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을 한마디로 하면, '자충수'이다.
- 재판의 목적은 대제사장과 의회원들이 바울의 잘못을 밝히는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아닌 자신의 문제를 드러낸다.
- 그들 내부에서조차 바울에 대해 찬반양론으로 갈린다.
- 바울의 잘못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한다.
- 결국 재판을 통해 대제사장과 의회원들의 잘못만 드러난다.
- 즉,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울에게 잘못 없음이 밝혀진다.
[행 23:9] 그래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바리새파 사람 편에서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서, 바울 편을 들어서 말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조금도 잘못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여 주었으면, 어찌하겠습니까?"
- 바리새인은 드러내놓고 바울을 옹호하고 나선다.
- 조금 전까지 바울을 잡아 죽이겠다고 소리쳤던 사람들이 말이다.
[행 22:22]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 있다가 "이런 자는 없애 버려라. 살려 두면 안 된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재판은 아무런 소득 없이, 오히려 바울의 무죄만 증명하며 끝난다.
- 이것이 맥락 안에서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옳고, 바울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제사장과 의회원들은 왜 자충수를 뒀을까?
원래 의도는 바울에게 덫을 놓는 것이었다.
-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왔다는 누명을 씌워서, 결국 바울이 민족, 율법, 성전을 거스르는 자라고 정죄하기 위해서였다.
- 그 죄만이 바울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바울을 죽이고 싶었을까?
- 바울이 그들의 신념과 정체성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은 민족, 율법, 성전의 경계선 안에만 있다고 믿었는데,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울이 그 경계선을 무너뜨렸다.
- 이방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그래서 자신들의 자부심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실제적인 권력 때문이다.
- 자부심이 무너진 것은 감정 문제이다.
- 엄청 기분이 나쁜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 손해는 없다.
-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울이 건드린 문제는 이들의 실제적인 권력 유지와 관련이 있다.
- 즉, 바울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의 기득권이 무너진 것이다.
여기에서도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입장이 갈린다.
- 말하자면, 사두개인은 보수파이다.
- 오래전부터 성전을 관리하며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 성전을 통해 종교적 주도권도 가졌고, 성전 제물을 통해 경제적 주도권도 가졌다.
- 안정된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 천사, 영을 인정하지 않고 현세적인 관점을 가졌다.
- 그런데 바울에 의해 성전이 부정되자, 자신들의 권력도 부정될 위협을 받았다.
- 즉, 사두개인은 성전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진보파이다.
- 성전을 통해 착취하는 사두개인에 반발하여 등장한 세력이다.
- 그들은 성전에 대한 반발로 율법을 주장하였다.
- 율법의 회복을 통해 사두개인에게 착취당하는 이스라엘을 개혁하려 하였다.
- 도전자의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 현세보다는 내세를 강조하며, 부활, 천사, 영을 인정했다.
- 그런데 바울에 의해 율법이 부정되자, 자신들의 권력도 부정될 위협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언제나 충돌했다.
- 현실 정치에서 보수당과 진보당이 그렇듯이 말이다.
-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서로를 공격했다.
동시에 이 둘은 조건만 맞으면, 언제 싸웠냐는 듯이 서로 합세했다.
- 마치 현실 정치에서 국회의원의 기득권이 공격받으면, 보수당과 진보당이 힘을 합치는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에 모든 기득권이 상대화되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힘을 모아 바울을 대적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약한 연결 고리를 공격한 것이다.
- 이 둘에게는 절대로 합의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보수당과 진보당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 그것이 '부활'이었다.
이를 통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더 이상 바울을 공격하지 못하고 분열한다.
- 결국 재판은 흐지부지 끝난다.
- 즉, 바울이 놓은 덫에 제대로 걸린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울의 덫은 효과적이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덫은 아니었을까?
결론부터 말해서, 바울은 겉으로 주장하는 것과 속으로 추구하는 것이 같았다.
- 즉, 바울이 주장하는 것도, 추구하는 것도 복음이었다.
- 바울이 놓은 덫도 복음이었고, 바울 인생 전체의 목적도 복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덫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 바울은 민족, 율법, 성전이라는 덫에 걸렸다.
