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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43) 22:1-30 복음의 폭력성 - 유대인을 향한 바울의 변호

자극적으로 제목을 지었다.

- 복음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 폭력성이 복음의 전부는 아니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부각하려 한다.

여기서 '폭력성'은 다른 말로 '영향력'이다.

- 그런데 단순한 영향력이 아니라, 영향력의 크기가 너무 커서 영향을 받은 사람의 인생 전체가  파괴될 정도를 말한다.

- 복음이 사람을 전인격적으로 제압하고 굴복시킨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폭력성'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게다가 폭력성에는 '강압성'도 들어있다.

- 만약 영향력은 크지만 자발적인 경우에는 폭력이라 말하지 않는다.

- '순종'이라고 말한다.

- 그런데 복음의 영향력은 자발적이지 않다.

- 물론 복음을 자발적으로 바랄 때 복음의 영향력을 받을 수 있다.

- 그러나 그 영향력은 언제나 바랬던 것 이상이다.

- 바라지 않았던 정도의 영향력을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준다.

 

바울의 예를 들면,

-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길 바랐다.

- 그래서 누구보다도 율법에 열성적이었다.

- 그래서 정통 유대인이 되길 바랐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의 바람을 들어주시되, 바랬던 것 이상으로 들어주셨다.

- 바울을 너무 거룩하게 하셔서, 유대인이라는 경계조차 초월하게 하셨다.

- 그래서 율법을 초월하여 이방인처럼 살게 하셨다.

- 결과적으로, 바랬던 것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정리하면,

-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바울의 바람은 성취되었다.

- 문제는 너무 완벽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정통 유대인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좌절되었다.

- 즉, 하나님께서는 폭력적으로 바울의 핵심 정체성을 파괴하셨다.

- 그래서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율법을 '비자발적'으로 어기도록 하셨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폭력성이다.

- 바랬던 것을 '완전히' 그리고 '강압적으로' 빼앗기기 때문이다.

- 바울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강압적으로 빼앗긴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복음의 폭력성 때문에 바울은 유대 사람들에게 정죄를 당한다.

- 유대인과 하나님을 대적한 반역자로 말이다.

 

지난 본문에서 바울은 유대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 죄명은 민족, 율법, 성전을 거스른 것이다.

왜 이런 정죄를 받게 되었냐?

-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시며 유일한 구원자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 이 주장 이면에는 민족, 율법, 성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 그래서 바울이 예수님을 증언할 때, 유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민족, 율법, 성전이 부정당했다.

- 따라서 목숨보다 민족, 율법, 성전을 더 소중히 여기는 유대 사람들에게 바울은 살인자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느껴진 것이다.

- 바울은 민족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자였다.

- 이에 유대 사람들은 자기 욕할 때는 참을 수 있어도 가족 욕하면 참기 힘든 것처럼 극노했을 것이다.

 

이번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변호한다.

변호의 포인트는 두 가지이다.

- 첫째로, 나는 민족, 율법, 성전을 폄하할 생각이 없다.

- 둘째로,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왜 바울은 이것을 변호 포인트로 잡았나?

-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민족, 율법, 성전을 폄하한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변절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유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민족, 율법, 성전을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 민족, 성전,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대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어리석어 보인다.

- 이미 구약에서 민족, 성전, 율법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 바벨론에 의해 유대 민족은 제거되었고, 성전도 파괴되었으며, 제사를 지내지 못하니 율법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들을 하나님과 혼동하고 있었다.

- 이는 마치 '죽은 자식 다리 만지기' 같이 아무 소용 없는 짓이다.

- 그러면서 그 다리가 살아 있다고 자신을 속이는 꼴이다.

하지만 이는 남 일이 아니다.

- 우리도 여전히 같은 착각을 한다.

- 교회 다니면, 믿음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 목사가 하라는 것 잘 따라 하면, 구원받을 것으로 착각한다.

- 교회 공동체 없이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 우리도 여전히 신앙을 교회, 봉사, 헌금, 마음 등으로 대상화한다.

- 그런 것들을 하나님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대상화된 것들을 비판하면 불끈한다.

