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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41) 21:1-16 그리스도인이 바울을 간곡히 만류하는 이유

왜 말릴까?

- 정확하게 말해서, 사도행전은 이들의 만류를 두 번이나 넣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뭘까?

- 이들은 바리새인처럼, 적대자도 방해꾼도 아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르지만 여전히 어리숙한 사람도 아니다.

- 믿음이 있는 것을 넘어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다.

- 그래서 이러한 충돌은 내분으로 오해될 수 있다.

- 오해를 사면서까지 이 충돌을 담은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해서, 시련이다.

- 신앙의 여정에는 시련이 있다는 것이다.

- 그런 시련은 전도 여행 전체에서 반복되었다.

- 특히 로마행이 시작된 20장부터 본문은 시련을 더욱 부각한다.

 

본문에서 나오는 시련의 원인은 다양하다.

① 그 시련이 유대 사람들 때문에 일어났다.

[행 20:3] 거기서 그는 석 달을 지냈다. 바울은 배로 시리아로 가려고 하는데, 유대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으므로, 그는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행 20:13] 우리는 배에 먼저 가서, 배를 타고 앗소를 향하여 떠났다.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바울을 배에 태울 작정이었다. 바울이 앗소까지 걸어가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다.

-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피하기 위해 경로를 두 차례나 바꾸는 시련을 겪는다.

② 성공적인 사역 중간에도 시련은 일어났다.

[행 20:9]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 멀쩡하게 가르치는 중에 사고가 일어난다.

- 사고로 사역이 방해되는 시련을 겪는다.

③ 교회 공동체 내부의 사람 때문에도 시련은 일어났다.

[행 20:30~31]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할 때에도 교회에서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 때문에 시련을 겪었다.

- 바울은 그들을 눈물로 훈계해서 돌이켰다.

④ 끝으로, 바울의 미래 사역에도 시련이 일어날 것이다.

[행 20:22~23]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 바울은 로마행으로 인해 시련을 겪고 죽을 것까지 알고 있었다.

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본문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 때문에도 시련을 겪는다.

[행 21:4] 우리는 두로에서 제자들을 찾아서 만나고,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말하였다.

[행 21:11] 이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 바울을 만류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선했다.

- 바울의 안전을 걱정했다.

- 그러나 그러한 걱정은 예수님을 전하는 바울 앞에서 한낱 시련일 뿐이다.

- 바울이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해이다.

-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만류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행 21:13]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련은 성경의 핵심 주제이다.

특히 예수님 공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 사역이 바로 시련이다.

- 예수님은 시련 당하기 위해 성육신하셨다고 볼만큼 시련은 중요하다.

- 예수님의 나머지 사역은 모두 십자가 시련의 의미를 설명해주기 위한 보조 사건일 뿐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반복되는 시련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장선에 있다.

- 예수님도 예루살렘행을 선언하셨을 때, 가장 최측근인 베드로가 간곡히 만류했다.

[마 16: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걸림돌'이라 말씀하시며 대적하셨다.

- 예수님 역시 바울과 같이 최측근에게 사역의 방해를 받으셨다.

 

그렇다면 본문은 이렇게 시련을 부각해서 무엇을 드러내려 하냐?

이는 '예수님은 왜 죽으셨냐? 예수님은 죽으심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 하셨냐?'와 같은 질문이다.

- 성경의 핵심 질문이며, 복음의 본질이다.

그것은, 신앙과 시련이 하나라는 것이다.

- 이 둘은 뗄 수가 없다.

- 신앙생활을 하면 필연적으로 시련이 있다.

- 반대로 말하면, 시련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아니다.

 

이에 대한 두 가지 오해가 있다.

① 신앙과 시련을 너무 멀리 떼어놓는다.

- 시련을 신앙생활의 통과의례로 오해한다.

- 신앙생활의 도약을 위한 과정으로 오해한다.

- 극복하고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오해한다.

