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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40) 20:17-38 여러분은 깨어서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또 문맥이다.

- 내가 이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하는지 몰랐다.

- 한이 맺혀서 그렇다.

- 개인적으로, 내 말을 문맥 없이 오해받았던 억울함이 있다.

- 그리고 신앙적으로, 문맥 없는 성경 해석에 대한 분노가 있다.

- 게다가 이 둘이 합쳐져서, 문맥 없는 성경 해석에 익숙한 사람에게 문맥에 따른 성경 해석을 제시하면, 문맥 없이 자기 생각을 고수하며, 나에게 반발한다.

- 이런 억울함과 답답함이 내 안에 많이 있나 보다.

- 앞으로 좀 더 절제되고 정제된 표현을 쓰겠다.

 

본문은 유명한 바울의 고별 설교이다.

- 그래서 많은 설교가 있다.

-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애절하게 작별 인사하는 것에서 해석을 멈춘다.

- 3년을 동고동락했던 바울과 에베소 사람들이 헤어질 때 얼마나 슬펐을까를 주제로 설교가 널려있다.

- 또 다른 주제로, 33-35절에 나온 자비량 사역에 대한 설교이다.

- 바울은 사례비를 받지 않고 교회를 섬겼으니, 우리도 많이 베풀자는 것이다. 

- 교회에서 더 헌신적으로 봉사하라는 것이다.

- 이러한 해석은 목사들의 설교뿐만 아니라, 전문 주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것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로서는 이런 해석들 때문에 정말 화가 난다.

- 쓸모없는 해석을 보느라 아까운 인생이 버려지는 느낌이다.

- 또한, 저런 해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부딪힐 생각을 하면 암담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가 아니다.

-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 바울이 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숨은 의도를 아는 것이다.

- 왜 전반부에 자기 이야기를 길게 하는지, 

- 왜 후반부에 '사나운 이리' 비유로 적대자를 경고하는지,

- 왜 마지막에 약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 이런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왜 기록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설교와 해설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전반부에 자기 이야기를 통해 밀린 회포를 풀기 위해서이다.

- 그리고 혹시 모른 적대자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 끝으로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베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동어 반복이다. 해석이 아니다.

- 성경을 쓸데없이 요약한 것이다.

- 게다가 요약 포인트도 잘못 잡았다.

- 이는 마치 명화를 쉽게 설명하겠다고 크레파스로 덧칠해놓은 것과 같다.

내가 이런 사람들과 같은 목사라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

- 게다가 그렇게 불성실하게 설교하는 목사들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니까 더 화난다.

- 나는 맥락 안에서 숨은 의도 알려고 안 돌아가는 머리 쥐어뜯으며 고생하는데, 그런 목사들은 손쉽게 유명해지니까 더욱 질투가 난다.

- 그래서 이렇게 같은 말은 반복하나 보다.

- 마치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꼴이다.

- 괜히 다른 목사한테 열 받아서 교회에서 푼다.

- 미안하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 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했냐가 아니고,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이다.

- '무슨'과 '왜'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할 때, 성경을 '해석'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해서, 본문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

- 앞으로 있을 시련 때문이다. 바울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행 20:19] 나는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또, 유대 사람들의 음모로 내게 덮친 온갖 시련을 겪었습니다.

- 그런데 그 시련은 사나운 이리들이 양 떼를 마구 해하듯이 교회 전체를 아프게 할 것이다.

[행 20: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그 이리들이 교회 안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행 20: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적대자가 생겨 교회를 공격하는데,

- 그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고 싸우는 시련을 겪을 것이다.

- 그런데 그 시련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니 너무 당황하지 말고,

- 겸손과 눈물로 적대자를 훈계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 왜냐하면 그렇게 사랑을 주는 것이 복되기 때문이다.

[행 20:35]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핵심은 교회 내부 문제로 시련을 겪게 될 성도들을 위로하며,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 이렇게 해석할 때, 지난 본문에서 유두고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 잠들어서 문제가 생겼지만 회복된 유두고 이야기를 통해서, 교회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지만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을 준다,

- 게다가 이러한 해석이 죽기 직전 고별 설교의 메시지답다.

- 적대자에 대한 경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은 유언장으로서 적절하다.

이러한 결론이 어떻게 나왔는지 본문을 단락 별로 보겠다.

 

단락 구분

① 17~18절: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바울을 방문

② 19~27절: 바울이 자신을 소개 -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해서

- 과거(19~21): 처음부터 시련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회개와 믿음을 전했다.

- 미래(22~25): 투옥과 환난이 있음을 알면서도 성령 따라 예루살렘에 갈 것이다.

- 현재(26~27): 오늘날까지 시련에도 불구하고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경륜(뜻)을 모두 전했다.

- 즉, 바울은 신앙 중에 언제나 시련, 투옥, 환난이 있었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 믿음, 복음, 하나님의 경륜을 전했다.

