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바울이 로마로 가는 여정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기록해야 했을까?
- 본문에 나오는 지역을 하나씩 따라가다가 지쳐서 내뱉은 하소연이다.
- 그래도 지역 이름은 항해 경로를 아는 데 도움을 주지만, 이물, 고물, 닻, 키 등 운행 정보까지 알 필요가 있었을까?
- TMI가 아닐 수 없다.
- 무엇을 위해 사도행전은 로마 항해 여정을 자세히 기록했을까?
결론부터 말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한 의지로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려는지를 보여준다.
- 그것을 위해 얼마나 험난한 경로를 거쳤는지, 배 안에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바울을 끝내 로마에 보내신다.
-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성취된다.
본문은 크게 세 단락이다.
① 1-12절: 바울의 경고에도 무시하고 항해 시작
② 13-26절: 경고대로 표류한 배에 대한 바울의 구원 선포
③ 27-44절: 선포대로 배가 육지에 도착
- 이 구분은 철저히 바울 중심이다.
- 바울이 위험을 경고했고, 위험 속에서 바울은 구원을 선포하며, 결국 바울의 선포대로 구원된다.
물론 바울이 아닌 경로나 날짜를 기준으로 단락을 구분할 수 있다.
- 그러나 그렇게 하면 맥락과 이어지는 해석을 하기 어렵다.
- 본문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보여주는 맥락이다.
- 따라서 본문도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바울을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 바울이 한 말을 중심으로, 그것을 거부했을 때 얼마나 큰 어려움에 빠졌는지,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따랐을 때 어떻게 어려움에서 구원받는지가 본문의 핵심 메시지이다.
① 1-12절: 바울의 경고에도 무시하고 항해 시작
바울이 황제에게 항소하자마자 즉시 로마로 이송된다.
- 이송단을 꾸리고, 배를 구하고, 일정을 조정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모두 생략된다.
- 항해 과정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기록했으면서 말이다.
첫 항해 경로는 다음과 같다.
- 가장 안전하고, 그래서 가장 길다.
- 변호하던 가이사랴에서 출발하여, 시돈에 가고,
- 시돈을 떠나, 키프로스 섬을 지나,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앞 바다를 통해, 루기아에 있는 무리에 도착한다.
- 그곳에서 로마로 가는 배를 갈아타고, 니도 앞바다를 지나, 살모네 앞바다를 통해, 미항에 도착한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여기까지는 비교적 안전한 경로이다.
- 육지도 가깝고, 중간에 바람을 피할 큰 섬도 많다.
- 만약 심한 바람에 표류한다고 해도, 육지에 도착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미항에서부터 로마까지는 큰 바다를 건너야 한다.
- 바람을 막아 줄 섬도 없고, 표류하게 되면 육지에 도착할 가능성도 적다.
- 따라서 진짜 위험은 지금부터이다.
베테랑 뱃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 대략 10월로 예상되는 시점에 무리해서 큰 바다인 아드리아 해를 건널 필요는 없었다.
- 곧 겨울이 오면, 바람도 거세고, 구름 때문에 별도 안 보이기 때문에 겨울을 지나서 출발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문제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 미항보다 뵈닉스가 알 수 없는 근거로 겨울 나기에 좋다고 판단한다.
- 거리도 반나절 정도면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바울은 생각이 달랐다.
- 문제가 되리라 판단했다.
[행 27:10] "여러분, 내가 보기에, 지금 항해를 하다가는 재난을 당할 것 같은데, 짐과 배의 손실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까지도 잃을지 모릅니다."
-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이는 전적으로 바울의 경험에 근거한 판단이다.
- 크레타 섬 남쪽으로 가면 유라굴로라는 광풍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뵈닉스에 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무시되고, 배는 출항한다.
- 게다가 운이 없게도, 때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와서 항해를 재촉한다.
- 이러한 순풍이 죽음의 소용돌이라는 것을 숨긴 채 말이다.