- 그러나 바울은 자신은 한 번도 민족, 율법, 성전을 거스른 적이 없었고,
- 있다고 해도 더 상위 개념인 복음에 따르다 보니 생긴 불가피한 일이라고 변호했다.
- 자신이 민족, 율법, 성전을 거슬렀건 아니건 상관없이, 일관되게 복음만을 주장하고 추구했다고 말했다.
- 그리고 그것이 참된 하나님의 뜻이라고 논증했다.
- 이러한 일관성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덫을 무력화시켰다.
반면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그렇지 않았다.
- 겉으로 주장하는 것과 속으로 추구하는 것이 달랐다.
- 겉으로 주장하는 것은 민족, 율법, 성전이었지만, 속으로 추구하는 것은 기득권 권력이었다.
이들은 민족, 율법, 성전으로 바울에게 덫을 놓았다.
- 그러나 이들 인생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 이들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율법을 어겼다.
복음서의 예를 들면, 대표적으로 안식일 법이다.
- 안식일 법은 할례법과 충돌할 경우 배제되는 하위 법이다.
- 그런데 이들은 안식일 법을 핑계로 수많은 상위법을 어겼다.
- 안식일 법의 본래 의미를 훼손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위해 율법을 훼손했냐?
- 결국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기득권이었다.
-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민족, 율법, 성전을 이용한 것뿐이다.
- 그리고 민족, 율법, 성전이 기득권을 지키는데 유용하지 않으면 지체없이 어겼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바울의 덫에 걸렸을 때, 이들은 분열했다.
- 왜냐하면 '부활'은 이들의 기득권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부활과 민족, 율법, 성전은 상관없는 개념이다.
- 만약 이들이 정말 민족, 율법, 성전이 목적이었다면, 부활이 있건 없건 상관없어야 했다.
- 그것이 이들을 훼손하지 못해야 했다.
- 이들을 훼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민족, 율법, 성전이어야만 했다.
- 마치 바울이 복음 외에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 이들은 주장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 이들은 기득권을 추구했다.
- 기득권이 훼손되었을 때, 이들은 흔들렸다.
- 그래서 바울이 부활이라는 덫을 놓았을 때, 걸려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충수를 둔 것이다.
- 자기들이 만든 재판에서 자신이 심판받은 것이다.
- 겉과 속이 달랐기 때문이다.
- 주장하는 것과 추구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 재판을 통해 속으로 추구하는 것이 기득권이라는 것만 들통났다.
- 반면에 바울은 속으로 추구하는 것도 복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회칠한 벽'이라고 부른 것이다.
[행 23:3] 그러자 바울이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당신이 율법대로 나를 재판한다고 거기에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서, 나를 치라고 명령하시오?"
- 여기서 '회칠한 벽'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
- 겉은 하얗고 깨끗하지만, 속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벽 말이다.
- 물론 바울이 전체 맥락을 알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실체를 고발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다.
- 그러나 사도행전은 이후에 재판에서 드러날 이들의 실체를 염두하고 바울의 말을 앞에 배치한 것이다.
결론 - 우리는 얼마나 겉과 속이 같은가?
우선,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왜 문제냐면?
- 겉도 튼든 속도 튼튼한 벽은 누가 와서 기대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안전하다.
- 반대로 겉도 연약 속도 연약한 벽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안전하다.
- 그리고 겉은 연약 속은 튼튼한 벽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안전하다.
문제는 겉은 튼튼 속은 연약한 벽이다.
- 누군가 와서 기대면, 무너져 벽에 깔리기 때문이다.
- 그래서 위험하다.
다음으로, 어떻게 하면 겉과 속이 같아지는가?
- 방법은 두 가지이다.
- 겉을 바꾸던지, 속을 바꾸던지.
겉은 튼튼 속은 연약한 벽이 있다고 해보자.
-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연약한 벽 속에 구멍을 뚫어서 철골을 넣으면 된다.
- 겉과 같이 속도 튼튼해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속은 그냥 두고, 겉도 속처럼 연약하게 바꾸면 된다.
- 그러면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다.
- 그래서 안전할 것이다.
게다가 누군가가 와서 벽을 무너뜨리고 새로 지을 것이다.
