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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사도행전(38) 19:23-41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 우상의 무능력 반증

에베소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아데미 여신을 찬양한다.

[행 19:28]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행 19:34] 모두 한 목소리로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하고 외쳤다.

- 멘트만 보면 신실한 신앙 같다.

- 온 인생을 다 바쳐서 아데미 여신만 믿는 사람들 같다.

- 아데미 여신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 같다.

- 한편으로는 요즘 교회에서 하는 찬양 집회 같다.

하지만 실상은 아데미 여신의 능력을 의심한다.

-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까 봐 두려워한다.

[행 19:27] 그러니 우리의 이 사업이 명성을 잃을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아데미 여신의 신전도 무시당하고, 또 나아가서는 온 아시아와 온 세계가 숭배하는 이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 그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더욱더 열광적으로 찬양한다.

[강자와 약자, 160] 강한 반응 중에는 마음에 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약하게 보이는 것이 두려워,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싶어 하는 완고함, 고집, 냉혹한 다짐 등도 있다. 아니, '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의심이 있기 때문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 즉, 이들은 여신에 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 오히려 여신의 무능력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들은 여신의 무능력이 왜 두려운가?

- 여신에 대한 신앙 때문이 아니다.

- 여신이 그들의 돈줄이기 때문이다.

[행 19:27] 그러니 우리의 이 사업이 명성을 잃을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 이들은 여신을 빌미로 우상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상의 무능력이 드러나면, 그래서 우상의 인기가 사그라지면, 사업이 망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들은 돈 때문에 이러한 소란을 일으킨 것이다.

- 돈 때문에 찬양을 한 것이며, 돈 때문에 바울을 대적한 것이다.

-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아데미 여신 숭배자들의 실상을 고발한다.

- 이들이 호들갑스럽게 찬양했던 것이 전부 돈 때문임을 드러낸다.

- 게다가 호들갑스러운 찬양 때문에 오히려 아데미 여신의 무능력만 더욱 드러난다.

그래서 본문은 이들을 묘사할 때 어리석음을 부각한다.

[행 19:32] 극장 안에서는, 더러는 이렇게 외치고, 더러는 저렇게 외치는 바람에, 모임은 혼란에 빠지고, 무엇 때문에 자기들이 모여들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 이들은 자신들조차 자신들의 주장이 뭔지 알지 못했다.

[행 19:34~35] 유대 사람들이 알렉산더를 앞으로 밀어내니, 군중 가운데서 몇 사람이 그를 다그쳤다. 알렉산더가 조용히 해 달라고 손짓을 하고서, 군중에게 변명하려고 하였다. (34) 그러나 군중은 알렉산더가 유대 사람인 것을 알고는, 모두 한 목소리로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하고 외쳤다.

- 게다가 이들은 아군과 적군도 식별도 하지 못했다.

-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바울을 적 삼고 있는 에베소 사람들 입장에서 바울의 적인 유대 사람들은 아군이나 마찬가지다.

- 에베소 사람과 유대 사람 모두 바울을 고발하고 있다.

- 하지만 에베소 사람은 유대 사람 알렉산더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적대시한다.

- 이를 통해 아데미 여신 숭배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드러낸다.

또한 마지막으로, 시청 서기관을 통해서도 에베소 사람들의 실상을 드러낸다.

[행 19:36]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여러분은 마땅히 진정하고,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 이들의 행동이 경솔하다고 한다.

[행 19:40] 우리는 오늘 일어난 이 일 때문에, 소요죄로 문책을 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요를 정당화할 수 있는 아무런 명분이 없습니다.

- 이들의 주장은 명분 없는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본문이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왜 에베소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낼까?

왜 아데미 여신의 무능함을 드러낼까?

- 결론부터 말해서, 아데미 여신에 대한 성령의 우위를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 이에 대해 지난번에 이미 설명했다.

<사도행전(37) 19:11-22 로마에도 꼭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 왜 하필 이 시점에?>

 

본문의 맥락을 간단하게 보면,

① 1-7절: 성령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 - 성령은 미래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② 8-10절: 제자들의 심화 학습 -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말씀을 듣게 되었다.