② 13-26절: 경고대로 표류한 배에 대한 바울의 구원 선포
바울의 경고대로 유라굴로, 직역하면 북동풍이 몰아쳤다.
- 이 지역 북동풍이 거세고 위험하여 유라굴로라는 별명까지 붙은 것이다.
- 지도를 보면 알다시피, 여기서 북동풍을 맞아 남서쪽으로 밀리면 육지가 멀어서 파선하기 쉽다.
결국 배는 폭풍에 휘말려서 떠밀려간다.
- 할 수 있는 조치래야, 거룻배(구명정)를 단단히 묶는 것, 선체가 부서지지 않게 밧줄로 묶는 것, 그리고 배가 뒤집히지 않게 닻을 내리는 것뿐이었다.
- 마지막으로 선원들은 짐도, 배의 장비도 다 버려서,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을 높였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상 살기를 포기했다.
- 아마도 유라굴로에 휘말리면 어떻게 되는지 그들은 충분히 들었을 것이고, 결말은 대부분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 그래서 그들은 살아남으리라는 희망을 잃었다.
[행 27: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거센 바람만이 심하게 불었으므로, 우리는 살아 남으리라는 희망을 점점 잃었다.
바로 그때 바울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구원을 선포한다.
- 하나님의 천사의 말을 인용하여, 배는 잃지만 목숨은 잃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행 27:22] 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 그렇게 소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소망을 전한다.
③ 27-44절: 선포대로 배가 육지에 도착
그렇게 14일이 지나 육지에 가까이 왔음을 느낀다.
- 그런데 그 틈을 타고 선원들이 거룻배를 타고 도망하려 한다.
- 바울은 사람들이 무사히 도착하려면 그 선원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백부장을 통해 그 시도를 막는다.
- 이를 통해, 구원 선포 이후 바울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음을 드러낸다.
- 백부장이 바울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 바울이 배를 통솔한다.
- 그 예로, 식사를 권유한다.
[행 27:34]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목숨을 유지할 힘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식사 권유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체력 보충이다.
- 바다에 표류하느라 사람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 그런 상태로는 마지막 상륙을 할 수 없었다.
- 그래서 식사를 통해 체력을 보충하여 상륙에 성공하려는 것이다.
둘째로, 구원에 대한 믿음이다.
- 그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언제 육지에 도착할지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비축한 것이다.
- 즉, 이전까지는 바울의 구원 선포를 믿지 않은 것이다.
- 그러나 이제는 바울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 곧 구원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 그러니 더 이상 식량을 비축하지 않아도 된다.
- 그래서 사람들은 용기를 얻고 마음껏 식사한 것이다.
[행 27:36]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용기를 얻어서 음식을 먹었다.
-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은 음식을 모두 버리기까지 한다.
- 그만큼 구원을 강하게 믿었다는 뜻이다.
결국 배는 모래톱에 걸려 부서지지만, 사람들은 모두 육지에 올라간다.
[행 27:44]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은 널빤지나, 부서진 배 조각을 타고 뭍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두 뭍으로 올라와 구원을 받게 되었다.
- 이렇게 해서 모두 구원을 받게 되었다.
-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은 성취된다.
이 잡다하게 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 성취'이다.
- 작게는, 표류한 배에서의 구원이고,
- 사도행전 안에서는, 바울의 로마 도착이며,
- 크게는, 죄악 된 세상에서 인류의 구원이다.
그런데 그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냐?
- 본문은 구원이 굉장히 복잡하고 힘겹게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 즉, 본문은 구원을 일으키는 주체이신 '하나님'보다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일으키시는 '과정'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구원의 과정을 보면,
- 1단계: 위험의 경고 - 바울이 항해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 2단계: 경고 거부 - 그러나 사람들은 경고를 거부하고 항해를 한다.
- 3단계: 죽음의 위기 -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의 경고대로 죽을 위기에 처한다.
- 4단계: 구원 선포 - 그때 바울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포한다.
- 5단계: 순종 - 그제서야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울에게 순종한다.