- 시련이 있으면 유익하지만, 없으면 더 좋은 것이라고 오해한다.

- 시련을 사탄의 방해로만 치부한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 중에 시련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만 한다.

- 그래서 시련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 그래서 시련 속에서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도 만날 수 없다.

- 마치 예수님께서 죽음을 피하셨으면 부활도 경험하실 수 없는 것과 같이 말이다.

② 신앙과 시련을 너무 가까이 붙인다.

- 신앙을 피학증(masochism)으로 오해한다.

- 모든 시련을 전부 신앙으로 치부한다.

- 의도적으로 시련을 당하는 선택을 반복한다.

- 그러한 잘못된 선택 때문에 망가진 인생을 은혜로 포장한다.

- 시련과 신앙을 구분하지 못한다.

- 시련 이후에 있을 회복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두 가지 오해는 모두 성경에 기반한다.

- 전자는 부활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입장이고, 후자는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입장이다.

- 부활을 강조하면 죽음은 수단이 된다.

- 시련은 회복을 위한 수단이 되어, 시련 그 자체로의 의미는 사라진다.

- 반면에 죽음을 강조하면 부활은 희석된다.

- 바울도 자신의 자랑거리로 회복이 아닌 시련을 삼았다.

[고후 11:21~28] ・・・・ 그러나 누가 감히 자랑을 하려고 하면, 나도 감히 자랑해 보겠습니다. ・・・・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24)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25)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

그래서 더욱 두 가지 양극단의 오해로 빠질 수 있다.

 

그렇다면 시련의 올바른 이해는 무엇인가?

신앙이 죽음과 부활 모두임을 믿는 것이다.

- 죽음만도 아니고 부활만도 아니다.

- 죽음은 신앙의 목적이 아니다. 

- 그 이후에 있을 부활의 회복까지이다.

반면에 회복만을 기대하면 절대로 회복에 이를 수 없다.

- 죽음의 시련을 극복하여 벗어나지 않고, 회피하여 도망가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 내 인생은 끊임없는 죽음의 연속일 것이며,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을 때만 죽음을 감수할 수 있다.

- 동시에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한 절망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믿을 때만 죽을 때까지 믿음 안에 머무를 수 있다.

-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신앙에서도 벗어난다.

- 동시에 절망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잊는 순간 또 신앙에서 벗어난다.

 

본문으로 돌아와, 

- 바울이 로마행을 결심한 순간은, 부활의 소망을 절정으로 경험한 순간이다.

-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우상의 성지 에베소가 변혁되었다.

- 우상에 대한 성령의 우위가 증명되었다.

- 그때 바울은 로마행을 결심한다.

[행 19:21] 이런 일이 있은 뒤에,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마음에 작정하고 "나는 거기에 갔다가, 로마에도 꼭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끝판왕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용기를 얻는다.

- 이것이 부활의 소망이 갖는 힘이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바울은 반복해서 시련을 겪는다.

- 은장이가 일으킨 소동으로 에베소에서 쫓겨나고,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유대 사람들의 살해 위협을 받으며,

- 설교 중에 멀쩡한 사람이 죽고,

-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있을 투옥과 환난을 계시로 받으며,

-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 만류를 받기까지 한다.

- 계속해서 상황은 로마행에 대한 의지를 꺾는다.

만약 바울이 부활만 믿고 죽음을 믿지 않았다면, 계속되는 시련에 좌절했을 것이다.

- 좋은 일 하려는데 왜 도와주시지 않냐며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이다.

- 복음 전하려는데 방해만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자신의 선택을 의심했을 것이다.

- 그리고 선택을 철회했을 것이다.

반면 만약 바울이 죽음만 믿고 이후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면, 

- 로마로 가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 어차피 시련은 계속될 것이고, 자신의 사역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며 낙담했을 것이다.

- 굳이 실패할 사역을 계속해야 할 동기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 전도는커녕 자기 신앙 챙기기도 버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과 부활 모두 믿었다.