③ 28~31절: 깨어 있으라는 권면 - 시련이 올 것이기 때문에

- 바울의 인생 전체에서 그랬듯, 교회에도 시련이 올 것이다.

- 그리고 바울이 그랬듯, 시련 가운데서 교회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 또한 바울도 그랬듯, 그 시련은 교회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

- 그때 바울처럼, 눈물의 훈계, 즉 또 다른 이름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 그렇게 자기 자신과 교회를 지키라는 것이다.

④ 32~35절: 정리 멘트 -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주는 것

- 32절은 깨어있을 수 있는 방법이다.

-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 말씀만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교회를 지키게 하며, 교회를 통해 구원(유업)을 얻도록 한다.

- 33-35절은 깨어있다는 것의 실제적인 예이다.

- 즉, 주는 것이다.

- 사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남김없이 목숨까지 주는 것이다.

- 그것을 바울은 자비량 사역으로 보여줬다.

- 그러니 단순히 구제하라! 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맺으라는 것이다.

- 만약 이 구절을 단순한 구제로 보면, 문맥이 어색하다.

⑤ 36~38절: 애절한 작별 - 다시는 볼 수 없으니까

 

이렇게 해석할 때, 본문의 맥락이 매끄럽다.

- 엄청나게 긴 분량의 자기 소개가 의미 있어 진다.

- 중간에 있는 짤막한 권면에 힘이 실린다.

- 마무리까지 일맥상통하게 된다.

 

그러면 내가 처음에 가졌던 세 가지 질문에 답해보면,

① 왜 전반부에 자기 이야기를 길게 하는지.

- 3년 동안 함께 했고, 함께했던 사람 중에 특별히 가까웠던 사람들만 모였기 때문에, 굳이 자신을 자세히 소개할 필요가 없다.

- 그럼에도 자기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자신의 사역 전체에 있었던 시련을 회상하고, 또 앞으로 있을 환난을 예상하여, 앞으로 교회에 있을 시련을 예견하는 것이다.

- 즉, 시련은 신앙에서 항상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 그래서 이후에 있을 권면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② 왜 후반부에 '사나운 이리' 비유로 적대자를 경고하는지.

- 복음이 있는 곳에 언제나 적대자는 있는데,

- 더 중요한 것은 적대자가 내부의 적이라는 점이다.

- 외부의 적은 언제나 있었기 때문에 새롭지 않다. 이렇게 따로 권면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내부의 적을 다루는 법은 '눈물로 훈계', 즉 사랑이다.

- 사랑으로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 추정컨데, 현재 교회에 소속된 사람 중에도 과거에는 적이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 그때 바울은 그들을 눈물로 훈계하여 돌이키도록 했고, 그랬기에 지금의 공동체가 있는 것이다.

- 바울은 그것을 기억하라고 한다.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 그것을 통해 적대자가 있는 교회를 지킬 것을 바울은 권면한다.

③ 왜 마지막에 약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하는지.

- 본문의 고별 설교는 유언장과 같은 글이다.

- 죽으러 가기 직전에 중요한 말을 함축적으로 담았다.

- 그런 글의 가장 마지막에, 문맥과 상관없이, 구제를 언급하는 것을 말이 안 된다.

-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적대자에게조차, 서로에게 받기를 기대하기보다 주자는 것이다.

- 단순히 물질 제공을 넘어서, 목숨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며 사랑의 관계를 맺으라는 것이다.

- 그런 사랑이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 그렇게 눈물 흘리며 사랑할 때에만 시련을 극복하고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왜 신앙에는 시련이 올 수밖에 없는가?

왜냐하면 신앙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 사랑은 목숨까지 남김없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남김없이 주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런데 때로는 교회 안에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사람이 나타난다.

- 그들이 양 떼를 해하는 사나운 이리이다.

- 그들 때문에 남김없이 주는 사람들이 남김없이, 목숨까지 빼앗긴다.

- 이것이 바로 시련이다.

이 상황에서 사람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 첫째로, 상대방이 마구 빼앗는 것이 두려워 사랑을 멈춘다.

- 그러면 빼앗기지 않고 목숨은 건질 수 있지만, 신앙을 건질 수 없다.

- 이로써 교회의 교회됨은 멈춘다.

- 둘째로, 상대방이 마구 빼앗아도, 계속해서 사랑을 제공한다.

- 그러면 결국 목숨까지 빼앗기고 죽는다.

- 그러나 교회와 신앙은 건질 수 있다.

- 나를 지키지는 못하지만, 교회는 지켜진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당연히 나를 죽이고 교회를 살려야 한다.

- 예수님이 그러셨고, 바울도 그랬다.

-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죽으면 결국 교회도 죽는다. 

-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울이 했던 '눈물의 훈계'이다.