- 6단계: 구원 성취 - 결국 바울의 선포대로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
이 과정은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셀 수 없이 반복된다.
-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나,
- 사사기에서 사사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과정이나,
- 열왕기상하에서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의 침략에 저항하는 과정이나,
- 특히 대부분의 예언서들이 이러한 구원의 과정을 담고 있다.
- 그만큼 일반적이라서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과정을 우리에게 적용해보자.
성경은 1, 2단계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 즉, 사람은 죄인이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경고한다.(1단계)
- 그러나 그것을 깨닫고 돌이키는 사람은 없다. 모두 경고를 거부한다.(2단계)
[롬 3:10~11]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이 두 가지는 이미 너무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다.
- 우리가 이 경고를 몰라서 신앙에 헌신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 알지만 설마 하는 마음에, 몰라 하는 무관심 때문이다.
- 그래서 이런 것을 배우는 성경 공부는 중요하지만, 그렇게 성경의 경고를 안다고 자동으로 믿어지는 것은 아니다.
- 뭔가가 더 필요하다.
만약 여기서 끝난다면, 경고는 허무한 메아리에 그친다.
- 성경의 경고가 진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성경의 경고대로 우리 인생에 진짜 위기가 찾아와야 한다.
- 특히 죽음의 위기, 즉 내가 정말 성경의 경고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 의식이 있어야 한다.
- 단순한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사회적 죽음, 정서적 죽음, 경제적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성경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 아직 전적으로 믿게 되지 않는다.
- 단지 죽게 생겼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경에 귀를 열게 된다.
- 이것을 다른 이름으로 '회개'라고 부른다.
- 여기까지가 3단계이다.
그런 사람에게 성경이 말하는 구원 선포는 그야말로 선물이 된다.(4단계)
- 이전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 구원 따위 없어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 하지만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봤다.
-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 마치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 여인처럼 말이다.
- 그런 사람에게만 성경의 구원이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이 된다.
- 말 그대로 은혜이다.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 무엇을 요구받던, 순종하지 않겠는가!((5단계)
- 죽음의 위기에 있는데, 작은 수고만 하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데, 무엇이든 못하겠는가.
순종은 바로 이런 것이다.
- 2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하면, 절대로 안 한다.
-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때, 어리석은 판단이다.
- 그런 사람에게 순종은 구원을 얻기에는 너무 비싸고 힘든 대가를 요구한다.
- 굳이 그렇게까지 순종해서 얻은 구원이 고작 그 정도냐며 혀를 찬다.
하지만 3단계를 지나 4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순종은 헌신이 아니다.
- 통과 의례 같은 것이다.
- 하나도 수고스럽지 않고, 오히려 즐거운 것이다.
- 마치 본문에서 사람들이 밥을 먹은 것처럼 말이다.
- 14일 동안 굶으며 표류하었던 사람들이 구원이 있을 것을 믿고 남은 음식을 전부 배불리 먹는 순종을 했을 때 얼마나 신났겠는가.
이것이 순종이다.
- 누군가에겐 너무 힘들어서 절대로 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겐 너무 재밌어서 계속하고 싶은 것이다.
이 차이를 3단계가 가른다.
- 그래서 고난이 축복이다.
[빌 1:29]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성취된다.(6단계)
- 어찌 보면 구원 성취는 4단계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망이 생긴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은 평안해지기 때문이다.
- 순종은 오히려 구원을 누리며 기뻐하는 과정이다.
- 단지 구원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6단계이다.
결론 - 과연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1단계와 2단계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 경고를 듣지만 거부하고, 또 듣고 또 거부하고를 반복한다.
- 본문에서 배에 탄 사람들이 바울의 경고를 들었지만(1단계), 확신을 갖고 항해를 출발하는 것처럼 말이다(2단계).
- 우리도 우리 인생의 방향이 틀렸다는 경고를 받지만, 여전히 같은 길로 계속 가고 있다.
- 물론 여러 가지 방면에서 위기를 느끼지만,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꺾을 만큼의 위기는 아니다.