-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기 때문이다.
- 속까지 연약해서 무너뜨리기도 쉬울 것이다.
- 그렇게 새로 지어지면 안전해질 것이다.
우리도 똑같다.
-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죄인이고, 내부가 연약하고 불의하며 더럽다는 것은 진리이다.
-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가리기 위해 의롭고 강하며 깨끗한 외형을 덧입는다.
- 그래서 우리는 위험한 존재이다.
- 겉만 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결국 상처만 주기 때문이다.
- 회칠한 벽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속을 바꿔야 한다.
- 믿음으로 죽고 부활하여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 그래서 겉과 같이 속도 의롭고 강하며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그래야 겉을 보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
-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
- 마치 바울이 주장하는 것도 추구하는 것도 일관성 있게 복음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렵다.
- 어떤 면에서 불가능하다.
- 현세에서 완전한 의로움이 가능하냐에 대한 논쟁이 있다.
- 만약 불가능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속까지 완전히 깨끗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 그래서 이 방법은 소망을 가져야 하지만, 당장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쉬운 방법으로, 겉을 바꿔야 한다.
회칠을 거둬 내야 한다.
-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연약하고 불의하며 더러운지 드러내야 한다.
- 우리가 겉으로 하는 주장은 그럴듯하고 있어보이지만,
- 우리가 속에서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고 경박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줄 때,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 마음의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더러움을 드러낼 때, 자기도 자신의 속을 바꿀 수 있다.
- 자신도 자신의 겉모습에 속는다.
- 겉은 멀쩡하니까 굳이 속까지 바꿀 필요 없다고 착각한다.
- 그래서 굳이 손해를 감수하며 예수님을 믿을 필요를 망각한다.
-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상처를 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 눈먼 바디매오, 십자가에 달린 죄인을 오히려 의롭다고 칭하는 것이다.
- 그들은 적어도 겉과 속이 같았기 때문이다.
- 겉과 속이 모두 의롭지는 않았지만,
- 자신들의 불의함을 알고 예수님의 필요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 변화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겉과 속이 달랐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내면이 정말 무엇을 추구하는지 몰랐다.
- 자신들이 겉이 민족, 율법, 성전을 주장하니까, 속도 같을 것이라고 믿었다.
- 그래서 자신들의 속까지 의로울 것이라고 착각했다.
- 자기 꾀에 자기가 속은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기득권이 훼손될 때 마음이 요동 첬다.
- 요동치면서도 왜 그런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 그것이 기득권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다.
- 그냥 반사적으로 바울이 민족, 율법, 성전을 거스르기 때문이라고 근거 없이 믿어버렸다.
그러니 바울과의 논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 자기가 무엇을 주장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자신이 지금 이 논쟁을 왜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자기가 왜 이 싸움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싸움에서 이기겠는가.
그들은 자신이 기득권 때문에 이 논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니까.
- 그래서 기껏 잡아놓은 재판에서 자신의 어리석음만 드러낸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이들처럼 우리도 우리가 정말 무엇을 추구하는지 모른다.
-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더럽고 천박한지 모른다.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회칠한 벽처럼 그럴듯한 주장으로 포장하기 때문이다.
- 게다가 실컷 포장한 후, 내가 나를 포장했다는 것조차 망각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화려한 포장지가 나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싸움에서도 질 수밖에 없다.
- 특히 세상과의 싸움에서 그렇다.
- 그 싸움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의 어리석음만 드러내고 말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우리의 어리석음이 드러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 얼굴에 똥칠하고 있으면서도, 어디서나 당당하게 다닐 것이다.
- 주변 모든 사람들이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리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어서 빨리 우리 인생을 돌아봐야 한다.
- 화려한 포장지를 뜯어 봐야 한다.
-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내지는 못해도,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나를 드러내야 한다.
- 그래서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 그래서 결국 겉과 속이 같아져야 한다.
그래야 신앙이 시작된다.
- 그렇게 자신의 실체를 알아야, 자신에게도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그래야 예수님을 찾는다.
- 그것이 신앙의 시작이다.
그 신앙을 통해서만 속의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 그래서 회개가 필요하다.
- 이 방법 말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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