- 교회 열심히 다니고, 목사 말 잘 듣고, 마음으로 잘 믿은 사람들이 타락한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봤는가.

- 교회, 목사, 마음이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는가.

- 하나님만이 구원자라는 것을 얼마나 잘 아는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람들과 똑같은 착각을 여전히 한다.

- 왜냐하면 그렇게 착각해야 신앙 생활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라도 자신을 속여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변절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 자신은 정통 유대인으로서, 민족, 율법, 성전을 폄하할 생각이 없다.

- 게다가 오해를 살만한 행동들도 전부 하나님의 뜻이다.

- 내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다.

-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유대인과 하나님께 변절하지 않았다.

- 오히려 더 올바른 유대인이 되었으며, 더 바르게 하나님을 섬겼다.

- 참 유대인은 이미 죽은 민족, 성전,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변호 포인트 두 가지가 본문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바울의 변호(1~21절)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1~5절: 나는 정통 유대인이다.

- 그래서 하나님께 열성적이다.

[행 22:3]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 그래서 나는 오늘날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행 22:4] 나는 이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 즉, 그리스도인에 대해 완전 적대적이었고, 유대교에 헌신적이었다.

② 6~16절: 그런데 나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

- 누가 봐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신비한 사건이 일어났다.

- 게다가 그 과정 중에 아나니아라는 정통 유대인이 관여한다.

[행 22:12] 거기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따라 사는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에 사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을 증언한 것이다.

[행 22:14~15] 그때에 아나니아가 내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셔서, ・・・・ (15) 당신은 그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③ 17~21절: 특히 이방 사람들을 위해 택함을 받았다.

-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셨다.

[행 22:21]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내겠다'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말하자 유대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변론의 기회가 없어진다.

 

이러한 변호를 통해 바울이 주장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자신은 정통 유대인임으로써, 민족, 율법, 성전을 폄하할 생각이 없음을 밝힌다.

- 오히려 자신은 민족, 율법, 성전을 폄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 그만큼 민족, 율법, 성전을 존중하는 것을 넘어서 열중했다.

- 따라서 바울이 민족, 율법, 성전을 거스른다는 주장은 틀렸다.

둘째로, 자신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다.

- 많은 신실한 유대인이 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신비한 사건이 일으키셨다.

- 그리고 정통 유대인 아나니아를 통해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 증명되었다.

- 게다가 아나니아는 바울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

- 특히 하나님은 증언 대상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신비한 환상 중에 말씀하셨다.

- 이렇게 모든 상황에 하나님 혹은 정통 유대인이 개입하여 하나님의 뜻임을 확증하였다.

 

따라서 바울이 결론적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 자신이 이방인에게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 그런 과정 중에 민족, 율법, 성전이 상대화되었지만, 그조차 하나님의 뜻이며,

- 자기 뜻대로 한 것은 없고,  

- 모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본문과 사도행전 9장의 회심 사건 기록의 차이 때문이다.

- 전체적인 사건 전개는 비슷하다.

-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 시작이 다르다.

- 9장에서는 다메섹 가는 길에서 시작한다.

- 반면에 본문은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로 시작한다.

[행 22:3]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

- 본문은 바울이 유대인임을 강조한다.

- 그래야 바울 자신의 복음을 변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아나니아를 자세히 소개한다.

- 9장에서는 아예 아나니아가 누군지 소개하지 않는다. 역할만 나온다.

- 반면 본문에서는 아나니아를 자세히 소개한다.

[행 22:12] 거기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따라 사는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에 사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 이를 통해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 사람이 정통 유대인임을 강조한다.

- 그래야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뜻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자세히 소개한다.

[행 22:14~15] 그때에 아나니아가 내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셔서, 자기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 의로우신 분을 보게 하시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15) 당신은 그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 이 역시 9장에 없는 내용이다.

- 이를 통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한다.

넷째로, 증언 대상이 이방인임을 밝힌다.

[행 22:21]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내겠다' 하셨습니다.

- 이것도 9장에는 없다.

- 이를 통해 이방인 사역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한다.

 

정리하면,

- 이방인 사역은 하나님의 뜻이다.