- 죽음을 믿었기에, 시련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 극복하거나 벗어나려 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 계속되는 방해 속에서도 담담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동시에 부활을 믿었기에, 소망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었다.

- 반복되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로마에서 있을 회복을 기대할 수 있었다.

- 방해 때문에 회복을 의심하지 않았다.

 

본문에서 바울은 굉장한 위기에 있다.

유대 사람들의 방해는 비교적 견디기 쉽다.

- 항상 있었던 일이고, 그들의 의도가 명백하게 나쁘기 때문에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다.

설교 중의 사고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 사고는 우연이고,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미래에 있을 투옥과 환난 계시도 견딜 수 있다.

-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 일어나면 그때 고민하면 된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만류는 굉장히 견디기 어렵다.

- 그들의 의도가 선하기 때문에 쉽게 거절하기 어렵다.

- 성령의 계시로 특별하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사소하게 넘기기 어렵다.

-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지나치기 어렵다.

어쩌면 바울은 지금이 어떤 시련보다 더 강력한 시련을 겪는 중이다.

- 만약 나에게 아내가 내 신앙을 만류한다면?

- 내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믿는 사람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막는다면?

- 게다가 그 뜻이 선하고 정당하다면?

- 굉장히 괴로워하며 고민할 것이다.

- 바울이 겪는 시련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이 많이 아팠다.

[행 21:13]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 그들의 말이 너무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 유대 사람들의 폭력적인 외침보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간절한 속삭임이 바울의 마음을 더욱 깊이 찔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

- 죽음을 감수한다.

- 그리고 실제로 바울은 죽는다.

 

결론 - 바울 신앙의 동기는 무엇인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

① 바울은 죽음을 믿었다.

- 풀어 말하면, 자신의 인생에 죽음의 시련이 계속 반복될 것이고, 결국 자연사하지 못하고 죽임당할 것을 믿었다.

- 왜냐하면 복음을 믿는 사람을 세상은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 그것이 사탄이건 사람이건 말이다.

- 예수님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 목숨은 비교적 소중하지 않았다.

- 복음을 믿은 순간부터 어차피 자기 것이 아니었다.

- 파리 목숨이었다.

- 목숨을 잃는 것이 큰 것을 잃는 게 아니었다.

- 그래서 목숨을 걸고 신앙 생활하기 비교적 쉬웠다.

- 거기에서 바울이 목숨 걸고 신앙에 헌신할 수 있는 동기가 나왔다.

② 바울은 부활을 믿었다.

- 풀어 말하면, 시련이 인생 전체에 반복될 것이지만, 인생이 끝나면 시련도 끝날 것이고, 그 이후에는 반드시 시련 없는 영생이 있음을 믿었다.

- 반복되는 시련에도,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을 잊지 않았다.

게다가 부활한 영생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았다.

- 단순히 시련의 끝이 아니라, 참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믿었다.

- 영생을 위해 인생을 소모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투자인지 알았다.

- 그 영생을 위해 바울은 인생을 걸고 헌신할 수 있는 동기가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이다.

- 죽음이 너무나 두렵다.

- 특히 육체적 죽음보다 사회적 죽음이 더 두렵다.

- 세상에서 뒤처지고 소외되어, 세상에 가치 없는 사람 되는 것이 가장 두렵다.

그리고 부활을 믿지 않는다.

- 천국과 영생이 있다는 막연한 믿음은 있다.

- 그러나 그것이 지금 인생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른다.

- 영생 없어도,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싶다.

- 지금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으면, 죽어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렇게 우리는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는다.

- 그러니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이다.

- 바울처럼 죽음을 감수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해법은?

-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 동기가 없다.

-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신앙생활을 하는 유일한 동기인데, 그것이 없으니 말이다.

- 지금 인생이 충분히 즐거우니 말이다.

- 그런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부활을 어떻게 소망하겠는가.

우리가 죽음과 부활을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