③ 11-20절: 우상에 대한 성령의 상대 우위 증명 - 우상숭배자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④ 21-22절: 로마행 결심 - 로마에도 꼭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⑤ 23-41절: 우상숭배자의 반격 - 바울 때문에 아데미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있다.

즉, 이번 본문에서 성령의 위세에 눌린 우상숭배자들은 반격한다.

- 하지만 '신전 수호자'였던 그들은 아데미 여신을 지키지 못한다.

- 오히려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여신의 무능력을 증명한다.

- 이렇게 당대 최고의 신 중 하나였던 아데미 여신은 몰락한다.

- 동시에 아데미 여신을 몰락시킨 성령의 위세는 더욱 확대된다.

 

이렇게 증명된 성령의 능력 때문에 바울은 두 가지 결과를 얻게 된다.

첫째는, 더 이상 에베소에 머물 수 없게 된다.

- 올바른 복음은 언제나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일으킨다.

- 환호와 배척이다.

- 예수님도 환호와 배척을 동시에 받으셨다.

- 환호받지 않는 복음도, 동시에 배척받지 않는 복음도 바른 복음이 아니다.

사람은 환호받으면, 더 오래 머무르고 싶다.

- 그래서 더 오래오래 환호받고 싶다.

- 그러나 환호가 커지면, 반드시 배척도 커진다.

- 그래서 배척 때문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된다.

그때 어리석은 사람은 잘못된 결정을 한다.

- 환호가 좋아서, 더 오래 머무르기 위해, 복음에 살짝 손을 댄다.

- 복음에서 거부감을 주는 부분을 조금 덜어낸다.

- 그래서 배척을 완화한다.

- 그래서 조금 더 머무르려 한다.

- 그래서 계속해서 환호를 이어가려고 한다.

반면에 현명한 사람은 바르게 결정한다.

- 환호가 너무 좋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떠난다.

- 그래서 환호의 기쁨을 잃는다.

- 그러나 복음은 지킨다.

그래서 바울도 떠난 것이다.

- 3년이나 함께 한 에베소 성도들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었을 것이다.

- 관계가 얼마나 끈끈했겠는가.

- 교회 외부는 우상숭배자의 공격이 횡행했지만, 교회 내부에서는 마치 천국을 사는 것처럼 서로 지켜주며 사랑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떠난다.

- 복음을 지키면서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드디어 로마행을 시작하게 된다.

- 에베소 성도들은 복음에 환호하며, 성령을 통해 우상을 대적하게 되었다.

- 불과 3년 전만 해도 우상이 두려워 아무것도 못 하던 이들이 말이다.

- 게다가 우상을 대적하는 기세가 우상숭배의 한복판에서 사회 전체를 뒤집었다.

- 성령이 한 도시 전체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바울은 눈앞에서 본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 우상숭배의 끝판왕인 로마로 향할 수밖에 없다.

- 세상의 중심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선포할 용기를 얻었다.

 

바울이 과연 타고나게 호전적인 성품 때문에 과감하게 전도할 수 있었을까?

과감함은 바울 몫이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적당히 살면 될까?

- 바울에게만 죽음을 감수하며 전도하다가 실제로 죽을 사명이 주어졌고, 우리에게는 적당히 하고 싶은 일도 하며, 적당히 누리며, 안정된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신앙 생활하다가 자연사하는 사명이 주어졌을까?

- 바울은 어떻게 로마까지 가서 전도하려는 과감한 혹은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었을까?

- 우리는 편안한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안전한 나라에서 안정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바울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다.

- 바울의 타고난 성품 때문이 아니다.

- 바울은 한편으로 소심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 예를 들어, 모두가 돌을 들고 스데반을 죽이려들 때, 바울은 옆에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 과감하게 참여하지 않고, 사람들의 옷만 맡아두고 있었다.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이다.

-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바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도 안 되는 기적적인 경험을 하게 하셔서, 경험에 기반한 가치관을 뒤집으시고, 또 가치관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용기도 주셔서, 하나님의 가치관을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 그래서 죽음을 감수하고 로마에 간 것이고, 그래서 결국 로마에서 죽임당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성령 때문이다.

-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다.

- 하나님이 주신 경험 속에서 내린 연속된 합리적 판단의 결과이다.