- 물론 그로 인해 민족, 율법, 성전의 역할이 퇴색되었다.

- 하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이다.

- 이는 민족, 율법, 성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참뜻을 성취하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정통 유대인인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논리이다.

 

이를 들은 유대 사람들은 속이 뒤집어진다.

-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된다.

- 그래서 거세게 항의한다.

[행 22:22]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 있다가 "이런 자는 없애 버려라. 살려 두면 안 된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들이 분노 조절 장애라서가 아니다.

- 이들은 참을 만큼 참았다.

- 바울이 자신을 정통 유대인이라고 말할 때 잘 들었다.

- 바울이 신비한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봤다고 했을 때도 참고 들었다.

- 그러나 하나님이 예루살렘은 배제하고 이방인을 택하신다는 말은 참을 수 없었다.

 

왜 유대 사람들은 이렇게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을까?

왜 바울의 말을 끝까지 들어 보지도 않고,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도 않고, 감정적으로 폭발했을까?

- 그래서 왜 결국 천부장에게 제지까지 당하는 것일까?

원인은 바울에게 있다.

- 그만큼 바울의 메시지가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 아무리 바울의 어조가 차분하다고 해도 말이다.

- 바울은 민족, 율법, 성전 전체를 완전히 무너뜨린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진리라고 말했다.

- 여기에는 자신의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압'이 담겨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렇게 폭력적일까?

결국 복음이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 복음의 영향력은 전방위적, 전인격적이다.

- 일말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 숨을 곳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강압적으로 영향을 준다.

- 내가 원할 때만, 원하는 정도로만 영향을 받을 수 없다.

- 원하지 않을 때도, 원했던 정도 이상의 영향력을 하나님 마음대로 주신다.

 

바울 역시 이런 복음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 유대 사람들에게 생명과 같은 민족, 율법, 성전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 또한 유대 사람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파괴했다.

그랬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바울을 폭력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왜 복음은 폭력적이어야 하는가?

- 자상하고 따뜻하며 부드러우면 좋을 텐데 말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영향력 있는 가치는 전부 폭력적이다.

- 회사도 폭력적이다.

- 회사는 우리 인생의 전부를 원한다.

- 우리가 하루종일 회사 일만 생각하길 원한다.

- 일 생각 안 할 때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재충전하길 원한다.

- 재충전해서 일에 영감을 얻고 일에 몰입하길 원한다.

'워라벨'이라는 말도 직원을 위한 말이 아니다.

- 너무 일에만 몰입하면 능률이 떨어지니까, 적절히 쉬면서 더 좋은 성과를 내라는 것이다.

- 개인의 삶에 가치를 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생존에 가치를 둔 것이다.

이렇게 회사의 영향력도 전인격적이고 강압적이다.

 

냉전 시대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도 폭력적이다.

- 자본이 기준이 되면, 노동은 상품으로 전락한다.

- 반면 노동이 기준이 되면, 자본은 노동을 했다는 기록지일 뿐이다.

- 서로가 서로를 상대화시키고, 비하하며, 희생시킨다.

- 자본이 중심이 되면 노동자는 물건으로 전락하고, 노동자 공동체가 중심이 되면 자본을 강탈하여 공유한다.

- 자본과 노동은 상생할 수 없다.

- 서로가 서로를 수단화한다.

- 문제는 공산주의는 자본을 격하시킴으로 노동의 가치도 함께 격하되었다. 그래서 몰락했다.

- 반면 자본주의는 자본이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만 노동의 가치를 격하했다. 그래서 수정자본주의의 형태로 살아남았다.

 

현실에서 상생이 얼마나 불가능하면, 정치의 핵심이 '견제와 균형'이겠는가.

- 이를 쉽게 말하면, 서로 죽일 듯 싸워서 결국 아무도 이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 아닌가.

- 이것이 한 국가를 유지하는 근본 원리라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 한 가지 일을 한 조직에 맡기면 훨씬 효과적이지만, 굳이 세 조직에 동시에 맡긴다.

- 그래서 아무도 독주하지 않고 합리적인 결정을 하도록 하는 것이 '삼권 분립'이다.