- 이리가 이리됨을 포기하고 양이 되어야 한다.

- 받기만을 바라는 사람에게 더 이상 받기를 포기하고 주라고 해야 한다.

- 거래 관계를 포기하고 사랑의 관계를 맺으라고 해야 한다.

- 이는 개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공동체 전체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 이는 강압으로는 불가능하고, 사랑의 감동으로만 가능하다.

- 공동체 전체가 이리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요구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리고 많은 교회는 강압을 사용한다.

- 강압을 통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고, 시련을 피한다.

시련을 피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 주변 모든 사람을 죽이고 혼자 살아남는 것이다.

- 다른 말로, 주변 모든 사람을 굴복시키고 혼자 왕이 되는 것이다.

- 다른 말로, 주변 모든 사람과 거래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 다른 말로, 사랑의 관계를 배제하고 거래 관계만 하는 것이다.

모든 관계가 거래가 되면, 아무 문제가 없다. 

- 누구도 시련을 겪지 않는다.

- 마치 우리가 편의점에 가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살 때 아무도 시련을 겪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하지만 거래 관계의 실상은, 주변 모든 사람을 죽이고 혼자 왕이 되는 것과 같다.

- 즉, 거래는 살인이다.

 

그래서 교회 문제는 언제나 사랑으로 극복해야 한다.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 거래를 거래로 대응하면, 상대방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복음으로부터 멀어진다.

- 거래에 끝까지 사랑으로 대응할 때에만, 나의 신앙도 지킬 수 있고, 상대방도 신앙으로 돌이킬 수 있다.

 

결론 - 미양 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에베소 교회가 그랬듯, 미양 교회에도 시련이 올 것이다.

- 유두고가 잠들어 떨어지듯, 우리 중 누군가가 잠들어서 교회 안에 분란을 만들 것이다.

- 사랑의 관계를 저버리고 거래 관계로 대할 것이다.

- 그동안 베풀었던 섬김에 대해 보상 요구할 것이다.

- 그래서 주기를 멈추고 받기를 바랄 것이다.

- 그러나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고 불만만 가득할 것이다.

- 결국 교회를 비난하며 떠날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그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방법은 두 가지이다.

- 원하는 것을 줘서 거래 관계로라도 유지하던지,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던지.

원하는 것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 돈이 될 수도 있고, 직분이나 권력일 수도 있다.

- 불만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로 적당히 위로하여 붙잡아둘 수 있다.

반면에 원하는 것을 끝까지 주지 않는 방법도 있다.

- 아무리 거부하더라도 계속해서 눈물로 훈계하는 것이다.

- 복음에 모든 것이 있으니, 믿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 그렇게 복음의 본질을 되새겨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 전자는, 잠시 잠잠해질 테지만, 불만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요구할 것이다.

- 제공할 수 없는 것까지 요구하다가, 결국 불만을 품고 나갈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곧바로 나갈 것이다.

- 어디서 가르치려 드냐며 성낼 것이다.

- 원하는 것을 주지도 않으면서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비꼬울 것이다.

- 계속된 공방에 지쳐 나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 전자를 선택하여, 관계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마음을 돌이킬 것을 기대해야 할까?

- 아니면 후자를 선택하여, 눈물의 훈계를 통해 즉각적으로 돌이킬 것을 기대해야 할까?

- 전자의 장점은, 그 사람을 교회에 잡아둘 수 있다는 것이다.

- 반면 전자의 위험은, 그 한 사람 때문에 교회 전체 관계가 깨질 수 있다는 것이다.

- 후자의 장점은, 적어도 남은 사람들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반면 후자의 위험은, 그 사람이 바로 교회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답은 없다.

- 장단점이 있고, 케바케이다.

-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우리는 예상할 수 없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가진 교회 경험이 전자밖에 없다는 점이다.

- 대부분의 교회는 어떻게든 사람을 잡아두려 한다.

- 그 사람 때문에 망가지는 교회 분위기는 목사의 독단적인 권력으로 유지한다.

- 그렇게 붙잡아두는 것이 교회를 위한 길이라고 배운다.

- 교회가 희생을 해서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늘리는 것이 전도라고 배운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틀렸다.

- 전자는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 유일한 답이 아니다.

- 우리는 잘못 배웠고, 우리의 경험은 틀렸다.

후자도 선택지 중 하나이다.

- 불만 있는 사람을 포용하지 않고 훈계하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이다.

- 그 사람이 교회를 떠나도 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 그때마다 기도하며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 그것이 바울이 깨어있으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 정답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깨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바울은 유언으로 전도를 말하지 않는다.

- 단지 교회 공동체를 말한다.

- 전도가 하찮기 때문이 아니다.

- 교회 공동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 공동체가 깨어 있으면, 어떤 시련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 전도도 자연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의 유언을 기억하자.

- 그것은 공동체를 위해 깨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