 등에 매몰되어, 그것이 내 인생을 결정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마치 우리가 고3 때 대학이 전부하고 믿었던 어리석음과 같다.

- 우리의 고3 인생이 대학 때문에 의미 없이 허비해진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우리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또는 얻지 못한다고, 내 인생이 다르게 결정되지 않는다.

- 대학이 우리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듯, 돈, 명예, 성공, 안정은 우리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니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

- 원하는 것 얻으려고 너무 매몰되지 말자.

- 못 얻는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 대학 못 간다고 큰일 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대학 때문에 열 아홉 살 꽃다운 나이를 허비했다.

-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10대를 공부가 빼앗아가 버렸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원하는 것 얻으려다가 인생 전체를 빼앗기고 있다.

- 지금 이때만 우리가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잃고 있다.

그러니 인생 대충 살고, 참 인생을 찾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