- 세 배의 비용을 들이면서 말이다.

- 왜냐하면 한 조직이 독주하여 낭비되는 비용이 세 배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 이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세상의 가치는 언제나 '승자 독식'이다.

- 'all or nothing'이다.

- 만약 상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힘이 너무 같아서 결판이 나지 않는 것이거나, 서로 관계가 없어서일 뿐이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복음도 폭력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 폭력적인 현실판에 자리를 잡는 것 자체가 폭력적으로 보인다.

- 다른 것들이 폭력적일 때는 그냥 받아들인다. 너무 익숙하니까.

- 그러나 복음이 폭력적이라는 인상을 줄 때 모든 사람이 주목한다.

- 그래서 복음의 폭력성이 더 부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다른 가치와 다르다.

- 복음만은 궁극적 목적이 상생이다.

-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한 관계 속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 하나님의 하나님다움도 훼손되지 않고, 인간의 인간다움도 훼손되지 않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하나님다움도 완전히 잃어버리고, 인간의 인간다움도 완전히 잃어버려서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다움을 완전히 포기하고 인간이 되신 것이고, 그 인간도 결국 인간다움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다.

- 그런 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를 포기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 점 때문에 복음은 결국 폭력성을 포기한다.

- 예수님의 예를 들면, 처음에는 폭력적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주셨다.

- 기적을 일으키셔서 자연 질서를 파괴하셨다.

- 그리고 회당에서 율법 질서를 파괴하셨다.

- 또한 반발하는 유대인들과 맞붙어 싸우신다.

- 폭력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신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유대인들 손에 붙잡혀 죽으신다.

- 아무 저항도, 아무 변론도 하지 않으신다.

- 강압도, 영향력도 없이 죽으신다.

- 왜냐하면 그래야 그 사람들과 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목적은 반발하는 유대인들을 죽여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들을 돌이켜 함께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강압과 영향력을 거두시고, 폭력성을 포기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은 다르다.

- 참 복음은 처음에 폭력성을 가지고 시작한다.

- 복음 자체가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폭력성을 포기하고 희생된다.

반면에 거짓 복음은 부드럽고 달콤하게 시작한다.

- 복음을 변질시켜서 폭력성을 숨긴다. 

- 그래서 받아들이기 쉽게 만든다.

-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발톱을 드러내며 순종을 협박한다.

- 마치 지금 교회들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론 - 바울과 유대인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가?

만약 우리가 복음을 좀 더 지혜롭게 전한다면, 본문과 같은 일을 피할 수 있을까?

- 슬프게도, 없다.

- 필연이다.

- 오히려 갈등이 없다면, 거짓 복음이다.

- 마치 돈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갈등이 없는 것과 같이 말이다.

- 왜 그런지는 충분히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갈등이 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상대가 누구든 우리에게 복음을 들은 사람은 우리를 죽이려 달려들 것이다.

선택은 세 가지이다.

- 맞서 싸우던지, 가만히 있던지, 맞아 죽던지.

만약 맞서 싸우다가 지면, 복음의 무능력이 증명될 것이다.

- 힘도 없는 게 설친다는 소리만 듣게 될 것이다.

만약 맞서 싸우다가 이기면, 세속적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 세상 가치와 똑같이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 사랑이 아니라 지배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가만히 있으려 한다면, 결코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 싸움 한 복판에서는 죽거나 죽이는 것 말고는 없다.

만약 맞아 죽기로 했으면, 금방 싸움은 끝날 것이다.

- 대신 우리는 희생될 것이다.

- 굴욕적으로 무시당할 것이다.

- 우리의 무능함이 증명될 것이다.

- 힘도 없는 게 설친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 예수님이 십자가에 박히셨을 때 그러셨듯 말이다.

그러나 그럴 때만 복음의 능력이 증명될 것이다.

- 우리의 전인격은 폭력적으로 파괴되지만, 복음은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그리고 그 복음을 본 사람들은 또 다시 우리와 같은 죽게 될 것이다.

- 그렇게 복음은 영원토록 이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말이다.

- 그리고 앞으로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보여줄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