- 따라서 지금은 바울처럼 당장 타지로 떠날 필요도, 죽음을 감수할 필요도, 과감하게 도전할 필요도 없다.

-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주어진 신앙생활을 성실히 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다.

- 바울에게도 약 30년간의 안정된 기간과 그 이후 약 30년간의 과감한 기간이 있었다.

- 우리에게도 이러한 전환이 언제 올지 모른다.

- 갑자기 우리 삶이 안정된 일상에서, 기적 없이는 생존조차 힘든, 생존을 위한 기적이 빈번히 일어나는 불안정한 삶으로 변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 물론 진도가 어느 정도 나갔는지는 모른다.

- 초급인지, 중급인지, 고급인지, 고급을 넘어 실전인지 모른다.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경험이 바뀌고 있고, 경험에 기반한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

-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이 낯설어졌고, 낯설었던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 예를 들어, 이전에는 일정 대가를 지불했으면 그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받는 거래 관계가 자연스러웠다면, 이제는 대가 없이 제공하고 제공받는 사랑의 관계가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 이렇게 복음 전도에 동참할 수 있는 가치관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준비를 끝내시면,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과감하고 호전적인 신앙생활이 반드시 시작될 것이다.

 

결론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냐? 

첫째로, 인간다움을 맛볼 수 있다.

- 다른 말로, 천국을 미리 경험할 수 있다.

-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누리며, 참 기쁨을 느낄 수 있다.

- 인간이 창조된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목적을 이루며 합당하게 살 수 있다.

- 사랑하는 사람과의 상호 신뢰 속에서 완전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 사람들과의 유대 속에서 완전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 나 자신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 무한한 확장감을 느낄 수 있다.

- 게다가 동일한 안정감과 확장감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

- 그래서 버려질 두려움, 소외될 두려움, 상처받을 두려움, 무시당할 두려움으로부터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게 된다.

-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둘째로, 인류의 비극을 맛볼 수 있다.

- 다른 말로, 지옥을 미리 경험할 수 있다.

-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거래 관계가 얼마나 비참한지 느낄 수 있다.

-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속에, 의식하지 못하지만, 절망이 얼마나 기쁜지 느낄 수 있다.

-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에 사랑으로 다가갈 때, 세상은 우리를 거래로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대가 없이 목숨까지 가진 전부를 제공하는 우리를, 세상은 목숨까지 전부 뽑아 먹은 후 가차 없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의심하는지 깨닫게 되고, 언제 배신당할지 몰라 지극한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불신 속에서 나 자신에 완전히 고립될 것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질 것이다.

- 게다가 하나님과도 동일한 단절감을 느낄 것이다.

- 이것이 복음을 떠난 사람들의 숙명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다워질수록 인간됨의 환희와 동시에 비 인간됨의 비극을 함께 느끼게 될 것이다.

- 그래서 환희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찬양할 것이다.

- 동시에 비극에 절망하며 비극으로부터 구원하실 하나님을 더욱더 애타게 찾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애타게 찾는 이유는,

- 우리의 믿음이 너무 좋아서도 아니다.

- 우리가 워낙 과감하고 호전적인 성품을 가져서도 아니다.

-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에 뛰어들 담대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죽이시고 부활시키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맛보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가 참된 사랑에 눈이 떠지게 하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목숨까지 남김없이 내어주는 사랑을 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목숨까지 남김없이 빼앗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세상의 거래 관계로 인해 목숨까지 빼앗기는 희생을 당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 그 죽음의 고통 속에서 우리를 도와줄 분이 하나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애타게 찾을 것이다.

[마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것이다.

- 세상을 사랑하다가 목숨까지 빼앗긴 사람들 속에서 말이다.

- 이곳은 세상으로부터 목숨을 빼앗겨 고통스럽게 죽은 자들의 모임이다.

- 동시에 이곳은 목숨을 빼앗길 만큼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모임이다.

- 그래서 그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기만 하는 모임이다.

우리가 참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자리이다.

-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쁜 자리인가.

- 동시에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한 자리인가.

우리 함께 예수님 만나러 가자.

- 하나님께 성령을 통해 목숨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우리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 이미 우리에게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예수님을 만나는 그 자리까지 인도하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빌 1:6]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