- 약간 개선하는 정도에 그친다.
나는 이러한 태도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 이는 전적으로 정상적인 반응이다.
-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데 바꾸는 것은 낭비이다.
- 이 정상적인 반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 만약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더이상 구원자가 아니게 된다.
-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경고를 인정하고 삶을 돌이키게 되니까 말이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생의 외형만 바꾸는 것이다.
- 많은 교회 목사들이 강압적으로 그렇게 하려 한다.
- 동시에 많은 교회 사람들이 그렇게 외형만 바꿔서 면피하려 한다.
- 그러면 목사는 성과를 내서 좋고, 교회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받았다는 착각 속에 빠질 수 있어서 좋다.
- 누가 더 나쁘다고 말할 것도 없이 피장파장이다.
- 그래도 목사가 더 나쁘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3단계이다.
- 죽음의 위기이다.
-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사망 선고를 당하는 것이다.
-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돈 벌 수 있는 가능성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다음 4, 5, 6단계는 일사천리이다.
-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성경을 빨아들인다.
- 그렇기 때문에 4, 5, 6단계가 어떤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죽음의 경험이다.
-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있는지 너무 많이 배웠다.
-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그 위기를 얼마나 외면하고 있는지도 정말 많이 배웠다.
- 이제는 찌르면 곧바로 튀어나올 만큼 잘 안다.
문제는 그것이 경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 머리로는 아는데, 아직 마음으로는 느끼지 못한다.
- 우리 인생의 방향 끝에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 지옥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옥 맛을 봐야 한다.
- 본문에서는 14일 동안 아드리아 바다에서 표류하며 지옥 맛을 봤다.
- 짐도 바다에 버리고, 배의 장비마저 버렸다.
- 더 이상 시도해볼 방법도 없어서, 결국 살아남으리라는 희망조차 잃었다.
- 그제서야 이들은 바울을 신뢰하고 구원을 믿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경험을 어떻게 하냐?
-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없다.
위험의 경고는 성경 공부하면 알 수 있다.
- 우리가 얼마나 경고를 무시하는지도 조금 성찰하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을 우리는 바꿀 수 없다.
- 여기서부터는 전적으로 신적인 영역이다.
누군가는 고행을 통해서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 그래서 고행을 수행의 길로 생각하는 종교가 있다.
그러나 자발적인 고행은 자동으로 고행 이후에 있을 보상을 떠올리게 된다.
- 그러면 그런 사람에게 고행은 더 이상 고생이 아니다.
- 그런 사람은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경제적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 왜냐하면 보상이 보장된 고행을 통해서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보상이 없는, 이후의 소망이 없는 죽음이어야만 참된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경험은 철저하게 타의여야 한다.
- 전혀 계획에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해야 한다.
- 자발적인 선택은 완전히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니 이러한 경험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 오직 성령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한 것이다.
- 이스라엘은 다윗 언약과 성전을 통해 자신들이 영원무궁할 것이라고 믿었다.
- 그 외의 생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그런데 다윗 언약이 파기되고, 성전은 무너졌다.
- 이스라엘 민족은 사라졌다.
- 즉, 이들은 말 그대로 예상하지 못한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 말씀이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 완전한 멸망 이후에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기억했다.
- 그것의 예표로서 역사 속에서 포로 귀환하여 이스라엘이 생긴 것이고,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로 확증된 것이며,
- 종말에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 역시 본문에서 나오는 구원의 과정과 일치한다.
- 이를 예레미야를 통해 확인할 것이다.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기도밖에 없다.
- 지금 내가 가는 길의 끝에는 죽음뿐이라는데,
-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데,
- 그 죽음을 경험해서, 지금까지 내가 가져왔던 소망, 기대를 모두 부수시고,
- 희망을 잃어버리게 하셔서,
-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이 내 유일한 생명 되게 하소서.
- 그것만이 유일한 살 소망 되게 하소서.
- 그것만이 내게 허락된 유일한 구원 과정입니다.
이 보잘것 없는 기도만이 우리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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